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사미도동(沙彌道童) (1)
“해원기라고 합니다.”
이것도 대답이랍시고. 당장 달려들어 그 뻔뻔한 얼굴을 쥐어뜯고 싶은데.
해원기의 천연덕스럽게 이어지는 말에 봉대저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고.
“이미 아는 걸 물었으니 이건 질문이 아니죠. 그 정도로 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제 등봉까지 가는 안전하고 빠른 길을 알려주시면…”
“흐음. 약속은 약속이지. 젠장!”
어울리지 않게 거친 말을 내뱉으며 도로 주저앉았다.
처음에 사부가 누군지 물은 건 대답하지 않으리라 예상했기 때문. 그러면 관련된 질문 두 개를 할 수 있고, 두 개면 어떻게 머리를 써도 출신 배경을 속일 수 없다.
아무리 특이한 무공이라도, 아무리 희귀한 절학이라도 그녀는 알아챌 수 있으니까.
그러나 해원기가 읊어댄 무공들.
그건 그렇게 특이하지도, 희귀하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다만.
봉대저가 고기튀김을 집어 입에 욱여넣었다.
‘개인의 기공이나 독문의 비기가 아닐 뿐, 전부가 심오한 이치를 바탕으로 삼은 무학이야. 찾으려 하면 어떻게든 찾을 수 있는 구결이기도 하고. 하나 그 이치를 확연히 깨닫고 오래 공을 들이지 않는 이상, 연성이 극히 어려워서 쉽사리 건들 엄두도 내지 못하지. 게다가 정사흑백을 따지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 어째서…….’
“퉤. 조금만 더 자세히 말해봐. 해 소제는 말한 대로, 지수조장권의 순서로 익혔어? 그렇게 정인법까지 갔다? 정인법이란 응기성강(凝氣成罡)의 다른 표현이지?”
물음표가 연속으로 붙는다.
해원기가 평소의 표정 그대로 봉대저를 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자신이 읊어댄 무공에 관해 물어본 내용, 새로운 질문은 아니란 건가. 봉대저가 돌연 드러낸 기세며 욕설에다 고기튀김을 욱여넣는 거친 모습이 안쓰러웠을 수도.
“후, 응기성강은 병기를 사용하는 경지에 적합한 단어지요. 맨손으로 익힌 무공은 본디 기경(氣勁)의 운용이라 정인법이란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순서는 제가 말한 대로고요. 더 대답할 건 없습니다.”
고리타분한 설명.
봉대저가 가만히 해원기를 쳐다보다가,
쪽.
문득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소리 나게 빨았다,
“흐으응, 그렇구나. 해 소제는 무학에 조예가 깊어 보이네. 아, 그럼 교환조건이었지. 슬슬 움직여볼까?”
어린아이처럼 손가락 다섯 개를 쪽쪽 빨고선 풀어진 얼굴.
그 잠깐 새에 분위기가 또 확 바뀌었다.
이번엔 해원기가 헷갈릴 차례.
“움직이다뇨? 그냥 길을 알려주면.”
“어이구, 그걸로 되겠쪄요? 그럼 여기서 동북쪽으로 조금 비스듬히 방향을 두고서 주욱 올라가면 등봉. 이러면 되겠네.”
이건 또 무슨 소리.
아이 어르듯 혀 짧은 소릴 섞고 팔까지 크게 휘두르는 봉대저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그렇게 알려주면 나야 좋지. 하지만 이미 약속한 사이에 그렇게 성의 없이 가르쳐줄 순 없잖아. 더구나 이 누님이 지금 주변 상황을 다 파악한 건 아니라서. 우직한 해 소제만 보내고 마음이 놓일 리 없어. 엇차!”
기운을 내며 일어서는 모습에,
해원기가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이 정체불명의 여인. 질문과 대답을 교환하기로 약속은 했어도 계속 붙어있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반룡령의 위탁을 받아 해원기 자신의 신세 내력을 밝히려는 의도 아닌가. 동해삼사의 후대인 인색이귀의 예를 봐도 반룡령과 얽힌 자들이 올바르진 않을 터.
성격과 분위기가 종잡을 수 없이 확확 바뀌는데다가,
“그래서 같이 가며 그때그때 알려주려는 거야. 이 누님이랑 계속 같이 있게 되니까 좋지?”
허리를 살짝 비틀며 한쪽 눈을 살짝 감는 교태를 부리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요.”
“환락사귀만이 아니거든. 평정산(平頂山)을 끼고 돌지 않으면, 정주(鄭州)로 향하는 길은 남의 눈을 피하기가 쉽지 않아. 내가 어떻게든 애를 써볼게.”
