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41화 (142/410)

제36장 취우중봉(驟雨重逢) (1)

파라락.

결계진을 깨뜨리고 백 명을 일거에 무너뜨린 위력 때문일까.

거센 바람 한 줄기에 중년미부가 걸친 하피 자락이 공중에 나부끼고,

“구구염양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라. 구속(拘束)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응험팔일법결을 썼는데도 말이야. 그러려면 법결에 정통해 흐름을 선점하거나 구속의 효과를 무시할 힘이 있어야 하지. 이건 후자로 봐야겠네.”

굳었던 입술이 풀렸는지.

예의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종알거리기 시작한다.

“주작모의 팔마반경술을 중간에 저지한 건 해운파랑과 탈백만이 아니었을 거야. 아마 절세오검에서 가장 신비하다는 경혼음마(驚魂陰魔). 기척도 없이 내부로 파고드는 음경(陰勁)의 검에는 반선진이든 염양진이든 그다지 의미가 없는 걸까.”

양쪽 뺨을 덮었던 두 손을 떼며 손가락을 꼽는 동작도 앙증맞다.

“이형환위(移形換位)에 이른 용선생의 신법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어. 심지어 염양진의 수자결(收字訣)에도. 분명히 검기가 흐트러졌거늘 마치 예상한 것처럼. 그러고선 회전하며 그 기이한 쌍검을 바꿔 쥐었겠지. 기화검도 신기한데 그걸 또 바꿔 쥐다니. 기가 막혀서, 내 참.”

손을 탁 털더니 시선이 내려왔다.

“한 가지만 묻자꾸나. 너, 독자포진(獨自布陣)이 가능했니?”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눈.

상체까지 살짝 구부려 해원기를 내려다본다.

여든한 명의 복면인이 나뒹굴고, 용선생이 피를 토하는 데도.

아무 관심도 없는 태도. 그저 자신의 궁금증을 푸는 게 더 중요하단 건가.

해원기의 얼굴에 찬바람이 돌았다.

그러지 않아도 위에서 지껄이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어지간히 사람을 눈에 두지 않는다.

역한 감정이 치밀어오를 듯해서.

말없이 가만히 가슴팍의 판과를 문질렀다.

징.

가벼운 소리에 중년미부가 눈을 깜빡거리다가.

“아, 너는 누가 머리 위에서 떠드는 걸 싫어한다고 했지. 맞춰줘야 답을 들으려나? 호호호.”

뭐가 즐거운지 웃음을 터뜨리는데.

와작.

족히 삼 장 높이는 될 엄청나게 긴 사다리 네 개. 높다랗게 의자를 받쳤던 사다리가 졸지에 박살이 나서 흩어지고,

그 가운데 중년미부가 교의에 앉은 채 떨어져 내렸다.

구름을 탄 것처럼 천천히.

그야말로 천상의 선녀가 강림하는 듯한 놀라운 모습에,

해원기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주작모와 용선생 같은 고수를 거느렸으니 절대 평범할 리 없다고 여겼으나.

지금 보이는 신수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심후한 내공을 바탕으로 경공의 상승 경지에 이르렀다는 증명.

부서진 사다리 조각이 눈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중년미부의 교의가 표표히 지면에 내려앉았다.

열 명 남은 복면인이 빠르게 그 뒤에 늘어서고, 용선생과 주작모가 좌우로 모여들자.

“호호, 내 조화가 대단하다고 했었지? 그래, 이제부터 조화부인(造化夫人)이라고 부르렴. 자, 네 청을 들어주었으니까…….”

내 재주가 어때? 라고 자랑이라도 하듯 살짝 내미는 턱.

누가 내려와 달라고 청했었나?

해원기가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눈높이가 같아진 자칭 조화부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독자포진이 일인성진(一人成陣)을 말하는 것이라면.”

짝.

당장 조화부인이 손뼉을 치며,

“아항, 그렇구나. 네가 회전할 때 일었던 풍진과 검을 떨쳤을 때의 뇌성, 그거 풍뢰진(風雷陣)의 일종이지? 어쩐지 염양진과 용선생이 힘도 못 쓰고 나가떨어지더라니. 호호호.”

수수께끼를 푼 아이처럼 기뻐한다.

해원기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이제 거리는 십여 장.

고수에겐 지척이요, 거느리던 수하들도 거의 다 쓰러졌건만.

