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26화 (127/410)

제32장 사일신화(射日神話) (2)

작은 승방.

향화객을 받지 않은 지 한참이 되었어도 손님 머물 곳은 준비해놓았나 보다.

간소한 침상과 의자, 조그만 등잔과 물병까지 갖추어진 곳.

해원기가 침상 위에 정좌하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 해도 사람. 제대로 먹고 제대로 쉬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다.

더구나 팽조린과 험한 싸움을 치렀고, 그 이후에는 소림 삼장신승과 한참 기막힌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피곤하다.

그러나 해원기는 피곤하다고 바로 눕지 않는다.

본래 주변을 잘 살피는 버릇이 있었고, 사부를 만난 후에는 더욱 주도면밀해져서. 겪은 일을 정리하고 이후의 계획을 대충이라도 마련하는 게 우선.

자연스럽게 잠심침령이 운용되었다.

약왕당을 떠나 환락사귀의 암습을 받고, 봉대저를 만나 등봉으로 향해서 소림에 오기까지를 차분히 되새기며.

‘반룡령의 백문량은 이미 나에게 초점을 맞추었고, 환락사귀의 실패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팽조린은 나를 알아보는 눈치가 아니었지. 시간이 맞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반룡령과 팽조린은 서로 딴 배를 탄 사이인가. 지금까지 동창이라고만 알았지, 동창 내부에도 우리가 모르는 알력이 있을지 몰라. 누가 주동이고 목적이 무엇일지. 그저 무림을 노리고 강호를 정복한다고 여기기엔 그 행사에 미심쩍은 점이 있어. 그리고 팽조린.’

이른바 팽가도법이라 불리는 쾌도. 둔형류의 신법을 섞은 공격, 그리고 도강.

특히 마지막에 보였던 괴이한 힘.

‘잠력을 폭발시키는 약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과거에 들었던 광혈단(狂血丹)과는 달라. 광혈단은 인체를 화약으로 바꾸어 공멸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하셨으니까. 능력을 높인다는 점에선 도리어 광혼(狂魂)의 술수와 비슷하지만, 딱히 마기(魔氣)를 드러내진 않았어. 흠, 팽가장의 가주라는 자가 그런 약을 어디서. 이건 나중에 단목 형님과 상의해봐야겠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든 생각에 감았던 눈이 뜨였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봉대저를 깜빡 잊고 있었다. 등봉에 들어오면서 먼저 사정을 알아보겠다고 떠난 여인. 해원기에게 절과 도관을 골라 움직이라고 했던 건 그쪽으로 연락을 취하겠다는 의미였을 터.

비록 언행에 요사스런 기미가 넘치고 정체를 알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그래도 해원기에게 도움을 준 봉대저인데.

소림사 승방에 머무는 걸 알릴 방도가 없다. 아니, 굳이 알릴 사이도 아닌데 괜스레 막막한 느낌.

해원기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 다시 눈을 감았다.

어차피 반룡령의 위탁을 받아 해원기를 따라다닐 뿐. 질문을 교환하는 우스꽝스러운 약속도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다.

‘무엇보다 성승과 도봉의 후대가 나와 인연이 있다는 예언이 참으로 기이하구나. 과거에 소림과 무당의 내부에 적이 숨어들어 불도양가(佛道兩家)를 패망으로 몰아넣었기에, 성승과 도봉의 후대에게 빚을 갚는다는 건 이해할 수 있으나. 사부나 나와 특별한 관계라곤 하기 어렵다. 소림의 노조종(老祖宗)도, 무당의 노신선(老神仙)도 결국은 사부 덕분에 심원을 이룬 셈. 더욱이 나와는. 흠, 그런데 예언에 나온 왕이란 글자가 나를 가리킨 다라. 억지라고 하고 싶지만, 그 앞에 하필 사일신화, 단목 형님이 의심했던 금오혈석에 관한 내용이 있다니.’

예언이란 게 본디 그렇지만.

