소설리스트

검왕춘추-149화 (150/410)

제38장 조인자조(助人自助) (1)

삐잇.

불평이 담긴 울음만 두 번째. 평소 같으면 벌써 해원기의 머리든 어깨든 제집처럼 내려앉았을 동강이 높은 하늘에만 머물자,

해원기가 한숨을 내쉬려다 오히려 눈에 힘을 주었다.

“그만해. 인광과 수진을 지키느라 한 대 맞은 걸 가지고. 너도 소나기를 흡수해 다 회복했잖아. 아무리 성질을 부려도 약속을 깰 순 없어.”

혼잣말 같은 나직한 음성이라도 수십 장 상공의 동강에게는 똑똑하게 들린다. 이미 이십 년 넘게 함께 지낸 사이요, 청강주의 기연을 나누어 받아 영교(靈交)까지 맺었으니까.

해원기 역시 아득하게 높이 뜬 동강의 눈이 자신을 노려보는 걸 훤히 알고 있다.

화가 많이 났다.

두 아이의 안전을 맡고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현무자의 탄환에 휘말리는 곤욕을 치렀고, 조화부인의 암습을 몸으로 막아내야만 했기에 어지간히 울화가 치민 모양.

이건 전부 동강 자신이 제대로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바람을 일으키는 것 외에는 어떤 공격도 하지 못한다.

약속.

처음 청강주의 힘을 흡수해 영성(靈性)이 깨어났을 때 맺은,

“사부님 말씀 기억하지? 넌 천금(千禽)을 다스리고 마침내 태화(蛻化)를 이룰 신조(神鳥). 사람을 해치면 행공(行功)이 무너진다고. 그러니까, 그만 화를 풀어라.”

사부를 들먹이는 해원기의 말에 비로소 동강이 시선을 피한다.

사람을 해치지 않기로 했던 약속이다.

그래서 금석을 쪼개는 부리와 발톱을 가지고도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었다.

과거에 해원기의 사부가 했던 말. 영금신조(靈禽神鳥)는 이무기가 용이 되듯이 언젠가 허물을 벗고 신령한 존재로 화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무의미한 살생의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동강이 아무리 영험하다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라, 기어이 약속이란 방법으로 금기를 세웠던 것이다.

삐이이.

맥 풀린 듯한 긴 울음에 해원기가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나마 사부를 들먹인 덕에 동강의 화가 풀렸나 보다.

한편으론 마음이 놓이고,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하고.

그 약속 때문에 충분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아이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울화. 그렇게 화를 내는 동강이 자신보다 낫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자신을 깨우쳐준 오소민.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바보짓을 거듭할 뻔했다.

도와야 할 때 과감하지 못했던 주제에, 돕지 않아도 될 때 쓸데없이 설쳐댔다.

수차제의 삿된 기운을 느끼자마자 신속하게 손을 썼어야만 했다.

‘주작모와 구구황웅을 제때 제압했으면.’

그 뒤의 조화부인과 얽히는 싸움도, 인광과 수진이 다치는 일도 없었을 터. 내막을 알아본답시고 불필요한 여유만 부렸다.

호랑이는 토끼 한 마리 잡는 데에도 전력을 다하거늘.

그러면서 자책에 겨워 어떻게든 잘못을 덮으려고 인광과 수진의 공력을 높여줄 생각이나 했으니.

성승과 도봉의 맥을 이은 두 아이에게는 이미 안배된 인연이 있다. 과분한 복은 도리어 화를 부르기 십상.

‘순전히 겉멋만 들어 잘난 척이나 하고. 한심하구나, 해원기.’

더벅머리에 찢어진 흑의 경장을 걸친 초라한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처사가 참으로 엉터리라는 생각에 자조(自嘲)하는 입맛이 소태를 삼킨 것 같았다.

해원기가 두 손을 뻗어보았다.

손목에 감았던 천은 벌써 풀어버렸다. 검왕수의 봉인을 풀고 무림에 나서기로 하면서.

그러나 이 손을 제대로 쓰고 있었던가.

고금무쌍의 신왕공을 지니면 뭐하나, 보병청강의 힘으로 풍뢰를 부려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상대를 헤아리는 동시안의 통찰도, 사부와 사모를 비롯한 많은 분이 베푼 무수한 무공도, 박대정심이라는 거창한 무도의 목표도 쓸모없이.

그저 상대에 맞추어 허둥대기만 했다.

가만히 자신의 두 손을 쳐다보던 해원기의 눈이 호수처럼 깊어지고, 두툼한 입술이 단호하게 물렸다.

반성은 철저하게, 후회는 여기까지만.

어렸을 때 글 선생에게 배운 한 구절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과능개(知過能改)면 선막대언(善莫大焉).’

