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노기충천(怒氣衝天) (4)
웃음을 거두고도 오공선사의 얼굴에는 미소가 남았다.
“몸매와 어울리지 않는 이사제의 기민함, 쪼그리고 앉아 점만 쳐대는 삼사제의 노고에 비하면 이 늙은 중은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만. 그래도 때가 이르면 사람도 이른다는 그간의 믿음이 보답을 받은 것 같아 참으로 기쁘구려. 해 대협을 오늘 소림에서 맞이하는 건 불존이 보우하심이외다.”
불존이니 보우니, 중이 흔히 입에 올리는 소리지만.
오공선사는 진심으로 이 만남에 감동한 눈치. 커다란 눈망울이 나이답지 않게 반짝거린다.
“제가 등봉에 들어온 걸 어찌 아셨습니까?”
해원기 역시 이 기묘한 해후가 궁금했던 차.
오공선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슬쩍 감는다.
“인연이란 그런 건가 싶더군요. 실은 저 밖의 개구쟁이들이 절을 뛰쳐나가기 전에 등봉 쪽에서 심상치 않은 소식이 들어왔더랍니다. 자칫 엉뚱한 일에 휘말릴까 싶어 두 사제들과 함께 사태를 파악하려고 했고, 그러다가 뜻밖에 검왕(劍王)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뜨였으니. 이렇게 보면 저 개구쟁이들도 나름 제 몫을 했던 거군요.”
오정선사의 점복(占卜)에 검왕이라는 글자가 나왔다라. 신통한 얘기긴 한데, 등봉 쪽의 심상치 않은 소식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문을 닫고 세상과 떨어져 지낸 소림이.
커다란 눈을 감으면서 오공선사의 목소리는 많이 침착해졌다.
“이십 년이 채 되지 않은 세월, 소림이 비록 절은 지키고 중은 모았으되, 경을 외우고 부처를 찾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물며 과거의 죄업이 아직 다 씻기지 않은 판이라. 아미타불. 그래서 감히 경망스럽게 나돌아 다니지 않도록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세상과 연을 끊을 수는 없지요. 해 대협은 혹시 중들이 어떻게 먹고사는지 아십니까?”
여전히 감은 눈. 해원기의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다.
“뭐, 중이나 도사나 다 마찬가지. 자급자족으로 안 되는 건 전부 백성들에게 의지해야만 하니까. 중생구제니 확철대오니 떠들면서 사실은 무위도식하는 게 출가인. 허, 그러고 보면 소림과 무당은 떳떳하게 걸식하는 개방을 볼 염치도 없구나. 허허허.”
웃으며 눈을 뜨지만, 그 눈빛도 이미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가.
“하찮은 불도라도 제대로 닦으려면 한평생도 모자라서. 소림은 그간 오백나한(五百羅漢)의 머릿수도 다 채우지 못했지요. 그러나 다행히 세간에 믿음이 굳은 선제자(善弟子)가 적지 않아 그 덕을 크게 입었고. 검주께서 구해주신 강호가 어찌 돌아가는지도 자연히 알 수 있었답니다.”
검주께서 구해주신 강호.
말하는 오공선사 뿐 아니라 좌우의 오능과 오정선사 역시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 속에는 똑같이 깊은 감사와 존경이 담겼다.
그러나 대화의 주제를 놓치지는 않는다.
“중생고(衆生苦)가 어찌 사라지련마는, 또 헛된 욕심 하나가 그 고통을 더 가중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희같이 머리 깎은 중들은 언제나 살피고 또 살펴야 하는 법. 강호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엉뚱하게도 우물물이 강물을 범하려는 기미가 날로 심해졌답니다. 참으로 무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미타불.”
정하불상범(井河不相犯).
오래된 강호의 묵계가 다시 나왔고, 그건 소림이 이미 동창을 주시했다는 의미.
오능선사가 가볍게 혀를 차며 말을 보탰다.
“쯧, 방장 사형의 말씀은 너무 우활해서. 무공과 상관없이 독실하게 부처를 믿는 재가불자(在家佛子)들이 속세의 눈과 귀가 되어주었고, 그 덕에 강호의 암류가 동창과 관계있음을 알았지요.”
