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사일신화(射日神話) (4)
이환은 자기가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도 몰라서,
낯선 사미승과 도동이 부축하며 물그릇을 찾는 모습에 더 당황스러웠지만, 다행히 해원기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아, 은, 은공…….”
허우적거리는 두 손이 인광과 수진을 잡아당기는 통에.
해원기가 옆에 앉기도 전에 상체를 거의 세웠고, 두 꼬맹이는 졸지에 이환의 팔뚝을 바짝 안은 채 지탱하는 꼴이 되었다.
“네, 접니다. 이환 소저.”
“여기, 여기는 어디?”
“소림사지요. 이젠 마음을 놓으셔도 됩니다.”
이환이 급하게 두리번거리고,
“악형도 같이 있습니다.”
“아, 악 대협.”
옆에 길게 누운 악송령을 발견하고서 어쩔 줄 몰라 하니,
“악형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잠을 자는 중입니다.”
위로의 말을 듣고서야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개봉 만화원에서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 제대로 빗지 못한 머리칼은 헝클어졌고, 화장이 다 지워진 얼굴은 파리하다. 여기저기 붕대로 동여맨 곳과 더러워진 피부, 어느새 눈가에 맺힌 눈물이 그간의 고초를 고스란히 말해준다.
해원기가 시선을 내렸다.
“개봉에서 헤어질 때는 일이 이렇게 될 줄. 후, 제가 너무 방만했군요. 죄송합니다.”
짧은 한숨.
부잣집 못난 아들과 무뢰배들이 흔히 기루에서 벌이는 행패라고.
악송령이라면 이환을 지키는 것쯤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그리 여겼던 게 잘못이었다. 놔두고 떠났다는 자책이 절로 밀려드는 한숨과 사죄.
이환이 손을 내리며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어찌 은공 탓을 하겠어요. 그저 천녀의 운수가 기박해서, 그 때문에 악 대협까지 엉뚱한 고초를 겪으신 거죠. 그래도 이렇게…….”
비로소 겨드랑이에 꼭 낀 듯 어색한 자세가 된 두 아이를 깨닫고,
좌우를 보며 미소를 짓고 다시 손을 모았다.
“천녀 이환이 재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또 행자와 도동 분에게도, 아, 그때의 낭자는 어디 가셨나요?”
증명단까지 잊지 않는다.
행색은 초라해졌어도 과연 노련한 기녀.
두 팔을 높이 쳐들어 두루 예를 차리고, 그 자세 또한 춤추는 듯해서,
인광과 수진이 되레 멍해졌다.
소림사까지 오는 긴 여정 중에 숱한 사람들을 보긴 했으나.
산속에서만 살아온 소년들이 이렇게 가까이서 성숙한 여인을 본 적이 있나.
더구나 험한 고생을 겪고서도 능히 차분하게 예를 갖추고, 그 음성과 동작이 우아하기까지 하니.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괜스레 얼굴만 붉어진다.
그래도 지정에게 미리 언질을 받아두었는지, 한쪽에 종이로 덮어놓은 탕약을 챙기고 깨끗한 수건까지 가져오는 건 역시 심성이 순후하기 때문.
이환이 조금 안정된 듯 하자 해원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정은 이환이 악송령보다 회복하는 데 더 시간이 걸릴 거로 봤는데 정반대인 상황.
체질이 약한 그녀가 먼저 깨어난 이유가 궁금했다.
“달리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요? 저희가 떠드는 바람에 억지로 깨신 것 같아서.”
입가를 닦던 이환이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조그맣게 탄성을 흘린다.
“아.”
탕약과 수건을 가져온 후에 해원기 뒤에 물러나 앉은 인광과 수진이 목을 조금 내밀고,
이환이 눈매를 살짝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게…… 어이없다 웃으시겠지만, 좋지 않은 꿈을 꾸었나 봅니다. 잠결에 무슨 소리를 들은 기억이, 그런데 어째 예전에 있었던 장면이 되살아났을까요. 흐음.”
자기도 궁금해져 절로 스스로 묻는 투가 되는데.
“예가 물리친 태고의 악금맹수 얘기였는데요. 육악이라는 여섯 짐승이요.”
“그 여섯 짐승 이름을 대셨어요. 육신지력이 풀렸다면서.”
기회가 왔다는 건가. 인광과 수진의 날랜 주둥이가 냉큼 원하지도 않았던 답을 내놓는다.
애들은 기억력도 좋다. 토씨까지 고스란히 흉내 내는 대답.
불쑥 튀어나온 아이들 때문인지 이환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 그렇군요. 그 장면이 왜…….”
해원기가 옆으로 나온 토란 두 개를 가만히 밀며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혹시 어떤 일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마침 저희에겐 중요한 내용을 의논하던 중이라.”
억지로 따질 일은 아니다.
이환은 겨우 정신을 차린 참이요, 기녀인 그녀가 어디선가 들었던 얘기일 수도 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지금 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
이환이 눈을 깜빡이며 기억을 더듬었다.
