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48화 (149/410)

제37장 주저과감(躊躇果敢) (4)

지익, 지익.

오소민이 손톱을 세워 탁자 위에 이리저리 선을 긋는다.

“성질 나쁜 우리 도장께선 온 신경이 과거의 난세가 재현될까에 쏠렸고, 바부탱이 고구마대장도 꺼진 불씨가 되살아날까 봐 전전긍긍. 물론 대단히 엄중한 사태란 데에는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지만, 우선 당면한 현실부터 따지는 게 옳지 않을까. 정말 벽세와 지부라는 끔찍한 사마의 부활이라고 해도 우리는 지금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성질 나쁜 부덕도인과 바부탱이 고구마대장이 일단 탁자 위에 그어지는 선에 눈길을 보냈다.

조롱이 담긴 호칭보다 침착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아까 처음의 처음이라고 했었는데. 흠, 진짜 시작은 호중객잔에서, 아니, 약왕당의 단목 가주가 추정한 금오혈석이라고 봐. 아홉 개의 오리 알이 아홉 무리의 도적에게 겁탈당한 그 날, 새북의 진자현이 그 도적 중의 하나였고, 정체불명의 독이 살포되었지. 그리고선 덕주의 차행에는 동창의 졸개들이 누가 마차의 단서를 찾아오나, 하면서 기다렸어. 나중에 행천호랍시고 나타난 팽조린도 보았고.”

밑으로 내려가는 선.

“그러다 흥륭의 일에 휘말리면서, 요건 용문세가의 일이라고 하는 게 맞으려나? 하여간, 동창이 떼거리로 쳐들어왔지. 제남까지 가는 길에 반룡령이 나서긴 했어도 첩형대인께서 손수 흥륭의 가주를 납치했었잖아. 그러다가 고구마대장, 흐흐, 우리의 검왕께서 현신하시니 동창이 싹 들어가더라나.”

해학 넘치는 말투지만.

오소민의 손은 계속 움직인다.

“태산을 넘어 용문세가로 가는 길에 우연히 조양신문이란 작자들을 만났고, 또 반룡령이 나섰다가 호되게 당했어. 그래서인지 그 뒤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만, 호오, 우리 검왕의 신분을 밝히겠답시고 여기저기 의뢰를 넣었다더군.”

툭툭.

손을 멈추어 두드리는 소리.

“이게 산서, 산동인데. 개봉에서 악형을 쫓은 삼보별저가 아마 팽조린과 동창을 불렀겠지? 그게 등봉이니까 낙양을 잇는 연장선에 있어. 그리고 해형이 남하하면서 개봉 외곽에서 마주친 구란와자. 요 유랑극단은 서쪽 장안에서부터 왔다고 했고, 약왕당에 가서는 또 휘주의 정수회가 튀어나왔지.”

손이 다시 움직여 아래에서 위로 선을 긋다가,

“해형은 약왕당에서 부리나케 등봉으로, 또 등봉에서 다시 무당으로 가는 길. 반룡령이 위탁한 봉대저와 향락사귀가 정체를 밝힌답시고 설치긴 했어도 워낙 바쁘게 움직여서 갈피를 잡기 어려웠을 거야. 일단 해 형의 노선이 예상외거든. 하남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간 사람이 도로 남쪽 끝으로 내려올 줄 어찌 알겠어? 그 원인이.”

손가락이 일어서서 토란 같은 머리통 두 개를 가리켰다.

“이 두 꼬마란 걸 모르는 이상. 그래서 진평현의 수차제는 딱 해 형을 겨냥한 게 아니야. 도리어 저쪽에선 날벼락을 맞은 셈이지.”

해원기가 붕대를 동여맨 두 아이를 보면서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조화부인의 등장은 예정된 게 아니었을 터. 주작모 다음에 조화부인, 오방신수의 이름을 딴 자들도 시차를 두고 도착했으니.

오소민의 손가락이 다시 탁자로 돌아와 이번에는 옆으로 선을 그었다.

“그런데 여기 변수가 있어. 아직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사이사이에 낀 사건들. 구란와자로 도주한 당가의 막내, 수차제에서 자네가 겪은 철릉쇄혼관이 당가에 암기를 제공하던 악산철장과 관련되었다면 이 또한 당가. 그리고 인광과 수진이 떠난 곳은 사천과 감숙이란 말이야.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구먼. 흐으음.”

길게 숨을 고르며 내려다보는 탁자.

