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45화 (146/410)

제37장 주저과감(躊躇果敢) (1)

정말 미친 듯이 달렸다.

북쪽을 더듬다가 다시 개봉으로 돌아왔더니 뭔가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렸고,

그게 악송령에 관한 것, 소림사 쪽으로 급히 움직였다. 다행히 소림사에서 악송령을 만났으나 해원기는 이미 떠난 후.

약왕당을 갔다는 친구가 등봉까지 올라와 악송령을 구하고, 다시 무당산을 향해 내려갔단다.

바부탱이 고구마대장이 뭐 이렇게 빠르나.

계속 한 발자국씩 늦은 게 약이 올라 더 서두르게 되었고, 총단에 보고할 것도 낙양의 용문세가에 있는 사형에게 맡길 셈이었는데.

바쁘게 용문세가에 들렀다가 묘한 서신을 받았다.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서신. 그러나 그 안에 반룡령, 구란와자, 위급이란 단어가 남양의 진평현이라는 지명과 함께 쓰여 있음에야 무시할 수가 없는 노릇.

바부탱이가 헤어지고 나서 소림사로 올라올 때까지 꽤 화려한 전적(?)을 쌓았다던데.

그 주제에 꼬맹이 둘을 데리고 또 내려갔다고?

취개 단삼육이 붙드는 걸 뿌리치고 득달같이 달렸다.

흥겨운 수차제가 열린다는 진평현이 괴괴한 적막에 싸인 걸 보는 순간 이상함을 직감했고,

어둠을 헤치고 사방을 뒤지다가 아련하게 폭음을 들었다.

현성을 관통해 남쪽 들판으로 접어들자마자 전신에 전해지는 불쾌함.

해원기를 발견하곤 곧장 품속의 법보(法寶)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사부들에게서 받은 후로 단 한 차례로 꺼내지 않았던 하선고(何仙姑)의 연꽃. 팔선(八仙) 중의 유일한 여인인 하선고처럼 수집하화불염진(手執荷花不染塵), 손에 연꽃 드니 티끌에 더러워지지 않는다.

끈적한 어둠을 물리치며 해원기를 부르는 외침에는,

반가움과 걱정이 가득 담겼다.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

아무리 급해도 주위를 살피지 못할 철부지가 아니다.

피잇.

대뜸 화살 같이 날아드는 지풍을 별호인 유룡(游龍)처럼 공중을 헤엄쳐 피하면서 곧장 해원기의 곁으로 내려섰다.

쏴아아.

급격히 거세지는 소나기에 함빡 젖는 몸, 두 발이 금세 진창이 된 도랑에 빠지지만.

오소민이 손에 든 연꽃보다 더 환하게 웃는 낯을 보였다.

“바부탱이.”

일단 농을 건네는데.

오소민의 웃는 낯이 조금 비틀렸다.

마주 웃을 줄 알았던 해원기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지고,

“동강과 두 아이, 뒤를 맡아주게.”

뚝뚝 끊기는 말이 뭔가 어색하다. 평소의 해원기 같지 않다.

그제야 바닥에 널브러진 동강과 그 날개 아래 혼절한 두 아이를 본 오소민이 눈을 크게 뜨다가.

처음 듣는 목소리에 주의할 때,

“이건, 보패선력(寶貝仙力)? 칫, 정말 꼬이는구나…….”

짜증 섞인 여인의 목소리보다 당장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해원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흙탕물이 오소민에게 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차아아압!”

고막이 터질 듯한 기합.

오소민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며 손에 쥔 하화에 공력을 더해야 했다.

해원기가 이렇게 굉장한 기합을 토하는 걸 처음 보았고,

쏟아지던 거센 소나기가 거꾸로 치솟기 시작했으니.

보병청강의 힘은 면면부절, 백천(百川)이 모여 장강대하(長江大河)를 이루고 마침내 바다로 이어진다.

거세게 쏟아지는 소나기 또한 물.

해원기의 기합에 깨어난 빗물이 청강지력에 귀속되어 소모된 공력을 단숨에 회복하고 오히려 배증하는 수정미기(水精彌氣)의 비법.

해원기의 두 눈에서 신광이 줄기줄기 뻗어 좌우를 점한다.

홍몽무변을 상쇄한 사면황제진이 다시 모여들고, 주관만 보이는 조화부인이 어둠 속에 흐늘거리는 양쪽.

