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25화 (126/410)

제32장 사일신화(射日神話) (1)

오공선사가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좌우를 번갈아 보았다.

“빈승이 워낙 말재주가 없으니 이 복잡한 사연은 두 사제와 나눠서 설명해야겠습니다. 이사제가 수진의 얘기부터 시작해주겠나.”

무슨 만담가들 모임도 아닌데 슬쩍 말머리를 건네고,

오능선사와 오정선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

영응진인은 본디 전진파(全眞派)의 말대(末代). 한때 천하 도문(道門)의 으뜸으로 여겨지던 전진은 원대(元代)를 거치면서 급격히 쇠락했고, 그 도결(道訣)과 무공은 전부 흩어져버렸다.

무너진 전진파를 일으킬 유일한 희망이었던 영응진인이었으나 그 사형인 묘응진인(妙應眞人)이 바로 사문을 배반하고 강호를 팔아넘긴 역도. 영응진인도 천하를 집어삼키려는 음모에 희생되었다.

그러나 천하 도문이 높이 받들 대도(大道)를 이룬 영응진인이 어찌 헛되이 사라졌으리.

무당에 천하 회생의 기틀을 부탁하고, 공동에 그 일맥을 전했다.

그러나 천지를 모조리 휘말아버린 사마(邪魔)의 창궐에 무당산은 폐허가 되었고 공동산의 선적(仙跡)엔 이단들만 들끓었다.

공동은 본래 좌도(左道)의 방사(方士)들과 변경의 무뢰배들까지 어우러져 있다가 차츰 정도로 돌아선 문파. 정도를 걸으며 사마와 싸운 이들이 사라지자 도로 사기꾼들이 몰려든 셈이 되었는데.

그래도 영응진인이 남긴 도맥은 온통 사이비와 요사스러운 무리가 점거한 공동산에서 용케 그 생명을 이어갔다. 남모르게.

그렇게 백 년. 득세한 삿된 무리가 몇 번이나 공동파(崆峒派)를 자처했으나 그때마다 기이하게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고, 그게 공동산 안에 있는 비밀스러운 일파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마침내 공동산의 모든 좌도와 이단들이 이 비밀스러운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힘을 모아서. 무려 일 년여에 걸쳐 참혹한 추적이 이어졌다.

과거 공동파의 진산절학(鎭山絶學)은 이미 대부분 사라졌으나 백 년이나 공동산을 점거했던 무리다. 비밀스러운 일파의 인원은 겨우 아홉, 좌도와 이단의 곳곳에 신분을 속이고 숨어 있었던 아홉 명이 차례로 쓰러지고.

이 일파의 이름도, 구성원인 아홉의 정체도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 아홉 명이 오직 어린아이 하나를 피신시키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었음을 누가 알리오.

영응진인의 도맥을 잇는 공동의 일파, 그 이름은 복마동이요. 복마구산인(伏魔九散人)이 목숨을 걸고 지킨 어린아이 하나, 그 아이가 수진이었다.

“영응진인께서 공동에 후대를 부탁할 때 남기신 참언(讖言)에 백 년 뒤를 가리킨 부분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 어린아이, 수진이를 소림과 무당으로 보내게 된 것이었지요. 그 참언이…… 흐음, 먼저 삼사제의 얘기부터 들으신 후에 함께 얘기할까요.”

오능선사의 말이 끝나자 슬쩍 끼어든 오공선사. 워낙 길고 복잡한 사연인지라 이렇게 정리하지 않으면 날이 새도록 끝나지 않을 터.

오정선사가 뒤를 잇는다.

