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잡기백희(雜技百戲) (3)
곳곳에 세운 횃불로 불야성이라도 이룬 듯한 들판에, 쿵작쿵작 음악 소리가 흥겹고 무수한 그림자가 어지럽게 일렁인다.
설날이나 원소절(元宵節)을 방불케 하는 광경. 명절이라도 만난 것처럼 삼사 백은 될 듯한 인파가 어울려 돌아가고, 그 앞에는 거대한 무대가 놓여 온갖 희귀한 재주를 보이는 중.
몸에 딱 달라붙으면서도 꽃잎처럼 팔랑거리는 옷을 입은 십여 명이 바닥을 구르고, 공중제비를 넘으며, 서로 어울려 탑을 이룬다. 그 좌측에는 엄청난 크기의 무쇠 솥을 공깃돌 다루듯 하는 자들, 우측에는 번쩍이는 구슬과 단검 따위를 수십 개나 던졌다가 받아내는 자들. 그리고 높다란 공중에는 가느다란 줄이 쳐져 남녀가 그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게다가 무대 옆으로는 어룡(魚龍)이니 마록(馬鹿), 봉황(鳳凰)으로 꾸민 화려한 수레들이 연방 폭죽을 쏘아 올려서.
퍼퍼퍼펑, 퍼퍼퍼펑.
꽤 먼 거리의 바위에 올라 바라보던 인광과 수진은 아예 넋이 나갔다.
큰 고을의 명절도 본 적 없는 아이들에겐 큰 충격이었을까.
엄청난 인파, 휘황찬란한 볼거리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잊었고, 고막을 울리는 소음과 코끝이 매캐한 폭죽 연기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해원기가 그런 두 아이를 쳐다보곤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흥이 날 광경이니 얘들은 오죽할까. 그나저나 진평현이 아무리 남양에서 부유한 고을이라고 해도 이건 좀 지나쳐 보인다. 명절도 아닌 수차제라면서. 흠, 동강 녀석이 내빼지 않아야 하는데.’
어두운 하늘을 슬쩍 향하는 시선.
소림사를 떠나면서부터 부지런히 호출한 동강이 높은 하늘 위에 떠 있다. 워낙 제멋대로인 데다가 시끄러운 걸 질색하는 녀석이라 나 몰라라 하고 사라질까 은근히 걱정된다.
하지만.
이 기묘한 잔치를 지켜보는 게 우선.
이런 규모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다. 진평현의 지현대인(知縣大人)께서는 얼마나 백성들을 사랑하기에 수차제를 이렇게 크게 여시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먹고 마시는 게 빠질 수 없다.
들판 곳곳에 노점을 펼친 곳도 수십 군데, 화려한 수레에서 나온 자들이 군중 속에서 또 잔재주를 보이는 통에 곳곳이 놀이판이고,
거대한 무대 위에선 연달아 신기한 연출이 이어졌다.
폭죽이 그치면 막간에 유명한 극목(劇目)을 짤막하게 보여주는데, 울긋불긋 분장한 배우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무예를 겨루어서 갈채를 받고.
극목이 끝나면 또 한바탕 눈이 어지러워지는 잡기가 등장한다. 무거운 물건을 공처럼 차올리는 다리, 나무를 종이처럼 찢는 손과 돌을 짓이기는 이마. 힘을 자랑하는 역기(力技)에 놀라면 그다음엔 팔다리와 허리까지 기괴하게 꺾고 접는 연체기교(軟體技巧).
그리고 거꾸로 선 채 활을 쏘고, 눈을 가린 채 비수를 날리더니 아예 장검을 목구멍으로 삼키기까지 한다.
시선을 위로 올리면 소위 고공기(高空技)라 불리는 줄타기와 공중연기가 펼쳐지고, 다시 아래를 보면 사람을 궤짝에 넣어 마구 난도질하다가 도로 붙이고, 불과 연기가 사방으로 춤추며 휘돌아가니.
그야말로 별세계에 온 듯.
멀리 떨어진 인광과 수진이 넋이 나갔는데 그 별세계 안에 있는 이들은 어떻겠나.
떠들고 소리치고 뛰고 춤추고. 그야말로 광희(狂喜)에 겨워 어쩔 줄 모른다.
들판 전체가 군중의 열기로 이글거리는 것만 같은데.
“이런 건 처음 보지만…….”
“어째 좀 괴상하다. 그렇지?”
그 광희의 도가니에 떨어져서 보는 건 확실히 다른가. 정신없이 구경하던 인광과 수진이 서로 마주 보며 하는 소리에 해원기의 고개가 돌아갔다.
