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36화 (137/410)

제34장 잡기백희(雜技百戲) (4)

화자의 위치를 감추는 무공. 공곡회음(空谷回音)은 소리를 울려서 빙빙 돌게 하고, 육합전성(六合傳聲)은 동시에 여러 방향에서 소리가 나도록 한다. 그러나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공곡회음도, 육합전성도 아닌데.

‘위치를 알 수 없다.’

횃불이 다시 켜진 순간에 지유진을 쓰려 했으나 목소리를 듣고는 생각을 접었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

구란와자에선 장야독연이란 걸 뿜었었다. 아직 들판에는 공황에 빠진 군중들이 도망가는 중, 섣불리 독연 같은 게 나왔다간 큰 피해가 난다.

‘그 구란와자의 구조도 묘한 구석이 있었지. 장안법(障眼法)의 일종인가.’

횃불과 무대가 갑자기 나타났었고, 무너진 후에야 무대 뒤에 숲이 있는 걸 발견했었다.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해원기조차 그 숲을 미리 인지하지 못했던 경험. 이 들판에 설치한 거대한 무대와 수레들도 단순하게 여길 수 없다.

더불어 상대방의 묘한 말. ‘골칫거리’라.

소림사를 떠나면서부터 봉대저에게 얻어 걸쳤던 천을 벗었다. 쾌체를 했던 본래의 모습, 평범한 용모에 가슴팍엔 판과를 매단 더벅머리 청년이다.

해원기가 양손을 가볍게 털었다.

“내가 누군지 아나 본데. 이런 짓거리를 하는 주제에 얼굴을 보일 감량은 없나?”

역시 그다지 크지 않은 음성.

동시안을 운용한 눈을 가늘게 뜬 채.

기괴한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바로 응한다.

“아, 먼저 확인은 해야지. 노신은 남들과 달라서 대충대충 하는 걸 싫어하거든. 그래, 이름이 해원기, 맞느냐?”

노신은 나이 먹은 여인의 자칭.

기괴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노파란 건데.

해원기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앉았다고 성을 바꾸고, 섰다고 이름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이름을 속인 적이 없다. 잔잔한 웃음이 바로 이어졌다.

“하하, 어린 것이 어울리지 않게 예스러운 소리를 하는구먼. 그럼 이름은 맞다 치고. 네가 덕주의 차행에서 야료를 부린 장본인이냐?”

해원기가 또 고개를 끄덕이고,

“제남 흥륭에서 비천무영의 방수(幇手) 노릇도 했지?”

“태산과 곡부를 거쳐 내려왔고, 구란와자의 영업도 방해했으렷다?”

연거푸 나오는 질문.

끄덕끄덕 인정하는 해원기의 시선이 차츰 무대의 오른쪽을 향한다.

무너진 무대의 양쪽은 뒤집힌 수레들. 왼쪽에는 어룡과 마록으로, 오른쪽에는 봉황과 기린으로 꾸민 수레였는데.

비췻빛 눈동자는 그 봉황과 기린으로 꾸민 수레 사이를 훑는다.

기괴한 음성의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방성에선 향락사귀를 전부 처리하고, 등봉에서 팽조린이 실종된 것도 분명 너 때문. 흠, 산동에서 하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어지간히 말썽을 피운, 너는 대체 누구냐?”

해원기의 동향을 하나하나 따지며 묻는 건데.

이번에는 해원기의 고개가 끄덕이는 대신에,

“얼핏 눈속임의 장안술로 여겨지지만, 진법과 둔법의 요결을 깨닫지 않고서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재주. 높이가 이 장이 넘어 보이는 그 기특한 의자는 뭐라고 부르나? 누의(樓倚)? 제의(梯倚)?”

뭔가 신기한 물건을 본 듯 갸웃거렸다.

기괴한 음성이 놀란 듯 뚝 끊겼고,

해원기는 자신이 바라보는 어두운 공간이 살아있는 것처럼 부르르 떠는 걸 확인했다.

