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잡기백희(雜技百戲) (2)
“아이쿠, 이런 실례를. 내가 좀 급했지유? 미안하오, 해 형제.”
입가를 닦으며 천연덕스럽게 사투리로 사과하는 봉대저.
해원기에게 간파되고도 계속 연기를 할 셈인가.
해원기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드시지. 너무 서두르시는 듯합니다.”
객잔 안의 다른 손님들도 있고, 인광과 수진 앞이라 굳이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는 건지.
일단 그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언행에 요사스러운 구석이 있기는 해도 봉대저가 재미로 장난을 치진 않기에.
봉대저가 더러워진 수염을 손질하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표가 나우? 쩝, 이런 난리 통에 휩쓸리면 현성을 빠져나가기 어렵거든. 해 형제는 그런 경험이 없수? 시끌벅적한 떼거리에 시달린 적이. 배를 채우면 바로 떠나야 하는데.”
시끌벅적한 떼거리에 시달린 적.
해원가 묘한 눈빛이 되었다.
수차제가 열리는 현성. 봉대저란 걸 알고 나선 자연스럽게 방성의 사방대주루를 연상하게 된다. 그때도 어르신의 생신연이라고 위장했었지.
그러나 이 객잔은 들어설 때부터 주의했고, 별다른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었다.
봉대저는 뻔한 연기 속에서 뭘 알리려는 걸까.
“시달렸다고 하긴 그렇고. 현성 전체가 모이는 수차제라니 그럴 만하잖습니까. 아이들에게도 좋은 구경이 될 듯한데요.”
봉대저가 어깨를 으쓱하곤 젓가락을 잡았고.
“좋은 구경? 사람 구경이 무슨. 수차제란 게 본디 소만 때에 농사 잘되라고 축원을 올리는 의식인데, 이건 완전히 놀고먹자는 판이잖수. 현성의 배부른 양반들이 아예 오만 광대를 다 불렀답디다. 이쪽 사미와 도동에겐 과한 장면일 수도 있잖우.”
작은 종지에 검은 식초를 조금 따라 인광과 수진에게도 찍어 먹으라는 손짓을 보낸다.
해원기도 만두를 손으로 찢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오만 광대요? 수차제에 그런 경우도 있습니까?”
“뭐, 돈 있고 권력 있는 이들이야 그저 즐겁게 놀 궁리가 먼저겠지. 사시사철 희희낙락하며 진짜 농사짓는 고생은 하나도 모르니까. 시답지 않은 연주나 해대는 풍각쟁이, 노래와 춤을 엮는 연극에다 온갖 요상한 짓거리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드러내는 잡기(雜技)까지 전부 몰렸다우. 그 바람에 신기한 구경에 눈 뒤집힌 촌것들이 이렇게 죄다 기어 나온 거고.”
불퉁하게 객잔 안을 흘겨보며 하는 소리에.
“풍각쟁이요?”
“연극에 잡기라면.”
인광과 수진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열심히 먹어대던 교자도 그냥 둔 채, 두 눈이 초롱초롱한 두 아이.
언제 제대로 본 적이 있나. 그저 들은풍월밖에 없다가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에 가슴이 뛴다.
원대를 거치면서 민간의 오락은 많이 발전했고, 세상이 바뀌고도 그 유행은 쇠하지 않았다. 산속에 살며 이야기꾼도 만나본 적 없는 인광과 수진이니 노래와 연극에 잡기라는 소리에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해원기는 다른 데에 신경이 쓰였다.
사시사철 희희낙락하는 자들.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
봉대저가 말 속에 끼워 넣은 의미를 모를 수가 없어서,
“환락사…….”
“환락이 아니라 향락이지, 향락. 아, 그 향락까지 포함하는 환락인가. 뭐, 어차피 그게 그거 아니겠수? 다 같은 예인(藝人), 한통속일 텐데.”
봉대저의 눈이 이번에는 해원기를 흘기며 대뜸 말을 자른다.
해원기가 자신도 모르게 입에 올린 환락사귀. 환락사귀가 아니라 향락사귀인데 그것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눈빛.
입맛이 써지는 실수. 그런 해원기는 놔두고 봉대저는 얼른 인광과 수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그거 다 허랑방탕한 짓거리라. 스님과 도사께서 볼 일이 아니라고. 자, 그 교자 맛은 어때? 소위 교자의 본고장이 여기 남양 땅이란 건 잘 모르더라고. 계란과 두부로만 소를 만들고 찌기만 했는데도 맛이 좋지?”
두 아이의 호기심을 달래듯 교자 얘기를 떠들기 시작한다.
