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19화 (120/410)

제30장 사미도동(沙彌道童) (3)

악송령과 우람한 체구의 인물 간 거리는 대략 사오 장.

싸움이 시작되고 악송령이 앞으로 나서면서 거리가 조금 줄었다 해도 족히 삼 장은 넘거늘.

성형검기를 이룬 복면인 둘이 검광을 십여 개나 뽑아내는 빠른 솜씨를 보였지만, 이 쾌도에 비하면 완전히 느림보 거북이에 불과하다.

악송령의 찡그린 눈이 빠르게 상대의 허리를 훑었다.

걸친 백삼처럼 순백의 칼집. 정교하게 문양을 새기고 은이라도 메워 넣었는지 은은하게 광채를 뿌리고, 손잡이 끝에는 푸른 수실이 가볍게 흔들린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모양. 칼집만으로 악송령의 투박하기만 한 환도와는 천양지차고, 그 안의 칼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삼 장의 거리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가른 칼.

엄청난 속도에 실린 힘은 또 얼마나 강한지.

호구를 찢고 어깨까지 울린 그 여력에 머리털이 전부 곤두서는 것 같았다.

“내 일도를 막아낸다? 그 환도는 생김새와 달리 범물(凡物)이 아니군. 칼을 여전히 쥐고 있는 네 근기도 괜찮고. 아까운 인재라는 생각이 드는데. 흐흠.”

우람한 체구의 인물도 의외였던 듯.

더는 손을 쓰지 않고 입을 놀리기 시작한다.

어지간히 자존심이 강한 인물인가 보다. 언제라도 악송령을 꺾을 수 있다는 여유가 그 당당한 위세 속에서 배어 나오고,

부러지지 않은 칼과 칼을 놓치지 않는 사람 모두 탐을 낸다.

묵묵히 노려보기만 하는 악송령.

“인자조(寅字組)와 묘자조(卯字組)를 한꺼번에 물리칠 실력. 그러나 악송령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제 막 강호에 나선 신출내기라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나름 포부와 야망을 지녔을 터. 그래, 여기서 너에게 좋은 기회를 하나 주마.”

우람한 체구의 인물은 오히려 흥미가 올랐는지 계속 말을 건넸다.

자신이 데려온 열 명의 복면인이 간신히 태세를 갖추는 건 본 척도 하지 않고서.

“본관은 당금 황실을 지키는 금의위 천호의 신분. 본관을 따르면 진충보국(盡忠報國)은 당연하며 명예와 영달을 함께 얻을 수 있느니라. 또한, 공교롭게도 같이 칼을 쓰는 자라, 네가 어떤 도법을 익혔든 능히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이르도록 도와줄 수 있단다. 어떠냐, 참으로 드문 행운이 찾아온 셈이 아니겠냐? 허허허.”

너털웃음이 살벌한 분위기를 푸근하게 바꾼다.

금의위 천호.

관위(官位)를 잘 몰라도 상당한 고관이라고 여길 품계요, 그에 걸맞은 실력과 위엄을 지녔거니와 인재를 아끼는 포용력까지 보여주잖나.

웬만하면 귀가 솔깃해지거나,

적어도 끌어모았던 힘이 풀어질 만하다.

악송령도 잠시 얼떨떨했다.

경각심을 잔뜩 올리고 머릿속으론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를 한참 궁리하는 판에.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푸근한 웃음이든 넉넉한 포용력이든 전혀 관심 없고. 상대가 하는 말 중에 제대로 알아먹은 건 복면인들이 인자조 다섯과 묘자조 다섯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뿐.

본디 명예니 영달이니, 생각해본 적도 없다.

병기를 서로 맞대고 생사를 가르는 싸움 중에 모를 소릴 지껄이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입이나 가벼우면 뭐냐고 묻기라도 하겠지만.

하여간 악송령은 싸움에 임해 조심해야 할 금기를 범했다. 방심이라는 금기. 거리를 무시한 쾌도를 지닌 자 앞에서는 참으로 위험한 짓.

그런데.

“외모는 그럴듯한데 속에는 여우가 들어앉았네. 여우가.”

불쑥 장중에 전해지는 목소리. 가볍고 빠른 말투가 어린 소년 같고.

“여우? 왜?”

뒤이어 또 다른 어린 목소리가 묻자 냉큼 답해준다.

“저거 꼬시는 거잖아. 살살 꾀어서 한입에 홀랑 털어 넣으려고.”

“헥? 사람을 꾀어 입에 털어 넣어? 그럼 요괴잖아.”

“으이구.”

딱.

“아얏! 왜 때려?”

