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39화 (140/410)

제35장 조화부인(造化夫人) (3)

부인(夫人)은 중년 여인에 대한 존칭이다.

사십 대의 아름다운 여인,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일단 그렇게 부를 수밖에.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이 시각에 여기에 등장한 건 아무래도 계획에 없던 일인 것 같다.

모종의 의도를 숨긴 이 화려한 수차제의 배후는 주작모일 터.

그 주작모조차 배후에서 ‘참관’한다고 했으며, 처음부터 해원기를 노리고 기다린 게 아니었다.

이렇게 차례로 더 큰 배경이 드러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해원기는 먼저 그 이유를 알고자 했다.

중년미부의 시선이 비로소 해원기에게 돌아왔다.

깊은 눈매에서 전해지는 기이한 느낌. 분명 해원기를 보는데 그 초점은 해원기 뒤쪽 먼 곳에 맺혔다.

“전에 주작모가 그런 말을 했었지. 골칫거리라고. 흠, 확실히 그 표현이 어울리네. 풍기는 기운이나 바탕, 깊이와 넓이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겠어. 그럼, 생각을 바꿔볼까? 용호방에는 아예 기대할 수 없고, 풍운책에서 실마리를…….”

“하아!”

해원기의 탄식.

혼자 조잘거리던 중년미부의 입술이 닫히고.

“똑같네. 어째 내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행동을 골라서 할까? 사람을 골칫거리니 뭐니 마음대로 부르면서.”

남을 무시하면 남도 무시한다. 그게 사람 사이의 당연한 도리.

연달아 해원기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중년미부에게, 이런 탄식과 혼잣말은 제대로 들렸는지.

초점이 스르르 바뀌었다.

“싫어하는 행동이라?”

고개를 살짝 꼬며 묻는 말에 해원기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물으면 제대로 대답해준다.

“나는 누가 위에서 떠드는 게 아주 싫다오.”

아까 주작모에게 알려주려던 말을 이제야 밝히는데, 이번에는 중년미부가 헷갈릴 차례였나.

하피 위에 다소곳이 얹었던 손 하나가 의아하게 바닥을 가리킨다.

사다리 위의 교의와 달리 자신은 지금 해원기와 같은 지면에 서 있거늘.

그 의미를 모를 수 없는 해원기가 또 혀를 찼다.

“쯧, 이건 희롱인가. 부인의 눈은 아마 하늘 꼭대기에 달렸을 텐데.”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돌리려 하자,

“이놈!”

“이 죽어 마땅한!”

대뜸 용선생과 주작모가 호통과 함께 눈을 부릅뜬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노한 모습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웃음소리에 둘 다 멈칫거려야 했다.

“호호호,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중년미부가 폭소를 터뜨렸다.

금 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것 같다는 표현이 실재하는 걸 처음 체험했다.

이렇게 듣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게 하는 웃음소리가 있을까.

게다가 하피 자락을 들어 입가를 가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천상의 교태.

해원기의 눈과 귀가 뜻밖의 호강(?)에 되돌아오자마자 중년미부가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쟁쟁.

주관의 옥돌이 웃음소리를 대신하고,

“이렇게 웃어본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 정말 사람은 생긴 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더니. 바보스러운 외모와는 달리 영민한 구석이 있구나. 그러면 그 보상으로 나도 너를 재미있게 해줘야겠다. 호호.”

몸을 홱 돌리며 하피를 크게 떨치는 순간,

번쩍.

돌연 터지는 눈부신 섬광. 해원기조차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릴 정도로 엄청난 빛이 폭발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빼려던 해원기가 문득 발에 힘을 주어 버텼다.

용선생이 발검제형을 막고, 중년미부가 등장했어도 신왕공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엉뚱한 대화 중에도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의 검왕수를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기에,

이 엄청난 빛이 아무런 폭음도 동반하지 않았고, 어떤 압력도 펼치지 않았다는 걸 즉각 감지했다.

순간적으로 가려진 시야.

지금은 어둠이 짙어질 때, 이렇게 엄청난 빛이 갑자기 출현할 수가 없다. 화탄(火彈) 따위를 쓴 것도 아니다.

손을 내리자 바로 회복되는 눈. 그러나 주위를 훑는 해원기의 눈이 급격히 일그러진다.

