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37화 (138/410)

제35장 조화부인(造化夫人) (1)

망루 같은 의자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던 노파가 살짝 인상을 썼다.

해원기가 꾸짖어 가리키는 손가락은 아예 보지도 못한 듯 목덜미를 긁더니,

“요것 봐라. 노신이 생각한 것과는 좀 다르다? 그러면…… 십삼, 십사호도 나가서 저놈 솜씨를 모조리 털어볼래?”

말이 끝나자 사다리 아래의 어둠 속에서 또 두 명의 복면인이 튀어나왔다.

해원기가 승세를 타고 계속 공격하지 않았던 것처럼, 처음의 세 복면인도 밀려난 후에 다시 덮쳐들지 않았다.

박룡금쇄라는 쇠사슬이 끊기고 전부 충격을 받았을 텐데도 삼 장 밖에서 묵묵히 노려보기만.

상당한 단련을 거친 자들이다.

해원기가 곧장 노파를 노리려던 생각을 접고 시선을 내렸다.

철컥.

십일호의 쇠막대가 위로 올라가며 활짝 펴졌다. 얇고 긴 철판을 촘촘하게 이어붙인 우산. 진해철산이라는 이름대로 병기의 제 모습을 드러내고.

촤르륵.

십이호의 양쪽 소매에서 수십 가닥의 쇠사슬이 흘러내린다. 한 가닥이 끊겨도 상관없다는 듯, 수십 가닥의 쇠사슬이 해초처럼 흐느적거리자,

십오호가 옆을 보며 손에 둘렀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번호 순서를 맞추는 것처럼 십이호와 십오호의 사이에 끼어드는 둘.

십삼호의 손에는 오 척이 넘는 길쭉한 장대가 들렸는데, 끝이 과(戈)처럼 갈라졌고 날이 낫처럼 휘어 마치 집게발 같은 병기.

십사오는 반면에 짧은 단봉(短棒) 두 개를 나눠 들고서 십오호와 가볍게 눈을 맞추곤 성큼 앞으로 나온다.

저벅저벅.

아까와 달리 해원기를 향해 함께 걸어오는 복면인 다섯. 보조까지 맞추어서 발소리도 하나로 들린다.

해원기가 당장 그 의미를 알아챘다.

‘호흡을 맞추고 공력을 같이 끌어올린다. 이 다섯은 본래 합격술(合擊術)을 익혔군. 그것도 상당히 괴이한.’

진해철산, 박룡금쇄, 집게발, 단봉, 맨손.

언뜻 보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그 의미를 아는 해원기가 경각심을 높였다.

진해철산과 집게발은 기병(奇兵).

우산이 본래 비를 막는 용도라고 진해철산을 그저 방어용 병기로 여길 순 없다. 온통 쇳덩이로 이루어진 우산은 그 무게만도 상당해서 파괴력을 지닌 중병기(重兵器), 게다가 스무 조각이나 되는 얇고 긴 철판이 단지 우산의 역할만 할 리 없다. 철산과 함께 연성하는 진해(震駭)라는 공력부터 대단한 진동을 일으키니까.

집게발은 소위 오구과(吳鉤戈)라는 걸까. 장창처럼 보이지만 묘용은 전혀 다르다. 잡고 끌고 당기고 찍는다. 워낙 희귀한 병기이니 그 묘용이 어디까지일지는 겪어보기 전에는 모를 일. 진해철산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공력이 덧붙었을 수 있다.

그에 반해 박룡금쇄는 기병이 아니다. 박룡금쇄의 기본은 연당(鏈鐺). 연당은 군문에서도 가르치는 정통의 기예다. 그 끝에 날카로운 날붙이를 붙이는 비성표(飛星鏢)나 쇠뭉치를 매다는 유성추(流星錘)가 다 이에 속한다. 창도, 칼도, 채찍도, 포승도 되는 참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병기요, 절세오검의 추풍으로도 그 한 가닥을 끊는 데 그쳤었다.

기병 둘에 연당 하나. 그리고 가장 단순한 단봉 두 자루와 맨손. 원공과 근공이 다 섞였으나 어떻게 어울리는가. 형태와 용법이 너무나 다른 다섯은 자칫 자기들끼리 방해할 가능성이 농후하거늘.

괴이한 합격진을 익혔을 터.

해원기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고,

‘재미있군.’

팔짱을 끼는 것처럼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춤추듯 경쾌하게.

이루어진 진(陣)을 공격하는 건 병가(兵家)의 하책(下策)이다.

설사 진의 변화를 뻔히 안다고 해도, 운용의 묘에 따라 거꾸로 역습을 당하기에 십상이요, 아예 문을 걸어 잠그면 성(城)과 같아서 세 배의 병력이라도 함락이 어렵다.

