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취우중봉(驟雨重逢) (3)
영금(靈禽)은 함부로 울지 않는다.
‘영’이란 글자가 이미 통령(通靈)을 의미해서 굳이 울지 않아도 뜻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동강이 울었다는 건 어지간히 위험한 상황.
신화검형이 냅다 집어던진 검처럼 눈 깜짝할 새에 수십 장을 가로지르다가,
해원기가 황급히 어깨를 뒤집었다.
인광과 수진을 남겨둔 바위는 본래 오십여 장 밖, 그런데 삼십 장도 되기 전에 멈춰야 했다. 공중을 새까맣게 덮은 점.
어둠 때문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무수한 점 가운데 동강이 거칠게 날개를 휘젓고,
착착착착.
체로 치는 것 같은 소리와 더불어 그 점들이 어지럽게 휘돈다.
‘탄환(彈丸)?’
그 점이 콩알만 한 쇠 구슬, 손가락이나 교묘한 기계로 퉁겨내는 탄환이란 걸 확인한 해원기가 양팔을 풍차처럼 휘둘렸다.
극히 작아서 어둠 속에서 판별하기 어렵고, 숫자도 한 사람이 퉁겨냈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많으며, 그 가운데 거칠게 펄럭이는 게 바로 동강.
대우신장으로 밀어낼 수 없기에 양손의 검왕수를 연달아 이지무성으로 이어 붙였다.
덩굴처럼 뻗는 검기가 걸리는 탄환을 전부 뿌리치는데.
차차차착.
수십 개의 탄환이 밀려나긴커녕 자기들끼리 부딪히면서 거꾸로 검기를 타고 되돌아온다.
일단 동강 주위를 정리하려던 해원기가 놀란 듯 손을 멈추고 지면으로 뚝 떨어졌다.
신화검형의 무서운 속도나 풍차처럼 휘둘렀던 두 팔의 기세를 다 잃어버려서 겁이 나 피하는 것처럼.
그러나 바닥을 사뿐히 딛는 발에선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녹아버린 양쪽 소매와 찢긴 바짓가랑이가 부끄러운지 냉큼 웅크리기까지 하지만, 두 눈의 동시안은 주위를 빈틈없이 살펴서.
오른쪽의 움푹한 도랑에 인광과 수진이, 그 앞 십여 장에 낯선 인영 두 개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삐잇.
동강이 매정하게 저 혼자 남겨 두냐고 욕하는 걸 들으면서도,
해원기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체로 치는 것 같은 소리가 전부 이 탄환끼리 맞부딪쳐서 났으며, 그건 낯선 인영 두 개 중의 뚱뚱한 자가 장난하듯 놀려대는 손짓 때문이다.
배가 남산만큼 솟아서 넉넉한 흑의 장포도 오히려 꽉 끼어 보이는 초로의 인물. 통통한 손가락 열 개를 공중에서 연주하듯 놀리면서 연신 옆을 보며 히죽거리고,
그 옆에는 머리에 커다란 흰 수건을 두르고 짧은 백색 경장을 걸친 중년인. 딱 벌어진 어깨며 두꺼운 팔다리가 힘깨나 쓰게 생겼고, 손에도 어른 허벅지 두께의 투박한 몽둥이를 든 채 잔뜩 짜증 난 표정이다.
“현무자(玄武子), 지금이 장난감 찾을 땐가? 부인께서…….”
“잠깐이면 된다고. 이 꼬맹이들 수상하잖아? 더구나 이 독수린 보기 드문 영물이라고. 황웅이 먼저 갔으니까 우린 요것들을. 에?”
지껄이던 둘이 말을 멈추고 깜짝 놀란 듯 동시에 해원기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말로 하면 긴 시간이지만, 해원기가 이지무성을 해제하고 내려선 직후.
백건(白巾)을 두른 중년인이 당장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어쩐지 소리가 섞이더니. 오늘의 이 급한 수행(隨行)은 아무래도 네놈 탓 같구나.”
삭막한 음성에 찍어 누르는 듯한 말투인데.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손에 든 투박한 몽둥이를 급하게 들어야만 했다.
투웅.
거센 충격에 되레 두 걸음이나 밀려난 중년인. 이 뜻밖의 광경에 초로의 인물이 눈을 둥그렇게 떴고, 공중에 놀려대던 열 손가락도 저절로 멈추었다.
백건을 두른 중년인이 이렇게 밀려나는 걸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생각을 되새길 틈조차 없다.
현무자라 불린 초로의 인물 또한 남산만큼 솟은 배를 안은 채 몸을 뒤집어야만 했다.
