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난신적자(亂臣賊子) (4)
소림사의 낡은 문은 미시 경에 열렸고, 해원기는 두 아이를 데리고 산길로 걸어 내려갔다.
어깨에 걸쳤던 천을 벗어서 그대로 드러난 판과.
인광과 수진도 각각 등에 작은 봇짐을 짊어진 것 외에는 변한 게 없다.
아침나절에 풍뢰가 울었던 산문 앞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가지런히 비질이 되어 있었고, 관군이 엉망으로 처박혔던 산길도 평소처럼 조용하다.
꼬마 둘은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신이 나서.
통통 튀는 발걸음이 금방 해원기를 앞지른다.
“몰래 나갈 때랑 달리 이렇게 대놓고 나가니까 좋은데.”
“그래도 이렇게 불쑥 소림사를 떠나니까 이상하다.”
“뭐야, 넌 중이니까 그렇지. 난 도사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으이구, 중이니 도사니. 그게 뭔 상관이냐? 유치하게.”
“흥, 이제 무당산에 가면 너도 내 심정 알게 될 걸?”
“그럴 리 없네요.”
재잘거리는 주둥이가 발걸음만큼 가벼운데.
해원기가 좌우의 무성한 숲을 훑어보곤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만 떠들고 속도를 올리자. 갈 길이 멀어.”
“네.”
“넵.”
경공을 조금 써서 내달리자, 인광과 수진 역시 전혀 뒤처지지 않고 따른다.
삽시간에 셋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날이 훤할 때 소림사를 떠날 필요가 있다.
악송령과 얘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조금 더 걸렸지만, 그건 또한 악송령에게 전해졌어야 할 마땅한 인연.
점심을 대충 때우고서 바로 일어섰고, 여봐란듯이 산문을 통해 나섰다.
관군을 상대할 때부터 느꼈던 시선, 관군이 물러갔다고 그 시선까지 사라졌을 리 없다. 오히려 더욱 감시를 강화하겠지.
그 시선에 확실하게 모습을 보이는 것이 목적.
구주신도 팽조린을 처리한 당사자가 소림사를 떠나는 걸 보여준다. 아니, 반룡령이 추적하는 대상임을 알려주는 걸지도.
어떻든 상대의 모든 시선을 해원기에게 집중시켜서.
‘그럼으로써 구주정문 간에 서로 연계할 시간을 확보한다. 지금은 동창이든 반룡령이든 상대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어. 더구나 강호가 막 회생한 시기라 불확정한 요소가 많다. 이럴 때는 역시 낭자(浪子)의 기행(奇行)이 어울린다고.’
오공선사가 말했었다.
삼장신승 중의 오능선사는 강호의 정세를 파악하고, 오정선사는 점복으로 앞날을 예지하는 역할.
해원기가 스스로 동창의 과녁을 자청한 이유를 알고 난 후에, 오공선사는 그간의 사정을 고려해 이렇게 제안했었다.
낭자의 기행.
무림은 본디 천하를 유랑하며 힘으로 행사하는 자들의 세상. 그런 전통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그 본색은 여전히 유효하다. 단 한 사람의 행동이 무림 전체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고, 강호의 흐름이 그 때문에 바뀌기도 한다.
강호의 암류가 제대로 얼굴을 들이미는 동창과 연관되었을 수 있으나, 아직은 모호한 부분이 남아있는 상황. 이에 대처하려면 역시 힘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면을 뒤집을 능력이 있는 고수.
인광과 수진을 데리고 무당산으로, 다시 아미와 공동으로 향하는 게 바로 낭자의 기행이다.
중원을 거쳐 멀리 서북까지 그 시선을 끌고 다녀야 한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산에서 내려와 등봉이 보이기 시작하자 해원기가 슬쩍 뒤로 빠졌다.
열심히 따라오던 인광과 수진의 어깨에 양손을 얹고,
“머릿속에 각자 배운 경공의 요결을 떠올려라.”
차분히 이르는 말.
경공을 펼치는 중에 입을 벌려 말을 하는 해원기가 놀라워서 두 아이가 눈을 크게 뜨지만,
쉬이익.
바람이 거세게 일면서 그림자조차 남지 않는다.
몇 배나 빨라진 엄청난 속도, 등봉을 옆으로 보면서 순식간에 지나쳐버렸다.
단주를 쥔 인광의 손은 만세를 부르고, 삐딱한 상투가 뽑힐 듯한 수진의 머리는 아예 뒤로 누워서.
꼬마 둘이 먼저 정신을 못 차린다.
한 시진 남짓.