오정선사도 쳐진 인상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동창만으로 해석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역대 왕조, 심지어 막강한 원(元)의 조정조차 감히 범하지 못했던 묵계거늘, 하찮은 환관들이 어떻게 그런 욕망을 품었을지. 강호 내부에도 예전과 달리 속세의 권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이 늘었고. 이런 상황이 어쩐지 과거와 닮은…….”
과거.
칠십 대의 고승이 말을 맺지도 못하고, 마음을 다스리려는 불호도 외우지 못했다.
그만큼 참혹한 과거였으니까.
해원기의 얼굴도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마음속으로 우려하던 것이 결국은 이런 식으로 드러나나.
호중객잔에서 벌어진 사건에 우연히 말려 들어가 무림에 발을 들였고.
처음에는 단지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에 분노했지만, 기묘한 겁표 사건과 얽혀 점차 동창과 맞서는 쪽으로 발전되었다.
그 와중에 불쑥불쑥 튀어나온 과거의 잔재들. 다 타버린 잿더미라 여겼건만, 그 속에 아직 잔불이 남아 다시 재앙을 일으키려는 것인가.
“제가 감히 논할 부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강호가 강호인 소이, 무림이 무림인 까닭은 스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배웠습니다. 어떤 식으로 바뀌든 그 또한 순리를 따라 자연스러워야만 하겠지요. 그럼 저에 관한 얘기도 진즉 들으셨겠군요?”
사부에게 들은 과거의 일. 직접 겪지 못한 해원기가 현재를 함부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당금의 정세를 자세히 파악할 필요가 있고.
해원기의 묻는 말에 오공선사가 동그란 머리를 끄덕였다.
“목적을 갖고 일부러 만든 소식 망이 아니기에 시차의 혼란이 있긴 합니다만, 산동에서부터 여러 소문이 전해졌었지요. 그러다가 그 소문의 실체를 대강이나마 알게 된 건 마침 무공의 편지가 도착한 얼마 전이었습니다.”
“아.”
개봉에서 풍진삼우를 만났고, 헤어지면서 소림을 방문하기로 약속까지 했던 걸 깜빡 잊었었다.
치승 무공화상이 당연히 해원기가 무림에 나선 소식을 알렸을 터.
말끝을 흐렸던 오정선사가 다시 설명을 덧붙였다.
“무지한 빈승이 어찌 천기의 흐름을 알겠습니까. 그저 하릴없이 별이나 세고 점이나 치는 주제, 그래도 무공의 편지를 받은 후로는 자꾸 해 대협 생각이 나서. 꼬맹이들 찾는 중에 해 대협의 명호가 나온 것도 우연이었답니다.”
비로소 오밤중에 삼장신승이 친히 마중을 나온 이유를 밝히는데.
오공선사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허허, 워낙 물먹은 솜 같은 삼사제라 귀찮으면 대강 우연으로 때우는 버릇이 있지만. 이건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지. 해 대협이 직접 두 아이를 무사히 데려오지 않았는가. 나무아미타불.”
조용한 불호에,
오능선사의 푸짐한 어깨가 움찔하고, 오정선사의 쳐진 눈썹도 바짝 올라붙는다.
인연. 해원기와 개구쟁이들 사이의 인연을 말함인가.
동창이니 암류니 나오던 얘기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지.
문득 화제가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동창을 거론한 이는 오능선사, 과거의 일을 입에 올린 이는 오정선사.
소림사 방장 오공선사는 처음부터 해원기와 두 아이만을 말했었다.
해원기가 어쩐지 미묘해진 분위기에 눈을 껌뻑이자,
오공선사가 선장으로 가볍게 바닥을 두드렸다.
그 뜻을 헤아린 지공이 입설정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해원기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뒤로 돌리게 되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토란 같은 머리통만 보이는 두 아이.
“머리를 들어라.”
오공선사의 말에 토란 두 개가 바짝 들리고,
“이름은 아뢨느냐?”
“네.”
“네.”
제꺽 대답이 나오지만, 그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묻는 말.
“감사를 드렸느냐?”
이번엔 대답 대신에 바짝 들렸던 토란 두 개가 도로 밑으로 떨어진다. 감사는 무슨, 놀라운 무공을 보인 해원기에게 달라붙어 까불어대느라 지공이 꾸짖지 않았으면 제대로 인사도 못 할 뻔했었다.
비록 지공이 같이 오긴 했어도 해원기가 제때 손을 쓰지 않았다면 과연 토란 같은 머리통 두 개가 온전했을지.
