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18화 (119/410)

제30장 사미도동(沙彌道童) (2)

폐묘(廢廟).

누구를 모셨는지도 모를 무너져가는 사당은 고목과 바위 틈새에 끼었고 지붕까지 다 내려앉아서 그냥 여우굴로 착각할 정도였다.

주위엔 길도 없는 황량한 언덕.

그 폐묘 안에서 악송령이 주위를 확인한 후에 뒤를 돌아보았다.

썩은 나무와 흙더미, 돌무더기만 가득한 좁은 공간 한쪽에 오도카니 앉은 여인. 자못 화려한 차림새지만, 흐트러진 머리와 곳곳이 찢긴 의상이 꽤 처량한 모습이다.

쳐다보는 악송령의 얼굴이 어두워지는데.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답니다.”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연다.

예쁜 장식이 몇 개나 꽂혔던 머리칼은 새집처럼 헝클어졌고, 연지곤지 찍었던 얼굴은 땀과 눈물로 엉망이 되었지만.

악송령을 보는 눈은 씻은 듯 맑다.

겁도 나지 않는지.

“악 대협이 계속 신경 써주셨잖아요. 저야 그냥 업혀 오기만 했는데 뭐.”

까딱거리는 고갯짓에는 여전히 애교가 넘친다.

과묵한 사내와 함께하며 자연스레 말수가 늘었다.

악송령이 쇳덩이 같은 얼굴을 잔뜩 우그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여인, 개봉 만화원 기녀인 이환.

언제 이런 일을 겪어봤겠나.

등에 업고, 어깨에 들쳐 메고, 허리에 끼고. 낯선 남자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여기까지 간신히 피한처지.

어떻게든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평범한 여자, 아니 이제껏 기녀로 살아온 그녀로선 억센 손에 들린 것만으로도 가녀린 몸이 전부 부서질 것 같을 텐데.

“미안하오. 물, 좀 마시겠소?”

악송령이 허리띠를 더듬다가 물주머니를 잃어버린 걸 깨닫고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며칠 째던가.

개봉에서부터 이환을 지키며 도주한 게 한참 전인 듯, 워낙 급하게 쫓겨서 끼니를 몇 번이나 놓쳤는지도 잊었다.

이젠 마실 물도 없나.

눈치 빠른 이환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뇨. 목마르지 않아요. 그나저나 우린 이제 통집범(通緝犯)이 된 건가요? 아니면 역적? 호호호.”

통집범은 수배당한 죄인. 관병에게 쫓기는 이 상황이 뭐가 재미있다고 웃음까지 흘릴까.

그러나 이환은 정말 즐거운 얼굴이었고, 그 목소리에는 생기까지 넘쳤다.

“어렸을 때 교방에서 들은 얘기. 강호에 나가면 협객을 만날 기회가 많다고 해서 잔뜩 기대한 적이 있었죠. 불의에 굴하지 않고 남을 돕는데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세상이 어떻든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 정말 있을까? 만날 수 있을까? 가슴을 두근대면서.”

기운이 없을 텐데 잘도 조잘거린다.

악송령이 그런 이환을 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달라진 여인. 지치고 냉막하던 표정에 저렇게 생기가 돌기 시작한 건 희한하게도 관병에게 쫓기면서부터였다.

창칼을 든 자들이 무섭게 덤벼드는 게 무섭지 않았을까.

태산에서 내려올 때 챙겨온 자루도 잃었고, 이제 손에 남은 건 칼 하나. 무려 십여 년이 걸려 겨우 만들어낸 자신의 환도뿐이다.

칼 한 자루면 천하를 돌아다닐 자신이 있었지만.

당장 지친 여인에게 물 한 모금 먹이지 못하는 처지.

한심한 심정이 절로 드는데.

“거의 포기했었거든요. 그런데 만났잖아요.”

그동안에도 계속 떠들던 이환이 흐뭇한 시선을 보내는 바람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 며칠간 모진 고생을 해놓고선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던 손으로 악송령을 가리키는 이환.

“진짜 협객을.”

기어이 쇳덩이 같은 악송령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오르게 한다.

협객이라.

악송령이 환도를 세운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이환 소저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소. 고맙소.”

사실이다.

개봉에서 갑작스럽게 관병에 둘러싸여 일단 피하느라 바빴고, 그 바람에 어디가 어딘지 모르면서 달렸었다.

다시 개봉 안으로 들어가 개방을 찾든, 흥륭을 찾든 뭔가 방도를 강구할 틈조차 없어서.

이환을 둘러업은 채 서두르기만. 길도 어둡고 방향도 모르는 판이라 엉뚱한 곳을 향할 뻔한 적이 몇 번이나.

