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사일신화(射日神話) (3)
사부가 해원기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나서 가장 먼저 배우게 한 건 무공이 아니었다.
글을 배웠다.
열 살이나 먹어 한참 늦은 공부, 기간도 매우 짧았으나 훌륭한 글 선생에 좋은 환경. 상당히 체계적으로 글을 익혔고.
덕분에 신화도 자세히 공부할 수 있었다.
“약수지괴? 혹시 알유(猰貐)라는 이름이더냐?”
“어? 확실히 그런 발음…… 어떻게 아시죠?”
수진이 되레 놀라 반문할 정도. 소림사에 도착해서 이미 몇 번이나 밝힌 얘기인데, 이렇게 단번에 이름을 든 사람은 처음이다.
‘알유’라는 발음이 약수지괴의 이름인지조차 의문. 그저 구산인의 논쟁 중에 여러 번 나온 발음이라 기억에 남았을 뿐이거늘.
해원기가 말없이 미간을 좁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얘기다.
열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나타났다는 신화는 세상에서 모르는 이가 없지만, 그중 아홉 개를 쏘아 떨어뜨린 이의 이름까지 헷갈리는 현재.
증명단도 예를 후예인 줄 알아서, 단목정이 바로잡아주지 않았나.
그러니 십일병출의 사일신화에 연관된 다른 얘기가 있다는 건 제대로 학문을 닦은 이들밖에 모를 터.
아홉 개의 오리 알을 금오혈석이라 의심한 이도 단목정,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공동에서 온 수진의 입에서 약수지괴, 즉 알유의 별명이 나올 줄이야.
뭔가 머릿속에 번뜩 스치는 게 있는데, 아직 확실히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호수처럼 깊은 눈이 일렁이다가 다시 초점을 찾았다.
“음, 잠깐 기다려주겠니. 우선 인광의 얘기도 들어보자.”
그렇게 말머리를 되찾는데.
그 짧은 시간, 개구쟁이 둘은 아무 소리 없이 가만히 해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지 모를 묵직한 느낌이 토란 같은 머리통 위에 얹힌 것 같아서.
가벼운 주둥이를 놀릴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인광이 눈을 크게 뜬 채 침을 꿀꺽 삼켰다.
부모가 누군지 모른다. 산에 버려져 탁발승에게 주워진 아기였다고. 번듯한 절에는 들어가지도 못했고, 여러 사람 손에서 컸다. 모두가 조그만 암자의 노승들, 가난하고 추레하고 세상에 관심도 없고. 그저 선도(禪道)를 닦는다고 맨날 앉아만 있는 이들이라 그 밑에서 나무하고 밥 짓고 빨래하고.
뭔지도 모르면서 머리를 박박 깎은 사미승이 되었다.
그러다가 옛날 불광암이 있었다는 금정의 뒤쪽 바위, 소위 불영암이라는 바위 밑에서 기연을 얻었고, 산을 떠나면서 삶이란 걸 알았다.
큰 고을, 작은 마을. 남녀노소, 부귀빈천. 공동산에서 온 또래와 벗을 삼아 소림사까지. 어차피 산에서 다시 산으로 왔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본 적도 없다.
꿈속에서 성승 요공대사가 만나라고 한 사람. 검왕이라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도 모르는데.
자기가 아는 한 어떤 노승에게도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소림의 삼장신승에게도.
그저 신기하기만 했던 더벅머리 총각이 지금은 대웅보전 가운데의 석가모니 불상보다 더욱 커 보인다.
상상지(上上智)가 열린 해원기 앞에서,
수진과 인광은 절로 옹송그리고 있었다.
“성승이 머물렀던 금정 불광암의 적통을 두고 내분이 있는 거로 안다. 백 년간 아미를 대표했던 천불각과 그 반대쪽, 그게 스님들 간의 논쟁이 아니라 무력을 동반한 싸움이 되었다고?”