더구나 모르는 병기에 모르는 진세. 다섯 복면인이 완전히 진을 이루기 전에 치는 게 상책.

과연.

촤르르르.

십이호의 한쪽 소매에서 오십 가닥이나 되는 박룡금쇄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눈을 찌르려는 건지, 목을 조르려는 건지, 어깨와 허리를 때리려는 건지, 손과 발을 묶으려는 건지. 실로 복잡하게 얽혀 꿈틀대는 쇠사슬들이 해원기의 전면을 온통 차단한다.

해원기의 접근을 거부하는 뜻.

이미 짐작한 해원기가 전혀 속도를 늦추지 않았고, 눈은 이미 비췻빛이 깊게 가라앉은 상태. 동시(洞視)가 통찰(洞察)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십일호가 철산을 든 채 십이호의 뒤쪽으로 붕 떠가고, 십삼호가 갑자기 납작 엎드려 빠르게 우측 뒤로 돌아가며, 십사호와 십오호가 십이호의 좌우로 위치를 확 바꾸었으나.

전부 해원기의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슴팍에 모았던 두 손이 실 뭉치를 돌리듯 마주 돌았다.

치잉.

판과가 놀라서 작은 소리를 울리는 사이, 해원기가 두 손을 밖으로 잡아 뽑았다.

차차차차창.

쇳소리가 우박 때리듯. 해원기의 전신이 졸지에 무수한 불똥에 휩싸이고,

파팡!

폭발하는 흙덩이 속에 날카로운 빛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뭐가 뭔지도 모를 상황.

그러나 높은 사다리 위에 올라앉은 노파는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오는 실언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지만, 자기가 지금 보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위에서 정확히 내려다볼 수 있었기에.

해원기가 두 손을 펼치는 순간, 공간이 횡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착각이 불쑥 들었다. 아니, 복면인 다섯이 서둘러 펼치려는 진형을 뭔가가 가로로 눌러대는 느낌이었을까.

어떤 감각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오십 가닥의 박룡금쇄가 산산조각이 났고.

진해철산이 급히 막지 않았으면 십이호는 머리통을 맞고 날아갔을 것이다. 분명히 십이호의 뒤에 내려서던 십일호까지 노렸으니까.

그럼 진세에서 십일호를 지키며 선봉을 맡아야 할 십사호와 십오호는 뭘 했는가. 절반이 넘게 부서져서 단봉이 아니라 짧은 북채를 쥔 꼴이 된 십사호나 두 손을 모아 멸혼추를 펼쳐야 하는 십오호나 쏟아지는 박룡금쇄의 조각들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수한 불똥으로 화한 파편은 이미 무서운 암기였으니까.

게다가 뒤로 돌던 십삼호는 땅바닥을 뒹굴며 오구과까지 놓쳐버렸다.

이게 전부 그 이상한 감각 때문.

하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횡으로 쪼개지는 착각? 가로로 눌리는 느낌? 그게 대체 무엇이길래.

해원기는 그저 양손을 펼치는 동작밖에 한 게 없다.

뭐에 홀린 것 같은 노파가 급히 의자의 팔 받침을 내리쳤다.

“관혼겁(串魂劫)!”

그 호통에 철산 뒤에서 박룡금쇄가 좌악 솟구쳤다.

춤추듯 나아가는 해원기의 눈썹이 올라갔다.

처음에 절세오검의 세 가지로 물리쳤을 때, 앓는 소리를 낸 건 붕악의 발길질에 차인 십오호 뿐이었다.

이미 신왕공을 운용한 상태였거늘. 진해철산과 멸혼추는 밀려났어도 십일호와 십이호는 섬전과 추풍을 견뎠다.

맨손과 발로 썼어도 검법이다. 끊긴 건 박룡금쇄 한 가닥, 찔리거나 베인 곳이 없다. 황의와 복면조차.

그래서 박룡금쇄의 덩어리가 덮쳐들자 검왕수를 제대로 끌어올렸다.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으로 서로 원을 그리면서 꺼낸 두 개의 발검제형. 제형은 갖다 대어 잰다는 의미이니 상대의 진세가 이루어질 공간 전부를 먼저 검세 안에 가두었고.

똑같이 절세오검을 펼쳤다.

섬전이 오십 가닥의 박룡금쇄를 부수며 진해철산까지 뻗었고, 추풍이 단봉을 끊으면서 박룡금쇄의 파편을 쏟아 부었으며, 붕악의 오른발이 지유진까지 더해 십삼호를 짓밟았다.

더벅머리가 뻣뻣하게 일어서고, 발밑에는 풍진이 자욱하다.

