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취우중봉(驟雨重逢) (4)
투둑, 뚝.
갑자기 얼굴에 떨어지는 물방울. 비가 오려나.
해원기는 되돌아온 철검을 쥔 채 날카롭게 정면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용선생과 주작모. 몇 차례 손해를 보았고 끝내 풍뢰경(風雷勁)의 충격을 뒤집어쓰면서 헐떡거리는 걸 보았었는데, 지금은 멀쩡하게 힘을 쓰고 훤하게 안광까지 빛낸다.
단숨에 내공을 증진하는 영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또 해괴한 약을?’
팽조린이 마지막에 보였던 기괴한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단정할 수는 없었다.
조화부인이 펼쳤던 진환용융의 멸정법. 그녀의 하피가 너울대자 해원기가 혼절시켰던 구구황웅이 전부 멀쩡해진 경우가 바로 조금 전이었기에.
약인지 독인지. 혹은 술법인지. 어떻든 사람의 잠재력을 폭발시켜 광기에 휘말리게 하는 공통점이 있으나.
지금은 그런 추리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해원기는 인광과 수진의 앞, 도랑에 있고. 오방신수를 흉내 낸 다섯은 약간 높은 지대. 조화부인의 기척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지만, 방심할 수 없다.
철검을 쥔 손을 천천히 올리는 사이,
상대도 전열을 정비하는 모양.
황웅이 거대한 손을 털며 웅얼거리고,
“역시 아파. 기껏 문반(文班)을 살렸더니 이번엔 무반(武班)이 또. 으잉.”
겨우 몸을 일으킨 현무자가 인상을 쓰며.
“징징대지 말고 빨리. 저놈 보통이 아니라구.”
황웅의 손이 그 뚱뚱한 체구를 이불처럼 덮어가는 옆에서 벌떡 일어난 호장은 이를 부득 간다.
“난 됐다. 부인의 명은?”
수치심과 노기가 내상을 회복시켰을까. 썩은 무 조각이 된 몽둥이를 내던지며 눈에 불을 켜는 호장에게.
용선생이 소매에서 둥글게 말린 축권(軸券)을 꺼내며 짧게 대답했다.
“격살무론(格殺無論).”
따질 것 없이 무조건 죽이라는 말.
주작모도 품에서 붉은 옥환(玉環)을 꺼내 손목에 끼고, 현무자 역시 황웅의 손아귀 안에서 꿈틀거리며 검은 채찍 하나를 손에 감는다.
호장이 머리에 두른 백건을 풀어 양손에 감으며 흉하게 웃었다.
“좋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몸을 날리는 넷. 현무자를 회복시킨 황웅이 땅을 박차고 뛰었다.
쿵.
태산처럼 거대한 체구가 정말 태산이 무너지듯 해원기에게 떨어진다.
대체 얼마 동안이나 싸우는 건지.
웬만큼 내력을 다진 고수라도 차츰 지쳐야 이치에 맞는다.
절정의 고수들이 며칠 밤낮을 싸우고, 수백 수천 초를 겨룬다는 전설이 많이 있지만, 그건 그저 호사가들이 떠드는 얘기일 뿐.
진실로 절정의 경지에 든 고수라면 결판을 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리 없다. 서로 승패를 짐작하기 어렵다고 여기면 굳이 사서 고생할 이유가 없기에. 오히려 전력을 다한 건곤일척의 승부야말로 어울릴 터.
내공은 쓰면 쓸수록 줄고, 체력도 마찬가지로 떨어지게 마련.
영단묘약으로 잠시 회복할 수는 있어도 근기(根基)와 지구력은 한계가 있다.
하물며 거친 충격을 거듭 받아 내부가 흔들린 바에야.
용선생, 주작모, 현무자, 호장의 넷이 이렇게 기세를 올리며 공세를 펼치는 건 확실히 정상이 아니요, 거대한 황웅이 다른 이를 회복시키고도 힘이 넘친다면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따지자면 해원기는 훨씬 더 피로한 처지.
수차제의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깰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싸워왔으니.
아무리 신왕공이라도 무한하진 않다.
그런데도 태산처럼 덮치는 황웅을 보며 철검을 그대로 내질렀다.
우웅.
단숨에 빛으로 폭발하는 얇은 쇠꼬챙이. 또 다시 출현한 일흔두 개의 검광이 부챗살처럼 펴지더니,
그게 다섯 묶음의 검강으로 바뀐다.
용선생에겐 부용(芙蓉) 꽃, 호장에겐 기둥 같은 천주(天柱), 주작모에겐 노을 진 자개(紫蓋), 현무자에겐 찬란한 상광(祥光). 그리고 정면을 덮치는 황웅에게는 가장 높은 축융(祝融).
