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취우중봉(驟雨重逢) (2)
“물러서라!”
열 명의 복면인이 밀려나자마자 용선생이 호통을 치며 달려들었다.
내상을 입었어도 정신없이 휘두르는 판관필 끝에 먹물처럼 번지는 검은 기운. 첩폭운필법의 기묘한 움직임만이 아니다.
수레 거(車) 자가 세 번 어울리자 고막을 찢는 소음이 터졌다.
후웅.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귀를 막고 엎어질 소음. 게다가 거친 파도가 때리는 듯한 충격까지.
그러나 해원기는 꿈쩍도 하지 않고,
여전히 내딛는 걸음과 함께 손 위의 채광이 벌떡 일어선다.
땅!
“크윽.”
끝이 뭉개졌던 판관필이 두 동강 나고, 어떻게든 참으려고 악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과 핏물이 같이 새어 나오고.
용선생이 어깨를 떨며 한쪽 무릎을 꿇는데.
화르륵.
해원기의 정면에 불길이 확 일어났다. 삽시간에 어둠을 태우는 화염이 좌르르 퍼지면서 시야를 가리는 시커먼 연기. 숨이 콱 막힐 것 같다.
이렇게 큰불이 대체 어디서 갑자기 일어났는지.
그래도 해원기는 발을 옮겼다.
군림검이 또 한 번 뒤집히며 찬란한 광채를 토하자.
퍽.
불길과 연기가 씻긴 듯 걷히고, 주작모가 조각난 괴장을 껴안은 채 엉덩방아를 찧는 광경.
용선생의 강력한 굉자결(轟字訣)도, 주작모의 신기한 환술도.
오행제림을 품은 군림검 앞에선 헛된 수작일 뿐. 해원기의 걸음조차 멈추지 못했으나.
시야가 트인 정면을 보던 해원기의 미간이 좁아졌다.
열 명의 복면인, 용선생과 주작모. 전부 무너졌어도 잠깐의 시간은 번 셈이요,
그 짧은 시간이 조화부인에겐 대단히 유용했던가.
사라라라라.
날개처럼 펼쳤던 하피가 아예 머리 위에 한 치쯤 떠올라 너울거리고,
그 하피에서, 아니, 조화부인의 주관에서부터 그 하피를 타고 주변으로 퍼지는 괴이한 안개.
어둠에 섞이긴 했어도 짙은 잿빛 안개가 몽롱하게 수십 장 넓이를 채워간다.
그러면서.
돌연 사방에서 전해지는 기척에 해원기의 눈썹이 확 올라붙었다.
하나둘이 아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수십 개의 기척이,
해원기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잠심침령과 동시안은 싸움 중에 항시 운용한다.
신왕공에 풍뢰지력, 그리고 검왕수로 십대검상을 뽑아 들었으니 의식하지 않아도 기권(氣圈)이 이루어진다.
주위에 새로운 적이 접근하는 걸 모를 수 없거늘.
불현듯 나타난 기척, 게다가 거의 백에 가까운 숫자가 한꺼번에 해원기를 노리고 덮친다.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해원기는 기척을 느낀 순간에 한쪽 다리를 축으로 빙글 돌았다.
반응은 바람과 같고, 반격은 벼락이 치듯.
위이이이잉.
찬란한 빛이 해원기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울부짖는다.
군림어검의 광환 앞에,
콰자작.
“으아악.”
“쿠엑.”
온갖 병기가 썩은 무처럼 쪼개지고, 팔다리가 꺾이거나 허리와 어깨가 부러진 자들이 합창하듯 비명을 내지르는데.
상대를 확인하던 해원기의 표정이 굳어졌다.
황의에 노란 복면. 구구염양진을 이루었던 여든한 명의 구구황웅.
신마공무에 의해 나동그라졌던 자들이 어떻게 멀쩡해졌는지. 아니, 멀쩡해지는 걸 넘어서서 고꾸라지는 절반을 방패 삼아 내던지며 마구 병기를 내지르는 나머지 절반은 사람 같지도 않다. 분명히 충격으로 혼절한 걸 확인했었는데.
비명을 지르는 동료를 아무렇게나 휘두르고, 이빨을 드러내며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모습에는.
동료라는 의식도, 자신도 똑같은 꼴이 된다는 두려움조차 없다.
광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조수가 밀려들 듯 왈칵 덮쳐드는 복면인들은 전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
한두 명이 아닌 수십 명이 동귀어진을 노린단 말인가.
축으로 삼은 다리를 구부리며 왼손이 오른손을 덮어 곧장 땅바닥을 내리쳤다.
군림검이 광환의 형태 그대로 지면을 파고들고,
콰콰콰콰.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솟구친다.