“언젠가 만화원에 귀빈들이 오셔서, 일부러 문을 닫고 다른 손님은 받지 않았던 적이 있었어요. 아주 극진한 대접, 만화원의 주인이라고 알려진 분들이 직접 나와서 맞을 정도였으니까요. 검은 옷을 입은 손님들이 만화원을 가득 채웠고, 천녀는 따로 제일 비싼 방에서 탄주를 했는데…….”
기루에서 가장 비싼 방은 대개 독채다.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자기들끼리 떠들며 놀 수 있으니까. 가격이 비싼 만큼 기밀이 철저해서 남에게 얼굴을 알리고 싶지 않은 손님들이 모여 난잡하게 놀아나기 일쑤지만, 때로는 은밀한 거래나 상담을 진행하기에도 적합하다.
예기를 불러 탄주를 시키는 경우는 대개 밀담.
부귀한 자들이 나름 분위기를 잡으면서 엿듣는 걸 방지하는 효과도 있고, 방과 분리된 좁은 벽장을 만들어 음악이 나오도록 하면 보이지도 않는다.
밀담이란 본래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것이니 굳이 예기 따위와 얼굴을 맞댈 필요가 없고.
뚱, 뚜둥.
“하하하하.”
벽장 안에서 탄금 하던 이환이 미간을 찡그릴 정도로 큰 웃음이 터지고,
“그, 그럼 벌써 지신력(地神力)이 해방되었단 말씀입니까?”
당황한 듯 묻는 이가 삼보별저의 주인이라는 게 기억났다.
삼보별저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개봉부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단다. 이환도 얼핏 두 번 정도 그 얼굴을 봤을까, 거창한 수염이 불룩한 배까지 내려온 전형적인 부가옹(富家翁)의 용모.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개봉의 지부대인조차 함부로 할 수 없다던가.
평소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방안의 대화가 자꾸 귀에 들어온다.
그런 대단한 인물이 깍듯하게 말을 올리는 상대.
“그 방법을 찾은 건 한참 전이지. 성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밝힐 수가 없어서 말일세.”
웃음을 멈추고 느긋하게 답하자,
“그럴 수가. 그래도 저에겐 알려주셨어야…….”
“부주(府主), 공공(公公)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말을 가려서 해야.”
아쉬움과 불만을 표하기도 전에 대뜸 자르고 들어오는 목소리.
냉기가 풀풀 날리는 그 목소리는 키가 크고 강퍅한 용모를 지닌 중년인이었고,
“하(夏) 어사(御史), 되었네. 정(鄭) 부주에게 너무 그러지 말게. 정 부주는 처음부터 참여했으니 서운할 수도 있지. 뭐, 이제라도 이렇게 얘기하잖는가.”
뚜당, 두둥.
삼보별저는 삼보태감 정화의 친척이 산다고 했으니 그 주인을 정 부주라고 부르겠지.
공공이면 궁중 태감에 대한 존칭. 커다란 모자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이가 주빈(主賓)이라고 했으니. 그런 자리라면 어사 벼슬이 끼는 것도 당연하다.
세 사람.
만화원에서 가장 비싼 이 방에 모인 세 사람이 어떤 신분인지 이환은 금세 눈치 챌 수 있었다.
디디딩, 뚜둥.
공공의 다독이는 소리에 힘이 난 정 부주가 다시 묻는다.
“육신지력이 전부 해방되었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을 텐데요.”
슬쩍 염려가 깃들어서 공공이 또 웃음을 터뜨리고,
“하하, 여전히 조심성이 많구먼. 그걸 다 드러낼 수야 있나. 소위 육신지력, 그 여섯의 이름이…….”
“알유, 착치, 구영, 대풍(大風), 봉희, 수사(修蛇)입니다.”
하 어사란 자는 공공을 모시고 온 자. 기민하게 희한한 이름 여섯을 주르르 읊어댄다.
이게 무슨 이름이지? 육신지력의 이름이란 걸 생전 처음 듣는 이환.
“그래, 그래. 그중 셋을 우선 멀리 서쪽에 있는 산에다 뿌려두었어. 감숙과 사천일세, 중원과는 아득히 떨어진 곳이잖나. 여간해선 소문이 퍼질 리 없지.”
“왜 그렇게. 아, 죄송합니다. 다른 뜻이 아니라 육신지력은 진짜 신력, 천신력(天神力)을 구할 단서. 굳이 공개할 필요가. 음.”
정 부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 그래도 하 어사의 경고와 공공의 앞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참느라 말이 자꾸 끊긴다.
뚱당, 두다당.
대화가 멈추고 금음만 울리다가,
“뭐, 일리는 있지. 그러나 언제까지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안고만 있을 수는 없잖은가. 게다가…….”
공공의 웅얼거리듯 낮은 목소리.
어려서부터 악기를 다루어 귀가 영민한 이환이 아니었다면 아마 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태상(太上)의 계획이야. 흥이 가셨군. 자세한 얘기는 별저로 돌아가서 하세.”
“예. 공공.”