수진이 자신의 삐딱한 상투를 만지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는 전에 공동산 아래에서 한번 본 적이 있거든요. 잡기가 원래 서역(西域)에서 들어온 거라나. 워낙 다양한 재주라 백희(百戱)라고 하더군요. 요망한 눈속임이라고 천하게 여기는 이도 많지만, 그래도 나름, 음.”
인광과는 달리 경험이 있는 수진이 ‘괴상’하다는 느낌을 설명하려다 입맛을 다셨다.
말을 꺼내긴 했어도 영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듯.
공동산은 감숙에 있어서 서역을 왕래하는 대상(隊商)들도 많이 보이는 곳. 잡기백희를 보는 게 그다지 희귀한 일은 아닐 터.
반면에 잡기는커녕 연극도 본 적 없는 인광이 인상을 잔뜩 쓴다.
“재주를 파는 거잖아. 남들 즐겁게 해주면서 먹고사는 재주. 요망하든 눈속임이든 사람들에게 좋은 일 하는 건데. 여긴 영…… 신기하긴 신기하지만, 에, 거북하달까.”
역시 자신 없게 말을 흐리는 건 정확한 표현을 찾지 못 해서지만.
해원기가 가만히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비록 거리를 두고 하는 구경이지만, 생전 이런 잔치 광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 아이들이.
넋을 잃고 보다가 문득 제정신을 차리고서 객관적으로 느낌을 말한다.
하나는 ‘괴상’하다고, 하나는 ‘거북’하다고.
쉬운 일이 아니다.
과연 성승과 도봉의 격세전인.
해원기가 양손으로 두 아이의 어깨를 짚었다.
“천한 재주라도 삶의 바탕이요, 그 한 가지에 몰두해서 길을 찾으니 업(業)이라고 하잖느냐. 그러나 지금 저 화려한 재주에선 그 업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아.”
“맞아요.”
왜 괴상하고 거북했는지 해원기의 말을 듣는 순간 황연히 깨달았다.
업이라는 글자는 출가인이 더 잘 알아야 할 것을.
“인광의 대정선공은 바로 정(靜)에 바탕을 두었기에 저 소란스러움이 거북하고, 수진의 헌원진기는 중(中)을 지키기에 다른 속셈이 괴상하게 보였을 게다. 사람들을 매혹해서 뭘 하려는 걸까? 흥겨움을 넘어 날뛰게 하는 건 뭘 노리는 걸까? 좋지 않구나.”
해원기의 이어지는 말을 들으면서 두 아이의 얼굴이 엄숙해졌다.
기연을 얻었으나 성취는 부족한 상태. 그래도 요 며칠의 수련 덕에 몸에 지닌 기운이 자신들을 깨우쳤음을 알았고.
정신을 모아 체내의 신공을 북돋자 눈앞의 광경이 더 확실하게 보인다.
해원기는 여전히 두 아이의 어깨를 짚은 채.
“눈에 보이는 것에 얽매이지 말고 그 너머를 보아야 한다. 거북한 소란의 근원, 괴상한 속셈의 바탕. 무엇이더냐?”
차분한 음성이 다시 묻자.
두 아이의 눈에 빛이 맺히고, 동시에 답이 나왔다.
“사술(邪術)!”
“사법(邪法)!”
한 글자가 다르지만, 그건 단지 인광과 수진의 출신과 경력이 다르기 때문.
해원기가 양손으로 전하던 신왕공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해원기의 두 눈에서도 신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현성을 나설 때부터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지고 텅 빈 것처럼 조용해진 현성. 그리고 남문을 빠져나와 멀리서 지켜볼 만한 곳을 찾아 커다란 바위에 자리를 잡은 후, 당장 구경에 넋이 빠져버린 인광과 수진. 심지어 해원기까지 흥이 올랐었다.
동강이 내뺄까 봐 신경을 쓰느라 주의가 잠깐 소홀해졌나.
온갖 신기한 재주를 구경하다가 문득 잠심침령이 깨어났고, 곧장 신왕공의 청정력(淸正力)이 절로 일어나면서.
눈앞의 광경이 옳지 않음을 경고했다.
그 청정력 덕분인지 두 아이가 바로 정신을 차리니. 그만큼 두 아이의 자질과 근기가 탄탄하다는 의미.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신왕공의 청정력까지 덧붙여주었는데, 놀랍게도 이 광희의 이유까지 알아보았다.
‘소림에서 환단의 대법으로 근기를 다져주었다고 했지만, 이건 내공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역시.’
벽사(辟邪)와 복마(伏魔). 백여 년 전에 사마의 음모에 희생된 불도양가의 지극한 염원이 고스란히 이 조그만 아이들에게 이어졌다.
해원기가 내심 감탄하는 중에도 인광과 수진은 눈을 돌리지 않고서.
