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난신적자(亂臣賊子) (1)
데엥, 데엥.
숭산 소실봉을 울리는 범종 소리.
해원기가 법당을 나서다가 미간을 좁혔다.
계절이 바뀌면서 조금씩 낮이 길어지긴 했으나 아직은 산바람이 서늘한 아침. 조과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묘시(卯時)가 끝나진 않았을 텐데.
이 시각에 이렇게 큰 범종 소리가 또 울리다니. 소림사의 일과를 몰라도 절에서 흔한 일은 아니다.
“아, 해 대협.”
좁은 소로길 끝에서 급히 달려오던 지공이 바로 알아보고 손을 모은다.
방장선사를 뵙고자 청을 넣은 게 조금 전이다. 지정이 지공에게 연락을 취한다고 나가고, 범종 소리가 울리고, 지공이 급하게 달려왔다.
해원기가 성큼 지공 앞으로 움직였다.
“무슨 일입니까?”
인사를 나눌 여유는 나중에. 소림사에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지공 역시 예를 취하기보다는 말을 전하는 게 먼저였던 듯, 해원기가 단도직입으로 묻자 곧장 말을 받는다.
“아미타불, 산문 앞에 관병들이 몰려왔습니다. 방장선사께서 마중을 나가실 것이니 해 대협과 다른 분들은 지정 사제가 제자들을 데려오면 뒷산으로 피하십시오.”
외부에는 호법으로 알려진 지공. 그러나 소림사 내에서의 정식 지위는 지객당(知客堂)을 맡는 승려다. 향화객이나 외부의 손님을 접대하는 직분이니 당연히 절 밖의 상황을 면밀하게 살필 터.
얼굴이 조금 상기된 걸 보니 방장인 오공선사에게 이미 보고를 마치고, 또 그 지시에 따라 즉시 해원기를 찾아온 모양이다.
“관병? 왜 관병이 왔습니까?”
해원기가 눈썹을 세우며 다시 물었다. 이십 년 전에 봉문을 풀고도 줄곧 강호와의 왕래를 삼갔던 소림사에 관병이 몰려오다니.
“아직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팽조린이 실종된 게. 흠, 여기 등봉의 관병이 아니라 도지휘사사인 듯하고.”
“음.”
지공의 말에 해원기가 황연히 깨달았다. 팽조린은 행천호의 관직을 받았다고 했고, 등봉까지 금의위 두 조를 인솔해 왔었다. 굳이 심한 살수를 쓰지 않았기에 금의위 중에 살아남은 자가 있을 것이요, 알아보지 못할 몰골로 사망한 팽조린을 찾을 단서라곤 소림사밖에 없을 터.
더구나 도지휘사사라면 그냥 관병이 아니라 군(軍)이다.
해원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건 제 잘못이군요. 소림과는 무관한 일,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네? 아, 아니. 지금 방장선사께서…….”
“산문으로 가셨습니까? 그럼 서두릅시다. 앞장서십시오.”
지공이 깜짝 놀라서 말을 더듬지만, 해원기는 굳은 얼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지공보고 앞장서라는 건 예를 갖춘 말, 당장 산문으로 날아갈 기세인데.
“저희도 함께.”
“뒤를 따르겠습니다.”
불쑥 좌우에서 튀어나오는 꼬맹이들. 당황한 지공이 눈을 부릅뜨는데, 해원기가 시선을 보내기도 전에,
“저희가 저지른 일입니다. 더는 선사님들을 난처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인광이 굵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단호하게 입을 열고.
“출가인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에, 해 대협 곁을 촌보도 떠나지 않기로 해서.”
수진은 멀뚱멀뚱, 오히려 느긋한 척을 한다.
멈칫했던 해원기가 눈을 잠깐 감았다가 뜨며 그대로 발을 내디뎠다.
“그래. 따라오너라.”
허락에 펄쩍 뛸 듯 신이 난 꼬맹이들이 잽싸게 해원기의 뒤에 붙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지공이 할 수 없이 서둘러 앞으로 뛰어나갔다.
“아, 아미타불.”
불호에 당혹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겼으나. 더는 해원기를 만류할 수 없었다. 그 노기와 기세가 얼마나 무서운지 이미 봤잖은가.
소홀했다.
