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21화 (122/410)

제31장 노기충천(怒氣衝天) (1)

“아, 아미타불. 검(劍), 아니, 해 대…해 시주. 자, 잠깐…….”

당황한 지공이 호칭을 몇 번이나 바꾸면서 말을 더듬었다.

이십 년 가까이 여간해선 강호에 발을 들이지 않은 소림사에서 그나마 이름이 알려진 이가 바로 지공이다.

직함은 그가 스스로 밝힌 호법. 사외(寺外)의 여러 일을 처리하느라 자주 모습을 보인 편이고, 생김새만큼이나 다부진 솜씨를 보여 호목존자라는 별호가 붙었지만. 사실 소림사에서 어떤 위치인지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소위 삼장신승(三藏神僧)이란 이름을 지닌 세 명의 고승이 현재의 소림을 이끌고 있다는 것 외에 세상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니까.

그런 까닭에 호목존자 지공선사가 마치 소림을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되었는데.

그 지공이 안색까지 변해 어쩔 줄 모른다.

팽조린의 시선이 재빨리 아래로 내려왔다.

지공의 당황이 같이 나타난 청년 때문이라고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보다 먼저 전신에 엄습하는 기세.

젊은 놈이 감히 천호대인의 공무라는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자마자, 돌연 머리끝이 쭈뼛하고 숨이 턱 막힌다.

‘기세, 라고?’

분명히 느끼면서도 속으로 반문이 튀어나오는 건 믿기지 않아서다.

이렇게 무서운 기세를 처음 접한 건 아니지만, 어찌 더벅머리 청년 따위가 뿜어낼 수 있단 말인가.

평범한 인상, 평범한 복장. 손에는 조그만 쇳조각 하나 들지 않았고.

그저 부릅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볼 뿐이거늘.

지공이 부르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듯.

해원기가 팽조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인광(印光)과 수진(守眞)이라고 들었다. 둘은 악형을 폐묘 안으로 모셔서 이환 소저를 위로해드려라.”

사미의 법명과 도동의 도호는 이미 지공에게 들었다. 이 두 아이가 악송령과 함께 있었던 건 기막힌 우연.

폐묘 안의 이환이 혼절할 정도로 겁에 질린 걸 미리 확인했고, 두 아이에게 험한 장면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험한 장면.

지공이 몇 번이나 호칭을 바꾼 이유도 알지만, 더는 말 할 생각이 없다.

친구가 다쳤다. 이환을 지키느라, 또 생면부지의 두 아이가 말려들지 않도록 애를 썼겠지. 악송령의 실력이라면 어떻게든 버티지 않았을까. 풍뢰(風雷)의 힘으로 내려설 때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과 다급함만 있었는데.

피를 토한 입가, 피범벅이 된 양손을 본 순간.

속이 확 뒤집히고 머리에 불꽃이 튀기는 것 같았다.

가여운 기녀 하나, 여린 아이 둘. 그들을 지키려는 친구에게 강호에서 손꼽히는 고수라는 자가 금의위를 열 명이나 거느리고.

이렇게나 핍박했더냐.

뚜벅.

한 걸음 내디디며 양손을 차례로 펼쳤다. 마치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음을 보여주듯이.

오른손에 오행제림, 왼손엔 오귀전륜.

휘리리리.

어디선가 미약한 산바람이 부나.

희미한 빛이 손끝에 어리는 것 같다.

훤한 달빛이 해원기의 손에만 비치나.

한꺼번에 덮치다가 뭔지 모를 힘에 밀려난 인자조와 묘자조. 칼을 놓친 낭패한 꼴도 절반이 넘는다.

겨우 진형을 갖추고 달려들었을 때, 또다시 돌풍에 휘말려 오 장이나 날려갔었다.

금의위에 들어와서 이런 치욕을 당한 적이 있었던가. 당두 둘은 눈이 뒤집힐 지경, 팽조린이 지공과 말을 나누든 말든 곧장 폐묘 앞을 노린다.

악송령의 살점 하나라도 베어야, 시뻘겋게 피 흘리는 꼴을 보아야만 체면이 설 터.

생판 처음 보는 더벅머리가 악송령 대신 그 자리에 있다고 머뭇거릴 리 없다. 걸리는 대로 짓이기고 폐묘까지 박살을 낼 셈.

“이야아앗!”

핏대를 세운 고함에 암기란 암기는 죄다 뿌리고, 칼을 놓친 자들은 비수라도 휘둘렀다.

굶주린 들개 떼가 한꺼번에 먹이에 달려드는 것 같이 흉측하지만, 또 그렇게 앞뒤 가리지 않는 처절한 협공인데.

