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난신적자(亂臣賊子) (2)
왼쪽에는 모아쥔 손으로 단주를 돌리는 인광, 오른쪽에는 두 손으로 불진을 받쳐 든 수진.
어린 사미와 도동을 거느리고 울창한 숲 앞에 선 해원기.
찌푸린 인상으로 세 필의 말과 서른 명의 관병을 훑어보더니,
“대명(大明)의 친군(親軍)이 어찌 여기에 있는가?”
딱히 누구에게 묻는 것도 아닌 말에 불쾌함이 잔뜩 담겼다.
그러나 그 혼잣말은 소란 속에서도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리고, 무장 둘이 붙은 덕분에 가까스로 말을 다독인 장 도사가 거칠게 소리쳤다.
“네, 네놈은 누구기에 감히…….”
놀란 말(馬)보다 더 놀란 장 도사. 헐떡거리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
그 말조차 또 해원기에 의해 끊겼다.
“세상에 이름 높은 소림사 구경을 왔건만, 이른 아침부터 관군이 절 앞에 있는 희한한 광경을 보는구나. 하남까지 왜구가 들어왔다는 소리도 들어보지 못했고, 중원에서 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도 없었거늘 이 무슨 일일꼬. 설마 당당한 친군이 힘이 달려서 소림사의 도움을 받으러 온 것일까?”
역시 혼잣말이지만, 땅바닥이 흔들린 소란이 가라앉아서인지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장 도사 곁의 무장 둘이 오만상을 쓰고, 관병들도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어정쩡한 모습들.
도지휘사사는 본디 친군지휘사사의 지방 군제(軍制). 외적의 침입을 막고,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는 역할이다. 해가 뜨자마자 칠품관에 무장 둘과 백호소의 삼십 병사가 숭산에 올랐으니, 당연히 이에 어울리는 변란이 있어야 한다.
하남의 숭산, 숭산은 중악. 나라의 가장 중심에 있는 곳.
이유 없는 출병은 국법에도 큰 죄가 되며, 하물며 그 병력이 부족해 백성을 징발하러 왔다면.
이 뜬금없이 등장한 더벅머리 청년은 지금 꾸짖는 것이다.
장 도사가 숨을 고르며 선뜻 말을 받지 못하는 까닭.
늘어선 관병들이 자연스레 어수선해지고.
해원기는 한 걸음 성큼 나섰다.
“얼핏 듣자 하니 대관의 실종 사건을 따지러 왔다던데. 그렇다면 우선 제형안찰사가 전모를 살피고 승선포정사의 심의를 거쳐 부현(府縣)의 해당 직분이 나서야 옳거늘. 아무리 봐도 삼사(三司)의 다른 관리는 보이지 않는구나.”
움찔. 장 도사뿐 아니라, 관병들까지 전부 어깨를 움츠리는 건 해원기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기 때문.
대명률(大明律)로 일컬어지는 나라의 법은 대단히 엄격하고 가혹하다.
각 성(省)의 최고 책임자가 비록 승선포정사지만, 치안은 어디까지나 제형안찰사의 소관. 도지휘사사의 병력을 동원하려면 협조하는 관리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게 이치에 맞다.
이렇게 조목조목 잘못을 지적하는 이 청년은 누굴까.
서른 명이 넘는 관군이 절로 주눅이 든다.
장 도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더벅머리에 평범한 얼굴, 간편한 흑의 경장에 가슴팍에 두른 낡은 천. 어딜 봐도 대단한 인물은커녕 하찮은 애송이가 분명한데.
좌우에 사미와 도동을 거느린 게 특이하고, 말하는 품이 전혀 무지렁이라고 여길 수 없다.
게다가.
혼자 나서서 관군 전부를 찍어 누르는 듯한 이 기세.
말에 높이 올라탄 자신은 아예 눈에도 두지 않고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지 않나.
혹시 뒤에 깜짝 놀랄 배경이라도 지닌 게 아닐까. 그래도 저렇게 허름하게 분장하진 않을 텐데.
자꾸 기가 죽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지만,
억지로 허리에 힘을 주며 머리를 쳐들었다.
“너는 대관절 누구기에. 어흠, 감히 관이 하는 일을 막아서고, 함부로 혀를 놀리는 것이냐? 냉큼 이름과 뭐를 하는지 고하지 못할까. 천한 것이 관을 거역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걸 본관이 굳이 밝혀야…….”
일단 입이 트이자 본래의 기질이 되살아나. 눈을 부라리며 협박하는 어투.
