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잡기백희(雜技百戲) (1)
해가 훤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서 해원기가 판과에 계란을 깨 넣었다.
치이익.
말린 두부를 살짝 데친 것과 몇 가지 채소. 그 위에 다섯 개나 계란이 오르자 판과가 잔뜩 부풀면서 맛있는 향기가 피어오른다.
커다란 바위를 이리저리 포갠 듯한 언덕 꼭대기.
햇빛이 비쳐들면서 주위의 풀냄새까지 어우러져 참으로 기분 좋은 아침이라 식사를 마련하는 손길도 흥겹고,
해원기가 바위 꼭대기에 앉은 두 아이를 불렀다.
“이제 그만 하고 아침 먹자.”
그러나 미동도 하지 않는 둘.
눈을 반개(半開)하고 떠오르는 해를 향한 채 정좌한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제 하루 반. 두 번째 맞이하는 아침에 제대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해원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소림을 떠나서 계속 강행군. 때맞춰 식사는 하면서 밤에도 계속 이동했고, 잠은 조식으로 대신하는 고된 일정이었다.
밖으로는 몸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깨닫고, 안으로는 바탕을 다져 내공을 기른다.
운기조식은 하루에 네 번. 아침에 해가 뜰 때, 해가 중천에 이른 한낮, 저녁에 해가 질 때, 달이 가장 높이 뜬 한밤중. 음양의 변화를 가장 잘 체감할 수 있는 시기를 골랐으며 때마다 두 아이가 정좌할 장소를 찾았다.
궁금한 건 언제든지 묻도록 했고, 틈틈이 무학의 이론에 관해 설명을 해주었으나.
그래 봐야 하루 반인데.
‘둘 다 보기 드문 재질을 지녔다. 인광은 침착하고 중후하지만 양강(陽剛), 수진은 기민하고 경쾌하지만 음유(陰柔). 아미와 공동, 불과 도에 적합한 기질이라, 과연 격세전인이라 할 만해.’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행하는 게 대견하다.
물론 두 아이로선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인 해원기에게 껌뻑 죽어서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마음이었겠지만.
인광의 정수리와 수진의 목덜미에 맺힌 땀방울.
해원기가 그 땀방울을 보고 조용히 판과 아래의 불을 치웠다.
음식은 거의 다 되었지만, 일각은 더 기다려야겠다.
“해 대협의 음식은 정말 맛있어요. 뭔가 기운이 충만해지는 느낌? 아, 이렇게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지만.”
수진이 흐뭇한 얼굴을 들며 하는 소리에 인광이 픽, 하고 웃었다.
“어울리지 않게 아첨도 하네. 조금 견딜 만한 가 보지? 밤길은 질색이라더니.”
수진이 가만있을 리 있나.
“얼씨구, 두통이 난다고 앓는 소리 하던 건 누군데? 하긴 박박 깎은 대머리라 햇빛에 금방 뜨거워지긴 하겠다만.”
“뭐야? 이 꼴통 녀석잇.”
“허, 점박이 머리통에 또 열나겠네.”
점박이와 꼴통은 언제나 이런 식. 해원기가 슬그머니 판과를 당겼다.
“그만 먹고 치우자.”
두 아이의 투덕거림도 이젠 익숙해져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
“아, 아닙니다. 아직 더 먹어야.”
“싹싹 비우고 제대로 씻어야죠.”
파파팍.
토란 같은 머리통 두 개가 조그만 판과에 박혀서 남은 음식을 단번에 빨아들인다.
맛있는 음식보다 맛있게 먹는 게 더 중요하다지만, 맛이고 자시고 배를 채우는 게 먼저다. 더구나 한창 허기질 나이 아닌가.
마지막 한 점을 삼킨 수진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희가 얼마나 왔을까요?”
정신없이 해원기를 따르느라 동서남북도 분간할 틈이 없었다. 동서남북을 분간해도 지리를 모르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대체 몇 백리를 달렸을까.
인광도 봇짐에서 챙겨온 물주머니를 꺼내다가 궁금한 시선을 보낸다.
“남양(南陽)에 접어든 듯하구나. 서쪽으로 치우쳐서 남쪽으로 내려왔으니까, 그래, 저 멀리 보이는 게 복우산(伏牛山)일 거고. 흠, 점점 물이 많아지겠다. 어떻든 등주(鄧州), 신야(新野)를 거쳐 단강구(丹江口)를 넘어가면.”
“균현(筠縣). 바로 무당산이네요.”
젓가락을 쳐들며 아는 척하는 수진. 인광이 판과와 젓가락들을 정리하며 다시 묻는다.
“그럼 온 거리만큼 남았습니까?”
지금까지 산속에서만 살아온 꼬맹이들에게 지명을 댄들 알아먹을 리 없다. 그러나 그 어린 나이에 소림사까지 무턱대고 찾아온 녀석들. 세상이 넓은 걸 직접 겪었고, 그러면서 더 많은 곳을 둘러보고 싶었을 것이다.
