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장 주저과감(躊躇果敢) (3)
말솜씨가 없는 편이다.
해원기 스스로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이미 했던 얘기 중에서 자신이 느꼈던 의혹만을 추려내었고,
이제 인광과 수진까지 누구 하나 식사에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화제의 무게가 무겁기 때문.
부덕도인이 수염을 쥐어뜯을 듯 움켜잡았다.
“젠장, 빌어 처먹을 것들이 또!”
세태를 의젓하게 논하던 근엄함은 어디로 갔는지. 대뜸 입에서 나오는 걸진 욕설.
인광과 수진이 절로 어깨를 옴츠리는데.
오소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받는다.
“또, 라는 건 과거가 떠올라서겠죠? 흠, 뭐랬더라, 무림삼보(武林三寶)?”
대뜸 부덕도인의 대답이 나오고,
“삼색지보(三色之寶)라는 거다. 특히 그중의 녹판(綠板), 아, 진짜 짜증나네.”
입에 올리기조차 싫은 이름이라 수염을 잡던 손이 입술을 북북 문지르자,
인광과 수진은 놀라서 눈이 똥그래질 지경.
해원기가 무거운 시선을 그저 탁자에 내려놓았다.
부덕도인이 짜증을 내는 이유를 충분히 알지만, 여기서 제대로 짜증을 낼 수 있는 이는 부덕도인뿐이다.
인광과 수진은 물론이요, 오소민도, 해원기도 부덕도인이 짜증을 내는 그 과거를 겪은 적이 없으니까.
들어서 아는 것과 몸으로 직접 겪은 건 다르다.
동창과 반룡령에서 보이는 벽세의 흔적, 사천당가에서 과거에 만들려 했던 오독진살, 그리고 조화부인이 보였던 오대마도.
의혹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종합하자 단번에 금오혈석을 녹판과 연결했으니.
부덕도인이 수염과 입술이 지저분해진 상태로 다시 입을 열었다.
“돌팔이가 금오혈석이라고 했다면 분명히 근거가 있는 겁니다. 무림을 멸절하든 강호를 정복하든 원하는 걸 이룰 힘을 찾는 게 먼저. 흉측한 것들의 생각은 언제나 똑같군요.”
한바탕 성질을 부리지 않은 건 해원기를 생각해서일까.
말투를 다듬으며 어떻게든 화를 누르려 애쓴다.
그 모습에 오소민의 눈꼬리가 조금 접혔으나,
“그럼 벽세의 찌꺼기가 동창에 흘러 들어갔다고 봐야 하는데. 벽세 맞죠? 그것들이 녹판의 힘을 갈취해서, 흠.”
부덕도인에게 다시 확인하면서 말꼬리가 흐려졌다.
녹판의 힘.
“그래, 혼돈(混沌), 궁기(窮奇), 도철(饕餮), 도올(檮杌)이라는 전설에나 나오는 사흉(四凶)의 힘. 젠장.”
부덕도인이 밝힌 대로. 사흉은 아득한 태고의 전설이다. 시비를 뒤집고, 신의를 저버리며, 탐욕에 물들고, 아집에 빠지는 인간의 사악함을 경계하는 교훈.
그걸 실제의 힘으로 찾아냈다는 얘기도 신기하기 그지없는데,
이번엔 십일병출의 사일신화와 관계된 금오혈석이라.
해원기로부터 가장 먼저 그 오리 알을 구경한 오소민도 참으로 믿기 어려워서,
해원기에게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조화부인이 쓴 술수가 확실히 지부(地府)의 오대마도였나?”
부덕도인의 인상이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벽세’와 ‘지부’. 부덕도인뿐 아니라 풍진삼우 모두와 방주를 비롯한 사부들 전부가 질색하는 이름들이지만,
오소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고.
해원기의 표정도 굳어졌다.
“처음에는 나도 과거의 잔재라고만 여겼네. 사천당가의 진법, 공동파의 비결, 심지어 동귀어진의 자폭까지. 그러나 중간에 보였던 아주 기괴한 술법,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는 목소리와 신체를 속박하는 눈빛, 게다가 마지막에 몸을 빼낸 그 신법은 분명히 미심환영(迷心幻影)이었거든.”
“끄응, 그럼 심마왕(心魔王)의.”
부덕도인의 앓는 소리가 설명처럼 붙었다.