아리법사(阿利法師)라는 이름이었던가.

왕년에 사부도 몇 번인가 골탕을 먹었다고 하셨다. 파사(波斯) 출신으로 여겨지는 희한한 복장을 하고 온갖 술수를 부렸던 자.

그 때문에 사부는 일찍부터 해원기에게 진법과 둔법에 소홀치 않도록 많은 걸 가르쳐주었었다.

실상 고죽의 독문절학인 천손검법에는 이미 공간에 대한 개념이 담겨서, 설사 술법이 복잡하고 다양하다고 해도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근본을 깨달으면 지엽은 자연히 알게 되는 법이니까.

더구나 사부의 주위에 이런 술법에 능통한 이들이 슬그머니 요결을 하나씩 전해주기도 했었기에,

박대정심을 지향하는 해원기의 머릿속엔 제대로 익힐 시간이 없을 만큼 다양한 지식이 담겼다.

노신이라 자칭하는 기괴한 음성이 질문을 거듭하는 동안,

소리의 울림을 통해 방위와 높이를 따지고, 동시안이 눈을 속이는 공간 너머를 간파했다.

가만히 서서 정신을 집중시켜야 가능한 일. 고분고분 질문에 대답한 이유다.

봉황과 기린으로 꾸민 수레 둘. 바퀴를 드러낸 채 널브러진 두 대의 수레 사이 어둠이 바람에 흔들리는 장막처럼 펄럭이며 밀려나고.

그 가운데 정말 높다란 뭔가가 나타났다.

엄청나게 긴 사다리 네 개를 엮어 세운 모양, 그 위에 호화로운 교의(交椅)를 얹어서 해원기의 말대로 무슨 망루처럼 보이는데.

거대한 무대뿐 아니라 들판 전체를 내려다볼 위치요, 그 아슬아슬한 의자 위에는 정말 왜소한 체구의 노파가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호오, 노신의 수렴두류진(垂簾逗留陣)을 알아본다? 그럴 능력이 있는 자는 기껏해야 두셋, 아니, 네 나이로는 불가능하거늘. 너 혹시…….”

말을 끌면서 해원기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기이하게 흔들린다.

이 장이 넘는 높이, 해원기가 선 자리에서 삼십 장 정도 떨어졌으니 꽤 먼 거리지만.

해원기는 그 노파의 두 눈이 노랗게 물들어 뱅글뱅글 도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격식을 갖추어 위로 틀어 올린 은발은 아마 가발일 듯. 이마에 주름이 몇 개 있긴 해도 아주 팽팽한 얼굴이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고, 눈매와 입술에 칠한 진한 화장은 아가씨보다 더하다.

해원기를 보느라 상체를 숙여서 몸에 걸친 화려한 궁장이 구겨진 노파가,

“대별산 안의 약왕당에 갔다 왔다고 했었지. 제세성수는 천문노인의 제자니까, 그래, 그쪽에서 나온 놈이었구나.”

탁, 무릎을 치며 빙긋 웃는다.

만족한 얼굴로 도로 등을 기대는 노파.

그러나,

“천하제일지자의 문하로 넣어준다니 그거 영광이군. 그보다 이왕 장막을 걷을 거면 그 밑에도 보여주시지. 바글바글하던데.”

어깨를 으쓱 올리는 해원기의 차분한 말에 자세가 굳어졌다.

수렴두류진은 노파의 위치를 감추고 목소리로 홀려서 해원기를 미혹시키는 진법. 수하들은 은밀하게 사다리 밑의 은문진(隱門陣) 안에 감춰두었다.

진법 안에 또 진법. 그걸 알아채는 걸 보면 분명 천문노인의 맥인 것 같지만.

해원기의 말투에는 전혀 존경이나 자부심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사라진 천외육가의 하나, 적성문(摘星門). 그 적성문의 주인이었던 천문노인이다. 그 맥을 이은 놈이라면 이렇게 얘기할 리 없거늘.