거북의 등껍질 같이 갈라지는 지면, 그 사이로 치솟는 백여 개의 검편(劍片).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이 반발하면서 순식간에 이루어진 검림소연이다.
땅에서 하늘로 뻗는 검의 숲이 구구황웅 전부를 꿰뚫었다.
광기에 젖은 나머지가 먼저 당한 절반보다 더 큰 손해를 볼 터. 덮쳐들던 자세에서 벼락을 맞은 것처럼 퍽퍽 무너지는데.
검의 숲을 억지로 헤치고 끼어든 자들이 또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퍼퍼퍼퍼펑.
폭죽처럼 연이은 폭발이 해원기에게 모여들고,
부서진 뼛조각과 찢긴 살점이 핏물을 휘몰아 쏟아졌다.
마지막까지 조화부인을 지켰던 열 명. 권장지조퇴와 검도창편부를 펼쳤던 자들이 화약으로 만든 육신처럼 터져나간다.
원래 기민한 신법과 교묘한 배합을 보였던 자들이다.
꼼짝없이 폭발에 휘말린 해원기로선 그저 검림소연의 기세를 타고 공중으로 피하는 수밖에.
몸에 두른 검왕법신을 강화하면서 급하게 땅을 박찼다.
팟.
검과 같은 신형이 단숨에 삼 장 높이로 치솟았다.
오른손에 오행제림, 왼손에 오귀전륜. 상반된 능력을 함께 운용하면 전신은 보이지 않는 검기를 갑옷으로 걸친다.
소위 검기영화조(劍氣靈化罩)니 의검지경(衣劍之境)이라고 하는 상태요, 이 상태에서 검강과 어검을 자유자재로 펼치기에 마침내 검왕법신이란 이름을 얻었다.
맨손으로 검기를 발하는 수법. 사부가 창안한 검형수를 검왕수로 명명한 이유요, 그 호신의 효과는 용선생의 판관필을 뭉갤 정도.
그런데도 양쪽 소매가 촛농처럼 녹아버렸고, 바짓가랑이가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핏물은 끓는 기름 같고, 살점은 벌처럼 쏘며, 뼛조각은 뱀처럼 물어댄다.
일부분이지만 검왕법신을 뚫을 줄이야.
경악을 금치 못하던 해원기의 눈이 더욱 커졌다.
삼 장 높이의 공중.
좌우에는 두 손을 활짝 편 용선생과 주작모, 정면에는 깍지를 낀 채 합장한 조화부인이 떠오르고.
삼각형의 중심에 처한 해원기의 머리 위쪽에는 하피가 활짝 펼쳐졌으니.
대경실색할 노릇. 미리 해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화부인의 반쯤 감긴 눈이 번쩍 뜨이면서,
“멸(滅)!”
매서운 교갈 한 소리에 용선생과 주작모의 손에서 엄청난 장력이 튀어나왔다.
둑이 무너지듯 밀려드는 먹물과 들불처럼 번지는 화염.
진재실학이든 가공환술이든 전신에 전해지는 압력과 감각은 진짜다.
끈적거리며 휘감는 무거운 압력, 아릿하게 파고드는 불쾌한 느낌. 게다가 조화부인의 눈이 바로 위에서 흘기는 듯해서.
손끝 하나 까딱거리지 못하겠다.
‘무, 무슨 수작을……!’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려던 해원기가 문득 이를 악물었다.
지끈.
두통이 날 정도로 머릿속을 울려대는 경종. 신왕공의 상상지가 흐려지던 잠심침령을 두들겨 깨우고, 동시안이 휘황한 신광을 뿌린다.
뻣뻣해진 어깨가 삐꺽거리며 기울고, 굳어버린 허리가 억지로 비틀리며, 꼬이던 다리가 공중에서 허우적댄다.
참으로 어설프고 어정쩡한 모습이라 마치 사람들 웃기려고 광대가 바보 춤을 추는 것 같은데.
휘이잉.
찢긴 바짓가랑이에서 돌풍이 일고, 드러난 팔뚝에서 번개가 솟구쳤다.
용선생의 먹물과 주작모의 화염은 무시한 채 번갯불이 거꾸로 뒤집혀 조화부인에게 떨어진다.
조화부인도 깍지 낀 합장을 풀 생각은 없는지 고운 눈매만 일그러뜨리고,
그 어깨 위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거대한 손바닥 두 개.
쾅!
벽력같은 굉음 속에,
해원기가 이십 장이나 날아 떨어졌다.
와직.
중심을 잡는 발밑에서 충격으로 부서지는 나뭇조각. 뒤집힌 수레의 파편이 낭자한 곳까지 밀려났다.
우르르르.
