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31화 (132/410)

제33장 난신적자(亂臣賊子) (3)

사방 일 장의 조그만 선방.

소림사 방장의 거처에 해원기가 오공선사와 마주 앉았다.

씁쓸한 고차(苦茶) 한 잔을 나누고 오공선사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해원기의 계면쩍은 표정. 도지휘사사의 관병을 눈에 두지도 않고 꾸짖어 물리친 조금 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검왕의 선포.

그렇게 일컬은 게 이리 마음 쓰이나.

“늙은 중의 감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보군요. 그러나 정대광명(正大光明)한 말씀과 기풍을 직접 보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지요. 과거에 탁 맹주가 그렇게 자랑하던 이유를 새삼스럽게 되새겼답니다.”

탁 맹주의 자랑이라.

‘풍화절세, 응양구천’이라는 엄청난 수식을 곁들여 검왕이라는 별호까지 지어서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 걸 가리켜서.

해원기는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저 사부님께 배운 게 저절로 나온 셈이죠. 힘만 믿고 약한 이를 괴롭히는 자들을 워낙 미워하셨기에. 관군이랍시고 아침부터 절에 장창을 겨누어 거들먹거리는 게 눈에 거슬리다 보니, 그만. 음.”

자꾸 추어주는 게 불편해 다른 핑계를 찾지만, 그러면 또 사부의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해원기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자,

오공선사가 일부러 시선을 찻잔으로 내렸다.

“그래도 겁주셨다면 온전히 돌아간 자가 드물었을 테니. 허허, 해 대협의 마음 씀씀이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애틋한 은덕도 도리어 원수로 갚으려는 흉한 자들이 적지 않아서. 아미타불. 해 대협 혼자서 너무 큰 짐을 지시려는 듯합니다.”

붉어진 얼굴로 말을 제대로 맺지 못하는 해원기.

맨손으로 바람과 우레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으나, 본성은 참으로 순후하여 싸움이 끝난 후에는 그저 칭찬에 좌불안석인 더벅머리 청년일 뿐.

그 신분을 떠나서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이가 참으로 대견스러워 오공선사가 말머리를 조금 돌렸다.

해원기는 싸움 말미에 이름을 밝혔고, 웬만해선 입에 올리기 어려운 조직들을 도발했었다.

해원기가 얼굴을 바로 했다.

“이 또한 사부님께 배운 대로입니다. 강호가 세속의 권력에 상관하지 않은 건 남송의 대응왕(大鷹王) 때부터. 정하불상침의 묵계가 무너지면 힘없는 이들은 더욱 시달리게 될 겁니다. 사람이 서로 어울려 살아야 비로소 참된 세상, 그 세상을 어지럽힌다면 설사 천하를 기울이는 권력이라도 좌시할 수 없지요. 그렇게 받은 이름이요, 그래서 무림에 나섰으니 뭔들 두렵겠습니까.”

이제는 거의 잊힌 옛 전설, 대응왕을 거론하는 건 해원기의 말대로 사부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해원기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뜻대로 살아가라고 했던 사부, 대첨산의 화전민 마을에서 무고하게 독살된 불쌍한 사람들.

동창이 아니라 대명의 친군이 전부 적이라고 해도 전혀 두렵지 않다.

오공선사의 내려갔던 시선이 퍼뜩 올라왔다.

정광이 맺힌 해원기의 시선과 다부지게 맺힌 입매. 풍기는 기도 또한 늠름하기 그지없어서 또 조금 전의 어수룩한 청년과는 다른 사람인 듯.

대담하다.

오공선사는 해원기가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되었다.

꼬박 한 시진.

그간의 얘기를 자세하게 나누고 나서 해원기가 선방을 나섰다.

해원기가 겪은 일부터 가장 최근에 이환에게서 들은 소식까지. 오공선사도 그간 소림이 얻은 여러 가지 소문을 일러주었고, 강호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데에 공감했다.

“암류든 동창이든 어쩐지 움직임이 뚜렷해지는 분위기군요. 이런 시기에 해 대협이 나타났으니 앞으로 풍험(風險)이 적지 않을 겁니다.”

“하하, 또 걱정을 해주십니까? 설사 난신적자(亂臣賊子)라 떠들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소림이 이 난신적자와 얽힐까 걱정입니다만.”

“이런, 이런. 검왕을 모시는 충신 노릇이라도 하려 했는데, 영 몰라주시는구려. 허허허.”