풍뢰진결이 충분히 부여된 검왕수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쓰러지지 않았고, 복면과 황의 또한 멀쩡하다니.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다.

풍진을 타고 나아가는 해원기의 두 손이 교차했다.

제형이 무디다면 재단해야 한다. 치수를 재고 나면 마름질이 당연하다.

솟구치는 박룡금쇄는 퍼지는 대신에 밧줄처럼 꼬여서 공중에 떠오른 오구과를 낚아채고,

철산이 확 앞으로 달려들면서 십사호와 십오호가 우산 뒤로 모습을 숨겼다.

땅바닥을 뒹굴던 십삼호는 오구과를 놔둔 채 흙먼지 속으로 사라지는데, 그 속도가 아까보다 배나 빠르다.

정면과 좌우, 그리고 뒤를 차지하려던 조금 전의 배치와는 딴판.

진세를 포기한 게 아니다. 노파의 호통은 형태를 바꾸라는 진결(陣訣)의 구령.

정면에 하나로 죽 늘어선 복면인과 박룡금쇄로 공중에 이어진 오구과. 눈에 보이는 건 철산의 촘촘한 철판뿐이다.

무슨 암수가 숨겨졌나.

펑.

철산이 폭발하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쇳조각이 퍼지고,

파파파파파.

곧장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단봉을 내던진 십사호가 한순간에 때려낸 수십 발의 장력이 밀물처럼 쇳조각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그 가운데 숨은 멸혼추가 기척도 없이 다가오는데.

슈왕.

그전에 먼저 공중에서 떨어지는 오구과. 그대로 해원기의 머리를 찍어버릴 것 같더니,

퍽.

집게발과 자루가 저절로 부서지면서 풀리는 박룡금쇄를 따라 회오리친다.

철산의 쇳조각 하나하나, 오구과의 파편 하나하나가 전부 기이한 경력을 품어서 빠져나갈 곳이 보이지 않는다.

해원기의 두 발이 가볍게 겅중거리면서 어깨가 따라서 들썩였다.

종은 세로요, 횡은 가로. 경은 세우고 위는 펼친다.

검왕수의 두 번째 재단경위가 흥이 실린 두 손을 따라 공간을 단열하기 시작했다.

철산의 쇳조각이 백 개든, 오구과의 파편이 천 개든. 기척을 숨긴 게 멸혼추든 아니든.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콰아아아.

절벽에 부딪힌 폭포가 비말로 흩어지듯, 달군 쇠를 빙판에나 내던진 듯.

쇳조각은 가루가 되고, 파편은 먼지로 화해서 공간이 자욱한 연기로 덮인다.

그리고,

너울대던 두 손을 오므리고, 겅중거리던 두 발을 옴츠리며.

해원기가 펄쩍 뛰었다가 떨어지면서 두 팔과 두 다리를 힘차게 뻗었다.

쿵!

솨아아아.

발밑에서 피어오르던 풍진과 시야를 가리던 연기가 모조리 밀려 나가고.

살만 남은 진해철산을 내민 십일호, 그 뒤에 좌우로 벌린 십사호와 십오호, 또 그 뒤에서 박룡금쇄로 오구과를 날린 십이호가 마름모꼴을 이룬 게 선명하게 드러났다.

모두가 복면 속의 눈을 부릅떠 해원기를 노려본 채인데.

돌연.

“큭.”

십일호가 허리를 꺾으며 비틀거리고, 뒤를 이어 십사호와 십오호가 털썩 무릎을 꿇었으며, 맨 뒤의 십이호가 벌렁 나자빠졌다.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차례로. 그리고 그 옆,

“끄윽.”

숨이 막힌 듯한 소리와 함께 사라졌던 십삼호가 땅속에서 내미는 머리, 힘없이 꺾이는 복면이 왈칵 토한 피로 물들어간다.

해원기의 눈매가 조금 어두워졌지만,

복면인 다섯이 쓰러진 걸 확인하자마자 다시 노파를 향했다.

“나는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걸 싫어해.”

아까 노파에게 던진 질문의 답.

말과 함께 멀리 떨어진 사다리를 겨누고 그대로 잡아챘다.

휘익.

매서운 손짓.

방성의 사방대주루에서 삼 층의 방 하나를 통째로 뜯어 내렸던 그 수법인데.

하지만 이번에는 소매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괜한 헛손질이 민망할 상황.

그러나 머쓱할 해원기가 오히려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고.

“그래, 과연 이곳에는 미리 포설된 뭔가가 있구나. 방출하는 기경(氣勁)을 터무니없이 흘려버리는.”

노파의 안색이 홱 변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복면인 다섯을 그냥 쓰러뜨린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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