정말 입에 담기 싫은데도 ‘미심환영’이라는 말에 절로 따라 나오는 이름. 한때 천하를 공포에 떨게 했던 지부의 다섯 마왕, 그중 심마왕의 독문신법이 미심환영임을 모를 수가 없다.
당세에 그걸 제대로 알아볼 이 몇이나 될까.
부덕도인이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곤혹도(困惑道)?”
해원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을 수 있음에도 기어이 되물을 수밖에 없었고,
긍정을 표하는 무거운 끄덕거림에 아예 머리를 부여잡았다.
“빌, 어, 먹, 을!”
성깔 사나운 도사로 알려진 부덕도인이지만, 지금은 정녕 욕설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인광과 수진은 하나도 알아먹질 못할 얘기라 무지하게 답답했다.
소림사에서 딱 한 번 보았던 부덕도인은 자신들을 돌봐주었던 지공선사보다 한참 위인 무공화상조차 마구 대하는 사람이라 무섭게 생각했고, 이번에 처음 만난 미남자는 도저히 개방의 거지라고 여길 수 없는 용모인데 호법장로인 유룡개라고 했다.
전부 대단한 인물들.
해원기의 알뜰한 가르침을 받으며 지낸 요 며칠간 잊었던 사실.
자신들은 ‘검왕’과 동행했었다.
방 안의 분위기가 워낙 무겁기도 했고, 또 비록 알아먹지는 못해도 굉장히 중대한 화제란 걸 느낄 정도의 눈치는 있어서.
그저 어깨를 옴츠리고 듣기만 할 뿐.
부덕도인의 욕설이 나올 때마다 자기들이 야단을 맞는 것처럼 주눅이 든다.
그런 인광과 수진을 힐끗 본 오소민이 입맛을 다셨다.
연신 욕을 해대는 부덕도인을 말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부덕도인뿐 아니라 무공화상도, 사형인 취개도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터. 아니, 과거의 난세를 겪은 이라면 누구라도 마찬가지.
백여 년에 걸친 지독한 난세요, 참으로 참혹한 과정을 거쳐 간신히 지금의 안정을 얻었다니까.
오소민 자신도 결국은 그 여파로 개방의 순행장로가 되지 않았나.
그래도 이렇게 고민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자네가 그리 봤다면 맞겠지. 그러나 아까의 얘기와는 조금 어긋나는 점이 있어. 구란와자인가 하는 패거리와 진평현의 수차제, 뭘 노리는 걸까? 그저 백성들을 퇴락한 풍조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수차제가 열리는 들판에 펼쳐놓았다는 진도(陣圖)며 조화부인의 수하들이 지닌 능력은 일부분을 빼곤 다 벽세의, 에, 그렇다기보다는 이전에 사라진 구결과 실전된 무공 아닌감. 더구나 조화부인의 무리는 역시 동창, 반룡령과 긴밀한 관계로 보이는데.”
충격적인 내용을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오소민이 말을 꺼내자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지나온 과정에서 좋지 않은 낌새를 몇 번이나 느꼈지만, 그걸 세밀하게 분석한 적은 없었다.
해원기의 눈이 깊어지고, 부덕도인이 일그러진 얼굴을 들자 오소민이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을 옆으로 밀었다.
“처음의 처음부터 따져보자고. 자네와 내가 덕주로 갔을 때부터.”
해원기의 눈꺼풀이 껌뻑.
전령전을 쓰려다가 알게 된 오소민과 동행을 시작한 때다. 오소민의 말대로 처음의 처음. 모든 일을 시작부터 다시 되짚어보자는 거다.
오소민의 손이 탁자를 짚어가며 지나간 일을 하나하나 되살렸고,
부덕도인이 차츰 집중하며 거친 수염을 쓰다듬는 곁에서, 인광과 수진도 간만에 머리를 들고 열심히 듣는 모습.
이제야 화제를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그냥 해원기와 지나온 일을 맞춰보기만 하는 게 아니다.
오소민이 해원기와 말을 주고받으면서 탁자에 앉은 이들에게 하나씩 맡기기 시작한 건,
“수진이라고 했지? 너는 동창에 관한 것만 기억해 놔.”
“인광은, 음, 반룡령 부분만 머리에 새겨둬라.”
“성질 나쁜 도장께선 역시 불쾌한 과거 쪽을 맡는 게 낫겠죠?”
“해형, 자넨 일단 지부의 오대마도란 것에만 초점을 맞춰.”