조화부인은 전혀 위축된 기색이 없이 또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주작모가 너를 천문노인의 일맥으로 추정한 것도 일리가 있어. 도대체 여기에서 진법을 몇 개나 부순 거냐? 주작모가 수렴두류진을 썼을 테고, 처음에 널브러진 애들은 철릉쇄혼관, 구구황웅이 드러나는 건 반선진도가 무너졌을 때뿐. 게다가 아암귀명진에다 구구염양진까지. 손해가 막심하지만.”

말을 잠깐 끊더니 손가락이 해원기를 향하고.

입가에 묘한 미소가 매달린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뭐가?

해원기가 눈썹을 꿈틀하자 조화부인의 가리켰던 손가락이 두 개로 펴졌다.

“네가 약왕당의 제세성수만큼 아는 게 많고, 화산파의 화산검협보다 더 대단한 검을 쓴다는 것. 진짜 골칫덩일세.”

제세성수 단목정이야말로 천문노인의 제자. 화산검협 마린(馬麟)은 명실공히 당세에 으뜸으로 꼽히는 검객이다.

소위 지극한 지혜와 검법을 함께 갖췄다는 엄청난 평가.

해원기의 굵은 눈썹이 가라앉고,

“그렇게 보였다니 감당하기 어려운 과찬이오. 그런데 골칫덩이라,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들었을까? 부인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되었소?”

“응.”

대뜸 손을 내리며 아이처럼 끄덕거리는 조화부인.

해원기도 바로 되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귀찮고 복잡하면서, 아주 흥미진진한 일. 일까?”

“번잡한데 재미있다?”

“궁금하지? 흐흥, 난 번잡한 게 딱 질색이지만, 사내들은 아주 열중하더라고. 아, 너도 사내니까 좋아하려나.”

“남자라고 다 번잡한 걸 좋아하진 않소. 한 길을 걷는 이라면 더욱.”

“오호라, 도 닦는 자들이나 할 법한 소리네. 하긴, 별종이란 게 있으니까 사내라고 다, 푸훗!”

가볍게 주고받던 대화가 끊겼다.

조화부인이 불쑥 터진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갑자기 뭐가 떠올랐는지 얼른 입을 가렸지만 들썩이는 어깨와 흔들리는 주관. 참지 않았다면 큰 폭소였을 터.

조화부인이 머리를 크게 흔들고 손을 뗐다.

“아유, 이게 무슨 추태람. 어처구니가 없어서. 에,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 그래.”

얼굴에 홍조까지 오른 게 어지간히 우스운 일이었나 보다.

스스로 민망해선지 얼른 말을 잇는데.

“무림쟁패(武林爭霸), 강호통일(江湖統一)이라나. 그렇게 말하더구나. 그 사, 내, 들이.”

일부러 ‘사내’를 강조하며 선뜻 내준 답에,

해원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무슨. 참으로 엄청난 소리면서 이렇게 간단히 밝히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건 조화부인이 아니라 해원기였다.

사내들.

무림을 쟁패하고 강호를 통일하는 번잡한 일에 열중했다고.

그렇다면 조화부인은 흥미진진한 재미 때문에 여기에 끼었다는 얘긴가.

해원기의 미간이 깊이 파였다.

무림이든 강호든 전부 사람이 어울려 사는 세상, 무공의 고하가 있고 빈부의 격차가 있긴 해도 저절로 그렇게 되었을 뿐.

그 누구도 독차지할 수는 없다.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행세하려면 남모를 혹독한 수련을 거쳐야 하고,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려면 남보다 몇 배나 노력해야 한다.

세상을 힘으로 집어삼키겠다고? 사람들을 물건처럼 수중에 넣어 지배하겠다고?

누가 감히.

지잉.

해원기의 판과가 또 한 번 울렸다.

아까와는 달리 매섭게.

성큼 앞으로 내딛는 발. 그러나 해원기는 한 발을 떼자마자 멈춰야 했다.

“시답잖은 얘긴 그 정도 하고. 넌 실로 보기 드문 인재, 뛰어난 무공에 무학 전반에 관한 대단한 지식까지 갖추었거든. 웬만하면 나한테 오지 않을래?”

조화부인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생긋 웃는다.

일어설 때의 우아한 자태며 꽃이 활짝 피는 듯한 미소가 참으로 고혹적이라.

