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46화 (147/410)

제37장 주저과감(躊躇果敢) (2)

죽 한 사발에 주먹만 한 만두 두 개.

한심하기까지 한 식사지만 낡아빠진 탁자에 앉은 꼬맹이 둘이 허겁지겁 먹는 모습에 해원기도 힘을 냈다.

배가 고팠다.

오소민이 그 모습에 입맛을 쩍 다시며,

“이거 참 소박한. 흠, 계란이라도 좀 있어야.”

부덕도인을 흘끔거리는 눈빛에 불만이 담겼으나. 그래도 툭하면 화부터 내는 이 늙은 도사가 챙겨준 마음을 생각해서 말을 줄이는데.

대뜸 성질을 부릴 줄 알았던 부덕도인 역시 무안한 기색.

“워낙 외진 촌락을 찾아서. 에, 기껏 구한 게 이뿐이라.”

해원기가 얼른 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도장(道長).”

“송구하외다. 회주.”

깍듯한 사죄 역시 평소의 부덕도인을 아는 이들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열심히 만두를 씹던 인광과 수진이 마주 보며 눈을 껌뻑거릴 만했다.

그 토란 같은 머리통의 움직임에 해원기의 시선이 따라가고,

“음.”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인광은 머리와 허리, 수진은 왼쪽 팔과 오른쪽 발목에 붕대를 칭칭 감았다.

부덕도인이 적시에 치료해서 큰 지장은 없어 보이지만.

결국은 이 두 아이를 다치게 했다.

부덕도인이 평소의 얼굴로 돌아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머리 나쁘고 뻣뻣한 놈은 대가리와 허리, 게으르고 굼뜬 녀석은 팔다리. 딱 알맞은 징계지. 뭐, 혈기 넘치는 개구쟁이들이라 금방 나을 거외다.”

거친 말투에 두 아이가 당장 머리를 죽 그릇에 처박자.

해원기가 부덕도인에게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난 적이 있었습니까?”

“소림에 도착하자마자 연락이 왔었지요. 빈도가 소림에 가서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본산에 보고하러 갔다가, 그 바람에 개봉에 늦게 도착했던 거라. 에,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또 늦었구려. 에잉.”

험악한 인상이 확 일그러져서, 이번에는 해원기가 미안해졌다.

부덕도인은 짧은 기간에 두 번이나 무당을 오가게 되었잖나.

해원기가 두 아이의 호송을 맡았는데도.

오소민이 슬쩍 끼어들었다.

“몸은 멀쩡한 거지?”

“응. 괜찮아. 일시에 기를 격하게 소모해서.”

“그럼 무슨 일인지 얘기해도 되겠네.”

해원기가 얼굴빛을 고쳤고, 다른 이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아는 이는 해원기뿐.

천천히 말을 시작하는 해원기의 미간에 차츰 힘이 들어갔다.

개봉에서 헤어진 후부터 겪었던 일이라 아무리 간략히 해도 꽤 시간이 걸린다.

긴 얘기가 끝나자 인광과 수진은 입을 딱 벌렸고, 부덕도인은 오만상을 쓴 채 탁자를 노려본다.

이리저리 머리를 갸웃거리던 오소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화부인? 오방신수의 이름을 차용한 자? 이건 또 뭐야?”

처음 듣는 이름들.

해원기가 겪은 험경이 평범하지 않다. 이미 해원기의 신분과 그 헤아리기 어려운 능력을 알기에 더욱 상대에 대한 의혹이 짙어질 수밖에.

급하게 질문이 이어 붙는다.

“동창도 아니고 반룡령도 아니라면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더구나 자네가 기절하기 전에 했던 말, 그거 정말인가?”

해원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섣불리 꺼내기 어려운 말. 그러나 이 무거운 고갯짓에는 그만한 무게가 담겨서 오소민의 표정도 굳어졌다.

오대마도라니.

잠시 말이 끊기자 부덕도인이 비로소 머리를 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결국 이런 상황이 되는구나. 곳곳에 그럴 기미는 보였거늘.”

안타까움이 실린 영탄조.

해원기의 시선이 돌아가자 부덕도인이 거친 수염을 쓸었다.

“구란와자 얘기를 했었지요. 여기 진평현의 수차제도 그렇고. 근래에 와서 세태가 퇴폐해졌다오. 과세가 갈수록 중해지건만, 어쩐 일인지 사람들은 그저 화려한 겉치레와 허망한 놀음에만 빠져서. 흐음, 당장 이 외진 촌락의 먹을거리가 그 증거겠구먼. 돈이 많이 돌아 살기 좋아졌다고 흥청망청하는데 실상 바닥은 더 먹고 살기 어려워졌거든.”