더구나 해원기와 함께 하는 여정. 고되고 지치는 것보다 희망과 기대가 부푸는 판이라.
해원기가 물주머니를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돌려주었다.
“거리로만 따지면 얼추 비슷하겠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지형이 복잡해지니 무작정 경공으로 움직이기 어렵지. 저녁에는 객잔을 찾아 묵자꾸나.”
“어, 객잔이요?”
“그럼 마을로 들어가는 겁니까?”
수진이 눈을 껌뻑거리고, 인광은 표정이 묘해진다.
간만에 침대 위에서 이불 덮고 잔다니 반가워야 하는데, 어쩐지 아쉬운 기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과 숲을 치달린 게 마을의 객잔보다 나을 리 없을 텐데, 영 내키지 않는 이상한 감정이다.
해원기가 빙긋 웃었다.
“나는 잘 모른다만, 출가입세(出家入世)가 도를 구하는 방편의 하나라더구나. 이미 길을 알았으니 굳이 안팎을 가릴 이유가 있겠느냐.”
출가가 반드시 세상을 벗어나는 건 아니다. 세상과 떨어진 절과 도관이 어디 있으랴.
출가인이 자수성도(自修成道)하는 건 그저 부처와 신선이 되기 위함이던가.
하루 반을 따르면서 배운 것. 들과 숲이 아니면 익히지 못할 것이었나.
인광과 수진의 눈매가 드물게 무거워지고,
아무 말 없이 판과와 젓가락을 나누어 들었다.
해원기가 모른 척 뒷짐을 지고 남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설거지를 맡겨놓으니 참 편하다.
역시 해 대협의 말씀은 정확하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큰 물길을 몇 갈래나 만났고, 곳곳에 물웅덩이와 큰 못이 널려 지금까지와는 판이한 지형.
때가 때이니만큼 사람들도 부지런히 농사준비로 나오는 터라, 걷다가 뛰고, 경공을 펼쳤다가 다시 걷고를 반복해야 해서 되레 힘이 더 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꼬불꼬불 길을 돌아가며 큰 마을을 찾은 게 저녁 무렵.
고을 이름이 진평(鎭平)이란 것도 현성(縣城)에 들어간 후에 알았다.
아직 해가 있는데도 사방에 달린 등롱이며, 무슨 잔칫날처럼 북적거리는 인파에 인광과 수진은 눈이 휘둥그레져 두리번거리느라 바쁘다.
“같은 현이라도 등봉은 비교도 할 수 없네.”
“오늘이 뭔 날이기에 이리 사람이 많아? 고을 사람이 다 나왔나?”
산에서 떠나 소림까지 오는 동안에 큰 고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쫓기듯 서두르며 불안에 떨던 두 아이에게 언제 느긋이 구경할 겨를이 있었을까.
소림사에 와서야 본래의 개구쟁이 기질이 드러나 등봉으로 탈출(?)한 적이 몇 번 있어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 걸 보진 못했었다.
해원기도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같은 하남이라도 등봉과 여기 남양 쪽은 규모가 확연히 다르다만. 흠, 평소 같지는 않구나. 일단 객잔을 정해서 물어보자.”
비록 대별산맥에 의해 동서로 떨어져 있긴 해도 바로 얼마 전에 방성을 거쳤었다. 방성도 큰 고을이었으나 이 정도로 번잡하진 않았는데.
‘환락사귀 때문에 사방대주루에만 사람이 몰렸을 뿐.’
두 아이를 끌고 가까운 객잔으로 향했다.
환락사귀를 떠올리니 이 진평현의 번잡함도 가벼이 보이진 않는다.
그러고 보니 두 아이와 함께하며 잠깐 잊었었다. 반룡령의 추적과 봉대저를.
오랜만에 객잔에 드니 사람들이 흘끔거리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주문을 받은 점소이도 머리를 갸웃거리며 돌아가는 이유. 뭐 하는지 모를 허름한 차림의 더벅머리 청년이 어린 사미승과 도동이랑 함께 들어왔으니.
희한한 일행이라 여겼을 거다.
인광과 수진은 그런 것도 모르고 삼 층짜리 객잔의 내부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고.
이전의 사방대주루보다는 작아도 이 층과 삼 층의 객방을 제외한 일 층의 탁자에는 손님이 빼곡하다. 다들 나들이라도 나온 듯 화려한 차림새.
빈자리라곤 입구에 붙은 탁자 하나뿐이어서 달리 선택권도 없었다.
인광이 먼저 차를 따라 올린다.
“수차제(水車祭)라는 게 큰 행사인 모양이죠?”
방금 점소이에게 들은 얘기. 현성에서 크게 수차제를 열어서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단다.
해원기가 턱을 가볍게 문지르며 찻잔을 들었다.
“소만 때가 되면 물길을 여는 게 먼저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물이니까. 겨우내 굳었던 수차를 밟아 돌리며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다만, 남쪽에선 큰 잔치로 지낸다는 얘기를 들었다. 여기도 물이 많은 곳이라 고을 전체가 즐기는가 보다.”