팽조린의 기괴한 죽음에 신경이 쓰여서. 상처 입은 악송령과 혼절한 이환 소저의 상태가 걱정되어서. 지공이 찾아 나선 개구쟁이 둘이 다치기라도 했을까 봐.
이건 전부 핑계였다.
악송령이 피를 흘리는 모습에 노해서 심하게 손을 쓰긴 했지만, 그저 팽조린에게만 분풀이를 했을 뿐. 내던져버린 금의위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강호의 싸움이라면 그 정도로 끝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사실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렇다면 뭔가 다른 방도를 생각했어야 했다.
그냥 현장을 떠나는 바람에 결국은 소림이 이렇게 피해를 보게 되었잖은가.
‘어리석기 이를 데 없구나.’
자책의 감정이 돌처럼 굳은 얼굴을 만들었다.
검왕은 무슨. 아무리 초출강호의 애송이라도 서투르기 짝이 없구나. 그간 배운 수많은 공부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사부를 무슨 낯으로 대하랴.
‘바부탱이.’
문득 오소민의 조롱이 들린 건 같아서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이미 벌어진 일. 되돌릴 수는 없으나 그 책임을 남에게 미뤄서는 안 된다.
소림사가 비록 무림의 태산북두로서 정도를 지킬 의지를 지녔다고 해도 아직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사안에 연루될 필요는 없다.
괜히 해원기 때문에.
그래서 인광과 수진이 따라오겠다는 걸 승낙했다.
아미와 공동 출신의 꼬맹이도 같은 심정이란 걸 느꼈으니까.
일인작사일인당(一人作事一人當). 강호의 속담대로 자신이 한 일은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법.
낡은 산문이 열리고 삼장신승이 차례로 걸어 나왔다.
낮은 돌계단 세 개로 이루어진 산문의 기단, 세 사람이 나란히 서면 꽉 차는 좁은 공간에서 오공선사가 선장을 짚은 채 반장례를 취했다.
“나무아미타불. 소림의 오공이 삼가 대관인(大官人)의 행차를 맞이합니다.”
고승이 예를 갖추는 곳에는 꽤 많은 인원이 살벌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산문 앞 공터에 품(品)자 형태로 버티고 선 세 필의 말. 가운데에는 아관박대의 관복을 걸친 중년인이 거드름을 피우고, 좌우에는 갑주를 걸친 무장 둘이 눈을 부라린다.
그 뒤에는 장창을 쥔 서른 명의 관병이 공터에 이어진 좁은 숲길까지 메워서 보기만 해도 오금이 떨릴 지경.
가운데의 중년 관원이 턱짓으로 인사를 받고,
“그대가 소림사 현임 주지인가? 본관은 하남 도지휘사사의 도사(都事)에 있는 장(蔣)이라고 한다.”
한껏 콧대를 높인 말투. 이름 높은 삼장신승이 다 나왔건만, 눈에 두지도 않는다.
오공선사가 평소의 부드러운 얼굴을 들었다.
“장 관인이셨군요. 소림이 쇠한 지 오래되어 아직 향화객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처지. 중요한 공무로 찾으신 듯한데 안으로 모실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양해하시길.”
도사라면 도지휘사사의 경력사(經歷司)에 소속된 칠품관(七品官)이다.
경력사는 주로 공문의 수발을 책임지는 부문. 칠품이면 높은 관직도 아닌데 무장 둘에 서른 명의 병사를 거느렸다.
뭔가 어울리지 않지만, 오공선사도 아무렇지 않게 절에는 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전한다.
장 도사가 짧게 코웃음을 쳤다.
“흥, 지저분한 절 따위 들어가고 싶지도 않아. 주지 말대로 본관은 공무로 온 것. 괜한 소란 일으키지 말고 빠르게 명을 따르면 된다.”
여전히 고압적인 모습으로 삼장신승을 내려다본다.
아무리 도지휘사사의 관원이라도 무례한 태도. 굳이 강호를 들먹이지 않아도 소림사는 유서 깊은 선종의 고찰이거늘,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오공선사가 눈을 껌벅이며 가슴에 세운 왼손을 가볍게 내밀었다.
“네. 명하시지요.”
장 도사의 인상이 조금 일그러졌다.