인광이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예. 저야 잘 모르지만, 그런 기미가 태동했기에 어르신의 유진이 전해진 거라고. 맨 처음 꿈에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불(佛)을 밖에서 찾으면, 짐승이 절 안으로 들고. 성(聖)이 공(空)이건만, 신(神)의 색(色)에 홀린다고. 암자의 노스님들이 기겁하였었죠.”
이 또한 선의(禪意)가 충만한 얘기.
마침 ‘알유’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상상지가 열린 판이라.
해원기의 눈가에 푸른빛이 스쳤다.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했으니 부처란 스스로 안에서 찾는 것.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할 승려가 밖에서 구하니 부처가 아니라 짐승이 들어왔고.
성승의 법명은 요공. 요공대사를 성승으로 받든 것 자체가 아미산 분란의 시작이다. 종파도 없이 작은 암자에 머문 노승들처럼 요공대사도 그저 깨달음을 얻으려 수행에 몰두한 수도자의 하나. 신성하다 숭배하여 빠져드는 것이야말로 색에 홀리는 잘못이다.
불광암이 아니라 불영암에 유진을 둔 것부터.
겉으로 눈을 어지럽히는 성색은 참된 불도가 아니다.
꿈에서 요공대사가 처음으로 했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낸 해원기가 다시 물었다.
“그 싸움이 어땠는지 아느냐?”
자기가 말해놓고도 아직 그 깊은 뜻을 모르는 인광이 이마를 긁었다.
“그것도 잘. 에, 노스님들끼리 푸념하는 걸 엿들었을 뿐이니까요. 천불각 쪽 스님들을 검승(劍僧)이라 부르고, 반대쪽은 법승(法僧)이라고 한답니다. 이것도 반대쪽인 복호사와 화엄탑에서 붙인 이름이라던가.”
승려는 검과 어울리지 않는다.
아미파가 역대로 검법에 깊은 조예를 지녔으나, 어차피 불가에서 무공은 방편일 뿐.
소림이 오악검의 하나에 꼽히면서도 수미전단검법으로 이름을 떨친 승려를 배출한 적이 없던 것과 같은 예.
그런 면에서 검승은 멸시를 담은 칭호요, 법승이야말로 진짜 승려라는 거다.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다 중이라, 처음엔 검승 쪽에서 그냥 우스개로 받아들였답니다. 그런데 복호사에 진여신승(眞如神僧), 화엄탑에 오온존자(五蘊尊者)라는 두 사람이 돌연 나타나면서, 그러니까, 보광사와 비래전이 거의 다 무너졌고 수백 자루의 검이 부러졌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죽은 검승의 시신을 한꺼번에 태우는 다비(茶毗)의 연기가 어찌나 높이 오르던지. 아, 아미타불.”
직접 본 것은 화장할 때의 연기밖에 없을 텐데.
인광이 부르르 떨며 얼른 합장하고 불호를 외웠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곁에서 그 무거운 심정을 느끼는지 수진의 얼굴도 어두워진다.
참된 모습을 진여라 하지만 그걸 신승이라 받들고, 오온은 사람을 구성하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니. 여기에 또 신과 색이란 단어가 들어갔다.
공동에선 복마구산인의 아홉이었으나, 아미에서 부러진 건 수백 자루의 검.
요술사 하나가 등장한 공동보다 신승과 존자 둘이 나온 아미산이 더 큰 피해를 보았나.
해원기가 가만히 두 손을 들어 인광과 수진의 어깨를 짚었다.
아직 어린 소년. 수진이 말할 때는 좋지 않은 기억을 되살리지 않도록 일부러 화제를 빨리 진행했으나.
두 아이가 겪은 일은 같은 아픔을 품었다.
개구쟁이로 지내면서 잊었던 일을 굳이 상기시키는 미안함과 안쓰러움. 그 마음이 전해져서일까. 인광의 어깨도 펴지고 수진의 얼굴도 그늘이 가신다.
아이들이 안정된 듯 하자 해원기가 입을 열었다.