대체 무슨 의미를 지녔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공동과 아미에서 벌어진 일이 비록 두 아이를 산에서 떠나게 했어도, 그 안의 시비곡직은 외부인이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 오공선사도 말을 아꼈거늘, 해원기라고 어찌 끼어들 수 있겠나.

자세한 내막을 알려면 천상 인광과 수진이라는 꼬맹이들에게 직접 듣는 수밖에.

‘개구쟁이들이지만, 나이를 뛰어넘는 담력과 자질을 갖추었다. 내가 이르기 전에 악형이 버틴 게 천만다행이야. 이환 소저에다가 두 아이까지 지키려고 무리했겠지.’

악송령의 상세가 그다지 심하지 않은 게 어느 정도 위안이 된다.

승방의 앞쪽이 악송령과 이환을 눕힌 작은 법당.

의약에 뛰어난 승려들이 두 사람을 보살피고, 또 가까운 곳에 해원기가 쉴 곳을 마련해 준 것이 다 소림이 신경을 써주었기 때문이었다.

해원기가 눈을 감은 채 생각을 멈추었다.

소모된 신왕공을 회복하는 운공으로 접어들자, 승방 안에 희미하게 청정한 기운이 퍼져나간다.

절의 조과(早課)는 묘시(卯時) 전에 이루어지는 법.

일찌감치 눈을 뜬 해원기가 범종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의 운공으로 시간을 보내어 눈을 붙인 건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지만, 악송령이 어떤가가 가장 궁금했다.

며칠 밤을 새워 수염도 꺼멓게 자란 거친 얼굴. 그래도 간만에 잠심침령으로 신왕공을 운용해서 눈빛만은 아주 깊고 맑은데.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서던 해원기가 발을 멈추었다.

법당 쪽에서 불쑥 튀어나온 둘. 해원기를 기다렸던 듯 부리나케 뛰어오는 건 바로 인광과 수진이었다.

인광은 머리에 납작한 목함을 이었고, 수진은 뭔가를 한 아름 안은 채.

“해 대협, 편히 쉬셨습니까?”

“해 대협, 일어나셨습니까?”

토란 같은 머리통만 까딱이며 인사를 올리는 건 머리에 이고 품에 안은 물건이 중요해서다.

“아, 그래. 일찍 일어났구나…….”

일단 인사를 받으려던 해원기의 눈이 커졌다.

인광이 머리에서 내린 목함에는 뚜껑 덮인 그릇이 두 개, 젓가락 한 벌이 같이 놓여있으니 먹을거리요.

수진의 오른팔에 걸린 건 작은 물통, 왼손에 든 건 동그란 표주박에 작은 칼, 어깨에는 깨끗한 수건까지 한 장 걸었으니.

아침 식사와 씻을 차비를 가져온 거다.

“씻는 데가 꽤 멀리 있어서. 수염 다듬을 칼도 가져왔습니다. 법당 안에도 물통을 더 가져놓았으니 부족하면 가져옵지요.”

“씻으시고 나면 간단하게 아침을 드시라고. 절이라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 식사는 방에 차려놓겠습니다.”

수진은 주위에 흩어진 큰 돌멩이 몇 개를 가져와 표주박을 올려두고, 인광은 목함을 방안으로 옮긴 후에 급히 나와 도우고.

부산스럽게 움직이지만, 그건 잘 받들려는 정성이랄까.

해원기가 조금 어이없는 느낌이었으나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귀여운 구석이 있잖나.

절의 아침 식사다. 좁쌀 죽 한 그릇에 야채를 절인 것뿐. 훌훌 마시고 일어선 해원기가 턱을 쓰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조과가 있을 텐데 괜히 수고를 끼쳤구나.”

사례하는 말에 뒤를 졸졸 따르는 토란 머리통 두 개가 재빠르게 움직이고.

“아닙니다. 잘 모시라는 명을 이미 받은지라.”

“수고는요. 계시는 동안 촌보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뭐든 말씀하시면.”

두 녀석이 한 사람처럼 말도 잘 이어받는다.

해원기가 피식 웃곤 성큼 법당으로 들어갔다.

삐꺽.