“성색으로 이목을 어지럽혀 미혹하고.”
“망령된 즐거움에 빠뜨려 심성을 망가뜨립니다.”
일단 체내의 신공이 발동하자 고유의 역량이 떨치고 일어나는 듯.
말과 함께 인광의 손에 쥔 단주가 붉게 변하고, 수진의 불진이 바람도 없는데 어지럽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해원기의 당부대로. 연등벽사의 법과 난환복마의 구결이 삿된 기운에 반응한 것.
해원기가 미간을 좁히며 앞으로 나섰고.
“그래, 환혹(幻惑)과 세심(洗心)의 사술이다만, 규모나 은밀함이 처음 보는 것이다. 족히 사도대법(邪道大法)이라 할 만한데. 무슨 목적인지 알아봐야겠구나. 너희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내 특별히 신조영금(神鳥靈禽)에게 너희를 부탁했으나 경계를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슬쩍 가리키곤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진평현 백성 수백.
이대로 계속되면 환상에 홀려서 심성이 망가질 터.
서둘러 이 상황을 깨야 하지만, 두 아이의 안전도 고려해야 할 일. 신조영금이란 과찬을 더해 동강에게 맡겨놓는 걸 빼놓지 않았다.
삐잇.
아득한 하늘 위에서 동강이 대답하는 울음은 해원기만이 들었다.
삿된 술법을 깨는 데에는 불가의 경문(經文)이나 도가의 주문(呪文)이 유효하다.
법력과 내공을 실은 사자후(獅子吼)나 창룡창(蒼龍唱), 또는 목탁과 영종을 두드리는 영취범음(靈鷲梵音)과 삼세종성(三世鐘聲).
성승과 도봉의 격세전인이 있다 해도 아직은 너무 어려 그 어느 것도 쓰질 못한다.
내공도 미약한데다가 부족한 수도(修道)로는 법력은 아예 무리.
불가나 도가를 닦지 않은 해원기 역시 마찬가지지만,
미쳐 돌아가는 잔치판에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활짝 펼친 두 팔에서 거센 바람이 들판 전체를 휩쓸고, 단호하게 꾸짖는 고함은 우레와 같다.
“깨져랏!”
대갈일성.
와르릉!
몰아치는 돌풍에 대낮같이 밝혔던 횃불이 확 줄어들고 귀청을 때리는 우레가 치자,
사방에서 비명이 터지고 들판이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해원기가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두 팔을 연달아 휘둘렀다.
휘이이이잉.
진귀한 짐승 모양으로 꾸민 화려한 수레들이 광풍에 뒤집히고,
번쩍, 꽈릉.
내리치는 천둥 번개에 무대가 와르르 무너졌다.
와아아아아.
졸지에 캄캄해진 주위, 눈도 뜨지 못할 거센 바람에다 무시무시한 천둥소리가 연달아 터지니.
사람들이 한꺼번에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황홀하던 세상이 어둠으로 확 바뀌어 벼락이 마구 떨어지는 공포.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깨닫기 전에 살려는 본능이 먼저 움직여서, 엎어지고 나동그라지면서도 미친 듯이 뛸 수밖에 없다.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들판 가운데 내려선 해원기의 두 눈이 비취처럼 빛났다.
의도했던 것.
스님이나 도사와 같은 법력은 갖추지 못했어도 신왕공의 청정력은 그에 못지않고,
목탁과 영종은 없어도 뇌정의 힘을 더한 고함은 그야말로 천지를 뒤집어놓는다.
삿된 술법의 정체도, 어떻게 펼쳤는지도 모르는 상태. 그래도 무엇보다 먼저 이 술법에 홀리는 백성들을 구해야 하기에.
어떤 술법이라도 변화의 극치인 풍뢰에 미칠 수 없다. 바람과 우레로 백성들을 깨워 떠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면에 내려서자마자 동시안을 운용해야 했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다른 느낌. 후끈한 듯, 끈적한 듯한 공기가 여전히 감돈다. 돌풍과 광풍이 몰아쳤는데도.
‘이건 무슨……’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파파파파팟.
꺼졌던 횃불이 갑자기 줄지어 불꽃을 올리면서 확 밝아졌다. 켜진 횃불은 스무 개 남짓. 무너진 무대와 뒤집힌 수레 주위에만 몰려서 마치 해원기의 등장을 반기는 듯.
그리고 잔잔한 웃음이 어디선가 전해졌다.
“하하하, 어쩐지 이번 대법은 참관할 마음이 들더라니. 그 솜씨와 그 몰골, 여기저기서 들리던 골칫거리인 것 같아서 아주 즐겁구나.”
땅속에서 울리는 듯,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 기괴한 음성.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별이 되지 않는다.
해원기의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