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40화 (141/410)

제35장 조화부인(造化夫人) (4)

해원기가 움직이자마자 십여 명의 복면인이 사다리 쪽으로 훌쩍 빠졌다.

가슴팍에 새긴 번호는 일호부터 십사호. 전부 열네 명. 그리고 남은 여든한 명이 같은 간격으로 원진(圓陣)을 이루고.

주작모가 미끄러지듯 다가들며 괴장을 횡으로 눕혔다.

구구황웅이란 복면인들은 그저 포위망을 유지할 뿐, 싸움은 주작모 혼자 하려는 모양이다. 용선생도 판관필을 거두고 구경하는 태도.

그렇다고 일대일 대결의 차륜전이라고 여길 수는 없지만.

오른쪽에서 오는 주작모, 해원기의 오른손이 지체 없이 움직였다.

주작모의 괴장이 은은하게 경력을 품는 것보다 더 빠르게 투명한 검기가 몰아친다.

챙.

주작모가 급히 괴장을 들어 막는데.

경쾌한 소리지만, 그렇게 예리했나? 주작모의 전신이 꿈틀하더니 대번에 둘로 쪼개졌다.

‘음?’

두 쪽이 난 게 아니다. 그럴 의도로 내친 섬전이 아니니까.

주작모가 정말 둘로 불어났고, 그 둘이 멀쩡하게 각각 괴장을 휘두르는 모습에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으나.

손은 이미 바람처럼 뒤를 쫓는다. 두 명의 주작모를 동시에 후려치는 검.

차창.

주작모 하나는 괴장을 돌려서, 또 하나는 꼿꼿하게 쳐들어 검기를 막고.

검기와 부딪치자마자 또 쪼개졌다.

넷.

짧은 괴장을 손에 든 주작모는 이제 네 명으로 늘어나 해원기의 사방을 차지했다.

처음의 섬전은 머리를 노린 찌르기였고,

다음의 추풍은 허리를 베는 참격이었다.

그런데도 주작모는 정수리에서 가랑이까지 쪼개져서 나뉘었다. 마치 수직으로 내리쳐진 것처럼.

그리고 해원기의 동시안에 비치는 넷은,

‘전부 실체. 평범한 눈속임이 아니군.’

환영(幻影) 따위라면 절대 동시안을 속일 수 없다. 참으로 괴이한 수법.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해원기의 유리검은 전혀 멈칫거리지 않았다.

맨손으로 검기를 뿜는 검왕수가 아니다.

비록 신왕공으로 이룬 검상(劍相)이지만, 일단 손에 검을 쥐면.

동정자재(動靜自在).

움직임에 꺼리는 게 있어서는 안 된다.

파파파파.

홀연히 검기가 바다처럼 펼쳐지고, 거친 파도가 겹겹이 일어선다.

사방을 점한 네 명의 주작모를 둘러보지도 않았다. 해원기의 시선은 오직 정면만 볼 뿐인데도 검기가 사방을 집어삼킬 듯 몰아치고.

주작모 넷이 급급히 괴장을 돌려댔다.

안개처럼 퍼지는 은은한 경력.

그러나.

따다다당.

어째 망치로 때린 듯한 소음이요, 넷으로 불어난 주작모가 전부 펄쩍 한 걸음 물러난다. 손에 든 괴장을 털며 진저리를 치는 모습에 해원기의 입이 살짝 열렸고.

“이건 어려웠나? 여덟으로 나뉘어야 팔마반경(八魔返景)일 텐데.”

왼손이 힘차게 일어섰다.

해운파랑검을 펼친 유리검 대신에 무겁게 사방을 누르는 본연검.

엄숙하고 정대한 검기가 먹먹하게 주작모 넷의 머리로 떨어진다.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주작모의 괴장이 선뜻 올라오지 못하는데,

“요(拗)!”

낭랑한 음성이 쨍하게 울리자 해원기가 인상을 썼다.

주위를 포위한 황의 복면인들, 구구황웅의 여든한 명이 누구에게 발목을 차인 것처럼 동시에 옆으로 쓰러지는 괴상한 행동을 취하자,

본연검이 비틀리는 느낌을 받았기에.

하지만 결계진에 대한 대비는 미리 하고 있었다.

중년미부가 외친 ‘요’라는 진결이 비틀리고 삐뚤어진다는 의미라면, 왼손의 본연검으로 능히 깨뜨릴 수 있을 터.

오귀전륜의 법식 그대로 내리쳤다.

펑!

동서남북의 넷이 한꺼번에 거꾸러졌으나.

해원기가 되레 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아야 했다.

본연검으로 내리친 건 분명히 주작모 넷의 머리이거늘, 거꾸러진 자들은 네 명의 황의 복면인.

가슴팍에 새겨진 숫자가 십육호부터 십구호까지.

해원기의 시선이 저절로 사다리 아래쪽으로 향했다.

왜 의심하지 않았을까.

처음에 쓰러뜨린 복면인 다섯이 십일호부터 십오호. 중년미부가 여든한 명으로 원진을 만들면서 사다리 아래로 빼놓은 복면인이 열넷, 그냥 일호부터 십사호까지라고 여겼다.