산속에서 돌을 쪼개며 칼의 도를 찾기만 했던 무식쟁이가 뭘 알겠나.

관도를 찾다가 수십 명의 관병과 마주쳤고, 남쪽으로 향하다가 복면을 한 고수들과 몇 번이나 부딪쳤다. 관병을 상대로 손을 쓰는 건 꺼림칙한 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복면한 고수들은 전부 상당한 무공을 지녀서 이환을 지키며 싸우기도, 벗어나기도 곤란했으니.

그럴 때마다 서쪽으로 빠지는 길목을 찾아낸 건 이환. 눈치도 빠르고 기지도 갖추었다.

그래서 겨우 소림사를 떠올릴 수 있었다.

개방과 흥륭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차선책을 찾아야 한다. 개봉에서 서쪽은 낙양 쪽, 등봉으로 가면 숭산의 소림사가, 조금 더 가면 용문세가가 있다.

관병과 복면인들을 피해 이환의 안전을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후후, 제 덕이라뇨. 전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요. 저 살려고 기를 쓴 건데 왜 악 대협이 고마워하죠?”

여전히 활기찬 이환의 음성에 악송령이 마른 입맛을 다셨다.

어눌한 게 이번처럼 불편하게 느껴지긴 처음.

잠깐씩 쉴 때만이 서로 대화할 짬이건만, 제대로 말을 이어가질 못한다.

“조금 쉬시오. 주위가, 조용하오.”

기껏 이런 소리만 한다.

이환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살금살금 악송령 옆으로 다가왔다. 요 며칠간 겪은 험한 일 때문에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게 몸에 뱄나.

환도에 기대 엉거주춤 앉은 악송령 곁에 쪼그리더니,

“네. 등봉에 가까워지면서부터 관병도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러지 않아도 눈꺼풀이 무거워서.”

무릎을 안은 채 환도를 쳐다보다가 금방 꾸벅거린다.

얼마나 피곤했을까.

체력이나 정신이나 이미 한계를 넘었을 터. 지금까지 억지로 참았겠지.

악송령이 안쓰러운 눈으로 그런 이환을 보다가 심호흡을 했다.

그저 이환이 가리킨 대로 우선 등봉을 향해 가는 길. 등봉은 낙양 쪽에 속하니 개봉에서 설치던 자들도 다른 지역엔 서투를 게다. 확실히 관병의 추격은 눈에 띄게 뜸해졌고, 복면인들도 나타나지 않아서 조금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눈치가 빠르고 기지를 갖추었다 해도 이환 역시 기루에만 매여있던 기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건 악송령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일 각 정도 흘렀을까.

악송령이 가만히 이환의 어깨를 흔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밤중인데도 달빛 덕분에 주위가 환하다.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든 이환이 얼른 악송령의 등을 보더니 서둘러 자신의 허리께를 더듬었다. 그녀의 허리께에 허리띠처럼 칭칭 감긴 천. 여차하면 그 천으로 악송령과 자신의 몸을 묶으라고 했었다.

복면인과 두 차례 싸운 후에 악송령이 일러준 말.

그런데 이번엔 악송령이 아예 돌아보지도 않는다.

이환으로선 감히 목을 빼 폐묘 밖을 볼 엄두가 나지 않지만, 아까와 별반 다른 것 같지 않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거늘, 악송령에게서 느껴지는 긴장.

그리고 문득 들리는 말소리에 저절로 어깨가 옴츠러들었다.

“아아, 참으로 금의위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구먼. 당두가 둘에 번역이 여덟이나 나섰건만, 등봉에 다 와서야 잡는단 말인가.”

중후하고 위엄이 넘치는 음성의 탄식 섞인 말이 끝나자마자,

휘익.

비로소 바람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전해진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폐묘 앞에 좌우로 늘어서 우렁차게 사죄하는 복면인들.

악송령이 손짓으로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환도를 뽑아 앞으로 나아갔다.

서너 차례 부딪쳤던 복면인이 열 명이나 되고, 그 뒤로 삼 장쯤 떨어져서 우람한 체구의 인물이 뒷짐을 진 채 바라보고 있다.

머리에는 표건, 풍성한 수염에 위엄이 가득한 얼굴, 눈처럼 흰 백의를 걸친 당당한 체구가 악송령보다 커서 허리에 매단 칼집이 잘 보이지 않는다.

주위에는 횃불을 든 병졸도, 칼을 빼든 군관도 보이지 않으니.

악송령을 찾은 이들은 이 열한 명뿐.

하나 악송령은 수십 명의 관병이 몰려들 때보다 훨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당한 무공을 지닌 복면인이 한꺼번에 열 명인 것도 처음이지만,

그 뒤에 선 우람한 체구의 인물.

