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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왕춘추-138화 (139/410)

제35장 조화부인(造化夫人) (2)

노파가 오만상을 쓰고서 눈을 껌벅거린다.

처음 격돌할 때는 그저 손발을 휘두르는 평범한 권각술(拳脚術), 단지 속도가 기막히게 빠른 것뿐이더니, 상대가 다섯으로 불어나자 대번에 기이한 느낌을 흘리고. 그 느낌 때문인지 똑같은 수법인데도 위력은 몇 배나 올라갔다.

그래서 곧장 합격진의 절초를 발휘하도록 했건만.

이건 또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무엇이든 자신의 눈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자부심에 금이 가고,

해원기를 천문노인의 후예라고 여겼던 판단도 흔들렸다.

예측이 한참 빗나갔다.

수하 다섯이 어떻게 쓰러졌는지도 모르겠는데, 마지막에 해원기가 한 말에 펄쩍 뛸 만큼 놀랐다.

속이 불편함을 넘어 메슥거린다.

뭐지? 이 녀석은.

그게 불안감이란 걸 자각하지 못하고 짜증이 솟구쳐서,

“이놈, 희한한 술수로 득세했다고 잘난 체하는 것이냐! 아무것도 모르는 천방지축이 감히…….”

뾰족한 소리가 나오는데.

저벅저벅.

“기본은 사상귀원진(四象歸元陣), 그러나 연당을 바꾼 박룡금쇄, 방패와 창을 대신한 진해철산과 오구과에다 병기를 부숴서 날리고 또 지하에서 기습한다. 정통 병진(兵陣)인 사상귀원진이 암(暗)의 구결로 운용되는 건, 흠, 철릉쇄혼관(鐵菱碎魂關)이란 이름이었나.”

쓰러진 복면인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걷기 시작한 해원기.

뭔가를 따져보는 혼잣말에 노파가 귀를 쫑긋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해원기의 시선이 바닥에 낭자한 파편들을 훑고,

“이런 기특한 병기를 암기로 쓴다. 철릉쇄혼관이 가능하려면 특별한 대장간이 필요하고, 그런 대장간은 과거에 단 한 곳에만 있었지. 가까운 사이인 사천당가에 암기를 공급하던.”

말을 끊으며 고개를 드니.

노파가 의자 손잡이를 부서지라 쥐는 모습.

철릉쇄혼관이란 이름은 알 수 있다. 예측했던 대로 천문노인의 맥을 이었다면 알아볼 식견 정도는 갖췄을 테니까.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해원기의 말에.

와직.

기어이 손잡이 하나를 부숴버렸다.

“사천의 악산철장(樂山鐵莊)에. 신기하군, 백여 년 전에 당가와 함께 사라진 악산철장을 어떻게 되살렸지? 더구나 당가를 위해 창안한 철릉쇄혼관까지. 궁금한 게 적지 않다.”

“이놈!”

버럭 고함을 지르며 일어서는 통에 사다리가 휘청하는데도,

노파가 손가락을 떨며 해원기를 가리켰다.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네놈이 어떻게 악산철장을 아는…….”

어지간히 격동한 언행이지만, 갑자기 말이 끊기며 가발로 무거운 머리를 내민다.

목소리도 확 줄어들면서,

“전사(前斜), 후직(後直), 삼보돈(三步頓), 입중궁(入中宮). 파진운보(破陣運步)? 그럴 리가. 뭔지도 모를 텐.”

휘둥그레진 눈.

저벅거리며 걸어오는 해원기의 발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그만 말을 맺지 못했다.

내디딜 때는 약간 굽은 무릎에 비스듬히 나가는 발, 뒤로 밀 때는 꼿꼿하게 서고. 세 걸음 째에는 뭐에 걸린 듯 멈칫, 그러다가 정면으로 힘차게 들어선다.

주위에 널브러진 복면인을 피해 걷는 거로 여겼다. 조금 어설퍼 보이는 동작, 그러나 그게 다 의미를 지녔을 줄이야.

스스스.

미풍이 불었나. 뒤집힌 두 개의 수레 사이, 노파가 높이 앉은 사다리 아래의 어둠이 장막을 걷는 것처럼 열린다.

노파의 입이 바보처럼 벌어지고,

해원기가 한 줄로 길게 늘어선 무수한 복면인들을 보며 혀를 찼다.

“쯧, 파진운보가 통했으니 여기에 포설한 건 반선진(盤旋陣)의 일종이라는 의미. 갈수록 더 궁금해진다. 어디서 이 비결들을 얻었으며.”

사다리 밑에 늘어선 자들은 거의 백에 가까운 숫자.

전부 똑같은 복면에 가슴팍에 숫자를 수놓은 자들. 조금 전에 쓰러뜨린 십일호 들과 같은 수준이라면.

