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사미도동(沙彌道童) (4)
폐묘 안에는 이환, 폐묘 앞에는 두 아이.
악송령의 환도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환도는 손잡이가 훨씬 길고 끝에는 커다란 고리가 달린 모양, 오른손으로만 휘둘렀던 것과는 달리 양손을 오가고, 장대한 칼날을 풍차처럼 돌려서.
마치 창을 다루는 것 같은데.
휘이이잉.
도풍이 땅바닥을 휩쓸어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난다. 장벽처럼.
사미와 도동의 두 아이를 지키려는 동작, 그러면서도 시선은 정면에서 떠나지 않고.
복면인 열 명의 공세를 차단하려는 의도지만, 정면의 팽조린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는 없다.
산속에서 한세월을 보냈으니 언제 제대로 비무를 해본 적이 있겠나.
그러나 어려서부터 군문에서 고된 삶을 살았던 기억과 돌을 다듬으며 얻은 곧은 심지가 이렇게 그를 대담하게 만든다.
어떤 수단을 택해야 하나, 과연 안전하게 막아낼 수 있을까.
주저도 불안도 생기지 않았다.
열 명이 자기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과 두 패로 나뉘어 뒤쪽의 아이들을 각각 노리는 건 전혀 다른 상황이다.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르고, 자칫 한눈을 파는 순간에 팽조린의 무서운 쾌도가 날아들 테지.
하여간 믿을 건 수중의 환도뿐.
담도(膽刀), 칼을 쓴다는 건 바로 담력(膽力)이요, 그게 악송령이 유일하게 지향하는 길이다.
칼바람이 차츰 붉은 기운을 띄고 흙먼지의 장벽이 기세를 올리는데.
“이얍!”
“야앗!”
양쪽에서 복면인들이 기합을 올리며 달려들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짧은 칼을 거칠게 휘두르고, 그 뒤에는 당두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채채채챙.
악송령이 일으킨 도풍만을 노리는 복면인들, 쇳소리가 쉬지 않고 터져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이제까지 나름 독특한 도기를 뿜어 공격하던 자들이 지금은 기형도를 몽둥이처럼 휘둘러 그저 도풍의 장벽을 부수려는 듯.
공격에 참여하지 않은 당두 둘까지 연신 기합과 고함을 더해서 더욱 정신 사나우니.
싸움 경험이 풍부한 그들이 지금 악송령의 상황을 모를 리 없다.
사미와 도동을 지키려고 심신이 분산되면 자연히 허점이 생길 터. 팽조린이 정면에 있는 것만으로도 악송령은 전력을 기울일 수 없고, 일단 파탄이 드러나면 굳이 팽조린이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목을 벨 가능성이 있다.
도풍의 방어에 치중해서 공력을 소모토록 한다. 그런 이유로 암침은 쓰지 않고 무식하게 힘으로만 달려드는 것.
채채챙.
과연 악송령이 풍차처럼 휘돌리는 환도의 장벽이 조금씩 밀려서 거의 좌우에만 힘을 쏟는 형세가 된다.
두 아이는 바로 눈앞에서 불똥을 튀기며 부딪치는 칼날에 오만상을 쓴 채 바짝 붙었고.
악송령이 점투성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여전히 뒷짐을 지고 자신을 쳐다보는 팽조린이 무엇보다 큰 압박이다. 한 호흡만 여유가 생기면 일단 복면인들을 떨쳐낼 수 있건만, 고스란히 방어에 몰린 꼴이 되어버렸다.
경험이 적어도 뻔히 상대의 의도를 알 수 있는 상황. 양쪽에서 복면인 넷이 돌아가며 휘두르는 칼을 힘으로만 버텨내야 하고, 당두 둘의 움직임까지 신경을 거슬려 차륜전(車輪戰)인 줄 알면서도 상대해야만 한다.
이대로는 항우 같은 체력이라도 지칠 수밖에 없다.
초조해진 심정이 바위처럼 굳은 얼굴 위로 언뜻 스치고, 왼쪽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도세(刀勢)를 바꾸어 현상을 깨뜨릴 셈.
바로 그 순간.
따앙!
종을 때린 듯한 굉음.
엄청난 압력에 악송령이 뒤로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좌우를 지키던 도풍의 장벽이고 뭐고 간신히 쾌도를 막아낸 환도를 손에 쥔 것만도 다행.
그러나 팽조린의 우람한 신형이 어느새 공간을 뛰어넘어 바로 앞으로 닥쳐오고,
“쳐랏!”
기회를 잡은 당두의 고함에 복면인들이 한꺼번에 덮쳐들었다.
도세가 바뀌려는 조짐을 보이자마자 그 틈을 쪼갠 팽조린의 도는 더욱 무거웠고, 우람한 체구라곤 생각할 수 없는 날랜 신법까지. 더구나 도풍이 깨지면서 등 뒤의 아이들뿐 아니라 악송령조차 당하게 생겼다.
악송령이 이를 악물었다.
땅을 박차고 거꾸로 몸을 뒤집어 두 손을 빠르게 교차한다. 환도에 어린 푸른 광채가 뒤쪽을 덮어 좌우로 줄기줄기 뻗었다.