해원기가 또 한 걸음 내디뎠다.

미약한 산바람이 이는 손 하나, 훤한 달빛이 비친 손 하나.

두 손이 원을 그리고 훌쩍 뻗었다.

따당. 퍼퍼퍼퍼퍽.

당두 둘의 성형검기를 뽐내던 기형검이 부러지고,

“크아악!”

합창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열 명이 사방으로 날려간다. 거대한 몽둥이에 정통으로 찔린 듯한 격통, 입에서 핏줄기를 내뿜는 자도 있다.

무수한 암기는 다 어디로 갔는지, 칼과 비수까지 전부 썩은 나뭇가지처럼 부서져 성한 게 하나도 없고, 땅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모조리 정신을 잃었다.

검왕오형의 첫 번째인 발검제형을 두 손으로 펼치는 변식(變式), 천추백련(千錘百鍊).

본래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한 형태에 오행의 상생상극이 한데 어울렸으니.

설사 백 명, 천 명에게 둘러싸여도 일거에 물리칠 수 있는 위력이다.

금의위 두 개조를 치워버리고,

해원기가 다시 한 걸음 걸었다.

시선은 처음부터 정면. 은은하게 푸른빛이 일렁이는 두 눈은 팽조린을 향한 채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맨손으로? 너도 소림에서 왔느냐?”

구주도를 칼집에 넣고 팔짱을 낀 여유 만만한 모습, 잔뜩 위엄을 갖춰 묻지만, 팽조린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졌다.

자신을 엄습했던 무서운 기세를 금의위들은 전혀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여덟 명의 번역은 그렇다 쳐도 성형검기를 연성한 당두 둘은 상대의 기세를 충분히 느껴야 마땅한데 저렇게 무식하게 떼로 덤비다니.

설마 이 무서운 기세가 오직 팽조린에게만 전해졌다는 건가. 당장 속에서 부정하는 고갯짓이 절로 나온다. 기세란 경지에 이른 고수가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위압. 가까운 거리에서야 상대를 정해서 펼칠 수 있지만, 지금 팽조린과는 오 장이나 떨어져 있잖나.

그리고서 두 손으로 금의위 열을 눈 깜작할 새에 해치우는 능력.

모르겠다. 소림의 비전절학인가?

아무런 병기도 없이 상대의 암기와 병기를 부수고 심대한 타격을 입히는 건 그만큼 심후한 내공과 수법을 지녔기 때문일 터. 전통적으로 소림은 신공(神功)과 권장(拳掌)에 뛰어났고, 지공과 함께 왔으니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다.

머리를 깎지 않은 속가제자(俗家弟子)로 비밀리에 육성한 자일지도.

의문이 계속 생겨 묻지 않을 수 없었고, 아울러 그 반응을 노리는 게 숨은 의도다.

미리 악송령에 대해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짐작했던 것과는 다르다. 이 더벅머리 청년이 어떤 자인지, 빈틈이 보이는지 조금이라도 확인해야 한다.

과연.

해원기가 걸음을 멈추었다.

“소림과는 아무 관계없다. 그리고…….”

쨍!

말을 자르는 쇳소리. 해원기가 앞섶에 묻은 먼지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털었다.

팽조린의 신쾌한 발도가 또 공간을 가르고 날아들었지만, 해원기는 쇳소리조차 듣지 못한 듯.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이며 말을 잇는다.

“나도 너에게 물을 게 있지. 너는 동창과.”

째쨍!

보이지도 않는 참격이 연달아 날아들어도 해원기의 오른손은 그저 옷매무시를 고칠 뿐.

뚜벅뚜벅.

거침없이 걷는 해원기의 발소리가 구주도가 퉁겨지는 소리보다 더 선명하다.

“또 반룡령과.”

“이엽!”

팽조린이 기합을 외치며 눈부신 도광을 쏟아냈다. 눈에 보이지도 않던 발도와 달리 팽조린의 전신을 가릴 정도의 빛 덩어리. 악송령으로 하여금 피를 토하게 했던 전광일순이란 초식이다.

그러나.

땅!

옷매무시를 고칠 때는 두 손을 쓰게 마련. 주름을 펴려고 올라온 왼손에 도광 덩어리가 물거품처럼 꺼지고,

“큭.”

짧은 신음이 들린 듯했으나. 팽조린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구주도로 이룬 빛 덩어리와 함께 산화했을 리 없고.

해원기는 전혀 놀라지 않는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옷의 주름을 편 두 손이 좌우로 나뉘었다.

검왕수 두 번째 재단경위.

펑!