되살리는 과거의 일 속에서 각자 주의해야 할 부분들.
덕분에 화제가 빗나가는 일 없이, 괜스레 묻거나 대답할 필요 없이 이야기를 주욱 이어갈 수 있었고.
조화부인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오소민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됐어. 일단 여기까지 훑어보자고.”
이야기를 끊고 바로 수진을 가리킨다.
“동창이 등장한 건?”
한참 듣는데 열중했던 수진이 눈을 껌뻑거리다 손을 꼽았다.
“덕주의 차행에서, 그리고 제남의 흥륭에서는 두 번입니다. 아, 등봉에서도 나타났죠.”
자신과 인광이 겪었던 일까지 포함해서 세 개의 손가락.
“누구누구지?”
“행천호 벼슬의 팽조린, 첩형 벼슬의 내시와 그 밑의 작은 내시, 영반이니 당두니 하는 자들이 거느리는 몇 개조, 가 됩니다.”
오소민이 고개를 끄덕이곤 손가락을 바로 인광에게 향했다.
“반룡령은?”
“네. 제남으로 들어갈 때와 태안을 떠날 때입니다. 반룡령의 소령주라는 백문량, 동해삼사의 후예인 인색이귀와 진방각궁을 쓰는 궁사들이 있었고요.”
인광이 기민하게 모아서 답을 하자 오소민이 씩 웃어주곤 시선을 부덕도인에게 돌렸다.
어른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는 없지.
“수진과 인광이 정리한 것 외에 도장께서 보신 건?”
부덕도인이 거친 수염을 쓰다듬다가 혀를 찼다.
“츳, 의심스럽게 보면 전부 의심스럽지. 벽세라는 도둑놈이 훔친 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까. 그렇다고 다 도둑놈으로 몰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개중에는 잊혔던 후대가 천신만고 끝에 뿌리를 되찾은 일도 있어서. 너도 잘 알잖냐, 근 이십 년간, 곳곳에 중흥한 문파와 방회가 적지 않은걸. 그게 다 무림 회생의 기운이요, 함부로 참견할 수 없는 일이라…… 흠, 오히려 바탕을 알기 어려운 무공들에 신경이 더 쓰인다. 대내(大內)도 그렇지만, 조양신문이니 향락사귀니 조화부인의 졸개들. 게다가 사천당가는. 흥, 영 맘에 들지 않아.”
여전히 말끝에 불쾌한 코웃음이 덧붙었으나.
그래도 노강호(老江湖)답게 꽤 폭넓게 생각한 의견.
확실히 벽세는 천하무림이 총집결한 신주영웅회(神州英雄會)를 내부에서 파먹은 집단이었기에, 과거 구주정문(九州正門)의 무공을 지녔다는 것만으로 무작정 도둑놈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증명단의 예도 있잖은가.
하지만, 바탕을 알 수 없는 무공들에 대한 지적과 더불어 사천당가에 대해선 어쩐지 화가 난 듯.
오소민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저런 얘기가 덧붙었다간 또 다른 얘기로 빠지기 십상.
“그럼 해 형이 지부의 마도로 확인한 건 조화부인 혼자인가?”
해원기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주작모란 여인이 쓴 팔마반경술이나 이목을 홀리는 아암귀명진이란 것도 지부의 마공에 닿아있지만, 결국은 조화부인에서 비롯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끄덕이던 머리가 멈추었다.
“마도에서 유래한 수법인데도 마기(魔氣)가 약해. 오직 조화부인에게서만 심마왕의 곤혹도를 느꼈지. 그래도 뭔가 좀, 사부님께 들었던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표현하기 어렵군.”
해원기의 미간에 주름이 몇 개나 잡혔다.
이렇게 따져보니 조금 더 세밀하게 살필 수가 있다.
조화부인이 사용한 섭혼(攝魂)의 능력이나 미심환영의 신법은 확실히 곤혹도의 일부분. 그러나 그 원천이 사부가 일러준 지부의 마력과 차이가 난다.
조화부인의 수련이 부족한 탓일까.
해원기가 생각에 몰두하려 하자 오소민이 얼른 탁자를 두드렸다.
“됐어. 일단 여기까지. 그럼 이제 내 차롄가.”
오소민이 나눈 순서대로 말하던 넷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소민이야말로 해원기와 같이 이 여정을 시작한 사람.
무엇을 주로 살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