순간적으로 내린 결정, 정면의 팽조린을 완전히 무시하고 복면인들만을 향한 공격이다.
공중에 물구나무를 선 꼴이라 팽조린에게 등을 훤히 내주지만, 당장 아이들이 칼질을 당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칫, 연등벽사(燃燈辟邪)!”
“에쿠, 난환복마(亂環伏魔)!”
꼬맹이 둘이 뭐라고 외치는지 헤아리기도 전에 신형이 또 한 바퀴를 도는 바람에 악송령이 크게 놀랐다.
자신의 거꾸로 뒤집힌 몸을 도로 세우는 부드러운 기운, 그리고 충격의 여파까지 환도 끝으로 몰아내는 견고한 힘. 두 아이를 지키려고 펼쳤던 도세가 그대로 팽조린을 뒤덮는다.
파파파팡!
어지러운 소음이 한꺼번에 울리고,
악송령이 또다시 뒤로 밀리다가 자신의 양쪽 겨드랑이를 받치는 손에 탄성을 토했다.
“허.”
격돌의 여파를 이기지 못해 폐묘 바로 앞까지 밀려나고, 피범벅이 된 양손에 내장이 흔들리는 통증도 있지만, 그 모든 게 이 순간에 느끼는 기이한 감정보다 대단하진 않았기에.
‘점박이’ 사미와 ‘꼴통’ 도동. 두 아이가 멀쩡하게 자신을 받쳐 충격을 풀어내고 있다.
팽조린이 눈에 들어오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으로부터 시선을 자신의 오른손으로 보냈다.
영롱한 광채를 뿜는 칼. 아홉 개의 조그만 점이 박힌 도신은 폭이 조금 넓고, 우아하게 휘어진 형태가 그야말로 신도(神刀)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자신의 애병이 칼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금의위들이 협공을 시작하고, 차륜전을 견디지 못한 악송령이 도세를 바꾸려는 틈을 놓칠 리 있나.
장기인 쾌도에 공력을 삼성(三成)이나 더하자 단박에 악송령의 도세가 무너졌고, 그 즉시 삼면에서 합공이 들어가니 무슨 재간을 부려도 소용없다. 더구나 악송령은 아예 목숨을 포기한 양 거꾸로 뒤집힌 자세.
한데 꼬맹이 둘이 손을 쓰자마자 이렇게 희한한 결과를 맞게 되었다.
사미를 노린 인자조는 두 명이나 칼이 날아갔고, 도동을 덮친 묘자조는 넷 모두 칼을 떨어뜨렸으며, 당두 둘은 자기 조원과 엉켜 나뒹구는 꼬락서니.
전부 엉성하게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는 듯.
게다가 자신이 작정하고 뽑은 칼은 악송령의 물결처럼 밀려드는 푸른 도기에 초식을 다 펼치지도 못했다.
악송령과 두 꼬맹이. 세 개의 목이 달아나야 마땅할 상황이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을까.
잘려나간 살점도, 부러진 뼈도, 쏟아지는 피도 없이 전부 뭐에 홀린 것처럼 거리만 멀거니 벌린 상황.
이럴 수가 있나.
자존심이 상한 팽조린의 눈에 불이 확 댕겨졌다.
소림이고 무당이고. 뒤에 어떤 고수들이 있든지 당장 도륙을 내야 이 분이 풀리겠다.
“뭣들 하는 게야!”
진형도 갖추지 못한 복면인들에게 버럭 고함을 내지르는 음성에는 팽가장 주인의 푸근함도, 천호대인의 넉넉함도 찾아볼 수 없다.
금의위들이 제정신을 찾기도 전에 팽조린의 신형이 벼락같이 튀어나갔다.
기척도 없이 공간을 건너뛰는 놀라운 경공, 그것보다 더욱 빠르게 닥쳐드는 찬란한 도광(刀光).
팽조린의 우람한 체구가 이 눈이 아릴듯한 도광에 휩싸여 악송령에게 떨어졌다.
무지막지한 도법. 악송령과 아이들뿐 아니라 폐묘와 고목까지 모조리 박살을 낼 위력이다.
악송령이 본능적으로 두 어깨를 흔들며 환도를 휘둘렀다.
겨드랑이를 받치는 두 아이를 떨쳐내고 어떻게든 이 도광을 물리쳐야 한다.
푸른 빛보다 붉은 기운이 더 짙어진 환도가 커다랗게 사선을 긋고.
펑!
“컥.”
악송령이 울컥 핏물을 토했다. 어깨가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듯, 그나마 뒤로 나동그라지지 않은 건 두 아이가 끝까지 등판을 버텨주기 때문이었다.
일 장 밖에 훌쩍 내려선 팽조린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본좌의 전광일순(電光一巡)을 막아내다니. 대체 네놈의 도법이 무엇이기에…….”
신쾌한 발도(拔刀)만으로도 강호에 견줄 자가 없다고 자부하는 그가 제대로 공력을 실어 펼친 독문의 도법이거늘.
저 날도 세우지 않은 환도로 겨우 그은 사선이 어떻게 막아냈을까.