바닥에 깐 낡은 판자들이 소리를 내자 안에서 중년 승려 하나가 급히 얼굴을 내밀었다.

“아미타불, 소승 지정(智定)이 해 대협을 뵈옵니다.”

간밤에 이미 인사를 나누었던 사이. 지공의 사제이고 절에서 의약(醫藥)을 연구한다고 했다.

해원기가 예를 갖추고 한쪽에 천으로 칸막이를 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선사께 폐를 끼쳤습니다. 두 사람은 어떤지요?”

지정이 손에 쥔 염주를 굴리며 미소를 지었다.

“악 대협은 내상을 약간 입었지만, 근기가 훌륭해서 금방 회복할 겁니다. 소저는 본래 체질도 약한데 무리를 해서인지 조금 시간이 더 걸릴 듯하고요. 외상은 다 치료했고, 탕약과 시침(施鍼)을 마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일부러 깨울 일이 아니면 그냥 두는 게 회복에 좋습니다. 소승은 그동안 식사와 옷가지를 준비하지요.”

빠른 말투와 간결한 설명. 민첩하고 영리한 사람이다.

해원기가 다시 손을 모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곳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네. 너희 둘은 이미 알겠지만, 해 대협을 잘 모시도록 하고.”

바로 법당을 나가면서도 인광과 수진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지정이 떠난 후에 한 놈은 구석에서 포단(蒲團)을 가져오고, 또 한 놈은 어디선가 물 한 그릇을 떠다 바치고.

해원기가 정좌하자 냉큼 앞에 무릎을 꿇는다.

다 배운 대로 하는 짓이요, 해원기도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간밤에 오공선사가 했던 말. 직접 들으라고 했었고, 이 법당처럼 어울리는 장소는 없을 터였다.

해원기가 칸막이를 다시 한 번 보고 시선을 돌렸다.

눈앞에 조아린 토란 두 개.

“아직 낯선 사이에 말을 놓는 게 어색하다만, 말투는 이대로 하자꾸나. 너희 얘기는 대충 들었고, 흠, 둘이 아주 멀리서 무사히 소림사까지 온 것이 참 기특했다.”

일단 운을 떼자, 두 아이의 머리가 바로 올라온다.

“아, 진짜 멀더라고요. 생전 처음 산을 떠나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가라니. 참.”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었지요. 뭐, 그래도 여기저기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해서.”

주위에 보는 눈이 없는 걸 잽싸게 눈치 채고는 입이 금방 가벼워지는데.

해원기가 바로 말을 이었다.

애들하고 수다나 떨려고 온 게 아니다.

“수진이 받은 참언, 인광이 얻은 유진. 방장선사는 그 속에 전부 나와 관계된 예언이 있다고 하셨다. 먼저 하나 물어보자,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해원기도 난생처음.

스스로 자신의 내력을 밝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부가 본인의 사적을 봉인토록 한 것보다, 사부에게서 배운 고협(古俠)의 덕을 잊지 않았기에.

불긍기공, 수벌기덕.

공을 세웠다고 자랑하지 않으며, 덕을 베풀었다고 내세우지 않는다.

‘나’라고 하는 것. 자신을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 전부 삼가야 할 일.

그래서 이 질문도 이 아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알고자 함이다.

삐딱하게 상투를 튼 수진의 머리와 박박 깎은 인광의 머리가 갸웃거리고,

“그게, 구산인이 자주 일러주신 바로는 천하 창생을 백년대란 속에서 구해낸, 그, 검주라는 분의 제자라고.”

“저야 뭐 아는 게 없지만, 꿈속에서 몇 번이나 소림에 가서 왕을 뵈어라, 라고 하는 바람에. 검주의 제자니까 검왕, 아닌가요?”

해원기의 눈썹 한쪽이 슬쩍 올라갔다.

복마구산인이라는 사람들이 키웠다는 수진의 말은 이해가 간다. 구산인의 나이는 모르지만, 사부의 행적을 들었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인광의 꿈속이라는 소리는.

“꿈?”

다시 묻자 인광이 어색하게 머리통을 긁었다.