방장선사께선 그것까지 훤히 아시는 모양.
쿵.
오공선사가 소리 나게 선장을 짚으며 꾸짖고.
“이런 무지한 철부지들!”
인광과 수진이 부르르 떨며 당장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자, 잘못했습니다.”
“용서,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나 일단 꾸짖기 시작하자 오공선사는 더 화가 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높인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들. 너희가 누구이고, 왜 소림에 왔는지 알면서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짓거리인고!”
방장선사가 일어나니 두 사제도 따라 일어서고, 손님인 해원기도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
입설정 안 석탁에 마주 앉았던 네 사람이 다 일어서자, 오공선사 다시 선장으로 바닥을 찍었다.
쿵.
“냉큼 해 대협 앞으로 기어와 사죄를 드리지 못할까!”
지공이 기다렸다는 듯이 두 아이를 짐짝처럼 들어 입설정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바들바들 떠는 두 아이. 해원기도 어정쩡하게 선 채 어쩔 줄을 몰랐다.
물론 야밤에 절에서 도망쳐 여러 사람을 걱정하게 한 잘못은 있으나, 방장선사가 이렇게 노해서 직접 혼을 낼 정도일까.
그것도 외부인인 해원기 앞에서. 구해준 은혜에 감사하지 않았다고 끌고 와 억지로 사죄를 시키는 건 아무래도 지나친 감이 있다. 소림사의 제자가 아니라 아미와 공동에서 왔다는 아이들에게.
그렇다고 함부로 나설 상황도 아니고.
그런데.
오공선사의 꾸짖는 목소리가 무겁게 변했다.
“불광암(佛光庵) 요공대사(了空大師)와 혼원정(混元頂) 영응진인(靈應眞人)께서 지금 너희를 보시면 어떤 심정이실꼬. 허어, 빈승이 참으로 성승(聖僧)과 도봉(道峰)을 뵐 낯이 없도다. 나무아미타불.”
질책이 탄식으로. 그리고 참괴한 심정을 가득 담은 불호 소리에.
“못난 제자가 죄를 지었나이다!”
두 아이가 합창하듯 목을 놓아 외치지만.
그것보다 해원기는 이 두 아이의 신분 내력을 알게 되어 눈을 크게 떴다.
불영암의 인광은 성승으로 일컬어진 불광암 요공대사의,
복마동의 수진은 도봉으로 존경받은 혼원정 영응진인의 맥이라니.
천하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겁난에 뛰어들어 목숨을 바친 두 분. 음모와 암해를 벗어나지 못할 걸 알고 소림과 무당에 한 가닥 생기를 남긴 위대한 인물의 후예가 바로 이 아이들이었다.
꾸짖는 건 그걸로 끝.
지공이 다시 두 아이를 데리고 나가며 입설정의 문을 닫자, 오공선사가 표정을 풀며 자리를 권했다.
“이걸로 인사는 제대로 한 셈. 철없는 개구쟁이들이라 검왕을 배견(拜見)하는 예를 억지로라도 가르쳐야지요.”
잘못하면 혼이 나야 한다. 그러나 꼬맹이들의 신분 내력을 해원기에게 밝히려고 그리 엄하게 꾸짖었을까.
“성승과 도봉의 후대였군요. 아미와 공동의 제자가 왜 소림사에 왔나 궁금했습니다.”
해원기가 새삼스럽게 두 아이가 소림에 있는 이유를 되새기자,
오공선사가 살짝 머리를 숙였다.
“과거에 소림과 무당이 지은 잘못을 이렇게나마 속죄할 수 있어서 다행이랄까. 흠, 이런 소릴 지껄였다고 조사들께 혼이 날지도 모르겠군요. 해 대협이 굳이 아실 일은 아니지만, 저 두 아이의 사연도 상당히 복잡하고, 그건 다 출가인 이랍시고 무위도식하는 중과 도사들이 본분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빈승이 괜한 소리를 자꾸 늘이는 건 또한 해 대협과 관련이 있는 듯해서. 아미타불.”
두 아이의 사연이라.
해원기가 미간을 모으며 오공선사를 바라보았다.
언뜻 떠오른 기억. 선승(禪僧)의 화두에는 다 깊은 의미가 담겼더라. 사부가 과거를 회상하며 감탄하던 혼잣말이다.
오공선사가 굳이 알 일이 아니라면서 알려주는 이유. 무슨 관련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