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노기충천(怒氣衝天) (3)
정적.
강한 힘이 마주치던 소리도 그쳤고, 눈이 어지럽게 날던 강기도 사라졌다.
미친 듯이 달려들었던 팽조린은 마치 다 타버린 촛불 마냥 무릎을 꿇은 채 흔들거릴 뿐.
팽팽하게 당겼던 실을 뚝 끊은 것처럼 싸움은 갑자기 끝나버렸고.
해원기는 무량대적을 쳐낸 자세 그대로.
“해 대협, 아니, 해 시주.”
지공이 뒤에서 조심스럽게 부르자 비로소 자세를 풀었으나,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평소의 고지식한 해원기와는 달리 어째 무례한 태도.
그러나 곁으로 다가온 지공의 시선도 해원기를 따라 팽조린을 향한다.
“마지막의 그 모습. 해 대협은 미리 아셨군요.”
칼이 부러지고 공중에서 땅바닥으로 나가떨어졌던 팽조린이 돌연 드러낸 기괴한 행동. 그건 광란에 가까웠고, 지금 바라보는 시선에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 들어온다.
우람한 체구와 당당한 용모가 저렇게 피폐해질 수 있을까. 단숨에 수십 년은 늙어버린 것 같다.
주위에 더는 들을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대협’이라고 부르는 지공에게.
해원기가 미간을 좁힌 채 시선을 옮겼다.
“뭔지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보기엔 어떻습니까?”
팽조린의 체내에 기괴한 기운이 일어난 건 감지했으나. 그게 무엇인지는 단언할 수가 없다.
소림의 승인이라면 혹시 알아볼지도.
하지만 고개를 돌리는 지공의 얼굴 또한 딱딱하게 굳은 채.
“빈승 역시. 참으로 끔찍한 형상이군요. 아미타불.”
팽조린의 육체는 대화하는 중에도 썩은 나뭇가지처럼 바스러지고,
무겁게 외우는 불호를 들으며 해원기도 천천히 본래의 신색을 회복해갔다.
팽조린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기를 꺾어놓으려고 몇 차례 손을 더 써서 팔이나 다리를 부러뜨리는 정도까지만 예상했었는데.
도강을 펼치기 전에 입에 넣었던 뭔가가 문제의 원인일 것이다.
그저 도강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도강이 깨진 후에 더 큰 변화를 일으켰다.
무엇일까.
“아무리 체내의 잠력을 끌어올려도, 진원을 전부 소모한다 해도 저런 지경까지 몰아가기는 극히 어려운. 흠, 자존심만으로는 불가능하지요.”
풀썩.
해골처럼 변해버린 팽조린이 마침내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해원기와 지공은 굳이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았다.
머리칼과 수염도 다 없어진 저 처참한 몰골, 누가 팽조린이라고 알아볼 수 있겠나.
도산초벽이라는 자부심에 목숨을 걸었다곤 볼 수 없다고.
지공의 말에는 팽조린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서.
해원기가 새삼스럽게 지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암자와 도관을 찾으라는 봉대저의 말을 따라 움직이다가 우연히 마주친 인물. 아니, 우연이 아니라 지공은 마치 해원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찾아왔었다.
제대로 그 사연을 듣기도 전에 싸우는 장소로 향하게 되었고,
아슬아슬하게 악송령을 구하면서 팽조린과 맞붙게 되었으니. 지금까지 그저 안면만 튼 사이랄까.
해원기가 먼저 주먹을 감싸 쥐었다.
“하여간 선사 덕분에 때를 맞추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까먹을 뻔했던 사례를 진지하게 표하자, 지공의 부리부리한 눈매도 살짝 누그러지고.
“아미타불, 빈승은 단지 심부름을 했을 뿐이지요. 우선 해 대협의 벗과 아이들부터 살핍시다.”
소림의 전통인 반장례를 취하면서 폐묘 쪽을 가리킨다.
맞는 말.
어떻든지 간에 싸움은 끝났고, 구출한 이들을 챙기는 게 먼저다.
호목존자라 불리는 근엄한 외모와 달리, 지공은 상당히 민첩하고 의술에도 조예가 있는 듯.
악송령과 이환의 맥을 짚고 외상을 살피는 동안,
해원기는 비로소 두 아이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아미타…… 우와! 누구시죠? 어마어마하던데요, 저 못된 것들을 그냥 쓱싹.”
“원시안진(元始安鎭), 원시안진. 웬 호들갑이야, 무례하게. 에, 저는 수진이라는 도명을 받은.”
“인마, 우리 이름은 벌써 알잖아. 멍청한 꼴통이 어울리지도 않는 점잖을.”
“허어, 어째 이러실까? 점박이는 출가인의 품위도 배우지 못했는가. 귀한 인연을 맺으려면.”
“너도 조금 전에는 입을 딱 벌려놓고선. 나한테 엄청 아는 척했잖아.”
“험험, 그거야. 근데…… 그거, 검기. 검기 맞죠? 아, 검기를 넘어선 강기니까.”