부덕도인이 귀찮아서 계란 몇 알을 빠뜨린 게 아니다.

“어쭙잖게 풍진삼우라고 불리는 처지라. 술꾼 거지와 멍충이 중, 그리고 빈도는 나름 강호를 쏘다닌 편. 세상의 흐름을 조금 더 실감한달까. 절에는 화려한 단청을 올려도 제대로 된 중이 드물고, 기름진 음식이 가득한 도관에는 사기꾼만 득실대며, 땅을 잃고 유랑하는 유민이 적지 않답니다. 개방과 녹림이 때 아닌 성세를 누리겠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니까. 쯧.”

개방과 녹림이 성세를 누리려면 거지와 산적이 늘어야 한다.

농담이라면서 쓰게 혀를 차고,

부덕도인이 바로 옆에 붙어 앉은 인광과 수진을 보았다.

“성승과 도봉의 맥이 이 시기에 중원에 나타난 것도 우연은 아니겠지요. 그간 은밀하게 느껴졌던 암류, 그 단서를 찾기 어려웠던 이유가 세태에 섞였기 때문일지도. 회주의 얘기를 들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사대흉수(四大凶獸), 약왕당의 돌팔이가 떠든 금오혈석, 그리고 아미와 공동에서 벌어진 일. 뭔가 비슷한 느낌. 허, 이거 검주를 뵐 낯이 없구나. 무량수불.”

도호를 외우며 숙이는 머리.

오소민이 조금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성질 더러운 이 도사의 입에서 도호까지 나올 줄이야. 부덕도인의 새로운 면목을 발견한 셈이지만, 내용이 워낙 심각해서 놀려댈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두 아이는 어쩔 줄 모르는 눈치다.

해원기가 눈을 감았다가 뜨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오 형과 도장은 어떻게 온 겁니까?”

소림을 떠나 무당으로 가는 길이 하나일 리 없다. 시간에 맞추어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부덕도인이 퍼뜩 머리를 들어 오소민을 노려본다.

“저 천방지축이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다가 확 뛰쳐나가는 바람에. 술꾼과 멍충이는 낙양과 소림사에 남은 일이 있었으니까 할 수 없이 빈도가…….”

“호오, 그러셔요? 골치 아픈 자리에 있기 싫었다가 옳다구나, 하고 내뺀 게 아니고? 그러고도 한참 늦었잖아요.”

“내뺀 거? 야, 이 녀석이 어디서 주둥이를 함부로.”

“어디서라니. 해 형 앞이라 점잔빼는 건가. 그냥 평소대로 해요, 어울리지 않게스리.”

“야!”

부덕도인의 목소리가 확 올라가는데, 오소민은 잽싸게 해원기를 향한다.

“용문세가에 급한 서신이 들어왔어. 근처의 잘 아는 상인이 부탁을 받았다나. 자네가 얘기한 것들이 대충 적힌 데다 진평현에서 위급이라고 딱 쓰여 있더라고. 누가 보냈는지 알겠나?”

해원기가 잠깐 미간을 좁혔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이 가는군.”

구란와자까지 언급했다면. 봉대저가 행한 일일 터.

그러나 시간상으로 직접 낙양의 용문세가까지 갔을 리는 없다. 역시 신비한 여인이다.

반룡령의 위탁을 받아 해원기의 내력을 캐는 게 목적이라면서.

대체 무슨 의도일까.

평소의 모습을 회복한 부덕도인이 씩씩대며 억지로 화를 삭이는 동안.

오소민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잠시 떨어진 새에 별별 일이 다 있었구먼. 한데 우리가 개봉까지 오는 동안은 동창과 반룡령이었잖아. 반룡령이 뒤로 빠진 건 겁을 먹어서라고 쳐도 자네가 마주친 자들은 전부 의외인걸.”

구란와자, 사천당문, 약왕당에서 만난 정수회, 향락사귀에다 수차제의 조화부인 일당.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자는 등봉에서 죽은 팽조린뿐, 전부 생소한 자들이다.

무슨 소린가 하고 쳐다보니,

“팽조린이 동창 것들 거느리고 악형을 쫓은 지역은 개봉에서 등봉이지. 그럼 하남 아래쪽부터는 관할이 다른가?”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하고, 부덕도인의 시선도 홱 돌아왔다.

확실히 새로운 시각. 오소민은 좀 더 객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전에 제남에서 봤던 적각개 기억하지? 자네와 헤어지고 난 후에 걔를 족쳐서 북쪽 사정을 좀 알아봤어. 그 낙향한다는 내시의 표행 말이야.”