도로 캄캄해진 주위, 두 발로 디딘 곳도 여전히 너른 풀밭인데.

정경이 확 바뀌었다.

장대한 발검제형으로 직접 노파를 노리고 달려들면서 사다리와의 거리를 줄였었다. 비록 용선생이 막아서긴 했어도 분명 이십 장 안쪽으로 들어왔을 터.

방금까지 앞에 중년미부를 비롯해 백 명 가까운 인원이 있었거늘,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쓰러뜨린 복면인 다섯과 뒤집힌 수레까지 감쪽같이 사라졌다.

깊어가는 밤. 짙은 어둠 속에 고요한 사방, 어디가 끝인지 모를 풀밭 위에,

해원기 혼자 서있다.

‘잠심침령에 동시안을 푼 적은 없다.’

해원기의 깊게 가라앉은 눈에 비췻빛이 스쳐 지나갔다.

중년미부가 몸을 돌리는 순간에 터진 섬광. 눈을 깜짝하지도 않은 그 짧은 틈에 이런 해괴한 일이 벌어졌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멀쩡하게 보이고, 미약한 바람 소리도 들리고, 풀 내음도 맡아지고, 발밑에 밟히는 땅도 있건만.

‘오감을 가리는 게 아니라. 나만을 별개의 공간에 가두었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면서 일그러졌던 눈매가 되돌아오고, 대신 입가에 알아보기 어려운 고소가 맺혔다.

대강 어떻게 된 일인지 헤아려진다.

급작스럽게 등장했다고 여겼다. 용선생 다음에 등장한 중년미부, 주작모를 구하려고 서둘렀다고 가볍게 판단한 것부터 실수.

설사 서두른 게 맞다고 해도, 그 이후에 엉뚱한 대화로 시간을 보냈잖나.

중년미부는 용선생의 평가를 들었고, 눈으로 주변의 상황을 확인했다. 그동안 주작모가 전음으로 벌어진 일을 보고했을 수도 있으니.

해원기가 말장난에 신경 쓸 동안,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정했겠지.

이곳은 본디 술법이 펼쳐진 곳. 해원기가 벗겨낸 건 주작모가 펼친 장안술과 허술한 결계진의 몇 겹에 불과하다. 중년미부가 진짜 우두머리라면 얼마든지 바탕의 술법을 뒤집어 발동시킬 수 있었을 터.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도 싸다.’

이제야 깨닫다니 늦어도 한참 늦다. 그런 자조(自嘲)가 입맛을 쓰게 하고.

어쩐지 이 상황에서 오소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중에라도 이런 일을 알게 되면 또 한바탕 험하게 놀려대겠지.

꽤 난감한 처지가 되었지만, 해원기는 되레 더 침착해졌다.

처음 겪는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는 건 이 또한 배운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부의 가르침.

독이라면 어떤 것이든 베어버릴 수 있는 제탁지검. 그런 제탁지검을 의식해 독이 아니면서 기묘한 효과를 내는 약을 쓴 상대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 이름은 폐색오관(閉塞五官), 이름 그대로 오감을 차단하는데, 다행히 소량을 흡입해 눈만 뜨지 못하셨다고. 지금 해원기의 오감은 멀쩡하니 폐색오관은 아니다.

또 옛날에 파멸한 사교(邪敎)의 섭심대진(攝心大陣)이란 게 있었다고. 캄캄한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기척을 속여서 같은 편끼리 적으로 오인케 하며 암습을 가하는 진법. 상당히 괴이하지만, 소리가 약점이라던데. 지금 해원기는 혼자이니 섭심대진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반선천지계. 이미 주작모가 펼친 조잡한 모조품을 겪었으나. 반선천지계라면 적의 종적이 감쪽같이 사라지진 않을 터.

사부는 세상을 뒤엎을 능력을 지녔는데도 참으로 지난(至難)한 길을 걸었고, 그렇게 얻은 경험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해원기에게 남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마음이 흐트러질 리 없다.

해원기의 왼발이 비스듬히 나아가며 어깨가 들썩하고, 두 손이 박자를 맞추듯 가볍게 부딪친다.

짝, 짝.

어둠 속에서 홀로 흥이라도 난 것처럼.

여기서 갑자기 웬 춤이람.

그러나 그건 해원기가 가끔 보이던 독특한 입무와는 뭔가 달랐다.