해원기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고, 이어지는 오소민의 말에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동창이 상계를 핍박한다는 소문은 외부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어. 강호에 암류가 있다는 단서는 제대로 찾은 게 없었지. 그러다가 동창이, 또 암류로 여겨지는 무리가 갑자기 이렇게 각지에 출몰하는 게, 아무래도 그 아홉 개의 오리 알이 도둑맞은 것과 맞물리는 듯하거든. 그것도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서.”

해원기만이 아니었다.

부덕도인의 눈매가 더 치솟고, 인광과 수진까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산서, 산동, 하남의 북부는 동창. 겉으로는 하북팽가의 가주가 동창의 무인을 거느렸고, 뒤로는 반룡령이 수상한 작자들을 동원했다. 그리고 그 정체가 확실하지 않은 조양신문이나 구란와자. 하나는 고상한 척 인심을 얻고, 하나는 저속한 연출로 풍속을 해친다.

하남의 남부에서 등장한 조화부인. 해원기에 대한 정보를 반룡령에서 얻었는지, 혹은 개봉의 삼보별저에서 얻었는지. 검왕을 위협할 정도의 실력을 지닌 무리건만 이제껏 소문조차 없었다.

그리고 약왕당을 찾은 휘주의 정수회는 금오혈석을 훔친 도적 무리의 하나로 의심되고, 인광과 수진이 떠난 아미산과 공동산에 또 금오혈석과 관련된 단서가 있다.

해원기가 무림에 발을 디디면서 우연히 벌어진 일일까.

오소민이 하고자 한 말은 바로 아홉 개의 금오혈석이었다.

해원기의 머릿속을 언뜻 스치는 것.

호중객잔에서 진자현이 떠들 때 아홉 무리 중의 하나는 억센 동북 말씨를, 하나는 교주 사투리를 썼다고 했었다.

새북 장풍보, 산동 조양신문, 휘주의 정수회, 하북팽가, 반룡령, 아미와 공동의 새로 등장한 세 인물. 그리고 조화부인.

대강 따져도 아홉이다. 이들이 전부 금오혈석을 탈취한 자들일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일정한 관계가 있을 터.

소림사에서 이환에게 들은 얘기로는 금오혈석이 아닌 육악(六惡), 그러나 그 또한 사일신화 일부분에 속한다.

해원기가 자기도 모르게 요대자를 더듬었다.

단목정조차 추정만 했던 이 희한한 돌멩이. 과연 어떤 물건이며, 겁표는 어떻게 된 사건일지.

당장 벌어지는 소란의 조짐이 바로 이 돌멩이와 이어지고,

모든 의문을 풀 관건임을 오소민은 지적한 것이었다.

해원기가 굳어진 얼굴을 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자네가 아니었으면 여전히 헤맸겠구먼. 고맙네.”

친구 사이에 굳이 감사를 표할 필요는 없다 했으나.

굳이 고맙다고 말한 건 오소민 덕에 시야가 밝아졌기 때문이다.

가만히 자신이 그린 낙서(?)를 보던 오소민이 그제야 머리를 들고는 픽, 웃었다.

“괜한 소리는. 뭐, 쉽게 풀릴 문제는 아니니까 이쯤 해두자고. 자네도 기력을 회복하는 게 먼저고, 요 두 꼬맹이도 밥은 먹여야 하잖나. 울화통 도장께서 귀하게 차려주신 식사인데.”

복잡한, 그리고 심각한 얘기.

한참 골치 아픈 화제에 몰두했던 좌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길고 험한 밤을 지내고 겨우 맞이한 점심때가 다 지나려 한다.

해원기가 오소민을 향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중대한 일이라도 사람이 멀쩡한 후에야 대할 수 있다.

그걸 깨우쳐주는 이도 역시 이 친구다.

말 없는 가운데 점심은 빠르게 끝나고,

부덕도인이 먼저 간밤의 들판을 살펴보겠다고 일어섰다.

진평현이 주관한 수차제다. 상당한 규모에 많은 백성이 몰렸던 행사가 엉망진창이 되었으니 분명히 뭔가 반응이 있을 터.

조화부인이 곤혹도를 사용했다는 걸 안 이후로 계속 일그러진 채인 부덕도인의 얼굴은 어떻게든 현장을 확인해야겠다는 결심인 듯.

부덕도인이 떠나자 해원기가 두 아이를 가까이 불렀다.