“맞을 만하니까. 너도 인명록(人名錄)을 같이 봤으면서 누군지 몰라?”

“에? 그게…….”

주거니 받거니. 애들끼리 장난하듯 나누는 대화가 순식간에 이어져서.

우람한 체구의 인물과 복면인들 모두 미처 반응할 수가 없었다.

이곳은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언덕의 폐묘. 일부러 금의위들만이 나왔고, 주변은 관병들이 철저하게 차단하도록 했다.

금의위 두 개조. 당두를 포함한 열 명이면 거칠 것 없는 무력이지만, 악송령의 만만치 않은 실력에 굳이 천호대인까지 직접 나선 상황.

이 폐묘를 둘러쌀 때부터 주위를 몇 번이고 확인했거늘.

인자조의 당두라는 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떤 놈이냐!”

“음?”

악송령이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건 역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지만.

폐묘를 가운데 끼고 자라난 고목 위에서 툭, 하고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

폐묘를 찾아 이환을 안치하고서 몇 번이나 주위를 경계했는데.

악송령 뿐 아니라 장중 모두의 시선이 저절로 모여들었다.

누구도 말소리의 주인공이 고목 위에 있는 줄 몰랐고, 더구나 그 차림새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어서.

고함을 지른 당두조차 선뜻 말을 잇지 못한다.

열대여섯 살은 먹었을까. 아직 양쪽 볼에 홍조가 남은 소년 둘.

하나는 박박 깎은 머리에 단출한 회색 승복을 걸쳤고, 또 하나는 왼쪽으로 삐딱한 상투를 틀고 흰 깃에 푸른 도복을 입었으니.

어리긴 해도 분명히 중과 도사의 행색이다.

다부진 체구의 어린 중은 굵은 눈썹에 큼직큼직한 이목구비인데 미간에 붉은 점 하나가 눈에 띄고, 수척한 체형의 어린 도사는 가느다란 눈썹에 감은 듯 가는 눈매가 웃는 듯한 인상.

어린 중은 손에 알이 굵은 단주(短珠)를 들었으니 사미(沙彌)가 틀림없고, 어린 도사는 허리춤에 기다란 불진(拂塵)을 꽂았으니 영락없는 도동(道童)일 터.

절에서 고승을 모시는 사미와 산에서 진인을 시봉해야 할 도동이 어떻게 나타났을까.

이 시각에, 이런 곳에. 둘이 함께.

그것도 장중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마른 체형의 도동이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사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맞네. 아가씨 지키려는 이 무뚝뚝이 아저씨는 착한 사람, 얼굴 가리고 몰려든 저쪽이 나쁜 사람이야. 그래도 저 사람이 나쁜 사람 우두머리란 건 이상하잖아? 명성이 대단하다고 적혀있었는데.”

그런 도동을 흘겨보는 사미.

“이런 꼴통이. 명성이 대단하면 착한 거냐? 그 사람됨이 선인지 악인지는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배웠잖아. 오밤중에, 복면 뒤집어쓰고, 여럿이 몰려와서 착한 사람 하나 해치려는 나쁜 사람 우두머리. 무뚝뚝이 아저씨 실력이 괜찮아 보이니까 살살 구슬려 한패로 삼으려 하잖아. 네 말대로 요괴라구.”

짜증을 내서인지 미간의 점이 더 붉어졌다.

고목에서 뛰어내린 후에도 전혀 주위에 신경을 쓰지 않는 두 아이.

대화를 들어보면 처음부터 지켜본 모양인데,

병기를 든 어른들이요, 금의위라는 이름도 나왔으며, 살벌한 격돌이 한 차례 벌어졌음에도.

참으로 방약무인하다.

“소림과 연락이 되었을 리 만무하거늘. 꼬맹이들은 본좌가 누구인지 아는 듯하구나. 흐흠.”

풍성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는 말에는 의혹이 담겼다.

우람한 체구의 인물. 자존심이 강한 그가 이 사미도동의 출현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하들에게 맡겨두긴 했어도 스스로 기척을 감지하지 못하다니.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꼬마 둘은 절대 평범한 사미와 도동이 아니다.

당장 머리를 스치는 ‘소림’이라는 단어.

등봉에 이르기 전에 악송령을 나포하려던 것도 다 소림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숭산 소림사. 세상의 모든 무공이 소림사에서 나왔다는 천하공부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이 과장이긴 해도 그런 말이 유행한 데에는 다 연유가 있다.

구주정문의 많은 명문정파가 다시 본래의 면모를 찾아가는 당세. 몰락했던 문파가 일어서고, 사라졌던 방파가 되살아났지만, 과거의 성세(聲勢)를 완전히 회복한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다만.