칼을 쓰는 자의 정점, 도산초벽이라고 불리는 그조차 전혀 모르는 도법이다.
그제야 우르르 몰려드는 복면인들. 그러나 팽조린은 눈길도 주지 않고 또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 배운 도법인지, 또 그 칼은 어디서 났는지 전부.”
말을 다 맺지도 않았는데 돌연 찬란한 광채가 악송령에게 떨어졌다.
말은 단지 상대의 방심을 노렸을 뿐, 팽조린은 이미 손을 쓸 작정이었다. 뻔히 우세를 점하고서도 이런 치졸한 수단을 쓸 줄이야.
이미 손에 쥔 칼, 당연히 칼집에서 나올 때보다 더 빠르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새에 악송령의 머리가 두 쪽이 날 판.
바로 그때.
번갯불 한 줄기가 곧장 내리꽂히고,
쾅!
굉음과 함께 돌풍이 일었다. 달빛이 훤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고 땅거죽이 뒤집히는 괴변.
“으음.”
팽조린이 신음을 삼키며 급히 뒤로 미끄러졌다.
자신의 애병, 팽가의 가전보도(家傳寶刀)인 구주도(九州刀)가 휘어질 정도의 타격. 금의위들은 아예 돌풍에 쓸려 오 장 밖으로 흩어졌다.
더구나.
“악형!”
“아미타불!”
아래위에서 번갈아 들리는 목소리에 이맛살이 절로 일그러졌다.
폐묘가 기댄 바위 위에 내려서는 붉은 가사. 정수리에 찍힌 계인(戒印)이 선명하고 덥수룩한 수염에 부리부리한 눈이 인상적인 중년 승인이 오른손 하나로 반장례(半掌禮)를 취한다.
번갯불보다 조금 늦게 당도한 인물. 차림새나 반장례로 봐서 분명히 소림사에서 온 중이고,
그다음 가라앉는 흙먼지 너머 악송령 앞, 흑의경장에 회색 천을 가사처럼 걸친 청년이 굳은 표정으로 노려보는데.
번갯불과 돌풍은 전부 이 평범하게 생긴 청년과 함께 이르렀다.
뽀얗게 흙먼지를 뒤집어쓴 악송령이 억지로 고개를 들다가 마침내 힘이 빠져 무너져 내렸다.
“아, 해…대형…….”
눈이 감기고 손에 쥔 환도가 덜컥 떨어진다.
청년의 시선이 돌아가고. 피를 토한 악송령 입가의 핏자국, 호구가 찢겨 피범벅이 된 양손이 그 눈에 들어왔다.
바위 위에서 불호를 외운 중년 승려가 우선 입을 열었다.
“야밤에 이 외진 곳에서 이렇게 흉한 칼부림이라니. 빈승의 둔한 눈에 보도를 쥔 시주는 팽가장의 주인이신 구주신도 팽조린, 팽 대협으로 보입니다만. 이 어찌 된 일인지요?”
중후한 음성에 완곡한 말투지만, 부리부리한 눈에는 노기가 서려서 팽조린을 알아보고 따지는 것과 진배없다.
팽조린의 미간이 좁아졌다가 펴졌다.
“허. 이 팽모를 바로 알아보시는구먼. 실례지만 선사는?”
역시 보통이 아니다. 중년 승려의 말을 받으며 구주도를 다시 칼집에 넣는 모습에선 예의 위엄이 되살아나고,
“선사는 과분하지요. 소림의 말승(末僧), 지공(智空)이라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뵐 분이 아닌데…….”
“하아, 호법을 맡은 호목존자(虎目尊者)이셨군. 이렇게 만나게 된 건 유감이외다. 하나 본관은 지금 조정의 명을 받는 신분, 장소와 사람을 가릴 수가 없구려. 행천호(行千戶)가 수하를 거느리고 공무를 집행하는 상황이니 존자께서는 잠시 피해주시는 게 좋겠소이다.”
지공이라고 법명을 밝힌 승려의 말을 끊으며 딱딱하고 고압적인 자세를 보인다.
지공이 부리부리한 눈을 살짝 찡그렸다.
‘조정’이니 ‘공무’니. 누가 감히 끼어들었다간 경을 친다는 경고요, 행천호라는 관직까지 밝혀 입을 막으려 든다.
“아미타불. 공무라 하시니 빈승이 조금 헷갈리는군요. 본사에 공부하러 온 두 아이가 여기 있을 텐데, 계인도 찍지 않은 사미승과 수염도 기르지 못한 도동이 어떻게 공무와 관련이 있을지? 더구나 천호대인이 되신 팽 대협께서 거느린 수하가 왜 얼굴을…….”
“선사.”
지공 또한 소림의 호법. 이치를 따져 반론을 펴려는데.
문득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입이 닫혔다.
“어린아이 둘과 여린 여자 하나. 아녀자에게 떼로 몰려와 칼을 휘두르는 게 공무라는 것이냐?”
지공의 말을 막은 청년이 나직하게 이어가는 말은 워낙 낮아서 혼잣말 같지만.
지공이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평범한 용모의 청년, 해원기가 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