낡아빠진 산문 하나에 늙은 중 셋뿐이다. 뚱뚱하고 조그맣고 길쭉한 노승 셋, 서유기에 나오는 요괴 셋의 이름을 법명으로 했다더니 딱 어울리는 자들. 이따위가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소림사의 삼장신승이라고? 가소로워서 무장 둘에 관병을 서른이나 끌고 온 자신이 한심할 지경.
그런데도 늙은 중놈은 겁도 내지 않고 꼬박꼬박 말을 받으니.
목청을 가다듬었다.
“들어라. 등봉에서 공차(公差)를 가던 대관(大官)이 어젯밤에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그 범인으로 여겨지는 자가 소림사에 숨어들었다는 고변이 있었다. 이에 소림사 주지는 본관에게 협조하여 관계되는 자를 즉시 인계하도록. 명을 받는 즉시 행할 것이다.”
고함치듯 목소리를 키워서 산문 앞이 쩌렁쩌렁 울리고.
이런 위세면 누구나 주눅이 들게 마련.
그러나 오공선사가 둥그런 눈을 껌벅이며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았다.
“허, 그런 일이? 당연히 명을 받아와야 하겠으나. 늙은 중이 어리석어 몇 가지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본래 원숭이를 연상시키는 외모다. 주름을 늘이고 기다란 팔까지 내저으며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자.
장 도사도 조금 어이없어 그만 고개를 끄덕였고,
“공차를 가던 대관의 실종 사건이라고 하셨으니 도지휘사사보다는 제형안찰사에서 다룰 일이라고 사료되는, 에고, 이런 쓸데없는 소릴. 죄송합니다. 그럼 그 범인이 본사에 있다고 고변한 사람이 누군지? 누가 어떻게 관계되었는지를 좀 가르쳐주시면 좋겠습니다. 해당하는 자가 있다면 빈승이 즉각 봉명시행합지요. 아미타불!”
줄줄 늘어놓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마지막의 장엄한 불호에 깜짝 놀랐다.
“으엇.”
푸르르.
뭐가 좋다고 갑자기 머리를 흔들어대는 말들. 장 도사뿐 아니라 무장 둘도 고삐를 잡느라 바쁘고, 장창을 든 관병들은 귀청이 울려서 모조리 술렁거린다.
단 한 마디의 불호가 장 도사 무리를 뒤흔드는 위력.
장 도사의 안색이 확 변했지만, 기어이 목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이놈! 감히 야료를 부릴 셈인고. 통집령(通緝令)을 내려 수배하는 건 어차피 포정사사의 일. 그전에 본관이 구두로 명을 전하는 건 그래도 소림사라는 이름을 배려해서라는 걸 모르는가? 기어이 백호소(百戶所)의 병사들이 직접 뒤져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소리는 질렀으되 통집령이니 포정사사니 들먹이는 건 어지간히 겁을 먹었다는 뜻.
소림사를 배려한답시고, 백호소의 백여 명에서 서른이나 되는 관병을 끌고 왔으니.
분명 협박이다.
하지만, 여기는 소림사.
오공선사가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무얼 오해하시어 이리 화를 내시는지. 사람이 누구요, 죄명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돕지 않겠습니까? 무턱대고 병사를 풀겠다고 하시니 늙은 중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태조(太祖) 홍무황제(洪武皇帝)나 성조(成祖) 영락황제(永樂皇帝)께서도 본사를 이렇게 박대하시진 않았다고 들었거늘. 아미타불, 아미타불.”
우스꽝스럽게 생긴 노승이 어쩔 줄 몰라 불호만 계속 외우지만,
이게 진짜 협박이란 거다.
역대 황제를 들먹이는 뜻을 장 도사가 모를 리 없어서 당장 눈에 쌍심지가 돋았다.
무림의 태산북두는 뭐든. 수십 년 동안 문을 닫아걸었잖나. 게다가 감히 관군에게 대들 수나 있을까.
“이이익. 뭣들 하는 게냐? 당장 저 늙은것들을 치우고 산문을 때려 부숴…….”
“잠깐!”
쿵.
낭랑한 외침, 그리고 땅이 울리는 굉음 하나.
드드드.
“으엇.”
“에구구.”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흔들려서 말이 뛰고, 병사들은 술 취한 사람 마냥 비틀거리고.
다들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 오른쪽 숲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더벅머리 청년. 지유진을 펼쳐 산문 앞을 뒤흔든 해원기가 노한 눈으로 관병들을 훑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