아미산에는 예전부터 종파가 다른 불문이 여러 곳 있었다. 그중에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곳은 보광사(普光寺), 복호사(伏虎寺), 비래전(飛來殿) 등. 흔히 아미파(峨嵋派)라고 하나처럼 부르지만, 실상은 여러 불문이 종파를 따지지 않고 어울리기 때문이다. 때론 보광사의 주지가, 때론 복호사나 만불전의 고승이 장문인 자리를 맡았는데,

금정의 불광암에 여래의 현신이라 할 성승이 출현했고, 그 성승 요공대사가 천하 불문의 대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강호의 존경과 앙모가 모이는 구심점의 출현을 사마가 어찌 두고 볼 수 있었겠나.

사악한 음모와 흉측한 마수가 불광암에 먼저 손을 뻗으니 요공대사는 헤어나기 어려운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불가의 성승은 도가의 도봉과 마찬가지로 해를 입었으나.

후사를 소림에게 맡기고, 불광암을 스스로 파괴하여 오용되지 않도록 하였다.

아미파의 독특한 전통 덕에 요공대사가 죽은 후에도 보광사와 비래전을 중심으로 하는 무승(武僧)들이 다행히 천불각(千佛閣)을 결성해서 아미파의 이름을 이어갔고.

무수한 절학을 잃어가는 중에도 어떻게든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다양한 종파가 모인 아미의 상황이 또 다른 결과를 낳아서 복호사와 화엄탑(華嚴塔) 등이 과거 금정 불광암을 계승한다는 명목으로 천불각과 대립하게 되었고, 천불각도 촉지(蜀地)의 무인들을 방만하게 받아들이면서 승복을 걸친 검객이란 조롱 속에 아미의 정통을 주장하기 어려워진 형세.

즉 사마를 상대하는 외부에 못잖게 내부의 혼란도 가볍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사마의 난이 종식된 이후로 내부의 모순이 돌출되어 금정 불광암의 적통을 따지는 분란이 거세졌는데.

아미산 금정의 뒤쪽, 언제나 그늘진 산기슭에 자리한 볼품없는 바위 하나.

선승(禪僧)이 홀로 좌선하러 찾기에도 어울리지 않는 그 볼품없는 바위 아래에 성승 요공대사의 유진(遺眞)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걸 아직 불경 한 줄 제대로 외운 적 없는 불목하니 사미승이 발견할 줄도.

난세에 버려진 아기. 탁발하던 노승이 키우다가 노승이 죽은 후론 이 암자 저 암자에서 나무하고 불 피우며 살아온 절집 아이.

이 사실이 밝혀지면 아미파의 적통을 두고 싸우는 두 파벌 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니, 그 유진을 발견한 사미승은 어떤 처지가 될지.

작은 암자에 거하는 무종파(無宗派)의 승려들은 마침내 사미승 인광을 아미산에서 내보내기로 했고.

인광은 홀로 길을 떠나게 되었다.

오정선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공선사가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그렇게 겨우 삐딱한 상투 하나 올린 꼬마 도동은 홍진도(紅塵道)를 걷고, 계도 받지 못한 아기 중은 고행선(苦行禪)을 시작했더란 말이외다. 더구나 두 녀석이 장안(長安)에서 걸식하다가 서로 알게 되어 함께 소림까지 왔으니 인연도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감숙 공동산과 사천 아미산은 아득히 먼 거리.

그야말로 딴 세상과 다름없는 곳에서 자란 아이들이 서로 만나 함께 소림에 왔다니.

해원기가 어쩐지 가슴이 울려서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다.

“몇 살이나 먹었습니까?”

“수진이는 열세 살이라고 알고 있는데, 인광이도 대강 비슷할 겁니다. 그래도 인광이가 항상 형인 척하지요.”

웃음을 머금은 채 답하는 오공선사.

해원기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열세 살. 여염집 아이라면 한참 몰려다니며 즐겁게 놀 때다. 어른들 일을 도와가며 물정도 조금씩 알아가고 몸집도 커지면서 몰래 어른인 체 까불 나이.

소림사에서 야반도주한 개구쟁이라고만 들어서 각각 기막힌 사연을 지녔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수진은 복마구산인이라는 아홉 명의 도인이 목숨을 걸고 피신시킨 아이, 인광은 하찮은 처지에 우연히 기연을 얻었건만 되레 골칫거리가 되어 또 버려진 아이.