해원기가 쾌체로 다닌 곳은 산동과 산서, 그리고 하북. 북쪽이라 추위가 오래 가고 날이 풀리면 황신 같은 재난이 닥치기도 한다. 쌀농사는 어렵고 밀이나 수수가 주식인 지역이라 남쪽과는 풍습도 꽤 차이가 나서 이렇게 추측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하남은 본디 중원(中原), 남양에서 한수(漢水)를 건너면 양호(兩湖)로 이어지는 곡창이다. 남양이라는 지명도 복우산의 남쪽이고 한수의 북쪽이란 의미니까. 수차제를 현성에서 큰 잔치로 치르는 게 당연할 수도.
그쯤 생각하고 차를 마시는데.
“어이쿠, 여기도 만석일세. 이거 곤란하네, 곤란해.”
불쑥 객잔으로 들어온 한 사람. 걸걸한 음성과 함께 먼지가 풀썩 일어나 저절로 시선이 돌아간다.
작은 키에 통통한 몸집, 구레나룻이 시커먼 중년 남자. 단단히 묶은 복건을 쓰고 갈의 단삼에 등에는 커다란 짐까지 메어서 영락없는 행상이다.
무릎까지 찬 감발이나 뽀얗게 앉은 먼지가 꽤 먼 길을 다닌 듯.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가득한데, 객잔 안을 휘 둘러보더니 바로 해원기에게 눈길을 보낸다.
“이거 초면에 실례이오만, 나 혼자 간단히 요기만 할 거라 합석할 수 있겠수?”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잠깐 궁둥이를 붙이고 식사나 하려 해도 그 차림새로는 어울려줄 곳이 해원기의 좌석밖에 없다는 걸 금세 알아챘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해원기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광과 수진을 한쪽으로 몰아 앉도록 했다.
“아이고,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이, 여기 교자(餃子) 두 판! 한 판은 고기, 한 판은 계란하고 두부 넣은 거로. 술도 작은 단지로 하나 가져와. 얼른 먹고 가야 한다.”
행상은 앉자마자 목청을 높여 주문부터. 정말 급해서인지 아니면 성격이 급한 건지. 점소이에게 연방 손짓까지 하곤 금방 웃는 낯으로 해원기 일행을 둘러본다.
“정말 고맙수. 나는 갈(葛)이라고 하고 잡동사니를 파는 사람이우. 소만 때까지는 고향에 간다고 하고선 그만 일자가 늦어졌지 뭐유. 멀지 않은 곳이라 밤을 도와서라도 갈 셈으로 부랴부랴 짐을 꾸렸는데. 에, 그런데…….”
묻지도 않은 자기소개를 늘어놓다가 묘한 표정이 되어 말이 흐려졌다.
그제야 알았나. 가슴에 판과를 매단 더벅머리 청년, 사미와 도동. 희한한 일행이란 걸.
“흐음, 스님이 될 아이, 도사가 될 아이를 한꺼번에 호북으로 데려간다. 허, 뭐 세상엔 별별 사정이 다 있으니깐. 해 형제도 참 특이한 일을 맡았구먼. 자, 그럼 이 교자 한 판은 우리 꼬마 출가인들에게 양보하지유.”
간단한 소개에 갈이라는 행상이 눈을 껌뻑껌뻑하며 대충 이해하곤 마침 가져온 교자 한 판을 바로 아이들 앞으로 밀어준다.
“아니, 이러실 것까지는.”
“아따, 되었수. 덕분에 자리를 얻었으니 타지 분에게 대접은 해야지. 만두와 국수에 풀떼기야 출가인의 금기 때문이라지만, 그래도 남양에서는 교자를 먹어야 하거든. 더구나 그 한 판은 계란하고 두부를 소로 썼으니깐 괜찮을 거유.”
해원기의 사양에도 막무가내. 독특한 사투리에 말도 빠르고 넉살도 좋은 사람이다. 해원기가 어쩔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자, 인광과 수진이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데.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갈 씨 행상은 벌써 잔을 닦아 해원기에게 술을 권한다.
“해 형제는 나랑 한잔합시다. 행자와 선동 데리고 가느라 제대로 먹고 마시지도 못했을 거 아뇨. 나처럼 밤길 걸을 사람은 이게 한잔 들어가야. 하하, 해 형제야 느긋하게 하루 묵을 셈이겠지만.”
어지간히 급한 성격.
올라온 음식에 아직 손도 대지 못한 해원기가 할 수 없이 따라주는 잔을 받았고,
갈 씨 행상을 똑바로 바라보며 답례했다.
“그럼.”
“자, 건배!”
혼자 흥을 내며 훌쩍 들이키는 갈 씨. 그러나 너무 급히 마셨나.
콜록콜록.
사레가 들려 정신없이 기침을 해대는 갈 씨를 보며 해원기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교자를 먹다가 놀라 눈이 둥그레진 인광과 수진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지만.
막 전음을 보냈던 해원기는 머리를 가볍게 저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갈의를 입었다고 갈 씨입니까, 봉대저?〕
너무 놀려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