“네. 이상한 말이지만, 유진을 얻은 후에 자주 성승 어르신의 꿈을 꾸거든요. 아, 그것도 꿈속에서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셔서 성승 어르신인 줄 알았고. 요, 수진이 녀석은 제가 거짓말한다고 놀려대지만.”

“쳇, 그럼 아니냐? 나도 도봉 어르신의 맥인데 나는 왜 꿈에 도봉 어르신이 안 나오는데? 성승이나 도봉이나 막상막하잖아.”

수진이 대뜸 입을 내밀며 불퉁하게 타박을 주자, 인광의 눈매도 확 올라붙고.

한바탕 말다툼을 할 것 같아서 해원기가 얼른 입을 열었다.

“가만. 그러면 수진의 얘기부터 들어보자. 좌도에 대단한 방사 한 명이 나타나 공동산을 전부 휘하에 거두고서 복마동을 토벌했다고. 그전에 몇 차례 공동파를 칭하는 삿된 무리가 나타나면 그들을 비밀리에 징치한 곳이 복마동이겠지?”

개구쟁이 둘이 아웅다웅하게 놔둬서야 쓰나.

화제가 먼저 자신에게 돌아오자 수진의 얼굴이 대번에 펴진다.

“넵. 복마동이지요. 본래는 공동산 심처의 이름 없는 선동(仙洞)인데, 도봉 어르신이 전진관문(全眞關門)의 요결을 전하면서 헌원광성(軒轅廣成)의 도맥이 이루어졌고. 공동파가 난세에 무수한 진산절학을 도둑맞고 잃었지만, 복마동은 가장 중요한 도결(道訣)을 고스란히 지켜왔으니까요.”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 들은 얘기일 것이다.

어려운 용어까지 쓰는 수진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빛이 가득했으나.

“그런데 갑자기, 그놈, 요술사(妖術士)가 나타나 공동산을 집어삼켰고. 삿된 무리를 이끌어 구산인을 찾기 시작했어요. 백 년 동안 구산인을 알아보는 이가 없었는데도, 그놈은 정말 귀신같이 알아채서…… 결국, 저에게 소림이나 무당으로 도주하라고, 헌원광성의 비결만은 절대로 넘겨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다들.”

산을 떠날 때의 상황을 전하면서 눈가가 붉어지더니, 말이 뚝뚝 끊긴다.

직접 복마동의 최후를 목격하지는 않았겠지만, 나이가 어리다고 모를 리 없다.

당장 성질을 낼 것 같았던 인광의 표정도 우울하게 어두워졌다. 장안에서부터 같이 한 사이, 기이한 인연으로 벗이 되었기에 수진이 겪은 일이 남 같지 않겠지.

그 심정을 짐작하기에 해원기가 바로 대화를 이어갔다.

“요술사라. 백 년 동안 삿된 무리를 징치한 복마동, 헌원광성의 도맥을 이루어 가장 중요한 도결을 지켜온 분들인데 너 하나를 지키기 어려웠을까?”

수진의 말에서 느껴지는 모순. 공동파의 진산절학이 실전되어도 중요한 도결을 지켜왔다고 했다. 그런 능력이 공동파를 사칭하는 삿된 무리를 백 년이나 무너뜨렸을 터. 그런데 요술사라는 자가 단숨에 복마동을 파괴할 수 있을까.

가까운 이들을 잃은 슬픔이 되살아나려던 수진이 눈을 깜빡거렸다.

구산인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수진만을 도피시킨 이유.

“그, 글쎄요. 아, 당시에 몇 분이 해주신 말로는 요술사의 힘이 어쩐지 약수지괴(弱水之怪)에서 나온 듯하다고. 그럴 리 없다고 서로 다투기까지 하셨죠. 그게 뭔지는 물을 새도 없었습니다만, 하여간 복마의 공부가 전혀 통하지 않아서.”

해원기의 눈썹이 또 꿈틀했다.

약수지괴. 사일신화의 내용 중에 관계된 부분이 있다는 게 기억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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