“맨손으로 어떻게 한 거예요? 그 수법 이름이 뭔데요?”
“그냥 수법이 아니죠? 마땅히 기고한 신공이 바탕이 되어야…….”
한 마디도 꺼내기 전에 산사태처럼 쏟아지는 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해원기의 가슴팍에 닿는 키. 인광이라는 사미는 몸집이 좀 더 단단해 보이고, 수진이라는 도동은 날씬한 체형이지만 어차피 도토리 키 재기. 가까이서 보니 얼굴의 솜털도 보송보송한 아이들이다.
방금 그렇게 흉험한 일을 겪어놓고도 이렇게 기운이 넘치고.
해원기를 요리조리 살피는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신이 나서 자기들끼리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다.
“이 녀석들. 똑바로 인사를 올리지 못할까!”
지공이 바로 와서 엄하게 꾸짖지 않았으면 한 시진은 족히 떠들었을 듯.
찔끔한 사미와 도동이 그제야 자세를 갖추고 예를 차렸다.
“아미타불. 처음 뵙습니다. 금정(金頂) 불영암(佛影岩)의 인광이라 합니다.”
“원시안진. 예를 잃었습니다. 광성(廣成) 복마동(伏魔洞)의 수진이옵니다.”
생김새대로 사미는 굴강하고, 도동은 부드러운 기질을 드러내는 인사인데.
답례하던 해원기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해원기라고 하네. 호오, 아미(峨眉)와 공동(崆峒)에서 온 고제(高弟)들. 만나서 반갑군.”
두 아이의 내력이 뜻밖이라.
고지식하게 인사를 나누면서 절로 지공을 쳐다보게 된다.
지공은 소림사의 승인, 이곳은 숭산 아래의 등봉. 사미는 당연히 소림일 줄 알았고, 도동도 대강 무당 출신이라 여겼건만.
금정과 광성은 아미와 공동을 뜻하는 대칭이다. 하남에서는 아득히 먼 사천과 감숙의 명산,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불영암과 복마동도 처음 들어보았다.
쳐다보는 이유를 짐작하는 지공이 고소를 지었다.
“그럴 까닭이 있답니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요. 절에서 큰스님이 기다리실 겁니다.”
소림사로 청하면서.
“인광은 악 대협을, 수진은 소저를 모시도록. 조심스럽게.”
지시를 내리자, 해원기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악형은 제가 업죠. 이환 소저는 미안하지만, 행자(行者)와 선동(仙童)에게 폐를 끼치겠네.”
행자나 선동은 어린 출가인을 높여 부르는 호칭.
당장 인광과 수진의 입이 헤벌쭉 풀어진다. 지공이 가만히 감탄하는 것도 모른 채.
이십 년 가까이 소림은 산문을 개방하지 않았다.
강호와 교류를 끊은 채 일반 향화객(香火客)도 들이지 않았으니 절이 어떤 모습인지 제대로 아는 이도 없고.
그저 가끔 외부에 얼굴을 보이는 승려가 몇 있을 뿐, 그중에 가장 이름이 알려진 자가 바로 지공이다. 봉문(封門)이 아닌데 봉문과 다름없는 소림사.
정식으로 산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선 건 해원기가 처음이 아닐까.
목봉(木棒)을 든 젊은 승려들이 곳곳을 지키다가 예를 올리는 걸 보면 지공은 꽤 높은 위치인 듯.
먼저 작은 법당에 악송령과 이환을 눕히고, 보살필 사람을 부르더니.
해원기만을 따로 안으로 안내했다.
달빛이 훤한 깊은 밤. 절과 도관은 한밤중에도 깨어난 이가 있다지만, 소림사의 젊은 승려들은 상당히 많은 숫자가 보인다.
주위를 둘러보던 해원기가 바로 뒤를 따르는 인광과 수진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까불대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절에 들어온 후로는 풀이 죽어서 그저 조용히 따라다니기만 한다.
‘어지간한 장난꾸러기라. 걸핏하면 눈을 피해 놀러 다니다가 오늘은 아예 야반도주를 감행했다지. 어떻게 소림에 오게 되었는지는 아직 듣지 못했지만, 꼬맹이들 크게 혼이 날 줄 아는구먼.’
오는 도중에 지공이 간단하게 얘기한 내용. 해원기와 함께 ‘큰스님’에게 가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누가 기다린다는 걸까.
풀이 무성한 작은 길을 오르자 낡은 정자 하나가 보이고 석등 불빛에 세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크고 작고 길쭉한 체형의 노승 셋.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선장(禪杖)을 짚은 가운데의 자그마한 노승이 먼저 웃음소리를 낸다.
“허허허허, 이제야 뵙게 되는구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불호와 함께 예를 취하는 세 사람. 선장을 짚어 반장례를 하는 가운데 노승과 달리 좌우의 노승은 두 손을 모아 정중한 합장으로 반긴다.