여주(汝州)를 거쳐 여양(汝陽)에 이르러서야 쉴 수가 있었다.
사람이 없는 들을 달리고 숲을 뛰어넘어 그야말로 바람처럼 이동한 거리가 백 리가 넘어서.
관도에 들어서자마자 인광은 풀썩 주저앉았고, 수진은 대자로 누워버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에,
해원기가 미소를 지었다.
“벌써 이러면 곤란하지. 조금 더 가서 이른 저녁을 먹자꾸나.”
인광이 간신히 머리를 들어,
“헉, 헉. 어, 얼마나 더 가야 하는데요?”
겨우 말을 받자, 수진이 뭉그적거리며 일어난다.
“서, 설마 저녁 먹고 또, 헉, 헉.”
휘둥그레 뜬 눈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 ‘이른 저녁’이 전혀 반갑지 않다.
해원기가 손을 털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도로 마을에 가니까 슬슬 걸어 반 시진 정도일까. 든든히 먹어야 또 움직이지. 너희도 이젠 요령이 생겼잖으냐.”
과연 밤에도 이동할 계획.
해원기가 말을 마치곤 바로 걸음을 옮기는 바람에 꼬마 둘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등에 진 봇짐까지 젖을 정도니 승복이든 도복이든 온통 땀투성이.
그렇다고 여기서 널브러져 있을 수는 없었다.
운신(運身)이 뭔지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거늘.
해원기가 손을 얹어주었으나 그건 몸을 가볍게 해서 힘을 덜어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인광과 수진에게 무거운 쇳덩이라도 올려놓은 듯, 체내의 공력을 한껏 끌어올리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상태로 경공을 썼다. 소위 경신술(輕身術)이다. 몸을 가볍게 해야 빠르게 달릴 수 있고, 심지어 공중을 날 수도 있는데. 천근만근이 된 몸으로 해원기와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니. 차라리 끌려간다면 이렇게 힘이 들진 않았을 거다.
중압(重壓)을 견디며 경공을 펼친다.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으나.
백여 리를 지나자 차츰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깨달았다.
경공이라고 공력을 쓰고, 걷는다고 체력을 쓰는 게 아니었다. 내공과 외공을 구분하는 순간, 운신의 묘용을 잊는다.
인광이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수진이 허리를 세워 일어섰다.
걷는다.
지친 두 아이를 위해서 천천히 걷는 해원기.
“좌선(坐禪)이 있으면 와선(臥禪)이나 행선(行禪)도 있겠지. 토납양기(吐納養氣)가 호흡에만 있더냐? 조식(調息)을 숨 쉬는 거로 국한하지 말아라.”
뻗고, 디디고, 밀고, 떼고.
사람이면 누구나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해원기가 조용히 읊조리는 말에 두 아이의 눈이 저절로 아래로 향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반복하는 움직임이 바로 걸음이요, 그건 마치 들고 나는 숨과 같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하는 운기조식. 정좌하고 호흡을 가다듬어 내기(內氣)를 다스리고 정신을 함양하는 것. 가만히 앉아서 숨을 고르는 행위라면 중과 도사를 따를 자가 없을 게다. 좌선과 양정(養靜)은 출가인의 일상이니까.
그러나 해원기의 말처럼 걸으면서 할 수 있을까.
한 시진을 시달린 지금은 걸으며 쉰다는 보식(步息)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아버려서.
두 아이가 금세 다리에 힘을 주어 따라 걸으니.
해원기의 입매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대견하다.
‘아미의 대정선공(大靜禪功), 공동의 헌원진기(軒轅眞氣). 이 두 아이가 성승과 도봉의 격세전인(隔世傳人)이라는 오공선사의 말씀대로다. 불영유진(佛影遺眞)과 복마도결(伏魔道訣)은 단지 신공을 전하기 위한 수단일 뿐. 불가와 도문의 진체는 벌써 체내에 자리를 잡았고.’
인광과 수진이 소림과 무당을 찾은 까닭.
아미산 불영암에서 성승의 유진을 찾은 인광을 무종파의 노승들이 떠나도록 했고,
공동산 복마동의 복마구산인은 끝까지 수진을 보호하기 위해서 희생했었다.
어째서 소림과 무당을 찾으라고 했을까. 자주 성승의 꿈을 꾸었다는 인광이나 복마구산인에게 많은 교육을 받은 수진 모두 자신이 무엇을 이어받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소림에서 환단의 대법을 받은 후에도.