그러자 바짝 말을 붙인 무장 한 명이 장 도사에게 뭔가를 속삭이고,
장 도사의 눈이 금방 세모꼴로 변했다.
“이놈! 이제 보니 네놈이 바로 혐의(嫌疑)가 있는 장본인이었구나. 감히 요설로 관을 능멸하다니. 이 쳐 죽일 놈잇.”
기가 죽고 주눅이 들었던 게 거꾸로 속을 뒤집어서.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아 버럭 고함을 지른다. 상대방이 풍기는 기세 따위, 분노에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이 더벅머리 놈을 잡으러 온 것이었잖아.
하지만, 해원기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시선이 장 도사에게 뭔가를 속삭인 무장을 향하면서.
두 손이 천천히 가슴으로 올라 팔짱을 낀다.
“너, 금의위였구나.”
두 눈에 은은히 어린 비췻빛, 동시안이 간밤에 복면한 금의위의 하나란 걸 알아보았다.
금의위가 지방 도지휘사사의 무장으로 있을 리 없다.
칠품관 도사를 앞세우고 백호소의 관병 삼십을 동원하여 소림사에 쳐들어온 이유. 그건 바로 금의위 두 조를 쓰러뜨리고 우두머리인 팽조린을 처치한 해원기를 찾기 위함.
그러나 금의위의 일개 번역에게 이런 힘이 있을까. 아무리 황궁의 비밀 조직이라고 해도.
해원기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잠심침령에 신왕공을 더해 주위의 기척을 샅샅이 훑으면서 미간에 잔주름이 돋아난다.
‘소림사는 드러나지 않는 고심한 진세로 보호받는다. 주위 백 장에는 다른 기척이 없으나, 누군가 보는 듯한 느낌이라.’
다른 의도가 있어서 아침부터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리라.
설사 도지휘사사 백호소의 관병이라도 서른 명 남짓으로 소림사에 시비를 거는 건 무리.
숨겨진 의도를 눈치 챘기에 일부러 나선 해원기다.
장 도사가 거품이라도 물것처럼 설치기 시작했다.
“뭐,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잡아 꿇리지 않고.”
무장 둘에게 닦달하는 모습에 해원기가 일부러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전후 사정이 어떤지는 알고서 혐의 운운일까? 그래, 도사 나리, 그 혐의라는 것부터 들어보자. 그저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생각이라면.”
쿵.
힘차게 내딛는 발에 지면이 크게 울리고,
팔짱을 풀고 양쪽으로 펼치는 손을 따라 거대한 바람이 일어났다.
휘이이잉.
“오래된 교훈 하나를 다시 일깨워주마!”
바위를 내던진 듯 단호한 음성.
소림사 산문 앞이 온통 거센 흙먼지에 휘말린다.
숭산 소실봉(少室峰)의 울창한 숲 안에 지은 절이라 소림(少林)이라 이름 붙였다.
좁은 산길 좌우로 숲이 무성하고 산문은 그런 산길 끝 아늑한 평지에 지어졌기에, 지금 광풍이 흙먼지를 말아 올리는 공간은 바로 그 아늑한 앞뜰.
산문에 선 삼장신승이 다 미간을 찌푸리는 건 흙먼지 때문이 아니다.
오공선사가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해원기를 바라보았다.
‘어이해 직접 나서시는가. 굳이 소림을 염려하지 않으셔도…….’
해원기가 모습을 드러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관병에게 소림이 욕을 보진 않지만, 관과 충돌하면 그만큼 귀찮은 일이 이어질 터.
세속의 권력이 이런 식으로 나온 경우가 극히 드무니 나름 늙은 중의 생떼를 써서라도 넘어가려 했거늘.
그러나 산문 앞뜰을 휩쓰는 광풍을 보며 오공선사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다. 빈승의 생각이 짧았을 수도. 과거의 인연이 여기 소림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왼손이 가만히 가슴까지 드리워진 염주를 헤아린다.
“아미타불. 사제들은 지켜보기만 하게.”
선장을 쥔 손에 힘줄이 돋지만.
오공선사는 오능과 오정 두 선사에게 말하며 자신도 발에 힘을 주었다.
웅.
세 노승의 대반야선공(大般若禪功)이 산문 앞에 철벽처럼 일어선다. 오직 산문을 지키기만 하는 형태로.
“관이 핍박하면 백성은 이반하며, 백성은 물과 같아 배를 띄울 수도 뒤집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해원기가 말을 이으며 또 한 걸음 내딛자.