넷이나 번호가 겹쳤거늘 주의하지 못했다.

노란 복면에 황의를 걸쳐 워낙 똑같은 모습이라 가슴팍의 번호에는 소홀했었나.

그리고 지금 확인하는 해원기의 눈에,

사다리 아래의 복면인은 열 명뿐. 십일호부터 십사호까지라고 여긴 넷이 있던 자리엔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주작모 혼자다.

바뀌었다.

‘시해선법.’

머릿속을 스치는 단어 하나. 동해삼사에서 유래되어 인색이귀가 썼던 사람을 바꿔치기하는 술법.

아니, 자신과 남을 바꾸는 시해선법보다 더 고명한 술법이다. 이 술법을 쓴 자는 주작모가 아니니까.

높은 곳에서 중년미부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후우, 이거 정말 주작모를 뭐하고 하지 못하겠네. 섬전과 추풍이야 그렇다 쳐도 해운파랑에 탈백을 섞을 줄 누가 알겠어? 팔마반경술을 읊조리는 데에는 깜짝 놀랐다고. 게다가 마지막에 붕악을 품고서 사방으로 내리친 거, 그거도 검법이지? 아아, 응기성형(凝氣成形)이라고 해도 기화검(氣化劍)은 처음 보네. 그걸 모르니까 죄다 맨손이라고 떠들었던 게지.”

한숨까지 아름다운 음성.

해원기의 가늘어진 눈이 위를 향했다.

응기성형은 기를 응축해 형태를 만드는 경지. 당연히 그냥 기를 방출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단계요, 병기를 쓰는 자들에게 있어선 더욱 상승(上乘)에 속한다.

그러나 맨손으로 기를 응축한 검을 뽑아 드는 것. 기화검은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고, 무림에서 그런 용어를 아는 자도 극히 드물다.

중년미부는 높은 곳에서 해원기가 펼친 수를 모조리 알아보고 있었다.

마지막에 사방을 점해 내려친 사우반고(四隅反顧)가 검법이라는 것까지.

정도 오악검과 마도 절세오검에 들지 않는 고절한 검초 다섯 가지를 엮어 쓰는 흑백연주오절검(黑白聯珠五絶劍)이란 이름은 한 갑자 전에 잊혔거늘.

대명호에서 태감이 거느렸던 무경박사라는 자가 무슨 무공이든 알아본답시고 설쳤지만, 이 중년미부의 안목이야말로 진짜다.

더구나 본연검을 비틀던 진세와 시해선법을 능가하는 바꿔치기.

해원기의 눈이 차츰 빛을 발하는데.

중년미부는 주관이 흔들릴 정도로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뭔가 가물가물하네. 답답하게. 용선생이 조금 더 어울릴래? 구구염양진(九九艶陽陣)은 조화모가 대신 돌려봐. 나 생각 좀 하게.”

아예 두 손으로 뺨을 가린다.

아이들이 뭔가 궁리할 때 취하는 동작.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동작이지만,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건가.

쿵.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용선생이 해원기 앞에 떨어졌다.

발검제형을 막았을 때도 그렇지만, 참으로 빠른 신법. 그러면서도 땅을 울리는 무거운 착지다.

판관필은 본디 점혈(點穴)의 병기다.

싸우면서 상대의 전신 혈도를 찍으려면 경교하고 영활해야 하며, 질기고 음유한 내공을 익힌 자가 많다.

검도창부(劍刀槍斧)의 병기에는 거리와 무게에서 모두 열세, 적수공권(赤手空拳)의 맨손보다는 나아도 찍고 찌르는 수법으로 제한된다. 그러니 장시간 상대의 공격을 피할 훌륭한 신법과 끊임없이 붓끝에서 기를 투사할 수 있는 단단한 내공이 필수.

그러나 이 용선생에게선 육중한 기운이 넘실거려서,

팔뚝 굵기의 판관필이 붓이 아니라 몽둥이처럼 느껴진다.

“부인이 말씀하신 섬전, 추풍, 탈백, 붕악은 과거에 마도 절세오검이라 불린 희세의 검법. 그걸 해운파랑검에 섞어 쓴다? 그럴 정도의 검객이 당세에 있을 줄 몰랐군. 그런데 검을 지니지 않은 것은…….”

유학교관의 외모답게 근엄한 언사요,

말을 끌면서 판관필을 들어 놀리기 시작했다. 마치 공중에 글씨를 쓰는 것처럼 손가락으로만 판관필의 몸통을 쥐는 악필법(握筆法).

“경망인고?”

쐐액.

꾸짖음으로 말을 맺으면서 무서운 기세가 공간을 가르고. 공중에 쓴 글씨가 용수철에 퉁겨지듯 곧장 해원기의 머리와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해원기의 두 손이 반사적으로 모이면서 유리검과 본연검이 교차했다.

펑.

어깨가 흔들릴 정도로 강한 충격. 해원기의 버티고 선 발밑으로 풀썩 풍진이 일자,

용선생의 판관필이 더욱 빠르게 공간을 누볐다.