오악검법 중에서 가장 복잡한 형산의 칠십이좌(七十二座) 기수검봉(奇秀劍峰). 그 중의 남악오봉(南岳五峰)은 형산검파가 멸망할 때까지 아무도 터득하지 못했다는 기수검봉의 최절초다.
더구나 남악오봉을 떨치는 오른손 바로 뒤에. 붙였다, 펼쳤다, 굽혔다, 폈다가, 마침내 움켜쥐는 왼손은 남악오봉에다 마도절세오검을 전부 곁들여서.
콰쾅!
벼락 치는 굉음 속에 다섯을 동시에 날려버렸다.
“후…….”
빈약한 철검을 두 손으로 무겁게 받쳐 드는 해원기의 입술 사이로 가는 숨이 새어 나왔다.
실검(實劍)이 기화검보다 위력적이긴 하지만,
이제는 공력이 달린다.
우르르르.
멀리서 때 아니게 또 우레가 운다.
검왕수.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의 병용. 검왕오형 중의 세 가지에다 십대검상의 현현. 막대한 공력이 소모되는 절학들이다.
게다가 즉석에서 삼매마려로 판과를 철검으로 바꾸기까지 했으니.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다진 신왕공, 청강주와 풍뢰동의 기연이 없었다면 벌써 진력이 고갈되어 기절했을 것이다.
삼매마려의 철검으로 검상을 현현하지도, 검왕오형을 펼치지도 못한 이유다.
그래도 검강과 어검을 겹치고, 재단경위에 버금가는 기수검봉에 절세오검을 더한 엄청난 위력.
저들이 본신의 공력을 회복하고 비장의 병기를 꺼냈다고 해도 버틸 리가 없을 터.
하지만,
해원기가 가늘게 토하던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이십 장이나 밀려나 떨어지던 다섯이 마치 고무공처럼 도로 튕겨오기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남악오봉에 절세오검. 당장 숨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공격인데.
다섯 모두 더욱 기운을 북돋우며 황웅을 중심으로 모여든다.
용선생이 펼치는 기다란 족자 위로 먹물이 번지고, 주작모의 손목에 낀 옥환은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현무자의 채찍은 끝이 몇 갈래로 갈라져 꿈틀대고, 호장의 손에 감긴 흰 천은 백은처럼 반들거린다.
쿵.
다시 거구를 띄워 올린 황웅의 좌측에 용선생, 우측에 호장, 머리 위로 주작모가 뛰어오르고, 다리 사이로 현무자가 바짝 엎드린 자세.
오방신수의 이름처럼 방위를 정하더니,
황웅의 거대한 팔다리가 간격을 무시하고 마구 내질러왔다.
콰콰콰콰.
성벽 같은 손바닥, 철퇴 같은 주먹, 기둥이 무너지는 듯한 발길질과 불덩이가 떨어지는 것 같은 머리통이 전부 무서운 경력을 쏟아낸다.
검강이든 어검이든 무엇이든 박살 낼 기세. 다섯이 한 몸이 되었다.
해원기가 급히 공력을 끌어 모으는데.
〔일인성진이랬지? 그럼 오인성진(五人成陣)은 어때?〕
불쑥 귓가를 울리는 조화부인의 전음에 손이 멈칫거렸다.
조화부인의 독자포진을 해원기가 일인성진이라고 고쳐 대답했었다.
그 대답이 고까웠던지 오방신수의 이름을 딴 다섯을 한 몸처럼 엮은 게 오인성진이라.
하필 해원기가 공력을 끌어올릴 때. 이미 간파되었어도 사람을 미혹하는 조화부인의 음성은 순간이라도 훼방을 놓았고.
광포하게 팔다리를 내지르는 황웅은 이미 십 장 안으로 가까워졌다.
다른 넷이 쏟아낸 경력이 연속해서 뭉쳐 이제는 황웅의 거구를 온통 덮을 정도. 갈수록 부푸는 이 무서운 경력이 정면으로 들이박으면 철벽이라도 깨질 터.
해원기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저 무서운 경력을 깨려면 군림검이 필요하지만, 남은 공력으로 구현이 가능할지.
따질 시간조차 없다.
두 아이를 뒤에 둔 이 자리.
왼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지고 발이 가볍게 서성인다. 검왕수도 해제되어 오로지 순수한 신왕공을 담은 철검.
천천히 원을 그리며 입술이 가볍게 벌어졌다.
“태초의 혼돈은 무엇이라 변별할 수 없나니.”
입으로 검결을 읊조리고, 춤추듯 움직이며 검을 놀린다.
음검병시(吟劍並施)는 고죽의 비전.
천손검법 제일초 홍몽무변이 시작되었다.
고오오오.
얇은 쇠꼬챙이 하나가 원을 그리건만, 주위가 낮게 울어대고.