히힝, 히히잉.
말 세 필은 아예 펄쩍펄쩍 뛰고, 관병들은 얼굴을 가리느라 대오조차 무너진다.
드물게 말을 아끼지 않는 해원기의 두 눈엔 동시안 대신 신령한 빛이 맺혀갔다.
“내가 되새기고 싶은 건 정하불상침의 묵계. 제대로 기억하거라.”
왼손이 커다랗게 원을 그리니,
쏴아아아아.
“으앗!”
“아악.”
갖가지 비명과 함께 관병들이 쥔 장창이 수수깡처럼 부러져 날린다.
흙먼지가 그 전부를 휘감더니 벌떡 일어나 솟구치고,
해원기의 오른손이 힘차게 내리치자,
우르르릉.
굉음이 하늘 끝에서 앞뜰로 떨어졌다.
콰앙!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은 폭음. 광풍이 폭풍이 되었다가 선풍으로 휘감아 용권풍으로 바뀌더니 우레가 되어 짓밟은 듯.
세 필의 말이 누가 내던진 것처럼 관병들 가운데 떨어져 수십 명이 한꺼번에 뭉그러져 나뒹군다.
엄청난 폭음에도 불구하고 지면에는 팬 자국도 없이 흙먼지만 자욱해서,
장창을 놓친 관병들은 자신들이 좁은 산길 아래까지 구른 걸 자각하지도 못했고, 말과 함께 처박힌 장 도사와 무장 둘은 눈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하늘과 땅이 거꾸로 도는 듯, 뭐가 뭔지도 몰라 그저 비명과 신음만 이어질 뿐.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을 함께 운용한 검왕수. 십대검상을 꺼내진 않았으나 풍뢰결(風雷訣)을 십성(十成)까지 펼쳤다.
관병들을 해치지 않고 전부 내쫓을 생각으로.
중수(重手)를 가볍게 쓰기는 달인이라도 어려운 법. 팔풍지력(八風之力)을 차례로 엮어 공간을 차단하고, 그걸 다시 한 줄기로 꼬아 뇌정(雷霆)으로 펼쳐서 충격만 주어야 했다.
해원기로서도 상당히 공을 들여야 하는 수법.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침착하게 베풀었던 힘을 거두어들이는데.
“너, 너는, 누구냐아?”
산길로 굴러 떨어진 무리 속에서 쥐어 짜낸 듯한 외침이 들렸다.
장 도사가 아니라 생소한 음성. 금의위인 무장이 기어이 한 소리 지른 모양.
해원기가 두 눈의 신광을 갈무리하며 바로 말을 받았고,
“내 이름은 해원기. 간밤에 구한 사람들은 전부 나와 함께 있다. 묵계를 깨뜨리겠다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라.”
천천히 몸을 돌리면서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동창의 내시든, 금의위의 영반이든, 반룡령의 패류(敗類)든.”
누가 어디서 지켜보는지 확실치 않지만.
해원기는 분명히 듣는 이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소림사 구경은 글렀구나. 얘들아, 그만 돌아가자.”
마지막으로 두 아이에게 눈짓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림이 곤란에 처하지 않도록 애는 썼지만, 사실 어수룩하고 유치한 술책이다.
나라의 관제를 논하고, 소림사에 구경 온 척하고, 정하불상침의 오랜 묵계를 핑계로 삼아, 강대한 무력을 과시한다.
그런 식으로 진행해서 상대의 과녁을 전부 자신에게 향하도록 했으나.
입맛이 쓴 건 어쩔 수가 없다.
‘이래서야 어린애라도 속지 않겠지.’
술책이나 모략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란 걸 스스로 잘 안다.
그렇지만,
“해 대협은, 과연 성승께서 일러주신 대로. 아미타불.”
“원시안진, 이렇게 해 대협을 모셔서 영광이옵니다.”
인광과 수진이 지극히 공경한다는 심정을 온 얼굴로 드러내며 인사를 올리는 데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산문 앞 계단을 내려서며 예를 취하는 삼장신승.
“소림이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만. 이렇게 선포하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역시 세상을 지키시려는 검주의 뜻이, 아니, 빈승이 소림을 대표해 검왕께 예를 올립니다.”
검주는 사부.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가 얼른 지우고,
검왕은 해원기. 세상을 지키는 뜻은 이제 여기에 있다.
오공선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능선사와 오정선사가 합장하며 고개를 숙이는데.
“나무아미타불.”
장중한 불호성에 해원기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