꿈속에서 무공을 배우는 몽중수예(夢中授藝)를 거치면 뭐하나. 복마구산인에게 전진과 공동의 실전절예를 배우면 무엇하나.
스스로 익히고 깨닫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법.
인광과 수진은 그런 자질과 품성을 갖추었기에, 해원기 또한 가르치는 보람이 있었다.
오공선사가 개구쟁이 둘을 해원기에게 부탁한 것도, 해원기가 흔쾌히 안내자 역할을 맡은 이유도.
이 두 아이의 성장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소림이 환단을 베푼 것처럼 무당 또한 자소를 일러준다면 어떻게 변할지.
그전까지 가능한 한 힘껏 가르쳐줄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인재를 얻어 잘 키우는 건 큰 기쁨이다. 무인에게도.
마을의 작은 반점에 들어설 무렵에는 인광과 수진이 되레 기운을 꽤 차렸고,
만두와 채소 요리에 맑은 국수뿐인 음식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백반(白飯)에 청증소채(淸蒸素菜)를 얹어 막 한 입 먹은 해원기가 피식 웃으며 주인을 불렀다.
“괜찮은 두부 요리 몇 개 더. 만두도 넉넉하게.”
그제야 고개를 든 인광이 겸연쩍게 입가를 문질렀다.
“너무 배고파서. 어, 그런데 해 대협은 혼채(渾菜)를 안 드세요?”
혼채란 동물 기름을 쓴 요리. 출가인이 일반인의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수진도 머리를 들어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절에서도 그냥 죽만 드셨잖아요. 관병들을 다 혼내시면서.”
사람이 힘을 쓰면 지치는 게 도리. 어마어마한 풍뢰를 부렸던 해원기라면 공력도 많이 소모되었을 터. 그리고도 둘을 끌고 백여 리를 왔으니.
해원기가 젓가락을 놀려 소채를 집었다.
“혼채라고 더 맛있고, 소채라고 영양이 없겠니. 백반에 청증소채도 아주 풍미가 있단다. 나는 굳이 음식을 가리지는 않아. 물론 맛있는 요리를 즐기지만, 무엇이든 맛있게 먹는 게 더 중요하지.”
맛있는 음식과 맛있게 먹기.
뭔가 아리송한 얘기라 토란 같은 머리통이 왔다 갔다 하더니.
인광이 손에 쥔 만두 조각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저, 저희를 무당산으로 데려가신 후, 다시 아미와 공동으로 향하실 건가요?”
해원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인광의 표정이 조금 굳어지고.
“그럼 또 험한 싸움을.”
나직한 말소리가 끝을 맺지 못한다.
진여신승과 오온존자. 그 둘이 소위 육악이라는 신화 속 짐승의 힘을 지녔다고. 공동산의 요술사도 알유의 힘을 얻은 것 같고. 아미에서 수백 자루의 검이 부러졌고, 공동에선 수진을 기른 복마구산인이 죽었다.
직접 목격한 해원기의 엄청난 능력. 그 능력으로 아미와 공동을 되찾으려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상할지.
해원기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일단은 사실을 확인하는 것부터다. 과거에 큰 욕을 본 두 산이 또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 삿된 자들이 산을 차지해서 불측한 짓을 도모한다면 그때는 단호하게 징치하는 게 옳아. 그러나 구주정문이든 뭐든 아미와 공동은 본디 깨달음을 구하는 도량(道場)이 아니더냐. 흠, 그런 만큼 되도록 심한 행동은 피해야지.”
살생은 해원기도 싫어한다. 인광이 뭘 걱정하는지 알기에 일단 정론으로 설명하는데.
“요사스러운 것들에게 무슨 인정을? 해 대협 말씀처럼 그것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점박이가 꼴에 중이랍시고.”
수진이 입을 삐죽거리며 비웃자 인광의 진지한 얼굴도 당장 일그러진다.
“이게. 넌 그럼 되는 대로 손을 쓰는 게 좋냐? 꼴통이.”
오랜만에 막 나오는 별명.
해원기가 다시 젓가락을 집으며 중얼거렸다.
“기운이 넘치는 걸 보니 더 주문한 건 취소해야겠네.”
헙.
두 아이의 표정이 홱 변해서, 각자 먹다 만 만두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다.
식사가 끝나면 다시 그 고행이 시작될 텐데.
해원기가 소채를 한 점씩 집어 인광과 수진에게 나눠주었다.
“어떻게 하든 그건 자신이 결정할 문제. 너희가 누구인지 잊지 말아라.”
만두를 씹던 턱이 멈추고 눈이 빛을 머금었다.
아미의 인광과 공동의 수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