손에 들린 어설픈 철검이 눈빛을 좇아 사면황제진과 조화부인을 번갈아 짚었다.

고오오오오.

주위가 모조리 빨려드는 듯.

여름날의 거센 소나기가 거꾸로 치솟다 못해 소용돌이로 몸부림치고,

마침내 사면황제진과 조화부인이 있는 지면까지 뒤집는다.

눈을 가리는 빗줄기, 귀를 막는 굉음.

해원기가 기합 끝에 중얼거리는 혼잣말은 들리지도 않는다.

“두 개의 기틀은 서로 얽혀 돌아가느니.”

천손검법 제이초, 양의상전(兩儀相纏). 얇은 쇠꼬챙이였던 철검이 어느새 일 장이 넘는 거대한 장검으로 화했다.

아니, 철검만이 아니다.

사면황제진을 덮는 빗줄기가 전부 검이 되고,

조화부인을 가둔 비바람이 전부 검이 되었다.

한데 모았던 경력이 다 사라진 사면황제진으로선 다섯이 제각각 손을 쓸 수밖에.

용선생의 족자가 새까만 먹물을 토하고, 호장의 백은 빛 쌍권이 미친 듯이 뻗으며,

현무자의 갈라진 채찍은 먹물과 뒤엉키고, 주작모의 옥환은 쌍권에 불을 뒤집어씌운다.

황웅은 쌍장을 펼친 채로 그 거대한 체구를 웅크려 다른 넷을 지키고.

검우(劍雨) 따위에는 끄떡없다는 자신인가.

하나 그건 해원기의 검이 바뀐 걸 모르는 무지.

사부에게 전해 받은 이래로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검상(劍相).

어렸을 때부터 꺼림칙하게 여겨, 검왕수에도 붕대를 칭칭 감아 봉인했던 이유.

사신검(死神劍)이 현현했고,

비는 우레를 동반하니, 검우는 뇌정을 부른다.

꽈릉!

먹물은 백은 빛을 덮치고, 채찍은 옥환과 뒤엉킨다. 음양이 서로 뒤집혀 돌아가는 속에선 아무것도 제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크악!”

“으엑.”

용선생의 두 팔이 어깨에서 잘려나가고, 호장의 머리가 싹둑 베어지고, 현무자의 몸이 벌집이 되고, 주작모의 허리가 두 쪽이 나고.

뿜어지는 핏물 속에 등판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황웅이 엎어졌다.

하피가 사라져 붉은 명부관복이 고스란히 드러난 조화부인.

머리에 쓴 주관만 보인 채 전신을 어둠으로 감추었으나 이 검의 폭풍에는 견딜 수가 없었다.

찌익.

섬섬옥수가 연달아 지풍을 튕기고, 신출귀몰하는 신법이 거듭 어둠 속에 숨는데도.

칼날 같은 바람이 팔방에서 몰아치는 데야.

풍성한 소매가 갈기갈기 찢겨나가자 주관이 경기하듯 떨기 시작했다.

와다다다다.

아름다운 옥소리를 내던 건 잊어먹었는지. 경망스럽게 울어대는 주관에서 장식한 구슬이 마구 튀어나와 그녀의 전신을 가리지만,

팔풍(八風)의 날(刃)은 무엇이든 쪼개버린다.

사신(死神)의 작두처럼.

뻑.

주관이 산산조각으로 터지고, 붉은 명부관복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데.

조화부인의 목을 단단히 감쌌던 하얀 원령(圓領)이 둥실 떠올랐다.

사신검을 거두던 해원기의 눈이 퍼뜩 그 원령을 향했다.

사신검으로 펼친 양의상전.

풍뢰결이 더해졌으니 자연히 풍우검권(風雨劍圈)의 사신참(死神斬)이 이루어진다. 그 안에 갇힌 자는 검우에 꿰이고 검풍에 베여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터.

이렇게 목만 남을 수 없는데.

주관이 터졌으니 하얀 옷깃 위에는 조화부인의 머리통이 있어야 하거늘.

팍.

시뻘건 핏덩어리가 터지면서 하얀 원령이 그대로 녹아버린다.

그리고 그 가운데 희미하게 울리는 목소리.

“으윽. 네놈, 네놈은 바로 백년제일검사의…….”

녹아내린 원령처럼 사그라지는 조화부인의 음성.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리며 바닥에 내려섰다.