뚱뚱한 체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신법, 제자리에서 퍼뜩 뒤집힌 등판에서 불똥이 마구 튄다.
채채챙.
꽉 낀 흑의 장포가 몇 군데나 터지지만, 울린 건 매서운 쇳소리.
훌떡 제비를 넘어 백건의 중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촤르르르르.
벌떼처럼 그 앞으로 모여드는 무수한 탄환들.
연달아 발검제형을 날렸던 해원기가 오른쪽으로 미끄러졌다.
머리통이 깨졌는지 온 얼굴에 피칠을 한 인광은 정신을 잃은 채 뒹굴고, 그 앞을 지키듯 주저앉은 수진 역시 팔다리 하나씩은 부러진 듯.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입가를 타고 흐르는 핏물.
두 아이 모두 심한 외상뿐 아니라 내부까지 흔들린 모습이다.
“쿨럭, 해, 해 대협…….”
“이 자리에서 꼼짝 말고 있어라.”
억지로 꺼내려던 말이 바로 잘린 수진이 멍하니 눈만 껌뻑였다.
제대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해원기의 등.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기엔 아직 어린 수진이라도 이 넓은 등이야말로 유일하게 기댈 구원. 해원기가 구하러 왔다는 걸 깨닫고 울음이 터질 지경이지만,
더는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엄격한 척해도 언제나 너그럽고 따뜻하게 느꼈는데.
지금 눈에 들어오는 등은 다른 사람 같고,
툭.
그 등 위에 열십자로 엮은 가는 끈이 저절로 끊겨나간다.
가슴팍에 판과를 매달기 위해 두 가닥으로 허리에 묶어놓았던 끈.
저게 왜 끊어지지?
그런 생각보다 소름이 먼저 돋았다.
탄환을 다룬 자는 현무자라고 불렸다.
동강을 괴롭히고 해원기의 이지무성까지 타고 넘으려던 탄환의 개수는 물경 백여 개. 발검제형을 막은 등판에도 커다란 쇠 구슬이 갑옷처럼 촘촘히 박힌 걸 보았고, 몽둥이로 막아낸 자는 백건에 백색 경장이니 백호(白虎)려나.
과연.
“호장(虎將), 이, 이게 뭐. 검기?”
당황한 현무자가 백건의 중년인에게 건네는 말이 들리지만.
해원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가슴의 판과를 두 손 사이에 끼웠다.
삐잇.
탄환에서 풀려난 동강의 불평 섞인 울음이 귀를 스치지만,
역시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는 표정.
〔시키는 대로 익선풍(翼旋風)을 날리기만 해!〕
의념으로 꾸짖자 동강도 기가 죽었는지 끽소리 없이 날개만 힘차게 젓는다.
후와아앙.
동강이 치솟으며 쏟아낸 바람이 하늘에서부터 회오리치면서,
막 자세를 되찾던 현무자와 호장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현무자가 거두어들였던 탄환을 뿌리고, 호장이 몽둥이를 맹렬히 휘두르는 건 거의 본능적인 반응.
펑!
익선풍이 단번에 흩어지며 흙먼지가 뽀얗게 일고, 무수한 탄환이 또 흙먼지 속에서 공중으로 뿜어졌다.
다시 한 번 동강을 옭아맬 기세.
동강의 익선풍은 기껏 잠깐의 시간과 흙먼지밖에 얻은 게 없지만.
해원기에겐 그 잠깐으로 충분했다.
과거의 구란와자도, 지금의 수차제도.
처음에 전부 백성들이 몰려있었기에 우선 그들의 안전을 도모해야만 했다.
제탁지검의 발검제형을 아낌없이 펼쳐 장야독연을 전부 베어냈고, 뇌정결을 실은 호통으로 군중들을 놀라게 해 쫓아내느라.
어쩔 수 없이 선기(先機)를 뺏겼다.
물론 선기를 뺏겼다고 승기(勝機)를 잃는 건 아니지만, 승패보다는 무고한 사상(死傷)이 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구란와자 때는 다행히 별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증명단도, 당령과 황보관도 다 탄탄한 무공을 지녔기에.
그런데 인광과 수진은. 백여 년 전의 성승과 도봉의 맥을 이었다 해도 한참 미숙한 아이들이다.
상대는 자신의 수하도 하찮은 도구처럼 쓰고 내다 버리는 악독한 자들.
생전 처음으로 노기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쾌체 일을 하면서 굳이 붕대로 봉했던 검왕수. 아니, 맨손으로 검을 대신하는 검왕수 자체가 본디 살생을 저어하는 심성.