오인성진으로 다가들던 황웅의 거구가 뭐에 걸린 것처럼 비틀거렸다. 눈에 띄게 느려진 속도, 무섭게 부풀던 경력까지 움찔거린다.
바람 한 줄기 없으면서 어지럽게 회오리치는 공간.
“이, 이게 무슨?”
상하좌우로 네 명의 힘을 받는 황웅이 자신의 거구가 옥죄는 느낌에 놀란 소리를 냈다.
용선생과 호장의 손은 양어깨에, 주작모는 목 뒤, 현무자는 허리 뒤쪽에 손을 붙인 채.
자신의 철골웅장과 동근쌍퇴(銅筋雙腿)에 여전히 무지막지한 힘이 깃들건만.
“왜 사면황제진(四面黃帝陣)이?”
갑갑하게 옥죄어 엉뚱하게 비틀리는 감각에,
오인성진의 이름까지 채신머리없는 입에서 새어 나온다.
게다가,
츠츠츠츠츠.
자신의 거구를 뒤덮을 정도로 모인 경력이 뭐에 깎여나가는 듯 줄어드니.
더는 나아갈 수가 없는 지경.
황웅이 급하게 기합을 지르며 모았던 경력을 그대로 내쳤다.
“우압!”
와릉.
산더미 같은 경력이 조여드는 공간을 억지로 찢는 굉음.
사면황제진이 절로 바닥에 내려서고 주변의 어둠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서,
해원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원을 그리는 철검에 걸리는 막대한 힘. 손목이 시큰하고 발이 무거워진다.
아무리 공력이 소모되었어도 순수한 신왕공의 천손검법이거늘. 홍몽무변을 버티는 힘이라니.
이를 악물며 두 발을 엇갈렸다.
다음 검결을 읊을 셈.
그런데.
정면에 집중했던 해원기가 순간적으로 등 뒤의 미약한 기척을 느꼈다.
쐐액.
동강이 하늘에서 유성처럼 떨어지는 소음에.
해원기가 곧장 몸을 비틀며 두 팔을 떨쳤고.
퍼펑!
앞뒤에서 동시에 터져나가는 땅거죽. 분수처럼 치솟는 흙덩이 사이로,
“으음.”
기어이 해원기가 짧은 신음을 흘리며 전신을 떨었다.
쏴아아.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비. 솟구쳤던 흙덩이가 거꾸로 쏟아지고, 그 흙비를 막듯이 기다란 두 날개를 펼친 채 바닥에 널브러진 동강.
해원기가 대우신장을 내친 왼손을 든 채 뒤쪽을 노려보았다.
십여 장 밖, 그곳만 소나기가 화려한 노을빛. 노을빛 비가 내리는가.
그건 가루가 된 하피가 비를 타고 떨어지기 때문이다.
기척도 없이 암습했던 조화부인의 주관이 신경질적으로 흔들린다.
“어디 미물이 감히. 대체 장영비금(帳影飛錦)을 어떻게 알아채고…….”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언제 해원기의 뒤에 이르렀는지.
순간적으로 미약한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면, 동강이 몸을 던져 막아내지 않았다면 여지없이 암습에 당했을 것이다.
해원기가 속이 울렁거려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데,
조화부인의 짜증 섞인 말은 엉뚱한 고함에 끊겼다.
“해 형!”
화악.
어두운 밤에 소나기까지 쏟아져 캄캄한 사방, 홀연히 맑은 빛 하나가 피어오르더니 해원기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온다.
그게 생화(生花)처럼 정교하게 빚은 한 송이 하화(荷花)란 걸 알아보기 전에,
해원기의 굳었던 얼굴이 어색하게 풀어졌다.
소나기 속에서 맑은 빛으로 달려오는 이. 자신을 목청껏 부른 낭랑한 목소리.
오소민이다.
절령제구(節令第九) 망종(芒種)
여름의 세 번째 절기. 망(芒)은 뾰족한 까끄라기가 있는 작물을 가리키니, 벼와 기장 따위의 곡식이요. 종(種)은 그 씨나 심는 걸 의미한다. 이때가 되면 온도가 크게 오르고 비가 충분히 내리는 고로 오곡을 심기에 적합해서, 농가에선 가장 바쁜 시기가 된다.
더운 여름, 쏟아지는 비를 감수하며 곡식을 심느라 정신이 없는 판이라. 시골에선 아예 망종(忙種)이라고 쉴 겨를도 없이 분망함을 드러내기도.
어째 그리 조급해하는가.
이 시기를 놓쳤다가는 오곡이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벼는 땅에 붙지 못하고, 기장은 말라서 썩어버리니 말이다.
더위가 과하면 들불이 일고, 비가 지나치면 홍수가 나는 법.
이 절기를 지나치면 곡식의 씨가 다 죽어 소용이 없기에,
망종은 또 망종(亡種)으로 불러 경계함을 잊지 말아야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