주변 상황까지 얼핏 잊을 정도.

“네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는데.”

깜빡이지도 않는 맑은 두 눈에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고,

파초처럼 나긋하게 내미는 손을 그냥 덥석 잡고 싶다.

해원기의 인상 쓴 얼굴이 풀려나갔다.

이마의 주름도, 깊게 파였던 미간도 펴지면서 평소의 무덤덤한 표정.

그녀의 제안에 마음이 동했을까.

조화부인의 미소가 더욱 짙어지는데,

“사람을 능력으로 취하려는 것. 그 또한 잘못이오.”

나직한 목소리에 미소가 당장 이지러졌다.

해원기의 목소리가 이랬던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낮은 저음. 마치 땅속 저 멀리서 울리는 것 같고, 어쩐지 뒷머리가 서늘해지는.

무서운 음성이 이어진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쓸 만하다고 대뜸 농락하려는 그 심성이. 흠, 우선은 그 심성보다 이 미혹(迷惑)의 술법이 문제군. 반선진, 팔마반경술, 응험팔일법결 등. 알고 싶은 게 더욱 많아졌소.”

아무런 표정도 없는 해원기.

그러나 그 눈매에 전에 없이 섬찟한 신광이 흐른다.

콰당.

해원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가 뒤집혀 날아가고, 조화부인의 하피가 날개처럼 펼쳐졌다.

파팟.

그리고 다급하게 마주 잡는 두 손, 섬세한 손가락이 구부러졌다가 펴졌다가 하며 깍지를 짓는데 얼마나 빠른지 잘 보이지도 않는다.

“호가(護駕)!”

누가 외쳤는지. 조화부인이 처음으로 보이는 급한 모습과 함께 날카로운 호령 한 마디에.

복면인들이 와락 앞으로 뛰쳐나왔다.

마지막 남은 열 명. 가슴팍에 일호부터 십호까지 새겨놓은 자들이다.

호가는 지극히 존귀한 인물이 타는 가마 따위의 탈 것을 호위하라는 높임말. 간단히 ‘지켜라!’라는 명령이다.

해원기의 기이한 저음은 그리 크지 않았기에 이 명령은 조화부인의 행동이 원인.

언제나 여유만만에 상대를 아예 눈에 두지도 않는 그녀가 다급해지자,

황의 복면인 열 명이 곧장 해원기에게 짓쳐 들었다.

휘익, 휘익.

얼마나 빠른지 호가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십여 장의 거리를 뛰어넘었고,

단숨에 해원기에게 손을 뻗는데.

내지르는 주먹은 바위도 부술 듯, 그와 함께 얇은 연검이 독사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수십 개로 늘어나는 손바닥 그림자 사이로는 예리한 단도가 새파란 날을 드러낸다.

손가락 열 개가 쏘아대는 지풍, 질세라 꽂혀오는 섬뜩한 창날, 짐승의 발톱처럼 할퀴는 손 옆에는 어지럽게 흔들리는 채찍이요,

공중을 건너뛰어 내지르는 발끝을 받치는 건 손바닥만 한 도끼다.

권장지조퇴(拳掌指爪腿), 검도창편부(劍刀槍鞭斧).

맨손의 다섯과 병기를 지닌 다섯. 응축한 경력이 열 명 모두에게서 느껴지고, 그 위력이 결코 간단치 않다.

처음 철릉쇄혼관을 펼쳤던 다섯과는 천양지차. 공력이 웅후하고 배합이 절묘해서 발검제형을 막았던 용선생보다도 더 강해 보인다.

해원기의 전신이 대번에 이 공격에 뒤덮이는데.

화악.

이 지독한 공세 가운데에 누가 등을 켰는가. 빛이라고 느낀 순간,

쾅!

귀를 찢는 폭음.

“크윽.”

“켁.”

갖가지 비명과 함께 열 명의 복면인이 피를 뿌리며 밀려 나갔다. 권장지조퇴를 펼친 자들은 적어도 사지의 하나씩은 부러진 모양, 검도창편부를 쥔 자들은 자신의 병기가 부서진 파편에 상체가 엉망이 된 채.

비칠거리며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한다.

그 앞에 살아있는 것처럼 뛰노는 채광(彩光)을 손에 올린 해원기.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군림검에 어린 다부진 결의. 누가 그 앞을 막을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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