시해를 능가하는 기묘한 술법. 조화부인은 양의상전의 풍우검권에서도 몸을 빼내 사라졌다.

해원기의 신분을 정확히 파악하고서.

오소민이 멍하니 해원기를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검에 놀아났던 소나기가 해방되자 더욱 세차게 쏟아져 동이로 퍼붓는 것 같다.

더벅머리에서 줄줄 흐르는 빗물, 엉망으로 찢긴 흑의 경장은 몸에 찰싹 달라붙었고, 오른손에 든 철검은 늘어져 빗줄기에 흔들린다.

그러고 보니 저 쇠꼬챙이는 어디서 난 걸까.

항상 가슴팍에 달고 다니던 판과도 보이지 않네.

머릿속에 그런 엉뚱한 의문이 떠오른 건 해원기의 모습이 그만큼 낯설기 때문이다.

바부탱이, 고구마대장.

그렇게 마음대로 부르며 놀려댔던 친구가,

지금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무섭다.

퍼붓는 소나기, 캄캄한 밤. 들판에 홀로 죽음을 찾아 내려온 사신 같아서.

도랑을 타고 핏물이 질펀하게 흘러내린다.

그러나.

“후.”

한숨과 함께 비틀거리는 해원기를 보자 오소민이 펄쩍 뛰어갔다.

“괜찮아?”

급히 어깨를 부여잡자, 해원기가 비로소 얼굴을 돌렸다.

“오 형, 또 놓쳤어. 꼭 잡았어야 했는데, 저건 분명 오대마도(五大魔道)…….”

“어이!”

스르르 무너지는 몸.

말을 맺지도 못하고 해원기가 오소민의 가슴팍에 머리를 떨구었다.

깜짝 놀란 오소민이 황망히 해원기의 어깨를 부축했지만, 이미 무거워진 머리를 가누지도 못한다.

힘이 빠져 잠들 듯 미끄러지는 몸. 오소민보다 키가 더 큰 해원기가 그냥 품속으로 쓰러지고.

어쩔 줄 모르던 오소민이 해원기의 혼절한 얼굴을 보다가 안아버렸다.

이렇게까지 힘을 썼던가.

“이 바부탱이가.”

하화를 손에 쥔 채 흠뻑 젖은 해원기의 더벅머리를 쥐어박으려다,

오소민도 그만 맥 풀린 욕만 내뱉었다.

쏴아아아아.

소나기에 질렸는지 맑은 빛도 금방 사그라들었다.

똑똑.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오소민이 픽, 웃으며 문을 열었다.

성깔 사납게 생긴 늙은 도인. 풍진삼우 중의 부덕도인이 어울리지 않게 눈만 빠끔히 들이밀고.

“해가 중천이다. 뭐라도 먹으면서 기다려야지.”

한껏 목소리를 죽여 소곤거리는 데에는 기가 찰 지경.

이 양반이 진짜 풍진삼우의 노도(怒道)가 맞나 싶다. 취개에게서 뒤늦게 얘기를 듣고 부리나케 오소민의 뒤를 쫓았으나, 그래도 한참이나 늦은 게 영 미안스러운지.

시골 촌락의 집 하나를 빌려 해원기 일행을 눕힌 뒤로는 계속 좌불안석이다.

오소민이 혀를 차며 돌아보았다.

초라한 나무 침상에 누운 해원기. 혈색이 많이 돌아왔고 딱히 내상이나 독을 당한 흔적은 없는데도 벌써 다섯 시진이나 깨어나지 않는다.

건너편의 작은 방에는 인광과 수진. 부덕도인이 상처를 치료하고 나름 약과 침을 두 번이나 써서 많이 좋아졌건만.

헛간에 둔 동강도 벌써 날아올라 지붕 위를 빙빙 돌고 있다.

기진맥진한 것 같은데 함부로 약이나 침을 쓸 수 없었다. 해원기가 익힌 공부는 중원의 상례를 벗어난다는 부덕도인의 말 때문에.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수밖에.

아침도 거르고, 부덕도인을 도와주지도 못했다.

아이들 치료와 식사까지 혼자 준비하는 부덕도인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새 점심때가 된 모양.

오소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덕도인을 따라 문밖을 나서는데.

“오 형.”

작은 목소리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에쿠.”

서두르다가 좁은 문에 끼인 오소민과 부덕도인을 보며 해원기가 힘 빠진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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