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22화 (123/410)

제31장 노기충천(怒氣衝天) (2)

‘영약(靈藥)이라도 삼켰는가.’

팽조린이 다시 기운을 차린 건 입에 뭔가를 털어 넣었기 때문.

공력을 배증하든 금강의 신체를 이루든. 무슨 수단을 써도 상관없다.

지닌 능력과 감춘 수단을 전부 써보아라. 모조리 부숴줄 테니까.

해원기의 동시안이 푸른 불꽃처럼 일렁이고, 내딛는 걸음에는 경력이 물결처럼 퍼져나간다.

삼 장의 거리가 줄어들자,

팽조린이 구주도를 비스듬히 눕혔다.

위잉.

끝이 한 치나 부러져나간 구주도가 크게 울면서 백광(白光)을 토하고.

그 백광이 눈 깜빡할 새에 공간을 사선으로 쪼갠다.

챙.

해원기의 왼손이 귀찮다는 듯 튕겨내지만.

윙윙윙윙.

백광은 연이어 사선을 그어대서.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또 왼쪽.

단순한 베기. 그러나 속도가 점점 빨라져 백광이 마치 빗살처럼 이어지고,

채채채챙.

해원기의 왼손이 튕겨낼수록 그 수를 늘리더니 주위가 온통 백광의 파편으로 뒤덮였다.

이걸 기다렸나.

“차압!”

팽조린이 힘차게 외치면서 구주도를 거칠게 흔들고.

쐐애애애.

귀를 어지럽히는 기음과 함께 파편으로 날아가던 백광이 전부 한 점으로 응축되었다.

그 한 점은 해원기, 공간을 뒤덮던 백광이 우박처럼 쏟아지는데.

도광을 막기만 하던 해원기의 왼손이 기이하게 펴져 앞으로 뻗었다.

손바닥이 보이긴 해도 엄지와 소지만 벌리고 손가락 세 개는 붙인 모양, 장법이 아니라 오귀전륜 속에서 삼지화정(三指火正)을 발현한 힘.

파앙.

우박처럼 쏟아지던 백광이 단번에 안개처럼 스러진다.

하지만 그 순간에 또 한 줄기 백광이 해원기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야말로 번갯불 한 줄기.

지금까지 팽조린이 펼쳤던 어떤 도법보다 빠르고, 해원기는 백광의 우박을 막느라 이미 손을 펼친 상태. 피할 틈이 없고, 다시 손을 쓰기엔 늦다.

그러나 새끼손가락 하나가 나머지 손가락 세 개에 붙기엔 충분한 시간.

사지태백(四指太白)에 뇌정결.

진짜 번개는 따로 있었다.

채앵!

차가운 소리와 함께 쇳가루가 흩날리는 가운데,

“으음.”

훌쩍 뒤로 물러선 팽조린이 무거운 신음을 삼켰다.

구주도의 끝이 또 조금 부서져 나갔고, 충격에 팔꿈치까지 얼얼하다. 공력을 회복하자마자 상대에게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공격을 가했다. 해원기는 그저 방어만 했거늘, 그것만으로도 이런 충격. 게다가 가전의 보도인 구주도가 어째서 자꾸 부서지는가.

“도기(刀氣)를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군. 경금지력(庚金之力)을 칼에서 뿜을 정도면 다음 경지도 엿보았을 텐데. 그 비싼 칼을 다 부숴 먹을 작정이냐?”

문득 해원기가 건네는 말에 팽조린의 수염이 와르르 흔들렸다.

방어만 하다가 반격할 기회가 생겼으면서 도리어 뻔뻔하게 말을 건다? 사람을 얼마나 우습게보기에.

그래도 입술을 깨물며 말을 받아야만 했다.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흐, 별 걸 다 아는구나. 그럼 그 팽가금도(彭家金刀)를 멀쩡히 받아낸 네 손은 뭐냐? 금강수(金剛手)? 철왕지(鐵王指)? 전설의 태허신수(太虛神手)라도 이렇게 손쉽게 본좌의 칼을 막아낼 수는 없어.”

어떤 병기도 깨뜨릴 수 없다는 장법, 닿은 것은 죄다 부순다는 지법, 신병이기도 수수깡 다루듯 꺾는다는 신공.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기고한 절학의 이름을 대보지만, 팽조린 자신도 그중의 하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가의 선공(禪功)을 완성해야 펼칠 수 있는 금강수다. 어딜 봐서 저 더벅머리에 불가의 장중함이 있나.

귀를 찌르는 괴음을 동반하는 철왕지와도 맞지 않고, 태허신수는 그야말로 이야기꾼이나 떠들 전설의 신공이잖나.

계속 밀리면서도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

해원기가 왼손을 뻗은 채로 머리를 가볍게 저었다.

“보는 눈도 생각하는 머리도 없군. 너는 무공을 잘못 배웠다.”

안타까운 듯 나직한 목소리.