해원기가 손으로 뜯은 만두를 입에 넣었다. 얼굴이 굳어지기 전에.
향락사귀의 이름을 틀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봉대저의 말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어서, 향락사귀를 포함하는 자들이 이 현성에 있다는 뜻.
사방대주루에서 주색재기의 우두머리를 처리했으니, 향락사귀를 포함한다는 건 그 상부의 조직을 가리킨다.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은 당연히 동창일 터.
봉대저가 처음부터 서둘러 길을 떠나려는 행상으로 분장한 것부터 빨리 여기를 벗어나라는 신호일 수 있다.
이미 해원기의 실력을 충분히 아는 봉대저이건만.
여기 진평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
“그럼 갈 선생의 고향은 어딥니까?”
서둘러 요기만 하고 떠난다고 했잖나.
봉대저가 교자를 집다가 흘끔 쳐다본다.
“선생은 무슨. 해 형제는 타지 사람인데 내가 어디라고 하면 알겠수?”
퉁명스러운 대답은 본심이 나와서일지도. 해원기가 덤덤하게 말을 받았다.
“멀지 않은 곳이라 밤을 도와서 간다고 하셨죠. 저희가 지리에 어두우니 좀 여쭤보려고요.”
봉대저가 구레나룻을 긁었다.
“등주 북쪽의 작은 마을이유.”
“그럼 남문으로 가시겠군요.”
“내가 미쳤수? 현성 남쪽에다가 거창한 무대 만드는 걸 봤는데. 서문으로 나가서 내향현(內鄕縣) 쪽으로 돌아갈 거외다.”
등주는 진평과 붙은 바로 남쪽 고을.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몰린다고 해도 굳이 서문으로 나가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그게 길을 가르쳐 주는 걸 모를 수 없었고, 동시에 해원기의 목적지가 어딘지도 안다는 의미였다.
서문으로 나가 단강구(丹江口)를 거치면 바로 호북으로 빠지니까.
“아, 그리고 슬슬 매운 음식이 나오니까 여기 두 아이는 가려서 먹는 게 좋을 거유. 우리 고향에도 향화날초(香花辣椒)라고 불 나는 고추가 있거든. 에, 나는 슬슬…….”
시킨 교자 한 판의 절반도 먹지 않고,
서둘렀던 티를 내면서 일어서려는 모습을 보이자, 해원기가 얼른 술잔을 들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헤어지는 잔을 드셔야죠.”
“허허.”
봉대저가 의미를 알기 어려운 웃음을 흘리면서 어정쩡하게 잔을 쥐니.
수진이 얼른 술 단지를 들어 잔을 가득 채우고, 인광은 먼저 시켰던 채소 요리를 집어 앞에 놓아준다.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밤길 조심하시고 편히 도착하시길.”
낯모르는 행상이 음식도 시켜주고 재미있는 얘기도 해주어서 그새 아쉬움이 생겼나. 눈치 빠르게 고마움을 표하는 언행에 봉대저의 얼굴이 허물어지고.
해원기가 두 손으로 잔을 잡았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여러모로 신경 써주신 은혜, 어떻게 갚아야 할지.”
꽤 정중한 사례에 봉대저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인생하처불상봉(人生何處不相逢)이쥬. 크게 갚아야 할 거유. 하하하.”
어디서든 다시 만난다는 의례적 대답이지만, 뒤에는 호탕한 웃음이 붙고 술을 쭉 들이켜더니.
탁.
소리 나게 잔을 놓고 몸을 일으킨다.
“행자와 선동도 잘 지내고.”
마지막으로 인광과 수진에게 웃는 낯을 보인 후에 휑하니 나가는데.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희단과 향락사귀가 다 같은 집단. 반룡령이 아니야. 오죽하면 이 누님이 해 소제를 직접 찾았겠어.〕
봉대저의 전음이 몰래 귀를 울렸기에.
“쾌활한 아저씨네. 그런데 행상이라면서 사람 많은 게 싫은가?”
“고향에 간다잖아. 무슨 급한 일이 있겠지. 희귀한 구경거리도 마다할 정도로.”
“그래, 사람들도 구경하러 나온 거잖아. 연극에 잡기에.”
“커다랗게 무대까지 꾸며놓았으면 아주 볼만하겠지?”
인광과 수진이 말을 주고받으며 해원기를 힐끔거린다.
오늘은 객잔에서 하루 묵는다고 했으니, 웬만하면 저녁을 먹은 후에 가 보면 어떨까 하는 눈치.
그러나 해원기는 마셨던 잔을 쥔 채로 미간을 모았다.
인광의 말대로. 행상이 인파가 많은 걸 싫어할 리가 없다. 그런 뻔한 이치를 모를 리 없는 봉대저가 행상으로 분장해서 찾아온 이유.