소위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로 칭해졌던 문파는 일찍이 저력을 복원한 게 틀림없는데도 도리어 은인자중. 그 실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었기에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었다.

하나는 소림, 또 하나는 무당(武當).

불교와 도교를 믿는 이 출가인들은 그야말로 무림과 역사를 같이 한 산 증인들.

당세에 가장 골치 아픈 눈엣가시다.

그런데 하필 나타난 게 사미와 도동.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도동이 가는 눈을 돌리며 대뜸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랬다가, 본관이랬다가, 본좌라네. 생김새나 쾌도를 펼친 거로 봐서는 구주신도 팽조린이라는, 하북 팽가장의 주인일 텐데. 도산초벽이라는 거창한 명성과 어울리지 않게 요랬다가 조랬다, 요괴 맞아.”

사미의 타박에 비로소 동의를 표한다.

“이 빌어먹을 꼬마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주둥이를 함부로!”

비로소 제정신이 든 당두 둘이 당장 노성을 내질렀다.

생각지도 못한 소년 둘의 등장에 잠시 헷갈리긴 했으나, 이런 기막힌 소리까지 지껄일 줄이야.

아무리 어리고 무지해도 그렇지, 누군지 알면서도 입에 올린단 말인가.

당장에라도 저 여물다 만 대갈통 두 개를 박살내야 할 판.

그러나 자신들 앞으로 불쑥 나선 백의 자락에 당두 둘이 나오던 욕설을 삼켰다.

“허허허, 아주 재미있는 녀석들이로고. 그래, 꼬맹이 둘이 모시는 분은 대체 누구냐? 이렇게 본좌를 우습게 여기도록 가르쳤으니 한번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사미와 도동도 평범하지 않지만,

이렇게 선선히 나와서 까불어대는 건 뒤에 믿을 만한 배경이 있어서겠지.

구주신도 팽조린. 우람한 체구의 인물은 그렇게 짐작했다.

소림과 무당의 어떤 고수가 나왔고, 어느 정도 실력인지 이참에 확인하는 것도 괜찮다.

칼을 쓰는 자들에겐 넘을 수 없는 절벽처럼 느껴진다는, 절정에 이른 고수가 바로 자신 아닌가.

하지만, 잔뜩 여유를 부리던 팽조린의 얼굴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확 일그러져버렸다.

꼬맹이들이 방약무인하게 설치는 배경. 사미와 도동이 모시는 소림과 무당의 고수더러 모습을 드러내라고 한 말이거늘.

사미가 단주를 쥔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고,

“나? 대일여래(大日如來).”

도동도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 위를 가리키며,

“나는 무량조사(無量祖師).”

기다렸던 것처럼 서슴지 않은 대답이 참으로 맹랑하다.

대일여래는 법신불(法身佛), 불교의 최고위요. 무량조사는 진무대제(眞武大帝), 도교의 지고신이다.

중은 부처를, 도사는 신선을 받드는 법. 지극히 당연한 대답을 한 것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놀려대는 조롱이 있을까.

부처와 신선이 팽조린을 우습게 여기도록 가르쳤다는 얘기가 되잖나.

팽조린의 푸근한 웃음과 넉넉한 포용력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씹어뱉는 말이 끝나기 전에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쳤다.

“인자조와 묘자조는 당장 저 꼬맹이들을 잡아 꿇려라!”

당두 둘의 시선이 잠깐 교차했으나, 천호의 명은 거스를 수 없는 것.

“존명!”

우렁찬 대답과 함께 복면인 열 명이 빠르게 양쪽으로 퍼졌다.

폐묘 앞에 선 악송령과는 삼 장 정도의 거리, 사미와 도동은 악송령의 뒤쪽 좌우로 내려섰으니 한 조가 한 명씩 덮칠 셈.

이에는 도동도 당황해서 얼른 사미를 불러댔다.

“야, 점박아, 이거 어떻게 해야…….”

사미도 살짝 놀란 눈치로 주춤거린다. 새까만 칼을 든 복면인이 다섯 명씩 달려드는데 놀랄 수밖에.

악송령이 황망히 환도를 곧추세우며 자세를 잡았다.

이 두 아이가 어떤 내력을 지녔는지 아직 모르지만, 애들한테 피해가 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면에는 무서운 쾌도를 선보였던 팽조린.

공력을 한껏 끌어올려서 실력을 전부 발휘해야만 한다.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얼핏 기묘한 감상이 이는 건 두 아이가 서로 부르는 호칭 때문.

도동은 ‘꼴통’이고 사미는 ‘점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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