환도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사죄하는 복면인들은 본체도 하지 않고서. 우람한 체구의 인물이 시선을 곧장 악송령에게 보냈다.

“호오, 그거 환도로구나. 제대로 다듬어지진 않았다만 요즘에는 그런 형태를 보기 어렵지. 꽤 솜씨가 있다고 들었는데, 사승(師承)이 어디인고?”

자연스럽게 아랫사람 대하는 말투. 악송령이 쥔 칼에 흥미를 보이는데.

악송령은 그저 한 걸음 더 내디디며 환도를 비스듬히 든다.

과묵한 성격을 알지 못하니 대뜸 도발하는 자세로 여겨질 터.

“허허허, 문답무용이란 건가. 재미있는 사내군. 그래도 감히 내 앞에서 칼을 쳐들다니.”

우람한 체구의 인물이 당장 껄껄 웃어젖히고,

그 웃음이 신호인 듯 열 명의 복면인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쉿.

가녀린 파공성 속에 공중을 덮는 수십 개의 암침. 그리고 시커먼 날붙이가 매섭게 뒤를 따른다.

이미 부딪쳐봤기에 이자들이 암기와 기형도를 능란하게 섞어 쓴다는 걸 아는 악송령.

기다란 환도를 좌우로 휘저으며 어깨를 한바탕 떨었다.

타타타탓.

수십 개의 암침이 도풍에 휘말려 튕겨나고, 환도가 긋는 선이 기형도를 한데 묶어 때린다.

채챙.

폭이 좁고 길이가 짧은 기형도는 전부 여덟 자루. 단 두 번의 쇳소리에 불꽃이 마구 튀는 가운데.

소리도 없이 두 개의 검기가 양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악송령은 이미 예상했던 듯, 손잡이의 고리를 잡고 돌린 것처럼 환도가 빙글 돌아 원을 그리고.

따당.

이 척 길이의 기형검으로 성형검기를 펼쳤던 복면인 둘이 빠르게 위치를 바꾸었다.

멀쩡하게 버텨내는 악송령이 의외인 듯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슈슈슈슉.

두 자루의 짧은 기형검이 단숨에 십여 개의 검광으로 바뀌었다. 검극에서 일 척이나 뻗은 성형검기가 삽시간에 악송령의 전신을 벌집으로 만들 것 같은 속도.

악송령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환도가 돌연 도신을 너울거린다.

십여 개의 검광을 막아서는 도기, 파도처럼 일렁이며 순식간에 퍼져나가서.

퍼엉!

폭음과 함께 악송령의 전면이 활짝 열렸다.

솨아아.

뿌옇게 이는 흙먼지가 악송령 앞에서 부챗살처럼 퍼져 폐묘 주위를 휩쓸었다. 암침과 기형도를 쓴 여덟, 기형검으로 성형검기를 펼친 둘. 열 명의 복면인이 모조리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다.

황급히 자세를 잡지만 몰아치는 여력에 자신을 지키는 게 고작.

복면 속의 눈들이 전부 경악으로 커졌다.

칼솜씨가 제법 있다고는 여겼어도 성형검기까지 꺾을 줄이야.

거친 파도처럼 연이어 몰아치는 이 도기는 무엇이냐.

악송령이 점투성이 얼굴을 찡그렸다.

가느다란 암침이 방비하기 어렵고, 기형도에서 흐르는 기운이 지저분하긴 해도 이미 손을 섞어봤기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의 두 복면인. 성형검기를 이룬 내공도 특이하고 곁들인 쾌검의 기예도 낯설어서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본신의 공력과 도법을 제대로 펼친 건 낙척문사 노문기와 의외로 부딪쳤을 때 이후 두 번째. 기형검을 쥔 두 명은 만만치 않다.

하여간 상대를 전부 밀어내니 절로 호기가 끓어오르고, 관병이 아닌 바에야 손을 멈출 이유도 없어서.

여기서 이들을 처리한 후 이환을 데리고 소림사를 찾는 게 가장 좋은 방법.

환도가 빙글 돌며 새파란 광채를 머금고, 악송령의 두 발이 땅을 박찼다.

병기든 검기든 걸리는 대로 쪼갤 참.

그런데.

“광망하구나!”

얼굴로 날아드는 무서운 압력.

악송령의 환도가 거침없이 그 압력을 쪼갰으나,

쩡!

이번에는 충격에 악송령이 주르르 밀려났다. 가늘게 떠는 환도를 진정시키느라 꽉 쥔 손아귀, 호구가 찢겨 피가 번진다.

노문기의 웅후한 장력도 베어버린 참경이거늘.

악송령의 일그러진 얼굴이 우람한 체구의 인물을 향했다.

처음 나타난 곳에 그대로 선 채, 허리에서 손을 떼는 자세. 칼을 집어넣는 것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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