요동 벌을 유랑하는 곤궁한 일족을 위해 매를 부리는 재주로 팔려가야만 했던 해원기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도봉의 일맥이니 성승의 유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데도 개구쟁이로 지내고 있잖나.

“재미있는, 독특한 아이들이군요.”

괜스레 일어나는 감상을 접으며 그렇게 말을 받았는데.

오공선사는 아직 할 얘기가 남았던 듯.

“재미있다라. 둘 다 평범하지 않은 사연을 지녔지만, 정말 흥미로운 건 도봉의 참언과 성승의 유진이지요. 득도하신 고승대덕(高僧大德)의 미래를 엿보는 예지랄까, 두 아이가 산을 떠날 걸 다 아셨고 도중에 사귀어 평생의 도반(道伴)이 된다는 것도. 더구나…….”

말을 끌면서 두 눈에 기이한 광채가 어린다.

“참언과 유진의 마지막에 똑같은 글귀가 있답니다. 처음엔 무슨 뜻인가 해석하느라 꽤 애를 먹었고. 삼사제, 베낀 걸 갖고 있지?”

오정선사가 소매에서 누런 종이 하나를 꺼내 석탁 위에 놓았고.

해원기가 그 위에 쓰인 글귀에 시선을 모았다.

한참 두 아이에 관한 얘기를 들었지만, 처음에 오공선사는 해원기와 인연이 있다고 했었다.

이게 핵심이라는 걸 직감했다.

금오해우(金烏解羽), 육악주살(六惡誅殺). 궁시수명(弓矢受命), 호생지덕(好生之德). 유형위훈(遺形爲訓), 난석위계(卵石爲戒). 불이신통(不以神通), 개이흉기(皆以凶器).

가승사도(假僧詐道), 참칭진보(僭稱眞寶). 구육지겁(九六之劫), 영산시란(靈山始亂). 환소엽지(還蘇葉砥), 수구역량(雖具力量). 막약근왕(莫若勤王), 이실직고(以實直告).

오정선사가 바로 해석을 이어간다.

“금 까마귀 깃을 잃고, 여섯 짐승 주살되네. 활과 화살 명 받은 건 생명을 아껴서지. 계란 모양 돌로 그 형태를 남겨두어 훈계로 삼았으니, 신통하다 하지 말게. 다 흉하게 쓰인다네. 이 여덟 구절은 십일병출(十日並出)의 사일신화(射日神話)를 말한 것 같습니다. 비록 쓰인 이유는 몰랐지만, 금방 풀어낼 수 있었지요. 그런데.”

해원기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얼마 전 약왕당에서 단목정이 말했던 금오혈석. 지금도 해원기의 수중에 있는 오리 알 모양의 돌. 갑자기 그것과 연관된 참언이 나올 줄이야.

백 년 전에 천하를 위해 희생한 불가와 도가의 두 위인이 남긴 글귀에.

저절로 다음 글귀를 풀어 읽게 되었다.

“거짓된 승려와 도사, 참람하게 진짜 보배라 하고. 구육의 겁난은 영산에서 시작 된다…….”

참언은 뜻을 깊이 숨긴 예언. 서두른다고 바로 이해할 수는 없다.

해원기가 첫 네 구를 중얼대다 머뭇거리자, 오공선사의 조용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소림의 대환단(大還丹)과 무당의 자소단(紫蘇丹)이 영약이요, 검주께서 각각 맡기신 불타패엽(佛陀貝葉)과 마검지(磨劍砥)가 비록 신력을 지닌 보물이지만. 왕(王)이 하시는 일에 온 힘을 다해서 있는 그대로 아뢰는 것만 못하도다.”

해원기가 천천히 굳은 얼굴을 들었고.