팽조린이 팽가금도라고 한 도기. 그건 분명히 경금지력의 일종이다. 몇 차례 부딪치면서 그 성질을 알았기에 도기를 우박처럼 쏟아낼 때 삼지화정을 쓴 것. 오귀전륜은 상극이니 화극금(火克金), 경금의 도기가 그대로 녹아버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양손의 검왕수로 펼쳐진 검기핍인은 한 걸음씩 다가가는 발걸음을 바탕으로 삼았다. 바로 물결처럼 퍼져가는 보병지력이니 팽조린의 칼이 아무리 예리해도 수중금(水中金)이라. 쇠는 물에 넣으면 녹이 스는 법. 녹슨 칼로 태백예금(太白銳金)을 어찌 막으랴.

팽조린의 도법은 본래 위력의 팔 할도 되지 않고, 그 칼은 이 빠진 부엌칼과 다름없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스스로 감지하지 못하고서 그저 상대방의 무공만 궁금하단 것이냐.

도산초벽이라는 예칭까지 붙은 고수가 겨우 이 정도라니.

‘무공을 잘못 배웠다’라는 건 조롱이 아니라 탄식에 가까웠지만.

당사자에겐 전혀 다르게 들릴 수밖에 없다.

“이놈!”

팽조린이 노성을 지르며 두 손으로 구주도를 쥐었다.

면전에서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치욕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동시에 구주도에서도 백광이 주욱 뻗었다. 도신(刀身) 전체가 광채로 덮이고, 부러진 칼끝이 일 척이나 늘어나 구주도는 본래보다 더 길어진 듯.

지이이잉.

앓는 소리를 내며 부르르 떠는 구주도.

폐묘 뒤에서 놀란 음성이 먼저 터지고,

“도기성강(刀氣成罡)!”

지공의 경악을 무시하듯 팽조린이 커다란 기합을 내질렀다.

“단(斷)!”

땅을 박차는 순간에 둔형류의 신법. 팽조린의 우람한 체구는 사라지고 오직 한 자루 새하얀 칼날만이 해원기의 정수리에 박혀 든다. 해원기만이 아니라 폐묘와 지면까지 두 조각을 낼 듯한 위력.

도기성강, 즉 도강. 팽조린이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요, 지공은 팽조린이 설마 이런 경지에 이른 줄 몰랐기에 놀랐지만.

지공도 팽조린도 그 전에 해원기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럴 줄 알았다.”

경금지력을 칼에서 뿜어 도기를 능숙하게 운용하는 수준. 다음 경지를 엿보았다는 건 바로 도강을 말함이다.

사 척에 가까운 새하얀 칼날을 응시하는 해원기의 오른손이 벼락같이 솟구쳤고,

그 손끝에서 먼저 공중을 꿰뚫는 건 서슬 퍼런 검형 하나.

추상검(秋霜劍)이 떨어지는 도강을 정통으로 무찔렀다.

쾅!

“으악!”

비명과 함께 공중에서 뒤집힌 팽조린의 모습이 드러나자, 해원기가 내뻗었던 왼손을 크게 휘둘렀다.

콰직. 퍽.

두 동강 난 구주도가 멀리 날아가고, 팽조린이 또 한 바퀴 뒤집혀 바닥에 떨어졌다.

둔형류의 신법으로 해원기의 머리 위에서 내리친 도강, 추상검에 의해 꿰뚫리면서 공중으로 이 장 가까이 퉁겨졌다. 그냥 두었다면 얼굴부터 떨어져서 목이 부러졌을 터.

해원기의 재단경위가 자세를 바꿔줬으나. 등과 허리가 멀쩡할 리 없다.

일부러 살려준 건가.

그러나 해원기는 선뜻 다가서지 않고 한 발을 크게 내디뎠다.

쿵.

땅바닥이 크게 울리면서 밀물처럼 밀려가는 경력. 사부와 탁 소숙이 즐겨 쓰던 지유진(地維震)의 수법인데.

그 경력이 미치기도 전에 땅바닥에 처박혔던 팽조린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강기(罡氣)를 연성하려면 정기신(精氣神)을 합일해야 한다.

무림의 누구나 아는 법문(法門)이다.

단련한 신체, 순후한 내공, 그리고 정신의 승화. 말이야 쉬워도 아무나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육체를 단련하고 내공을 길러도 끝내 강기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정신의 승화’가 과연 어떤 것인지는 상승(上乘)의 구결(口訣)로만 전해지기에 그저 ‘깨달음’이라고 알 뿐이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는 핵심이 바로 이것이기에, 이른바 명문이니 세가니 하는 이름은 바로 그 오묘한 구결의 존재에 달렸다.

신체와 내공이 같더라도 강기를 연성하게 되면 그 능력은 천양지차. 전혀 다른 경지이기에 월등한 능력을 발휘하고, 월등한 능력만큼 그 강기가 깨졌을 때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시간을 들여서까지 발현한 도강이 추상검에 파괴되었고, 높은 공중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처박힌 팽조린.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할 심한 내상을 입어야 하거늘.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달려든다.