대화를 통해 몇 가지를 전달했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마지막 전음이었다.
소림사 산문 앞에서 해원기가 이름을 밝힌 후에 동창의 이목이 따라붙을 것은 이미 예상한 일.
인광과 수진의 출신을 알기는 어려워도, 사미승과 도동을 데리고 소림사를 떠나 남쪽으로 향하니 무당산을 연상할 수 있다.
동창이 도중에 어떤 수작을 부릴 가능성은 염두에 두었으나.
지금 봉대저의 정보는 의외.
연극을 하는 희단은 구란와자일 터. 구란와자를 깨뜨린 후에 봉대저가 찾아왔었다. 그 구란와자에는 아직도 당가의 막내가 연루된 혐의가 있고.
향락사귀는 봉대저와 마찬가지로 반룡령의 위탁으로 해원기의 내력을 캐는 게 목적이었다.
그런데 구란와자와 향락사귀가 본래 같은 집단 소속이었다니. 그것도 반룡령이 아니라고.
전음에 ‘오죽하면’이란 말은 봉대저도 전에 몰랐다는 의미다.
아직 봉대저가 어디에 속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온갖 정보에 밝은 그녀조차 시간이 촉박했다.
어울리지 않는 행상으로 변신할 만큼.
‘단지 나를 노리고 미리 함정을 마련한다?’
그러기엔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인광과 수진을 가르치며 상당히 빠른 속도로 여기까지 왔거늘.
진짜 구란와자와 향락사귀를 거느린 세력이라서 복수를 하려는 걸까. 이것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아직 해원기의 신분도 제대로 모를 텐데.
반룡령이 아니라면 누가 무엇을 노리고?
생각에 잠겨서 음식과 술에도 손이 가지 않으니,
꼬맹이 둘이 간절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몰랐다.
남문이 가까워지자 해원기가 다시 두 아이를 돌아보았다.
“인광은 대정선공에 연등지법(燃燈之法)을 일으켜야 하고, 수진은 헌원진기와 함께 난환결(亂環訣)을 외우고 있어야 한다. 둘이 항상 붙어 있는 걸 잊지 말고.”
“네.”
“넵.”
객잔을 떠나고 벌써 세 번째 당부. 대답이 시들해진 걸 느끼면서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저녁을 먹고 객잔에서 쉬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현성에서 마련한 수차제의 소문은 일찌감치 퍼진 듯, 근처에서 구경꾼들이 몰려 방이 다 찬 상태. 겨우 작은 방 하나를 얻었으나 간단하게 씻은 후에 꼬맹이들이 당최 진정하질 못했으니.
정신이 딴 데 팔렸는데 운기조식이 될 리 없다.
하룻밤 푹 자긴 애초에 글렀다는 걸 그때 깨달았고, 차라리 이전처럼 밤길을 가는 게 나을 듯. 그렇게 다시 길을 떠나는 김에 멀리서나마 무대를 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그냥 무시하기 어려웠다.
해원기도 사실 봉대저를 만난 후에 이 수차제의 행사에 의심이 가는 판. 두 아이의 안전을 생각하면 수상한 상황은 피하는 게 옳지만, 조심스럽게 탐망(探望)하는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도 노파심에 두 아이에게 단단히 주의를 시켰고, 가면서도 계속 상기시키는 중.
수진이 어두워진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나저나 그새 이렇게 휑해졌네요. 그 많던 사람들이 전부 구경하러 갔는지.”
저녁을 먹은 후에 한 시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거리가 싹 비워져서.
남문으로 걷는 동안 마주친 이가 없을 정도로 한적해졌다.
“그만큼 볼만하다는 걸까?”
머리를 갸웃거리는 인광. 둘 다 남문이 가까워질수록 기대가 높아지는 모양.
그러나 해원기의 얼굴은 쉬 펴지지 않았다.
개봉에서도 느꼈지만, 사람들은 갈수록 사치와 향락에 빠져가는 듯. 좋은 옷, 맛있는 음식, 즐거운 놀이에 지나치게 몰두한다. 그런 추세를 어쩔 수는 없으나 세상이 어째 근본과 실질은 잊고 지엽과 말단에만 쏠리는지.
그리고 그런 분위기가 어둠과 어울리면 불측한 일이 벌어지기 쉽다.
해원기가 천색을 살피듯이 고개를 젖혀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침 제멋대로 싸돌아다니는 녀석(?)이 돌아와서 다행.
만일의 사태에도 꼬맹이들을 지켜줄 힘이 되기에 탐망을 결정한 것이다.
바람을 타고 소음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