해원기가 깜짝 놀라 급히 손을 모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사부에게 들은 대로라면, 좌측 큰 체구의 노승은 오능(悟能), 우측 수척한 모습의 노승은 오정(悟淨)이란 법명. 그리고 가운데 자그마한 체구의 노승은 당대 소림사의 장문인인 오공(悟空)선사일 터.
소림을 이끄는 삼장신승(三藏神僧)이 전부 영접을 나올 줄이야.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인사말조차 선뜻 입에서 나오지 않는데.
“으엑. 방장(方丈)선사까지. 크, 큰일.”
“에구구,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진짜 기겁한 건 바로 뒤의 두 아이. 비명과 다름없는 해괴한 소릴 내면서 그대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소림사의 주지는 사방이 일 장인 작은 방에 거하기에 선문(禪門)의 종사를 방장이라고 존칭한다. 두 아이도 오공선사가 직접 나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
오공선사도, 오능선사와 오정선사도, 심지어 차분하게 배례를 올리는 지공까지.
단 한 사람도 애절하게 앓는 소리를 내는 두 아이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환한 얼굴, 부드러운 시선은 오직 해원기만을 향할 뿐.
정자 안에는 둥근 석탁 하나, 투박하게 돌을 깎아 만든 의자 네 개.
해원기가 자리를 정한 후에야 비로소 다시 인사를 할 수 있었다.
“해원기가 삼가 삼장신승을 뵙습니다.”
당황해서 포권을 취했던 조금 전과는 달리 양손을 포갠 장읍(長揖). 깍듯하게 예를 차리지만, 오공선사는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채 얼른 손을 내젓는다.
“되었소. 속례(俗禮)로 귀빈을 번거롭게 할 수는 없지요. 어서 앉읍시다, 오늘 워낙 달이 밝아 일부러 입설정(立雪亭)으로 모시었다오. 늙은 중이 머무는 퀴퀴한 방구석은 불편하잖소.”
자글자글 주름이 가득한 얼굴. 계인이 찍힌 동그란 머리에 커다란 눈망울, 선장을 쥔 기다란 팔이 딱 원숭이 같은 생김새이고.
해원기가 자리에 앉자마자 싱글벙글 말을 잇는데.
“인연이 다시 검주(劍主)의 후대를 만나게 하니 쪼그리고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오. 이 입설정은 마침 과거에 검주를 맞았던 곳, 게으른 사제들이 이 석탁까지 내왔구려. 세월은 참으로 물같이 흘러서 당시를 떠올리면…….”
“방장 사형.”
큰 체구의 오능선사가 가만히 말을 끊고, 불쌍할 정도로 마른 오정선사가 고개를 흔들며 불호를 외운다.
“나무아미타불.”
머쓱한 표정으로 동그란 머리를 벅벅 긁는 오공선사.
“에쿠, 반가움에 늙은 중의 주둥아리가 쓸데없는 소리까지. 에, 오는 길에 험한 꼴을 보셨을 텐데 괜찮습니까?”
얼른 화제를 돌렸고,
해원기도 평소의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검주. 과거에 사부를 알았던 이들이 사부를 부르는 호칭. 해원기를 만나면 자연히 사부를 떠올리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사부의 부탁도 잊지 않고 있다.
“네. 여기 지공선사를 때맞춰 만났으니까요. 모두가 방장선사 덕분입니다.”
해원기의 의젓한 대답에 오공선사가 커다란 눈을 되록되록 굴리며 좌우를 본다.
“이 늙은 중은 그냥 선장만 쥐고 있었고. 게으른 뚱땡이랑 불쌍한 물귀신이 한 거라…… 아, 이사제(二師弟)가 꼬맹이들 도망간 걸 알아 지공이를 불렀고, 삼사제(三師弟)가 꼴에 천기를 엿본답시고 난리를 쳤답니다. 그래서 해 대협과의 인연을 짐작했었지요. 허허허.”
오능선사는 뚱땡이, 오정선사는 물귀신.
과연 들은 대로 서유기(西遊記)에 등장하는 배역을 고스란히 흉내 낸다.
그러나 원숭이를 맡은 오공선사의 말은 오능선사의 기민한 대처와 오정선사의 신통한 예지를 의미하는 것.
칠십 대의 노승들은 젊은 해원기가 어색하지 않도록 애를 쓰는 중이다.
게으른 뚱땡이 오능선사가,
“팽가장의 팽조린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만, 동창이 이제 자신이 붙은 거로 봐야겠지요.”
라고 아뢰고.
불쌍한 물귀신 오정선사가,
“두 아이가 소림에 먼저 온 것과 해 대협을 만난 일. 모두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방장 사형께선 얘기를 빨리 진행하시는 게.”
조심스럽게 청하는 건 이제 진지한 대화로 접어든다는 뜻.
정자 밖에서 대기하는 지공의 머리에 달빛이 맺히고, 바닥에 꿇어 엎드린 두 아이는 아직 머리도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