화제가 다시 바뀌었다.

방주의 호출로 개방의 총단에 간다던 오소민. 처음 해원기와 동행하게 된 사건을 잊지 않았다.

“제남을 거쳐 간 건 맞아. 그런데 그 이후로 감쪽같이 사라졌더구먼. 본래 목적지가 절강 쪽이니까 휘주든 강소(江蘇)든 남향한 흔적이 있어야 하잖나. 없어, 산동에서 연기처럼 증발했더라고. 그래서 표행에 관계된 표국을 찾아봤지. 워낙 큰 규모라 표국도 세 개, 그중 한 개가 실마리가 될 듯해서 직접 가 볼 참이었는데.”

해원기의 눈이 빛을 띤다.

이 친구. 그간 어지간히 바쁘게 탐문한 모양. 얻은 소득이 적지 않고, 개봉에서 소림사와 낙양을 뛰어다니다가 또 달려온 것이다. 해원기를 위해.

“어디 어디인가? 그중 한 곳?”

경사에서 출발한 표행이다. 쾌체 일로 하북에 있었기에 유명한 표국은 거의 다 아는 해원기.

“경사의 진원(鎭遠)과 평안(平安), 하북의 용위(龍威). 그중 용위의 표사(鏢師) 하나가 얼마 전에 진원과 평안을 찾아 한바탕 난리를 쳤다더군. 진원과 평안이라면 경사에서도 알아주는 큰 표국이거늘…….”

일개 표사 한 명이 혼자서 찾아가 난리를 칠 수 있나. 꽤 특이한 일이라 오소민은 거기서 실마리를 찾아볼 생각이었나 보다.

그런데.

“누구라던가?”

해원기가 대뜸 묻는 말에 오소민이 묘한 표정이 되었다.

“에, 그게 명호도 없는, 그냥 일개 표사, 이(李) 표사라던데.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흔하디흔한 성이다.

해원기의 얼굴이 미묘하게 흔들리더니,

“가능성이 있지.”

또 모를 소리.

아까는 짐작이 간다고, 지금은 가능성이 있단다. 오소민이 은근히 심통이 나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이 친구, 잠시 안 본 새에 더 답답해졌네. 괜히 남, 고구마 먹이지 말고 제대로 불지 못해?”

눈을 치뜨며 을러대지만,

해원기가 씁쓸하게 입꼬리를 내리며 시선을 내렸다. 자신을 위해 동분서주한 벗에게도 선뜻 답하지 못하는 심정.

하북에서 쾌체 일을 하면서도 용위표국을 찾은 적이 없었다. 사부와 인연이 있는 곳이기에 그랬을까. 무림을 멀리하고 손에 검을 쥐지 않으려 했던 시절.

그런데 그 인연이 이렇게 이어진다.

해원기가 무림에 나서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과거에 하북 용위표국의 젊은 청년 한 명은 사부에게서 전진(全眞)의 실전된 청허심법(淸虛心法)을 배웠었다. 심성이 바르고 자질이 훌륭해서 탁 소숙이 참 마음에 들어 했었다는, 이소천(李嘯川)이라는 표사.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서야 해원기가 간략하게 이소천과 봉대저의 얘기를 밝혔고,

오소민이 자세를 고치면서 입맛을 다셨다.

“이 표사가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래, 확실히 가능성이 있네. 표국 쪽은 그 양반을 찾는 게 정답이겠어. 흠, 그런데 그 여자는 뭐야? 봉대저? 어지간히 요사스러운 아줌마잖아.”

이소천을 말할 땐 진지했다가, 봉대저를 언급하자마자 왕창 구겨지는 표정.

어지간히 싫은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글쎄,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 요사스럽다고 딱 규정하기 어렵고.”

“어이, 어이. 뭘 그리 두둔하고 그래? 그새 홀렸나? 뭐, 중간에 당가의 여식도 만났다더니. 오매불망이 별호라던데 아주 도처에 시금치를 뿌리시는구먼. 가을도 아닌데. 쳇.”

가을 시금치는 추파(秋菠). 추파(秋波)를 보낸다는 말과 같은 발음이다.

오소민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조롱을 더하자,

부덕도인이 픽, 웃으며 화제를 되돌렸다.

“헛소리 작작해라, 이 녀석아. 그보다 당면한 일부터. 회주, 일단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여서 이 외진 촌락을 골랐지요. 직접 상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을 좀 더 상세히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맹주(盟主)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도.”

조화부인이 도주했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그간 겪었던 일보다 이번의 경과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에, 부덕도인의 요청이 당연하지만.

‘맹주’라는 단어에 해원기의 얼굴이 다시 무거워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