거듭된 격돌에 놀랐는가. 캄캄한 하늘 위에서 뒤늦은 우레가 아련하게 울어댄다.
창백해진 안색. 몸에 걸친 흑의 경장은 어깨까지 터져나가 민소매로 변했고 바짓가랑이 한쪽은 아예 누더기가 되었다.
해원기가 바위처럼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노려보았다.
조금 전까지 싸웠던 자리는 폭발한 시체로 뒤덮여 참혹하기 그지없고, 눈에 들어오는 건 조화부인을 비롯한 네 명의 그림자뿐.
처음 겪는 경험(驚險)에 흉한 몰골이 되었지만, 해원기의 눈빛은 더욱 환하게 타올랐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헐떡거리는 용선생과 주작모 사이에 조화부인이 오만상을 쓰고, 바로 그 뒤에는 엄청난 체구가 두 팔을 벌린 채 흔들어댄다.
구 척이 넘어 보이는 키에 산맥처럼 벌어진 어깨, 보통사람의 서너 배는 될 듯한 덩치가 도저히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고.
산발한 머리칼과 몸에 걸친 짐승 가죽 때문에 얼핏 곰으로 착각할 외모.
“손바닥, 손바닥이.”
웅웅거리는 목소리도 곰이 울부짖듯.
조화부인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 거대한 팔뚝을 찰싹 때렸다.
“철골웅장(鐵骨熊掌)이 무슨 엄살이야? 어서 용선생과 주작모나 챙겨.”
어린애 꾸짖듯 날 선 목소리에 거구가 산발한 머리칼을 숙이더니 얼른 두 손을 용선생과 주작모에게 내미는데.
시커먼 그 손바닥이 얼마나 큰지 사람 하나쯤 한 손으로 쥘 만하다.
철골웅장이라는 그 손이 바로 해원기의 번개를 막아냈다.
해원기의 날카로운 시선이 거구를 훑으면서 조화부인의 후원이 이르렀음을 짐작했다.
청룡과 주작이 있으니 이 거구가 황웅이겠지.
그런 해원기를 눈싸움하듯 쏘아보는 조화부인의 입이 또 열렸다.
“정말 대단하구나. 풍뢰진이 아니라 기권을 이루었다니. 더구나 검기를 전신에 두르고 어검술(馭劍術)도 펼칠 수 있다? 화산검협도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 텐데. 그리고…….”
이제까지의 느긋함과는 달리 쌀쌀맞은 음성. 신광이 어린 해원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두 눈도 뱀처럼 차갑고.
“아암귀명진을 무너뜨렸던 그 괴상한 동작. 진환용융(眞幻鎔融)의 멸정법(滅頂法)은 파진운보 따위론 깨지지 않아. 도대체 그 웃기는 춤사위는 뭐냐?”
뾰족한 물음엔 거친 신경질과 살기까지 담겼다.
어설픈 반선진이나 아암귀명진은 결계진에 속하기에 해원기가 파진운보를 응용했으리라 여겼으나.
소위 진환용융의 멸정법이란 것은 결계진을 뛰어넘는 경지. 자신이 알아보지 못하는 게 있다는 걸 밝히려니 속이 뒤집히나.
해원기의 신광이 얼핏 깜빡였다.
생소한 명칭이지만 ‘진환’이라는 단어가 귀에 꽂힌다. 진실과 환상. 이 들판에서 질펀하게 벌린 수차제의 의미를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는데, 문득 이전의 구란와자의 장면이 겹쳐지면서 느껴지는 한 가지.
그러나 그보다 먼저 전면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에 노기가 치솟았다.
구구황웅이라는 아흔아홉 명. 타고난 순후한 성품 탓에 어떻게든 살생을 피하려 애썼다. 양손의 검왕수도 되도록 오행제림을 위주로.
절세오검을 오행제림으로, 해운파랑을 오귀전륜으로 쓴 건 살기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뜻이거늘.
자신의 수하를 이렇게 도구로 써서 내버리곤 눈길조차 주지 않다니.
굳게 다물었던 입이 비틀어진다.
“참으로 악독한 심보……!”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노기를 담아 한바탕 호통을 치려는데.
삐잇.
여간해선 듣기 어려운 울음소리. 귀에 들리기 전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아서.
해원기가 황급히 바닥을 내찼다.
악독한 자들에 대한 분노도, 기괴한 수차제의 의미도, 조화부인을 비롯한 상대의 정체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슈왕.
전력을 다한 신화검형이 무서운 속도로 어둠을 가른다. 상대하던 조화부인이 뒤를 노릴 것도 생각지 않고.
수십 장 밖의 바위, 인광과 수진을 남겨둔 곳에서 동강의 격한 날갯짓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