어느새 쥐었는지 양손에는 세로로 쪼갠 칼집. 머리칼은 엉망으로 흐트러졌고, 전신의 백의는 갈기갈기 찢겨서 정말 미친 것 같다.

평소에 도검을 수납해 보관하는 곳. 칼집이라는 물건에는 초(鞘)나 갑(匣)이란 글자를 쓴다.

초는 가죽을 앞뒤로 댔다는 뜻이니 속에 가는 철사를 넣거나 굵은 가죽 끈으로 꿰매 형태를 잡는 것이고, 갑은 본래 상자라는 의미라 얇은 판자나 쇠를 덧대어 좀 더 무겁고 단단한 것. 겉치레를 즐기는 근래에는 갑이 더 유행해서, 팽조린의 칼집도 도갑(刀匣)이었던 듯.

그걸 세로로 쪼개어 양손에 쥐었으니 얇은 칼 두 자루와 진배없다.

예의 새하얀 도기가 무수히 뻗고, 그게 제멋대로 뒤엉키더니.

번쩍.

두 줄기 도강이 선명하게 좌우로 날아들었다.

구주도로도 사 척 길이의 도강 하나만 내리쳤던 팽조린이 칼도 아닌 칼집 조각으로.

아까보다 두 배, 아니 두 배가 넘는 능력이다.

그렇지만 해원기는 지유진을 펼친 순간에 두 손을 크게 떨쳤고, 오른손의 추상검과 왼손의 본연검이 두 줄기 도강을 베어버렸다.

퍼펑!

새하얀 도강이 터지면서 지면이 뜯겨나가는데.

번쩍, 번쩍.

흙먼지로 뿌예진 시야를 가르는 네 줄기 광채. 여덟팔자를 거꾸로 쓴 듯한 도강이 겹쳐서 달려든다.

팟.

해원기의 신형이 거침없이 마주 나아갔다.

교차하는 두 손, 종횡으로 움직이는 두 자루 검. 재단경위의 변식인 신마공무가 공간을 찢어발기면서.

파파파파.

갈기갈기 찢긴 강기가 눈발처럼 어지럽게 흩날리기 무섭게,

해원기의 왼손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공간 전체를 휘젓기 시작했다.

신마공무를 펼쳤던 두 자루 검은 어느새 사라지고, 동시안의 비췻빛이 흙먼지 속을 응시하면서.

우우우웅.

무거운 음향이 낮게 깔리자 흙먼지와 강기가 마구 뒤섞여 어지럽게 돌아갔다.

그 가운데 두 팔을 벌벌 떨며 흐느적거리는 그림자. 양손에 쥐었던 칼집 조각이 가루가 되어 떨어지고, 곳곳에서 피를 뿜는 전신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움켜쥔 듯 제대로 운신을 하지 못하지만.

해원기가 미간을 좁히며 급하게 오른손을 흔들었다.

제때에 팽조린을 제압하기 위해 심지어 천손검법 제일초 홍몽무변까지 펼쳤건만.

동시안에 잡힌 팽조린은 이미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과 풍성한 수염이 마구 뽑혀나가 절반도 남지 않은 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지나치게 공력을 남용해서 거듭 펼친 도강이 죄다 파괴되었고, 그 경력의 여파가 고스란히 반동으로 작용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위세가 당당하던 우람한 체구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질 수 있을까.

갈기갈기 찢긴 백의 안에 곳곳에서 피를 흘리는 육체는 수척하기 이를 데 없어서 도저히 팽조린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

팽조린이 처음 도강을 펼쳐 머리를 쪼개려 했을 때는 영약을 먹었다고 생각했었다.

경금지력을 깨고, 칼끝을 부수고, 둔형류의 신법으로 도주하는 것까지 차단하며 몰아붙이자 비장의 한 수를 끄집어낸 것이라고.

내공의 바탕인 진원(眞元)을 자극하는 영약이든, 아니면 잠력(潛力)을 모조리 격발시키는 극약이든.

그러나 추상검으로 도강을 파괴하면서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했다.

비명을 지르며 공중에서 떨어지던 팽조린의 눈. 그 눈에 기괴한 기운이 불쑥 일어나는 걸 순간적으로 확인했기에.

과연 내장이 흔들리고 뼈가 몇 군데나 부러졌을 팽조린이 미친 듯이 광포한 모습을 보였고.

그 잠깐 사이에 모습까지 바뀌었다.

불길한 느낌에 즉각 홍몽무변으로 공간을 조이면서 적멸검(寂滅劍)을 꺼냈다.

팍.

업화(業火)가 차갑게 타오르는 무량대적(無量大寂).

오행제림의 검왕수가 괴상해진 팽조린의 내부를 단번에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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