“인광이 들어보았을지 모르겠다만, 천불각의 무행승(武行僧)은 상당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검법도 그렇지만 다른 무공도. 흠, 그런데 진여신승과 오온존자라고. 보광사와 비래전을 무너뜨릴 힘을 어디서 얻었을까. 성승께서 불광암을 파괴한 후에는 아미 고유의 절학도 거의 사라졌을 텐데.”
의문점.
공동과는 달리 아미에 대해선 해원기도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다.
과거 사마의 대란 속에서 화산파, 종남파, 아미파, 청성파는 무너지는 문파의 맥을 어떻게든 유지하고자 사대검계(四大劍界)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모인 적이 있었고.
화산 풍림당(楓林堂), 종남 은한전(銀漢殿), 아미 천불각, 청성 천연궁(天然宮)이 오랜 세월을 버티면서 서로 절학을 공유하기까지 했으니.
다시 본산을 되찾은 후에도 그 실력은 절대 만만치 않다. 특히 검에 관해서는 더욱 바탕이 탄탄한 편이거늘.
인광이 눈을 깜빡거렸다.
“네, 네. 검승은 본래 무행승이라고 불렸다는. 에? 그걸 어떻게 아시는지. 아, 그건 암자의 노스님들도 단지 소문만. 진여신승은 구룡토수(九龍吐水)를 구룡토화(九龍吐火)로 바꾸는 신술(神術)을 지녔고, 오온존자는 현명(玄冥)의 풍화지력(風化之力)으로 누구든 그 앞에선 무릎을 꿇는다는 소문이었죠. 그게 석존(釋尊)의 법력이요, 화엄(華嚴)의 진체라나요.”
해원기의 표정이 또 굳어졌다.
구룡토수는 석가모니가 세상에 나올 때 아홉 마리 용이 물을 뿜어 목욕시켰다는 전설. 그런데 물이 아니라 불까지 뿜게 한단다.
더구나 현명은 북해(北海)를 가리키는 말이요, 그 가르침으로 무릎을 꿇리는 게 화엄의 힘이라니.
“천불각의 검승들은 화엄의 진체 앞에서 힘도 쓰지 못하고, 쓸모없는 검은 구룡의 수화(水火)에 걸려 전부 부러졌대요. 노스님들이 가끔 설법에 희한한 소릴 섞긴 하지만, 이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어린애도 속지 않을 거짓말을 소문이랍시고, 나 참.”
“넌 믿었잖아. 놀래서 벌벌 떨다가 또 꿈을 꿨대 매?”
“놀라긴 누가? 내가 언제 그랬냐? 그냥 그날 밤에 성승 어르신이 대정(大靜)이란 걸 알려주셨다고 했지. 내가 어린애야?”
“치, 말할 때마다 달라지네.”
“이게. 형님한테 감히. 야, 지금 어떤 자리인데 함부로…….”
조금 전의 슬픔과 우울함은 어디로 갔는지.
인광과 수진은 해원기의 눈치를 보면서도 투덕거리기 시작한다.
해원기가 바로 앞에서 까불어대는 둘을 그냥 둔 채 눈을 감았고,
어느새 낀 팔짱에서 한 손을 풀어 눈썹 끝을 밀었다.
어린 시절 사부를 흉내 내다가 굳어진 버릇. 깊은 생각에 잠길 때의 버릇이다.
공동파를 집어삼킨 요술사. 오랜 세월 헌원광성의 도맥을 지켜온 복마동의 구산인을 전부 찾아내 참살한 능력은 약수지괴에서 나왔다.
약수지괴의 이름이 알유라면.
아미파의 적통을 차지한 복호사의 진여신승과 화엄탑의 오온존자. 백 년이나 버텨온 천불각의 무행승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무너진 건 신승의 구룡토수와 구룡토화, 존자의 현명풍화의 힘이란다.
그렇다면.
“너희는 십일병출의 사일신화를 알겠지.”