곳곳에 붕대를 감은 모습에 인상이 잠깐 어두워졌다가 얼른 두 손을 나누어 두 아이의 맥을 잡았다.

가늘게 뜬 눈에 맺히는 비췻빛. 신왕공의 청정력을 전하면서 아울러 동시안으로 내부를 살펴본다.

잠깐의 시간.

동시안을 풀며 손을 뗀 해원기의 얼굴이 많이 밝아졌다.

소림사에서 두 아이에게 베푼 환단의 대법이 나름 기틀을 잡아주었고, 부덕도인의 응급처치가 훌륭해서인지. 다행히 두 아이는 크게 상한 곳이 없어서 위안이 된다.

스스로 두 아이를 맡겠다고 나섰으면서 이런 꼴이 될 줄이야.

가슴속에 이는 자책이 한 가지를 결심하게 해서,

요대자에서 서둘러 약병을 꺼냈다.

“약왕당의 백초환과 복원고다. 백초환은 내상, 복원고는 외상을 치료하는데 탁월하지. 먼저 복원고를 상처에 바르고 나서 백초환을 삼켜라. 오형이 호법을 좀 서주게.”

물끄러미 탁자만 보던 오소민이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빡이며 다가오다가 묘한 표정이 되었다.

무림에 널리 알려진 약왕당의 명약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호법이라.

두 아이가 서둘러 붕대를 풀고 복원고부터 번갈아 바르기 시작하자, 오소민이 해원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네, 뭐 하려고?”

나직한 질문에 해원기가 두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폈다.

“백초환의 약효를 최대한 올려주려고.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걸세.”

“허, 공짜로?”

대뜸 나오는 엉뚱한 소리. 해원기가 조금 어리둥절해지는데.

“나도 들은 게 있어서. 약왕당의 백초환은 과거에는 아주 대단한 물건이었더군. 워낙 공효가 뛰어나 심한 내상이나 불치의 절맥 같은 병도 단번에 낫게 한다고. 물론 당대의 백초환은 그 정도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강호에서는 기를 쓰고 구하려는 자가 아주 많아. 칼끝에 기대어 살아가는 아슬아슬한 삶이라서 만일을 위한 대비라고, 흥, 그런 순수한 이유라면 얼마나 좋겠어.”

두 아이를 신경 쓴 듯 소곤거리는 말이 꽤 길다.

“멀쩡한 자가 복용하면 공력을 증진하는 효과를 낳는다나. 그 소문 때문에 별별 것들이 단목 가주를 꽤 귀찮게 했었다네. 자네, 알면서 이 꼬맹이들에게 베풀려는 건가? 소위 기연이라는 명목으로?”

해원기도 다 아는 내용. 멀쩡한 자가 복용한다고 바로 공력이 늘진 않는다. 그러나 약효가 뛰어나기에 그 약력(藥力)을 고수가 내공으로 제대로 돌리면 기대 이상의 성취를 얻을 수 있다.

무공을 익히는 자에겐 기연이나 마찬가지.

그걸 따져 묻는 오소민의 말에는 어쩐지 불만이 담겼고,

이유를 모르는 해원기는 묵묵히 쳐다보아야 했다.

오소민이 그 준수한 얼굴을 가까이 대며 미간을 찡그렸다.

“무공일도(武功一道)에 통달한 해 형이라고 여겼거늘. 참 과감하네그려.”

통달, 과감. 다 칭찬이 아니다.

이 친구가 왜 비아냥거릴까.

오소민이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답답한 친구.

같이 지내면서 해원기를 알게 되었다. 순후한 성품을 타고났고, 진지하고 끈질기며, 나름 풍취와 여유도 갖추었다. 게다가 끝을 알 수 없는 무공, 단순히 백년제일검사의 제자라서가 아니라 검왕을 형용하는 ‘풍화절세, 응양구천’이란 말에 어울리는 깊이와 위엄이 어리숙한 외모 속에 감추어진 것까지.

그러나.

무인이라기보다는 은둔자(隱遁者)가 더 어울린달까. 오소민을 만난 때부터, 정확하게는 제남의 대명호에서 진짜 실력을 보일 때부터가 무림에 정식으로 출도한 셈. 어떤 이유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렇게 무림을 등졌기 때문인지 꽉 막힌 구석이 있다.

바부탱이니 고구마대장이니 놀려댈 정도로.