들판에서 벌인 수차제의 떠들썩한 놀자판이 간단하지 않다는 뜻이다.

해원기의 걸음이 빨라졌다.

백 명이라도 그냥 놔둘 수가 없다. 저 노파를 반드시 잡아야 이 모든 문제의 답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구란와자에 사천당가의 막내 당규가 끼어있었지만, 당령의 말로는 당규가 가출할 때 들고 나간 것은 독경의 일부분뿐.

당가가 어느 정도까지 과거의 힘을 회복했는지 몰라도 어린 당규가 철릉쇄혼관을 제대로 알 리 없다.

더구나 악산철장의 병기까지 얻어서 펼치려면 상당한 수련이 필요하다. 당규가 십 년, 이십 년 전에 가출한 것도 아닌데. 복면인들의 솜씨나 내공은 이미 꽤 높은 수준.

그리고 해원기의 검왕수를 견뎌내던 능력. 그건 복면인들의 실력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었다.

복면과 황삼까지 멀쩡했잖은가.

그 야료를 알아내려고 일부러 철릉쇄혼관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들판의 그 화려했던 축제, 그 위에 덧씌워진 건 장안법 따위의 환술이었으나 속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펼쳐져 있었다.

그것도 몇 겹이나.

술법과 진세를 함께 펼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동시안으로 밝혀낸 환술도 둔법이 섞인 것이었고, 파진운보라는 독특한 보법을 굳이 사용한 이유도 검왕수의 위력이 떨어진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

사부가 궁리 끝에 해법으로 제시한 걸음걸이는 오직 한 가지를 겨냥한 것이고,

정말 반선진이었다.

술법과 진세가 하나로 결합된 결계진(結界陣).

과거에 사부와 탁 소숙은 수십 명의 옛 망령들에 의해 이런 결계진에 갇힌 적이 있었다.

만약 동심무적(同心無敵)의 고천무쌍진(孤天無雙陣)을 두 분이 이루지 못했다면 큰 위험에 빠질 뻔했었다고.

내부에 가둔 상대의 기를 흩어버리고, 진을 펼친 자들은 되레 힘을 배가하는 괴상한 효과를 일으켰단다.

물론 지금 해원기가 처한 진은 과거에 사부와 탁 소숙이 겪었던 반선천지계(盤旋天地界)의 십분지일도 되지 않지만.

이 결계진이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다니.

내막을 밝혀야겠다.

해원기의 발밑에 또다시 풍진이 일고,

왼손이 커다랗게 그리는 원, 왼발이 힘차게 앞으로 뻗으며 오른손이 원의 가운데를 무찔렀다.

풍뢰를 담은 발검제형.

우르르르.

거대한 검형이 우레를 끌며 튀어나간다.

뒤집힌 수레도, 백 명 가까운 복면인들도 보이지 않는 듯.

노파가 높다랗게 앉은 사다리를 곧장 향하는 거창한 찌르기.

늘어서 있던 복면인들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달려들 줄은 몰랐던지 그냥 멍청히 지켜보기만 한다.

퍼펑.

뒤집힌 수레가 박살이 나도 그대로. 사다리보다 먼저 십여 명이 몸통 째 꿰뚫리게 생겼는데.

쩡!

쇠를 때리는 굉음.

발검제형을 찔러가던 해원기가 충격으로 신형을 멈췄다.

어느새 나타났는가, 복면인들 앞에 선 한 사람이 손에 든 커다란 붓 한 자루를 빙글 돌리며 인상을 쓴다.

“이건 검기였구나. 대단하다.”

해원기가 손을 풀며 미간을 좁혔다.

단번에 복면인들을 무너뜨리고 사다리를 꺾으려 했던 발검제형을 퉁겨낸 인물.

머리엔 충정관(忠靜冠)이라는 동그랗게 높은 모자를 쓰고, 전신에는 심청색(深靑色)의 넓은 의상을 걸쳤다. 흰 옷깃에 금테를 두른 허리띠, 백발에 길게 기른 흰 수염이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노인. 손에 든 팔뚝 굵기의 판관필(判官筆)이 특이하지만, 정식 관복을 차려입은 근엄한 모습이다.

큰 고을의 유학교관(儒學敎官)으로 여길 풍모. 귀까지 늘어진 흰 눈썹을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더니.

“주작모(朱雀母), 그만 내려오게. 이번엔 잘못 짚었어.”

무거운 목소리를 내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고,

휘익.

그 옆에 즉각 노파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내려섰다.

“용선생(龍先生), 어떻게 여기에? 서, 설마…….”

주작모라 불린 노파가 말을 더듬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꽤 당황한 표정. 해원기에겐 신경 쓸 겨를조차 없나 보다.

용선생이라는 노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친히 오셨네. 구구황웅(九九黃熊)이 가만히 대기하잖는가.”