“말씀이 과하십니다.”

심각한 화제가 거듭되었지만, 선방을 나서는 해원기나 배웅하는 오공선사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져갔다.

오공선사가 방문 앞에 선 지공을 불렀다.

“이미 얘기를 다 나누었으니 차후의 일은 해 대협의 결정에 따르도록 해라. 오늘 중으로 절을 떠나실 것이다. 너도 할 일이 있고.”

“네.”

지공이 공손히 손을 모으는 건 본체도 하지 않고,

오공선사가 다시 해원기에게 합장례를 취했다.

“번거롭다 하시니 여기서 인사를 마칩니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시길.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그럼.”

해원기도 포권으로 답하고 바로 몸을 돌렸다.

지공의 안내를 받으며 다시 악송령이 있는 법당으로 향하는 뒷모습에.

오공선사가 또 한 번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검왕의 장도(壯途)를 축원하면서.

무림에 또다시 희망이 생긴 걸 감사하면서.

반가운 얼굴. 해원기가 악송령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악형.”

내상으로 핼쑥하고 여기저기에 붕대를 감은 초췌한 모습이지만, 악송령 역시 쇳덩이 같은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었다.

“해 대형.”

본래 말수가 적은 악송령이나 해원기도 달리 말할 것이 없었다.

벗이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

해원기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놓았다.

“아직 내상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닙니다. 지정선사의 말씀으론 보름 이상 요양이 필요하답니다. 그리고…….”

말을 끌며 잠이 든 이환 쪽을 보곤,

“이환 소저에게 중요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동창과 이전의 오리 알에 관해서. 흠, 이환 소저는 아직 안전하다고 볼 수 없기에, 소림에서 대외적인 일을 맡은 지공선사의 도움을 받아 소림 속가제자의 집에 잠시 의탁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악형도.”

이어지는 말이 빠르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지공을 통해서 전할 수 있다. 지금은 시간을 아껴서 움직여야 할 때.

악송령이 그런 기미를 바로 알아챘다.

“해 대형은, 어디로?”

과묵하다고 둔한 사람이 아니다. 해원기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후, 조금 멀리 다녀올 곳이 생겼고, 서둘러 소림사를 떠나야 하지요. 그간의 모든 사정은 소림에 알렸으니 천천히 들으면 됩니다. 부탁도 하나 해야겠군요, 개방의 오형과 약왕당의 소단은 악형이 연락을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악송령이 미간을 좁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명단이 약왕당에 남았다는 걸 알았고, 지금의 상황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태산에서부터 개봉까지 함께 하면서 겪었던 일들이 이제는 소림, 개방, 약왕당으로 퍼졌다는 의미.

악송령도 잠깐 이환 쪽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내가 어리석어, 해 대형에게 실례를 범했소.”

무거운 목소리와 함께 머리를 숙여 산발한 머리칼이 앞으로 쏟아진다.

해원기를 안내해 온 지공과 이환을 돌보는 지정, 젊은 승려도 몇 명이 있는 자리. 비록 악송령과 인사를 나눈 후에 자리를 피해 주긴 했어도 법당 안에서 뻔히 보이는데.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불쑥 사죄를 하다니.

뜬금없는 얘기라 해원기가 눈을 껌뻑였다.

“아니, 무슨…….”

감을 잡지 못하자 악송령이 머리를 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본래 상구에서 물어야 할 것인데. 개봉에서 엉뚱한 일에 정신이 팔려 깜빡 잊고 말았소. 부끄럽게.”

악송령으로선 상당히 길게 한 말. 핼쑥한 얼굴이 참담함으로 일그러지기까지.

이럴수록 해원기는 더 어리둥절해졌다.

개봉에서 이환 소저가 처한 위기에 나선 건 협의에 어울리는 행동.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건만.

뭘 물어야 했다는 건지.

‘상구에서? 상구에서는 풍진삼우를 만나고.’

기억을 되살려보니 그곳에서 해원기의 검왕이라는 신분이 드러났었다. 그리곤 바로 탁자를 나누어 악송령과는 떨어져 앉게 되었고.

해원기가 말없이 쳐다보자 악송령이 또 어색하게 이환 쪽을 돌아본다.

그게 이환이 아니라 침구 옆에 놓아둔 악송령의 환도란 걸 비로소 깨달을 때.