잘못을 알고 고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약효가 돌아서인지, 운공을 일주천(一週天)한 인광과 수진이 몹시 노곤한 기색이라 우선 방에 눕도록 하고.

오소민이 밖으로 나오다가 눈을 깜빡거렸다.

짧은 작대기 하나를 쥔 해원기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땅바닥에 뭔가를 열심히 그리는 중.

초승달 같은 곡선에 부챗살처럼 퍼지는 직선, 그리고 여기저기 적어놓은 몇 글자.

무안한 기색으로 나갔던 해원기라 답답한 김에 낙서라도 했나 싶은데.

표정이 신중해서 시선이 절로 지면을 향한다.

“아, 애들은?”

해원기가 손을 멈추고 바라보지만,

“운공을 마쳐서 쉬게 했네. 이건, 진도(陣圖)인가?”

오소민은 되레 바닥의 그림에 흥미가 생긴 듯, 대뜸 바닥의 그림을 꼼꼼히 살핀다.

“음, 수차제가 열렸던 그 들판. 싸우면서 느꼈던 몇 가지를 재현해본 걸세. 미심쩍은 부분을 확인할 셈으로. 몇 겹이나 덧씌운 진세의 정체가 영 수상하거든.”

멀리서 수차제를 보았을 때, 인광과 수진도 삿된 기운을 느꼈었고. 해원기는 환혹과 세심의 사도대법이라고 추정했었다.

잡기백희가 어지럽게 펼쳐져 이목을 어지럽히고, 거기에 미혹된 백성들은 미칠 듯이 환호하며 날뛰었던 수차제.

무대와 양쪽에 화려하게 꾸민 수레들, 군중 속 곳곳에서 소란스럽게 열렸던 놀이판을 간결하게 선으로 연결했다. 장안법을 뜻하는 장(障), 은문진을 가리키는 은(隱)을 초승달로 표시한 무대 뒤쪽에 써놓고.

“주작모가 구구황웅이란 수하를 거느리고 숨은 게 수렴두류진이라고 하더군. 여기서 철릉쇄혼관을 펼쳤는데, 철릉쇄혼관은 사상귀원(四象歸元)이 바탕이지.”

말과 함께 장과 은을 지우자, 오소민이 미간을 좁혔다.

“진을 걷고 관을 내세운다? 두류라면 왔다 갔다 하며 머문다는 말, 장안법과 은문진으로 헤매게 했다가 그다음에는 가두려고 했군. 딴 곳에는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면서.”

동서남북이 한 점으로 돌아가는 사상귀원의 의미도 금방 알아챈다.

역시 개방의 뿌리인 팔선(八仙)의 제자.

드르륵.

해원기의 작대기가 지웠던 곳에 다시 원 두 개를 겹쳐 그렸다.

“그렇지. 반선진 계통이 여전히 있었고, 조화부인이 등장하자 곧장 아암귀명진을 펼친 것도 그런 이유라고 봐야겠어. 검기를 약화하고 감각을 무디게 해서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도록.”

오소민의 손이 얼굴로 올라갔다.

방 안에서 얘기로 나누었을 때보다. 이렇게 지면에 그림으로 표시하는 게 좀 더 생생하게 당시의 상황을 전달한다.

“흐음, 구구황웅에 조화부인이 용선생이란 작자를 데려오고서도 그랬다는 건.”

뺨을 긁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해원기의 정체나 본신의 능력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다 쳐도, 수로 압도하고 고수까지 더해졌거늘 묘한 진법만 계속 펼치는 게 수상하다. 소위 백 대 일의 싸움이면서.

생각을 굴리다가 해원기를 힐끗 보며,

“그냥 힘으로 깨버렸나?”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하자, 해원기가 작대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아니. 반선진 계통은 파진운보, 아암귀명진은 손뼉을 쳐 음향을 더했지. 느낌이 달랐거든. 그런데도 또 구구염양진이라는 결계가 이루어지더란 말이야. 공동파의 응험팔일법결을 응용한.”

“응험팔일법결? 그건 뭐야? 어째 무공요결로 들리질 않는데.”

“맞아. 본래 도가에서 구소응룡(九霄應龍)을 붙잡아 비를 내리게 한다는 주문이지. 구구황웅이라고 아흔아홉 명의 복면인도 그 수를 맞추기 위한 것 같고.”

“그럼 그 구구염양진도 파진운보로?”

“검기를 약화하는 걸 넘어서 아예 그 방향을 비틀어대더군. 마치 반선진에다 아암귀명진을 덧씌운 듯이…… 아, 그렇군, 그래.”

툭.