현무자와 호장의 실력이 용선생이나 주작모보다 뛰어난 황웅과 비슷해 보였으나,
그런 이유로 판과를 양손 사이에 끼운 게 아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스스스.
오른손의 오행제림에 뇌정결이 더해져 쇠를 녹여 두드리고,
왼손의 오귀전륜에 팔풍결이 스며들어 뜨거워진 쇠를 단단히 식힌다.
동강의 익선풍이 흙먼지로 흩어지는 잠깐의 시간, 해원기의 양손이 엇갈려 벌어지면서.
판과가 검으로 화했다.
너비가 일 촌, 길이가 이 척이 조금 넘어 얇은 쇠꼬챙이와 다름없는 모양이지만, 분명히 한 자루 철검.
삼매마려(三昧磨礪)의 철검이 출현하기 무섭게 뻗었다.
한 줄기 뾰족한 검기라면.
호장이 투박한 몽둥이를 빙글 돌렸다. 처음의 발검제형에 두 걸음이나 물러난 수모를 씻으려고 충분히 끌어올린 힘.
팍.
한 줄기 검기 정도야 간단히 깨뜨릴 수 있지만,
그게 두 줄기, 네 줄기, 여덟 줄기로 바뀌자 몽둥이가 풍차처럼 돌아야 했다.
파파파파파.
거듭되는 검기는 호장만 노린 게 아니다. 곁에 선 현무자도 뚱뚱한 몸을 빠르게 흔들며 두 팔을 헤엄치듯 흔들었다. 동강을 노리고 솟구쳤던 백여 개의 탄환이 폭포처럼 쏟아지는데,
어느새 서른여섯 줄기로 늘어난 검기.
차착, 따닥, 키릭.
아까와 달리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어지럽다.
탄환이 서로 부딪치며 검기를 따라갈 틈이 없다.
탄환끼리 엉기고, 깎이고, 부서지는 판.
“이이잇.”
“어, 어떻게.”
용을 쓰는 호장과 말을 더듬는 현무자 모두 안색이 허옇게 질리는 건,
검기가 순간적으로 일흔두 개로 변했기 때문이다.
또렷하게 떠오른 일흔두 개의 형상, 그건 저마다 깎아지른 위용을 뽐내는 산봉우리! 그저 무수히 뻗는 예리한 검기가 아니라, 이미 빛을 머금은 강기다.
번갯불처럼 빠르면서 시야를 전부 뒤덮는 검봉(劍峰).
콰쾅!
“크억!”
“우에엑.”
호장이 몽둥이를 껴안은 채 엉덩방아를 찧고, 현무자가 미친 듯이 몸부림치다 나가떨어졌다.
얇은 쇠꼬챙이 하나에.
호장의 투박한 몽둥이는 썩은 무처럼 허물어지고, 현무자의 불룩 솟은 배는 대패로 민 듯 깎였다.
웬만한 쇠보다 단단하다는 철목(鐵木)으로 만든 몽둥이요, 수많은 탄환을 몸에 지니기 위해 뚱뚱한 허리에 매단 복대거늘.
일흔두 개의 검봉에 형편없이 망가졌다.
병기에 내력을 실을 수 있는 고수일수록 병기가 상했을 때는 심한 내상을 입는 법.
호장과 현무자 모두 창백한 얼굴로 팔을 벌벌 떠는데.
해원기는 다음 수를 내지 않고 도리어 철검을 거둔다. 상대의 불쌍한(?) 몰골에 평소의 후한 인정이 또 일어났나?
그러나 치켜뜬 눈매의 굳은 표정, 뻣뻣하게 일어선 머리칼.
시선을 홱 돌리며 철검을 쥔 오른손을 거칠게 떨치자.
슈와아아앙.
삼매마려로 즉석에서 만든 철검이다. 손등을 덮는 호수(護手)도, 가죽 끈을 감은 손잡이도 없는 길쭉한 쇠꼬챙이가 맹렬히 회전하며 반대쪽을 덮쳤다.
어둠을 찢는 광환.
세 개의 크고 작은 인영이 이 광환을 막으려 한꺼번에 손을 쓰고,
용선생의 먹물과 주작모의 화염을 이끈 거대한 철골웅장이 공중을 뒤덮는다.
콰앙!
엄청난 폭음.
“으음.”
나직한 신음이 새어 나오는 중에도 셋이 현무자 곁으로 훌훌 내려섰다.
해원기의 정면에 늘어선 다섯.
용선생, 주작모, 황웅, 현무자, 호장. 오방신수(五方神獸)의 이름을 차용한 자들이 전부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