해원기 앞, 삼 척 높이의 공중에서 불현듯 나타난 팽조린이 뱅글뱅글 돌아 밀려난다.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건 눈처럼 하얀 백삼 조각들.

“으웩!”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핏덩이를 왈칵 토한 팽조린이 간신히 얼굴을 들었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 어깨까지 걸레쪽이 되어버린 소맷자락.

구주도의 끝이 한 치나 부러졌고 칼과 칼집을 나눠 잡은 두 손에선 피가 뚝뚝 떨어진다.

조금 전의 악송령보다 더 심하게 당했는데.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다. 행천호의 벼슬까지 받았으면 아는 게 적지 않을 터.”

해원기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보폭도 속도도 똑같은 걸음걸이가 여전히 팽조린을 향해서 거리는 삼 장으로 줄어들었고,

두 손에 맺힌 아련한 빛이 차츰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뚜벅뚜벅.

그동안에도 흙투성이 바닥은 나무 바닥처럼 발소리를 울려댄다.

억지로 버티고 선 팽조린이 이를 갈아붙였다.

“네 이놈! 대체 무슨 사술(邪術)을 써서…….”

분을 참지 못해 외치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해원기가 먼저 말을 잘랐다.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마라. 달빛이 사라져 어두워져도 네 둔형류로는 도망갈 수 없어. 도산초벽이라며? 솜씨가 이게 다인가?”

‘쓸데없는 수작’. 수염을 붉게 물들이는 핏자국을 닦지도 못한 팽조린이 전신을 부르르 떨고,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그 뒤쪽에 흙먼지가 갑자기 풀썩거리니.

전광일순이 깨진 순간에 몸을 숨기고 기습하려 했다가 되레 크게 당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둔형류로 허상(虛像)을 남긴 채 몸을 빼려던 게 허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떻게?”

말을 더듬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신쾌한 발도를 몇 번이나 가해도, 전광일순으로 공력을 더해도, 둔형류의 신법으로 시야에서 벗어나려 해도.

전부 실패했으며 무슨 수법에 당했는지조차 모르겠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저 더벅머리는 대관절 누구이기에?

머릿속이 터질 것 같고 속이 타는 듯 급해서 견디기 어렵다.

해원기가 가까워지면서 아까의 그 무서운 기세가 또 옥죄어오고, 이제는 전신의 솜털이 다 일어설 정도로 소름이 끼쳐서.

팽조린이 황망히 품속에 손을 넣었다가 꺼내 뭔가를 입에 털어 넣었다.

이대로 해원기가 더 가까워지면 말은커녕 버티고 서지도 못할 것 같았기에.

뱃속에 뜨거운 기운이 화끈 느껴지면서 사지백해에 새로운 기운이 좌악 퍼지고, 손에서 떨어지던 피까지 멈추었다.

끝이 부러진 구주도가 다시 빛을 머금는다.

‘소주, 기가 죽는다는 말이 있죠? 그러니까 기를 확 죽여야 해요.’

악송령을 보고 노한 해원기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예전에 들었던 교 노인의 말이었다.

사부의 종을 자처해 죽을 때까지 곁에서 모셨던 사람. 온 얼굴에 칼자국이 있어서 섬뜩한 인상인데도 처음부터 해원기를 작은 주인이라 부르며 귀여워했던 사람.

흉한 얼굴에 수척한 체구였지만, 그는 한때 강호를 종횡하며 수라와 같이 살육을 일삼았던 무서운 검객이었다.

수라검 교악.

교 노인은 해원기에게 틈틈이 싸움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주곤 했었다.

싸움은 단순히 서로 실력을 겨루어 보는 비무가 아니다. 절차탁마니 무도의 수련이니 좋은 수사로 꾸며도 싸움은 결국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 서로 해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살기가 거의 없는 해원기지만, 그런 해원기도 교 노인의 인생이 담긴 가르침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고.

그건 바로 투지(鬪志)였다.

죽이기 싫다면, 죽이지 않는다면 상대가 오히려 나를 죽이려 할 터. 그럼 어찌해야 하나?

답은 그 싸우려는 의지를 꺾어버리는 거다.

‘악착같이 대들어도, 온갖 수단으로 기를 써도 절대 봐주지 않는 겁니다. 상대를 완전하게, 끝까지 밟아줘야죠. 소주의 모습을 멀리서 보기만 해도, 아니지, 소주의 이름만 들어도 오줌을 질질 싸면서 천리만리 도망갈 정도로 만들어줘야. 흐흐흐, 이래야 제대로 기를 죽였다고 할 수 있지요.’

팽조린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가는 해원기는 교 노인의 음흉한 웃음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검기핍인의 기세로 팽조린을 옭아맨 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