내던진 작대기가 두 개의 원을 가로질러 초승달 모양에 걸쳤다. 초승달 모양은 무대, 그 바깥은 부챗살처럼 퍼진 선이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문득 깨달은 것.

해원기의 시선이 부챗살처럼 퍼진 선을 살피다 불쑥 하늘로 올라갔다.

간밤의 거센 소나기 덕분에 맑게 갠 하늘. 구름 한 점 없어 드높이 날아오른 동강만이 한가롭게 보인다.

오소민이 그런 해원기를 물끄러미 보다가 씩 웃었다.

“알아냈구먼.”

해원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오소민을 본다.

함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 속마음까지 훤히 아는구나.

“자네 덕분일세.”

해원기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오소민은 ‘내가 뭘 했다고?’라고 냉큼 반문하지 않았다. 또 ‘뭘 알아냈는데?’라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이 답답한 고구마대장에게 충고랍시고 싫은 소리를 해대는 건 자신도 싫은 일. 그 싫은 일을 하고 나서 은근히 마음이 쓰였었는데.

바부탱이라는 호칭은 사실 장난에 불과하지. 눈앞의 이 허름한 친구야말로 진정한 검왕 아니던가.

무공에 몰두할 때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멋지다.

해원기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티끌도 더럽힐 수 없는 연꽃. 자네의 하화 덕에 문제가 풀렸어.”

여전히 모호한 소리. 어지간히 말재주가 없음을 상기하면서 오소민이 맥이 빠져 뺨을 문질렀다.

“자세히 설명해봐.”

자신의 말이 비약했다는 걸 그제야 알아챈 해원기가 머리를 긁으며 얼른 두 발을 모은다.

“아, 미안. 진세가 거듭되면서 나도 그 안에서 풍뢰진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지. 파진운보로선 깨뜨리기 부족하다고 여겼기에. 그래서 손뼉을 칠 때부터 다른 한 가지 운신법(運身法)을 곁들였다네. 조화부인이 진환용융의 멸정법이란 기괴한 술법을 부릴 때는 그 운신법이 큰 도움이 되었고. 마지막에 오방신수의 수하를 한꺼번에 내보내고 암습을 펼친 건 이미 결계진이 흔들린 후.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도 도움이 되었지만, 결계진이 완전히 무너진 건 바로 그 하화 때문이야. 조화부인이 ‘보패신력’이라고 기겁하더라고.”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설명하는데,

그 동작이 어정쩡하게 덩실대서. 우스꽝스러운 춤처럼 보이는지라 오소민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알아낸 게 뭐, 아니, 자네 춤추나?”

해원기가 동작을 멈추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 앞에서 엉뚱한 광대 짓을 한 셈이잖나.

“하하, 월영무(月影舞)라는 걸세. 제월신공(霽月神功)의 일부분이고 어둠을 밝히는 맑은 기운. 그리고 자네의 하화에는 암담한 풍랑 속을 비추는 빛이 심어졌으니. 수차제의 들판에 펼쳤던 것은 유탕섭백대진(遊蕩攝魄大陣)이었어.”

마침내 찾은 답.

그러나 오소민은 생소한 유탕섭백대진보다 그 앞의 말에 눈가를 찡그렸다.

“제월신공의 월영무? 그거 혹시 예전에 실전된 속가(俗家)의 비전, 그건 또 어떻게 안대? 이 친구, 정말 괴물이잖아!”

처음 들었지만, 유탕섭백대진은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해괴한 사도대법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제월신공은 오소민의 사부들이라도 가물가물한 기억일 터.

바부탱이, 고구마대장 주제에 무공에서만은 괴물인가.

“사부님이 과거에 우연히 그 후예가 연공하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어서. 나는 그저 월영무를 흉내 내는 수준이지. 그래도 제월(霽月)의 뜻이 담겼기에 야밤의 암흑 속에 넓게 풀어놓은 유탕섭백대진의 맥을 거꾸로 거두기 시작했을 거야. 흑야(黑夜)의 암영(暗影)은 어차피 월영에게 맥을 못 추는 도리…….”

달빛 앞의 반딧불에 견주어 말을 보태려던 해원기가 얼른 몸을 돌렸다.

경공을 풀고 내려선 부덕도인이 오만상을 쓴 채 막 마당으로 들어선다.

수차제의 뒤처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 온다더니 표정이 상당히 침중하고,

“오, 식사는 마쳤, 쯧, 좋지 않군요. 무량수불.”

인사도 대충. 혀를 차며 별로 입에 올리지 않던 도호까지 외운다.

해원기만 없었다면 평소처럼 욕설을 내뱉으며 화를 냈을 법한 분위기.

해원기와 오소민이 풀어졌던 안색을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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