노파가 미간을 찡그렸다가 가볍게 냉소를 쳤다.

“흥, 뭔 수작인지는 검증해보면 알아. 적성의 무공으로 그런 야료를 부릴 실력이면 혜성지법(彗星指法) 정도는 익혔겠지. 십일호(十一號)하고 십이호(十二號)가 나가보렴. 아, 그리고 약왕당도 거쳤으니 십오호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사다리 밑에서 세 개의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똑같은 황의에 노란 복면. 체구까지 비슷해서 가슴팍에 수놓은 숫자가 없다면 누가 누군지 분간도 어려울 자들.

다만 십일호가 두툼한 쇠막대를 들고, 십이호가 양쪽 소매에서 가는 쇠사슬을 늘어뜨리는 것과 달리 십오호는 그저 붕대를 둘둘 감은 두 손뿐.

해원기가 빠르게 다가드는 셋을 보며 미간을 모았다.

노파가 혜성지법을 아는 것부터 의외. 천문노인이 전대에 천하제일지자로 불렸다는 것쯤은 전설로 남았지만, 적성문의 무공을 제대로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적성문뿐 아니라 천외육가의 무공을 당세에 누가 판별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혜성지법은 적성문의 주인만이 익히는 비전절학. 노파는 그 이름도 알면서 감히 검증을 한단다.

해원기가 가만히 서 있자,

가운데의 십이호가 속도를 높여 먼저 달려들었다.

쉬잇, 쉬잇. 촤르르르.

번갈아 내치는 쌍장에서 날카로운 장력이 일고, 그 장력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소매에서 나온 가는 쇠사슬이 반원형으로 뻗는다.

빠른 장력과 엉뚱하게 뻗어가는 쇠사슬. 수상한 의도가 담긴 공격이다.

해원기가 왼손을 활짝 펴서 힘차게 밀어냈다.

우웅.

십일호와 십오호까지 뭉뚱그려서 한꺼번에 밀어내는 대우신장. 아예 셋을 힘으로 눌러버릴 셈이다.

한데.

펑, 펑.

폭음과 함께 대우신장이 흩어지면서 좌우로 날아드는 쇠사슬 때문에 도리어 해원기가 뒤로 훌쩍 물러나야만 했다.

해원기가 왼손을 올린 채 빠르게 좌우를 훑었다.

쇠막대를 내지른 십일호와 붕대를 감은 두 손을 한데 모아 뻗은 십오호. 공간을 통째로 내모는 효능을 지닌 대우신공이건만, 그걸 능히 견뎌냈고. 십이호의 쇠사슬은 영향도 받지 않은 것처럼 날아들었다.

쇠막대에선 눈치 채기 어려운 미세한 진동, 붕대를 감은 두 손에 어린 건 극히 패도적인 기운.

그걸 느끼기 전에 당장 노파의 웃음부터 귀를 간질인다.

“하하하, 그따위 장법으론 어렵지. 어째 북두신공(北斗神功)은 익히지 못했나? 그래서야 혜성지는커녕 옥골수(玉骨手)도 펼칠 수 없잖아. 하긴, 본디 사대보고(四大寶庫)의 신병이기가 없으면 무공으론 한참 떨어진다니까.”

빤히 내려다보면서 해원기의 대응을 샅샅이 살피는 중이었나.

처음부터 압박하는 형세가 마음에 드는 모양.

십이호가 다시 덮치면서 장력과 쇠사슬을 날리고, 십일호도 그에 맞춰 쇠막대를 겨눈 채 곧장 닥쳐들었다.

십오호는 옆으로 미끄러져 뒤를 받치는 게 미리 묵계를 맺은 듯.

해원기가 아무 말 없이 성큼 앞으로 나왔다.