눈을 뜨며 건네는 말에 인광과 수진이 움찔하다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사에서 일러주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들은 적이 있고요.”
앞에서 투덕거린 걸 나무라지 않나. 얼핏 그런 생각이 들지만, 깊이 가라앉은 해원기의 두 눈을 보자 다른 생각은 다 없어진다.
“수진은 알유가 뭔지 모르던데. 인광은 혹시 구영(九嬰)이나 우강(禺强)이란 이름을 들어보았니?”
“아, 아니요. 처음 듣습니다.”
인광의 대답에 수진이 옆을 보다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느냐?”
“저한테는 알유 하나만 물으셨는데, 인광에게는 이름이 두 개라서. 혹시…”
자신 없는 어정쩡한 말투에 해원기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영민한 구석이 있다.
“그래. 진여신승의 소문은 구영을, 오온존자의 소문은 우강이란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으나, 너희와 내가 어떤 인연으로 만났는지 알겠구나. 흐음.”
해원기가 드물게 목구멍 깊숙이 탄성을 울렸다.
오정선사가 해석한 예언.
전팔구(前八句)를 쉽게 풀었고, 후팔구(後八句)에서 ‘왕’이란 단어 하나로 해원기랑 이어진다고 했지만.
이제야 열여섯 구의 예언이 무슨 의미인지. 왜 해원기와 연결되는지 알 수 있었다.
성승과 도봉의 맥을 이은 인광과 수진. 검왕을 찾아서 사실 그대로 아뢰어야 할 임무를 맡았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일신화는 예가 아홉 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뜨린 얘기로 끝나지만,
이 얘기에는 또 몇 가지 덧붙는 내용이 있다.
십일병출. 열 개의 태양이 하늘에 떴을 때, 세상이 온통 불타오르고 사람들이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흉악한 짐승들이 활개를 치며 나타났다.
멸망의 겁난을 틈타 세상에 다시 등장한 태고의 악금맹수(惡禽猛獸)들. 주인 자리를 빼앗긴 원한을 풀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고 해를 가하니.
아홉 개의 태양을 떨군 예가 어찌 이를 좌시하리오.
하늘로부터 받은 활과 화살을 써서 흉악한 짐승들을 퇴치하는 데 나섰고, 그렇게 주살한 짐승이 여섯이었다.
해원기가 간략하게 설명을 더하자,
인광이 입을 딱 벌렸고.
“금오해우, 육악주살. 궁시수명, 호생지덕…… 육악이 바로.”
인광이 먼저 대답하는 바람에 다급해진 수진이 뒤질세라 입을 놀렸다.
“가승사도, 참칭진보. 구육지겁, 영산시란이니까. 그럼 공동과 아미의 겁난이 전부?”
해원기가 천천히 팔짱을 풀며 머리를 돌렸다.
“그래. 알유, 구영, 우강은 예가 주살한 여섯 짐승 중의 이름이지. 얘기는 잠시 멈추고, 둘이 칸막이 뒤로 가보렴. 이환 소저가 깨어난 듯하구나.”
“예? 아.”
“알겠습니다.”
번쩍 정신이 든 둘이 발딱 일어나 천 뒤로 뛰어가는데.
“으음, 아, 알유…착치(鑿齒), 구영…봉희(封豨)에다, 육신지력(六神之力)이 풀렸다고…… 아, 음, 여, 여기가 어디? 내가 어떻게…….”
가녀린 음성이 신음과 숨소리에 섞여 어지럽지만.
이번에는 해원기가 크게 놀라 그대로 몸을 날렸다.
인광과 수진보다 먼저 이르는 번개 같은 속도. 칸막이로 친 천이 펄럭이면서 간신히 눈을 뜨고 힘겹게 뒤척이는 이환의 모습이 보인다.
깨어나면서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모습.
그런 그녀가 어찌 육악, 여섯 짐승의 이름을 읊어댄단 말인가. 해원기가 아직 다 밝히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