“아, 예.”
갑작스러운 파장.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소란하고 곧이어 방문이 거칠게 닫혔다.
주빈의 심사가 뒤틀렸나.
방 안의 분위기가 냉랭해진 걸 깨닫기도 전에 금방 끝난 자리.
아무리 그래도 예기에게 수고했다고 돈푼이나 놔두는 게 관례거늘. 그냥 떠난 주석에는 요리만 그득하게 남았다.
“같이 온 검은 옷의 손님들, 아마 그 공공의 수행이었겠죠. 스무 명이 넘는 자들까지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바람에. 다들 수고비도 못 받고 남은 요리만 며칠 먹어댔네요. 상당히 희한한 일이어서, 그리고는 그 대공자가 또…….”
이환이 말을 맺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만화원에서 겪은 희한한 기억, 끝 무렵엔 그 못된 대공자가 등장하니 불쾌해진 탓이다.
“그게 언제였습니까?”
“이 년은 채 안 되었고, 일 년 반쯤 전인 듯.”
해원기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았고,
인광과 수진도 눈이 휘둥그레져 마주 보았다.
기루가 뭘 하는 곳인지, 이야기에 등장한 인물들이 어떤 자들인지 감도 잡을 수 없는 아이들이지만, 내용 중에 절대 놓칠 수 없는 단어가 나오기에.
육악이든 육신지력이든 여섯 짐승의 이름이 나온 건 둘째 치고, 우선 셋을 푼 곳이 감숙과 사천이랬다.
공동산과 아미산. 그리고 인광과 수진이 산을 떠나게 한 요술사, 진여신승, 오온존자의 셋.
이렇게 맞아떨어지는 얘기가 있을까.
“대, 대협, 이 얘기는 바로 저희.”
“그런데 우강이 아니라 대풍인데요.”
한꺼번에 입을 열어 말이 섞였어도, 두 아이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으음.”
이환이 가벼운 신음과 함께 이마를 짚어서 해원기가 얼른 두 아이를 일깨웠다.
“이런. 어서 눕혀드려라. 어서.”
깨어나자마자 기억을 되살려 한참을 얘기했으니 도로 어지러워진 듯. 마침 법당 안으로 지정이 들어서다 급하게 달려온다.
“아니, 벌써 깨어날 줄은. 괜찮으십니까?”
해원기가 급히 자리를 피하며 한숨을 돌렸다.
무리하게 말을 시켰다는 미안함이 들지만, 일단 지정이 돌아왔으니 돌봐줄 수 있을 터.
얼른 이환을 안심시키고,
“이환 소저와 악형을 구하신 소림사의 지정선사이십니다. 쉬면서 원기를 회복하도록 도와주실 겁니다.”
일어서며 지정에게 얼굴을 돌렸다.
“방장선사를 뵈어야겠습니다. 이 두 아이도 같이.”
지정이 이환과 악송령을 차례로 살피다가 머리를 들었다.
해원기의 굳은 표정, 인광과 수진의 당혹스러운 기색을 확인하더니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빈승이 바로 지공 사형에게 연락을 취하지요.”
법당 문 앞에는 나무 쟁반을 받쳐 든 젊은 승려가 둘. 아침에 인광과 수진이 그랬던 것처럼 탕약과 미음을 가져온 이들이 들어와 해원기에게 공손히 예를 취하고, 지정은 도로 밖으로 나가 지공을 찾고.
조과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침나절.
소림사가 갑자기 분주해졌다.
이환에게도 미안한 마음, 또 소림사에게도 폐를 끼치게 되었으나.
해원기는 굳은 표정 그래도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요대자에 들은 검은 상자. 금오혈석으로 의심했던 오리 알에 또 다른 의미가 있을 줄이야.
절령제팔(節令第八) 소만(小滿)
소만은 여름의 두 번째 절기이다. 이때가 되면 날씨가 따뜻함을 넘어 더워지기 시작하고, 따라서 강우량도 크게 는다.
남방에는 ‘소만소만(小滿小滿), 강하점만(江河漸滿).’이란 속담이 있는데 만(滿)이란 글자가 본래 영일(盈溢)의 뜻이므로, 소만은 물이 아직 가득 차지 못했다는 말이다.
북방은 비가 많지 않지만, 온도는 급격히 상승해서 곡식들이 뚜렷하게 영글어가고. 특히 여름에 익는 맥류(麥類) 작물은 알곡이 차츰 포만(飽滿)해지므로 ‘소만불만(小滿不滿), 미지대만(未至大滿).’이란 속담이 더 어울린다.
하여간 소만에는 온도와 습도가 다 올라가 바야흐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준비로 바쁘게 마련. 물 길으려 수차(水車)를 밟고, 유채 기름 짜느라 유차(油車)를 밀며, 누에고치 실 뽑으러 사차(絲車)를 돌린다.
이렇게 서두르다 몸이 상할까, 들판에 지천인 씀바귀 캐어, 틈틈이 입에다 넣어보면은.
입에 쓴 것이 몸엔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