빳빳하게 세워진 두 손이 이번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움직여,

벼락같은 왼손이 장력과 쇠사슬을 가르면서 쇠막대까지 무찌르고, 바람 같은 오른손은 쇠사슬과 장력을 휘감아 십이호의 얼굴에다 내리꽂는다.

엄청난 쾌수, 아니, 쾌검.

따당, 땅.

덮쳐들던 십일호와 십이호가 동시에 공중제비를 거꾸로 넘으며 밀려가는데,

그 사이로 뛰어든 십오호의 두 손이 또 하나로 붙어 해원기의 가슴팍을 쪼갤 태세, 그러나 해원기의 다리가 기다린 것처럼 먼저 십오호를 차버렸다.

펑.

“으음.”

누구의 복면에서 나온 신음일지. 세 명이 죄다 삼 장 가까이 밀려나서야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러나 해원기는 뒤를 쫓지 않고 처음 자리에 선 채,

“진해철산(震駭鐵傘)과 멸혼추(滅魂錐). 다 희귀한 기예지. 게다가 이건 박룡금쇄(縛龍禁鎖) 같은 걸. 전부 출처가 궁금하고…….”

오른손에 끊어 쥔 쇠사슬 한 가닥.

검왕수를 운용해 섬전으로 십일호를, 추풍으로 십이호를, 나중의 십오호는 붕악을 실은 다리로 걷어찼다.

절세오검의 세 가지를 연용한 해원기의 인상은 더욱 굳어졌고, 쇠사슬을 내던진 오른손이 망루 같은 의자에 앉은 노파를 가리켰다.

“내가 뭘 싫어하는지는 아직 모르나?”

목소리가 무겁게 변했다.

사부는 본디 고오한 성격이지만, 해원기에게만은 언제나 다정했고 무엇이든 해주었다.

고죽(孤竹)의 맥. 고죽에는 사실 전해지는 무공이 많지 않다.

입무(立舞)라는 춤, 행위지(行爲止)라는 멈춤, 구고문심이나 잠심침령이라고 부르는 묵상법이 기본 공부. 그 외에는 대우신장, 신왕공과 천손검법 뿐이다.

다른 무공은 전부 사조나 사부가 세상에서 구했던 것. 그것도 대부분이 검법이었다.

그러다 해원기가 박대정심이란 목표를 정하자,

사부는 참으로 온갖 무공을 다 가져왔고, 남의 손을 빌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서. 그 열성이 평소의 사부 같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니 두 분 사모가 뭘 아끼겠는가.

큰 사모는 자신이 배운 봉황문(鳳凰門)의 무공에다 의조부인 천지일사 어르신에게 배운 모든 것을,

둘째 사모는 천외육가 중의 해중천(海中天) 출신이니 자신의 사부인 정풍선자(定風仙子)를 졸라 천외육가에 관계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긁어모았다.

사부를 아버지처럼 모셨던 해원기로선 두 분의 외가 덕을 크게 입은 셈일까.

백여 년 전에 무림의 유불도속(儒佛道俗) 사가(四家)가 모여 창조했다는 무공까지 빼놓지 않고 배워야만 했었다. 설사 실제로 익힐 수 없는 이론만의 무공일지라도.

여기서 한술 더 뜬 사람은 탁 소숙이었고.

아는 사람은 전부 닦달해 무조건 한 가지씩 비결을 내놓으라고 을러댔다나.

십일호가 든 쇠막대가 실은 쇠로 만든 우산이요, 그 미세한 진동이 모든 경력을 해제하는 진해철산이란 것.

대우신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십이호의 가는 쇠사슬이 박룡금쇄라는 기이한 병기라는 것.

십오호의 붕대로 감은 두 손이 멸혼추라는 괴이한 공력인 것도 이런 이유로 알아냈는데.

문제는 이 이름들이 백여 년 전에 나왔다는 사실. 그것도 유불도속 사가가 창조하기 전에 바탕으로 삼았다고 배웠으니.

기괴한 노파가 그간 의심했던 사안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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