엄청난 배경에 대단한 무공을 지녔으면서 순간순간 명쾌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

수차제의 싸움도 해원기에게서 듣기만 했지만, 직접 눈에 본 것처럼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미적미적.

뭐에 그리 구애받는지, 무엇이 그렇게 속박하는지.

결국은 그 자신이 기진맥진했고, 지키던 두 아이는 상처를 입었다. 언제나 억지로 드러내는 듯한 능력, 검왕은 어울리지 않는 별호던가. 내치는 손속이 무디고 여려서야 천하에 으뜸가는 무공을 익힌들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런 답답함이 또 불쑥 사리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게 한다.

두 아이가 다친 걸 자책하며 이런 식으로 갚으려는 서투름.

“싸움에 주저하고 도움에 과감한 게 협의의 본색이라지만, 정말 중요한 건 싸움이 어떤 의미이고 도움이 정말 도움이 되는지를 판단하는 게 아닐까? 자네는 백여 년 전의 성승과 도봉이 아닐세.”

여기까지만 말하는 게 좋다.

오소민이 말을 마치자 바로 몸을 돌려 문가에 섰다.

호법을 서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따르지만, 속이 상해서 준수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해원기의 멍한 시선이 초점을 잃었다.

바부탱이라 놀려대지만, 해원기는 오소민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아들었고,

동시에 아련한 기억의 한 조각을 떠올렸다.

‘저는 끔찍한 무림에서 남을 돕는 무림인이 되고 싶어요.’

매를 부리는 어린 소년이 품었던 소망. 그리고 그 소년의 소망을 이루어주려고 제자로 받아들인 사부. 그때 사부 앞에서 맹세했었다. 목숨을 걸고.

무림이 어떤 곳인지 이미 알았으면서, 협의의 길을 간다고 목숨을 건 맹세를 했으면서.

싸움이라면 무조건 주저했었나? 도움이라면 무작정 과감했었나?

아니, 주저와 과감을 전부 외면하려 했었구나.

그러니 과감할 때 주저하고, 주저해야 할 때 과감해지지.

싸움은 되도록 피하되 남을 위한 싸움이라면 과감해야 하고,

도움을 망설이진 않아도 혹시 남을 망치는 단서가 될까 거듭 주저해야만 한다.

일단 결정을 내리고 나면 주저와 과감이 무슨 구분이 있을꼬.

소림사에서 진평현까지 내려오면서 인광과 수진을 단련시켰던 마음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성승과 도봉의 맥을 이은 아이들이다.

소림에서 환단의 대법을 베풀었고, 무당에서도 상응하는 준비가 되어있을 터. 두 가지는 모두 과거의 인연에 따른 마땅한 보답. 제멋대로 설치는 과시가 아니다.

졸부들이나 헛된 자랑질에 낭비가 아까운지 모르지, 진짜 부자는 여전히 부지런하고 아끼며 산다던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눈에 빛이 돌아오고, 입가에는 쓰디쓴 고소. 더벅머리를 벅벅 긁다가 두 아이 뒤쪽에 앉았다.

“백초환을 삼키고, 각자 대정선공과 헌원진기를 운용하거라.”

그래도 기어이 공력을 전해줄 셈인가.

지켜보는 오소민이 얼굴을 찡그리는 걸 뻔히 알면서.

해원기의 두 손이 가볍게 인광과 수진의 등에 붙었고.

오소민의 찡그린 미간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불현듯 방안에 감도는 맑은 기운을 느끼자, 해원기가 바로 손을 떼면서 몸을 일으킨다.

쑥스럽게 오소민을 보는 눈길.

“음, 무(武)를 술(術)로 익혀 겨우 부리는 수준이라 도(道)를 깨달아 몸에 붙이려면 아직 멀었으니. 용서하게나.”

부끄러워도 말은 또렷하다.

오소민이 코를 찡긋거리면서 얼른 물었다.

“뭘 한 거야?”

“청정력으로 체내의 탁기를 몰아냈을 뿐이야. 내상의 회복을 조금 도운 거니까. 괜찮지?”

해원기가 또 어색하게 머리를 긁어서 오소민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 허락이 필요한 일인가?”

“아, 뭐. 그건 아니고. 음, 잠깐 동강이 괜찮은지 보고 올게. 그럼 부탁하네.”

어물어물. 슬쩍 오소민을 지나쳐 밖으로 향하는 해원기의 뒷모습에.

“풋.”

오소민이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다.

답답하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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