고죽에 전하는 입무는 화락(和樂)이 자연스러워 천지와 함께 즐기는 뜻인데, 이 춤은 어쩐지 자신을 죽이고 남을 위로하는 느낌.

파진운보가 조금 깃들었는지 밟는 발이 기이하면서도 무겁다.

그런데 손뼉이 두 번 울리자마자 주위를 덮은 고요한 어둠의 한쪽이 묘하게 흐려지고,

기다렸다는 듯 해원기가 몸을 뒤집었다.

쿵.

힘차게 디딘 지유진의 경력과 함께 벼락같이 뻗는 손. 그 손이 정말 번갯불로 화해서 삽시간에 흐려진 어둠의 한구석을 꿰뚫었다.

우릉.

뇌성이 뒤늦게 울리고,

쨍!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쩌억 금이 가는 어둠.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정 맞은 얼음덩이가 쪼개지듯 열흔(裂痕)이 거미줄처럼 퍼지면서 어둠이 돌연 잿빛으로 화해 부서져 내리고,

그 뒤에 짧은 괴장(拐杖)을 세워 막은 주작모의 질겁한 표정과 구구황웅이라는 자들의 노란 복면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괴상한 술수가 깨진 이상, 해원기가 또 바보짓을 할 리 없다. 그대로 돌진해서 주작모를 칠 셈, 그러나 지유진을 펼쳤던 다리를 틀면서 옆으로 크게 돌았다.

훌쩍 내치는 다른 한 손에서 파도처럼 겹겹이 이는 경력.

펑!

판관필이 품은 힘과 마주쳐 굉음을 낸다.

주작모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에 뒤에서 덮쳐온 용선생이 눈을 치켜떴다.

“해운파랑! 오악검이라고?”

자신의 판관필을 막은 파도 같은 경력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모습. 그리고 공중에서 아름다운 음성이 곧장 그 뒤를 잇는다.

“호오, 그럼 천문노인의 일맥이면서 또 동악검종(東岳劍宗)의 후예라? 믿기 어려워.”

산산조각이 난 어둠 뒤, 진짜 밤의 어둠 속.

어느새 올라갔는지 높다란 사다리 의자에 앉은 중년미부가 턱을 괴고 바라본다.

해원기가 두 손을 가슴팍에 모았다.

처음 있던 그 자리. 뒤집힌 수레와 쓰러뜨린 다섯은 그사이 어디로 치웠는지 보이지 않고, 복면인들은 커다란 원을 그려 포위했다. 좌측에는 용선생, 우측에는 주작모.

중년미부는 정면의 사다리 의자에 앉아 흥미진진한 눈빛을 보내면서,

“아암귀명진(亞暗鬼冥陣)을 단박에 깨는 자라면 천문노인의 맥이 맞겠지만, 동악검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동악의 검으로 경옥신공(瓊玉神功)을 십성(十成)이나 익힌 왕(王) 첩형을 이길 수 있나.”

또 마음대로 떠드는 혼잣말.

그 혼잣말에 해원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암귀명진은 처음 듣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글자가 귀에 거슬렸고.

동악검종은 오악검 중 동악 태산이 마지막으로 배출한 절정의 검객. 그러나 한 갑자 전에 잊힌 인물이다. 그리고 대명호에서 제압한 동창의 첩형은 경옥 빛의 특이한 공력을 지녔었다.

중년미부야말로 진정 모든 일에 연관된 자.

확실한 단서를 찾았고, 그러기 위해선 먼저 이 국면을 장악해야 한다.

가슴에 모은 두 손이 판과를 살짝 만지곤 활짝 펼쳐졌다.

지잉.

오른손에 보일 듯 말 듯 투명한 유리검.

치링.

왼손에 굳건한 쇳덩이처럼 엉기는 본연검.

십대검상의 두 자루를 현현하자 자연스럽게 가공할 예기가 형성되고.

그 예기가 검왕법신으로 전신을 감싸자 곧장 정면으로 나아갔다.

좌측의 용선생, 우측의 주작모, 원형으로 둘러싼 구구황웅은 아예 눈에 두지도 않은 듯.

사다리 위의 중년미부를 똑바로 바라보며 걷는 해원기에게서,

위풍(威風)이 뇌정(雷霆)처럼 줄기줄기 뻗었다.

마치 제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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