주작모의 낯빛이 대번에 창백해지고, 두리번거리던 머리가 옴츠러들어 더욱 왜소해 보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역력한데.

하는 꼴을 조용히 지켜보던 해원기의 시선이 슬쩍 움직였다.

“괜찮아. 주작모의 잘못은 아니니까. 법사(法師)들은 일을 마치고 돌아갔잖아. 대법을 감독하는 게 주된 임무, 다른 건 그냥 도와주는 건데 뭐.”

맑고 높은 교성. 마치 꾀꼬리가 노래하는 것같이 아름다운 목소리가 사다리 뒤에서 들려왔다.

쟁쟁.

그리고 조그만 옥돌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멍청하게 서 있던 황의 복면인들이 신속하게 좌우로 길을 터고, 그 가운데로 늘씬하고 화려한 여인이 차분하게 걸어 나왔다.

주작모가 머리를 조아리며 뒷걸음치고, 용선생은 판관필을 내린 채 슬쩍 비켜서고.

윗사람을 대하는 예를 차린다.

머리에는 수백 개의 옥구슬로 꾸민 주관(珠冠), 양쪽으로 말아 올린 머리끝이 살짝 보이는 귀에는 황금 귀걸이, 목까지 채우는 원령(圓領)에 붉은 옷을 입었고 그 위에는 화려한 두루마기인 하피(霞帔)까지 걸쳤다.

나이는 사십 대, 길고 깊은 눈매에 오뚝한 코, 흰 피부에 붉은 입술이 보기 드문 미녀.

궁장의 주작모와 관복의 용선생을 좌우로 거느리고 나서는 옷차림도 평범하지 않아서.

소위 일품부인(一品夫人)이나 입는다는 명부관복(命婦冠服)이다.

고관대작이나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집안의 여자에게만 내리는 은전이거늘.

중년미부가 해원기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해원기라는 이름이라지? 많이 놀랐단다.”

아는 사람을 대하듯. 다정하고 친근하다.

해원기가 뭔가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주작모에 용선생, 그 복면을 뒤집어쓴 자들이 구구황웅이면 백호(白虎)와 현무(玄武)도 있겠구려.”

동의 청룡, 남의 주작, 서의 백호, 북의 현무, 그리고 중앙의 황웅. 대강 어떤 식으로 명칭을 붙였는지 추측할 수 있다.

“일은 많고 손은 부족하고, 맡은 자들이 또 소홀해서 자주 실수를 하거든. 오죽하면 내가 직접 동창의 번역 따위를 찾아야 했겠니. 그래도 저희가 모시던 행천호인데 제대로 기억하는 것들이 몇 없더라고. 대체 하북팽가를 뭐로 생각하는지. 에휴.”

그러나 중년미부는 해원기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서.

붉은 입술을 놀려 조잘대다가 한숨을 폭 내쉰다.

답답함을 하소연이라도 하는 듯, 듣는 이가 절로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하나 그 내용은 말투와 달라서.

그녀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그 배경을 얘기한다.

“또 미심쩍은 곳이 많았단다. 체면이랍시고 에둘러서 대충 넘어간 작자들 때문에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기미가 보였거든. 그런 주제에 전부 제 앞가림만 하고 귀찮은 일은 이리저리 미루니까. 하마터면 주작모가 곤욕을 치를 뻔했잖아. 용선생, 맞지?”

해원기를 상대로 말하면서도 계속 자기 할 말만.

새초롬히 옆을 쳐다보자 용선생이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맨손으로 이런 성형검기를 쓸 경지. 나중에 반룡령에게 책임을 물어야겠습니다.”

여전히 근엄하지만, 그래도 꽤 공경하는 투다.

그 대답에 해원기의 눈에 이채가 스쳐 갔다.

봉대저에게 들은 말.

반룡령은 이미 봉대저를 포함한 추종자들을 보내 해원기의 내력을 캐려고 했다.

이 중년미부의 말이 제멋대로라 무슨 의미인지는 모호해도, 용선생의 대답은 바로 해원기에 대해 정확한 정보가 부족했다는 뜻.

해원기가 가슴의 판과에 손을 올렸다.

“책임을 묻는다니 이쪽이 더 높은 것 같소. 부인은 누구고 여기서 뭘 한 거요?”

평소의 무덤덤한 표정과 말투로 돌아왔다.

술법과 진법으로 결계진을 구축한 주작모, 장대한 발검제형을 능히 퉁겨낸 용선생.

구구황웅이 그 숫자대로라면 철릉쇄혼관을 펼치다 쓰러진 다섯을 빼면 아흔넷.

그리고 이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중년미부.

어둠이 짙어지는 들판에 홀로 선 해원기가 조용히 숨을 골랐다.

쉽사리 끝날 상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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