“도사(導師)의 유언, 소문의 검왕이 진짜 있다면, 그가 백년제일검사와 관계가 있다면, 한 가지를 물어보라 했소.”

“음?”

해원기가 눈을 크게 떴다.

뜻밖의 질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군문에서 악송령에게 칼을 가르쳐준 외팔이 노인. 악송령은 그를 사부가 아닌 도사로 칭했다고 들었으나. 그 외팔이 노인이 남긴 유언이 해원기를 가리킬 줄이야.

악송령은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그답지 않게 많은 말을 계속한다.

“태산(泰山)의 검은 왜 바다를 노래하나?”

해원기가 검왕이란 걸 알았을 때, 다른 탁자에 앉는 바람에 묻지 못했던 질문.

해원기는 풍진삼우와 함께 밀담을 나누었고, 그 이후로도 개봉에 이르기까지 따로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해원기, 증명단과 함께 응방원을 떠난 저녁때에 물어야 했었는데, 만화원의 소동이 벌어지고 이환을 보호한답시고 헤어졌으니.

이제야 제대로 묻는다.

당혹스럽기는 해도.

악송령의 질문을 듣자마자 해원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 기묘한 질문의 답을 이미 알기에.

“오악이 모두 하늘을 떠받치지만, 땅이 바다에 둘러싸였음을 누가 알리오. 하늘 길 열릴 때 오직 동악(東岳)이 해를 맞으니, 천지(天地)가 산해(山海)요, 정혼(精魂)이 신운(神韻)이로다. 해운파랑검은 검법이라기보다는 검공(劍功)이란 이름이 어울린다. 라고 하셨군요.”

“아!”

탄성을 올리며 번쩍 눈을 뜨는 악송령.

그 얼굴에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감격이 물결친다.

사부가 사조에게 배운 검법은 서른세 가지였다고 했다. 해원기에게 가르친 검법은 그 두 배가 넘었고, 교 노인과 두 분 사모까지 틈틈이 일러주어서.

해원기는 무려 칠십여 종의 검법을 익혔다.

그러나 기본은 언제나 정도 오악검법과 마도 절세오검. 사부가 가장 공들여 강해한 건 이 열 가지 검법이었고, 그래서 어떤 검법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정확하게 기억한다.

동악 태산의 해운파랑검. 오악검법의 다른 네 가지가 다 산과 관련이 있는 것과 달리 태산만이 검으로 바다를 논한다.

한 갑자 전에 태산검파가 낳았던 최후의 검객인 동악검종(東岳劍宗) 양정림(楊靜林) 이후로 실전된 해운파랑검의 진체는 사부 외에 아는 이가 없을 터.

그래서 악송령의 뜬금없는 질문에도 해원기는 거의 반사적으로 답할 수 있었고,

동시에 악송령이 이 질문에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까지 알았다.

깨달음이란 문득 찾아와 홀연히 사라지는 법.

해원기도, 법당 안의 다른 이들도 그런 드문 기연을 소중히 여기기에 전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를 닦는 자라면 자연스레 지니게 되는 선심(善心).

그러나 그 정적은,

“해 대협, 저희는 준비를 마쳤는데요. 헉헉.”

숨을 몰아쉬며 뛰어드는 토란 두 개에 의해 깨졌고,

악송령이 제정신을 차리며 눈을 껌뻑이는 모습에 해원기가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어쩔 수 없는 노릇.

“악형.”

조용히 부르는 소리에 악송령이 머쓱한 듯 흩어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

“과연, 해 대형은 진짜 검왕. 도사의 말대로요. 또 큰 도움 받았소. 내 환도와 도법, 전부 태산에서 나온 것, 산혼해운(山魂海韻)의 연벽도(連璧刀)를 완성할 수 있을 듯.”

서투른 말이 흥분으로 더 뚝뚝 끊긴다.

마침내 악송령이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알게 되었으나. 아직 궁금한 게 있었다.

오악검파는 전부 검으로 이름을 떨친 문파. 도사라는 외팔이 노인은 아마 태산검파의 후예일 텐데 왜 검이 아닌 도를 전수했을까.

해원기가 미묘한 분위기에 두리번거리는 인광과 수진을 손짓으로 불렀다.

시간이 많지 않지만 간단하게라도 얘기를 더 할 필요가 생겼으니, 두 아이도 제대로 인사를 시키는 게 도리.

해가 어느새 머리 위까지 이르러, 법당 안도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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