그 시선을 기다렸다는 듯이 삼장신승이 동시에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무겁고 낮은 불호성. 입설정 안이 잠시 침묵에 잠겨 든다.

왕이 하시는 일.

먼저 입을 연 이는 역시 오공선사.

“몇 글자가 다르긴 해도 의미는 같아서 백 년 전의 성승과 도봉이 이렇게 똑같은 예언을 남긴 데에 놀람을 금치 못했습니다. 동시에 이 예언이 그만큼 큰 의미를 지녔다고 봐야겠지요. 아직 계란 모양 돌이나 구육지겁 같은 모호한 부분이 있긴 해도, 마지막에 두 아이를 통해 왕에게 이실직고한다는 구절…… 해 대협과의 인연을 백 년 전에 이미 예지했으니. 허허허.”

둥그런 눈을 아이처럼 깜빡이며 웃는 노승.

소림의 방장선사로서도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는 일이리라.

왕. 그 글자가 해원기를, 검왕이라는 별호를 가리킨다.

선뜻 인정하기 어려운 억지 같지만, 사일신화와 연관된 앞 구절 때문에 거부할 수도 없었다.

개봉에서 풍진삼우를 만났을 때, 짧은 시간과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환경 때문에 간단히 겁표 사건과 그 이후의 진전을 밝혔을 뿐.

상자에 든 오리 알, 단목정이 금오혈석이라 의심한 돌멩이를 꺼내 보이지 못했다. 당시엔 아직 금오혈석이라는 의혹조차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공동, 아미와 관계가 있다.

해원기가 비로소 오능선사와 오정선사가 왜 수진과 인광의 사연을 자세히 밝혔는지 알게 되었다.

두 아이가 겪은 사연.

“공동에서 복마구산인을 해친 좌도와 이단, 아미에서 금정의 적통을 놓고 대립하는 분란. 이 두 가지 일에 공통점이 있습니까?”

오공선사가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바로 알아채시는구려. 빈승도 이 두 아이에게 듣고 나서 괴이한 느낌이 들더군요. 지금으로부터 대략 일 년 전, 공동의 좌도가 복마동을 찾자고 힘을 모았고, 아미의 복호사와 화엄탑도 거의 같은 시기에 천불각과 대립하는 구도를 만들었답니다. 더구나 그렇게 된 원인이 공동 좌도에 새로이 엄청난 방사가 나타나 공동산 전역을 휘하로 두었으며, 아미 복호사와 화엄탑에도 각기 이전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승려가 한 명씩 나타났는데 그 능력이 성승에 버금갈 정도라고. 흠, 여기에 관해선 설명이 조금 필요하겠으나, 빈승이 감히 다른 문파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긴 어렵습니다. 해 대협도 휴식이 필요하니, 내일 아이들에게 직접 들으시는 게 어떨지요?”

“아, 이런 실례를.”

해원기가 새삼 한밤중임을 깨닫고 무안한 표정이 되었다.

소림을 이끄는 삼장신승이 전부 맞아주고, 대화로 긴 시간이 지났다.

검왕이니 뭐니 해도 해원기가 이렇게 극진한 대접을 받는 건 오직 사부가 이룩한 업적 덕분.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더벅머리 젊은이에겐 지나치다.

또 오공선사의 입장도 생각해야 하지 않나. 백 년에 걸친 인연이라고 사미승과 도동을 받아주었지만, 그렇다고 소림이 공동과 아미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 자격은 없다.

긴 시간을 들여 두 아이의 사연과 참언까지 일러주어서 인연이 해원기에게 닿을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준 것만으로도 큰 공덕.

해원기도 시간이 필요했다.

악송령의 상태도 확인해야 하고, 팽조린과의 싸움에서 느꼈던 의혹도 되짚어 봐야 한다.

계면쩍게 더벅머리를 긁는 해원기.

원숭이, 돼지, 물귀신을 자처하는 세 명의 노승이 그런 해원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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