정묘한 해서(楷書)가 흥에 겨워 갈기는 초서(草書)로 바뀌는가. 붓끝이 점을 찍긴커녕 해원기의 주위로 거침없이 흘러간다.

붓을 쥐는 악필법은 다섯 손가락을 날구정부(捏鉤頂扶)의 네 가지 효용으로 쓰는 것. 엄지와 검지로 붓 허리를 붙드는 날, 중지로 감싸는 구, 무명지로 버티는 정, 소지로 받치는 부.

흰 수염이 허리까지 내려왔으니 용선생이 조금씩 상체를 구부렸다는 뜻이고, 그러면서 팔만이 아니라 손가락까지 날구정부로 움직여서 공간이 전부 그 붓끝이 그리는 형상에 뒤덮인다.

글자보다는 그림을 그린달까. 해원기를 중심으로 하는 사방 일 장이 마치 화폭으로 변하는 듯.

그러나 해원기도 그저 보고만 있진 않았다.

오히려.

유리검과 본연검의 교차를 풀면서 검기가 종횡으로 치달렸다.

투명한 유리검은 삼십삼천신마봉헌, 어스름하게 형태만 갖춘 본연검은 대천세계신마난무.

재단경위의 변식인 신마공무가 화폭을 갈기갈기 찢는다.

촤라라라라.

글씨든 그림이든. 판관필이 지나간 흔적이 모조리 지워지고,

검기가 크게 떨치려는 순간,

“구요(救拗)! 수(收)!”

주작모의 째지는 호통.

복면인들이 쓰러졌던 상체를 벌떡 세우고 크게 한 걸음 물러나 원진이 커졌다.

비틀어진 것을 바르게 하는 ‘구요’. 비틀리는 검을 버티려던 힘이 도리어 반대로 비틀리고, ‘수’라는 진결에는 떨치려던 검기가 때 이르게 끌려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에 해원기의 바로 앞까지 다다른 용선생. 과연 빠른 신법이요, 바늘 끝같이 날카로운 기운이 수십 개나 쏟아졌다.

괴상한 결계진과 어울린 치명적인 기습.

조금 전과는 다르다. 용선생은 나설 때부터 주작모와 묵계를 맺었던 듯.

그러나 그도 해원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건 보지 못했다.

기회를 노린 건 용선생만이 아니다.

해원기의 두 발이 엇갈리고 허리가 뒤집혔다.

화라락.

맹렬하게 회전하는 신형이 돌풍을 일으켰는지, 발밑에 일던 풍진이 회오리치는 게 먼저인지.

제자리에서 도는 기세가 너무 강해서일까. 양손이 부딪쳤다가 떨어지는데.

그 회오리 가운데 투명한 유리검과 어스름한 본연검이 어느 쪽 손에 들렸는지를 굳이 분간하려는 자가 있겠나.

왼손에 유리검, 오른손에 본연검. 맞바꿔 쥐었다.

신마공무가 눈에 보이지도 않게 다시 이루어지고, 단열의 검망(劍網)이 벼락같이 폭장(暴張)했다.

지척에 이른 용선생부터 훌쩍 넓어진 원진까지 뒤덮는 무수한 검. 그야말로 폭발하는 검의 그물.

꽈릉!

뇌성벽력 속에 여든한 명의 복면인이 죄 나동그라지고, 용선생이 미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사다리 근처로 밀려갔다.

머리에 썼던 충정관이 날아가서 산발이 되어버린 용선생. 떨리는 손으로 붓끝이 뭉그러진 판관필을 들다가,

“호, 호신강기(護身罡氣)? 우웩.”

왈칵 토하는 피로 늘어진 수염이 벌겋게 물든다.

해원기의 전신 혈도를 찌른 바늘 끝 같은 경기가 거꾸로 반탄 되면서 졸지에 내상을 입었다. 판관필이 분명히 몸에 닿았거늘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게 경기만이 아니라 판관필까지 뭉개는 지극한 강기 때문이란 걸 알았지만,

해원기는 두 손을 가볍게 털면서 중년미부를 바라본다.

“아흔아홉 명을 구구황웅이라고, 또 결계진을 구구염양진이라고 해서 조금 헷갈렸소. 이거 응험팔일법결(應驗八一法訣)을 응용했군. 공동파의 오랜 비전이라는. 실전된 무공을 알아보는 그 안목, 희귀한 술법을 능숙히 쓰는 그 능력. 또 팔마반경술과 첩폭운필법(帖幅運筆法)을 연성한 수하까지 두었으니 부인의 조화(造化)는 참으로 대단하오.”

오랜만에 꽤 긴 말을 하는데.

사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던 중년미부는 굳은 듯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황의 복면인 아흔아홉에 용선생과 주작모. 지금까지 멀쩡한 건 사다리 아래에 빼놓은 열 명뿐이다.

중년미부가 이곳에 서둘러 오면서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일.

주작모의 얼굴이 허옇게 질리고, 용선생이 피를 토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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