아예 해원기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말이야 옳은 말. 방성을 떠나 등봉까지 가는 길을 제대로 알고, 다른 추적자를 미리 방지할 수 있는 사람은 봉대저다.
해원기가 맥이 빠져서 괜히 입맛만 다셨다.
달빛이 워낙 밝아서 시야가 훤하다.
길도 없는 곳을 용케 빠져나가는 봉대저의 얼굴은 아까와 달리 딱딱하게 굳은 채.
‘마도절세오검을 어디서 다 찾아냈을까. 아니, 그보다 정도오악검법 중 소림과 화산은 다 주인이 있거늘. 소림이 속가제자에게 수미전단검(須彌栴檀劍)을 가르친 적이 없고, 화산이 단홍검법(丹紅劍法)을 되찾은 건 지금의 장문인에 의해서다. 물론 화산검협이 당대에 손꼽히는 검객이긴 해도 오악검법을 다 안다는 건 불가능. 누가 정사십검을 모조리 알고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렇지 않게 해원기의 길 안내를 자처했지만,
경공을 펼치는 중에도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다.
‘그리고 맨손으로 익힌 무공. 일반적으로 수공(手功)을 익히는 순서는 권장지조(拳掌指爪)인데 이건 거의 거꾸로. 흔히 장법으로 분류하는 양의수나 관음천수를 따로 나누어 익혔다는 것도 특이해. 그 순서에 달리 의미가 담겼나?’
해원기의 무공에 관한 두 번의 대답이 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수많은 무공의 특징과 그 안에 담긴 이치를 간파해서 연원까지 밝혀낼 능력이 있는 그녀.
해원기가 차라리 생전 들어보지 못한 무공을 익혔다고 했으면 이렇게 골치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머리가 좋고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풀리지 않는 문제에 집착하기 마련.
그럴 시간이 필요해서 동행을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곧장 평정산을 넘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문득 귓가를 울리는 해원기의 목소리에 봉대저가 현실로 돌아왔다.
“아, 잠깐 쉴까?”
숲이 끝나는 곳을 가리키며 속도를 늦추자 해원기가 바로 옆에 이른다.
과연 초상비의 경지에 이른 경공. 살랑거리는 미풍과 함께 자연스럽게 멈추는 모습에 봉대저가 머리를 까딱거렸다.
너럭바위에서 출발한 지 반 시진.
아무리 밝아도 한밤중이요, 빽빽한 숲이나 어지러운 바위 더미를 헤치고 왔건만.
해원기는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경공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내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해 소제는 지치지도 않는구먼. 젊어서 좋겠어. 물론 방성에서 등봉까지 일직선을 그으면 아예 평정산을 타고 넘는 게 빠르겠지. 그러나 해 소제만 그리 생각할까?”
입을 삐죽이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길 안내를 맡았으니 앞서서 가야 한다. 해원기가 악송령의 상황이 급박한 걸 안 이상, 속도도 느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봉대저는 이 반 시진 동안 경공에 전력을 다한 상태. 멀쩡한 척 입을 놀려도 휴식이 필요했었다.
묵묵히 옆을 걷는 해원기를 힐끗거리며 말을 잇는다.
“대별산의 약왕당에서 등봉을 간다는 소식에 가장 먼저 나선 환락사귀잖아. 산속에 야점을 차리고 길목에 여자들을 배치할 수 있었던 건 가장 단순하게 생각해서야.”
“단순하다라.”
“그들은 살수, 대상의 심리를 파악하는 면에선 나보다 나을 수도 있지. 시각을 가리지 않고 벗을 구하러 떠난다면 곧장 방성으로 가는 길이라고 판단한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
“흐음.”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환락사귀의 예를 들어주어 알아듣기가 편했고, 아울러 또 한 가지를 배웠다. 대상의 심리를 파악한다는 점. 하찮은 살수들도 그냥 움직이진 않는다.
“그렇게 단순한 제가 방성에서 사방대주루를 택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겠군요.”
“후훗. 맞아. 의표를 찔린 셈.”
봉대저가 피식 웃었다.
스스로 단순하다고 하는 해원기가 귀엽다는 듯.
“방성에서 환락사귀가 당한 걸 알고 나서는 더 그렇게 여기겠지. 평정산 꼭대기부터 북쪽의 보풍(寶豊)이나 겹현(郟縣) 쪽으로 미리 안선(眼線)을 배치하느라 바쁠걸.”
“안선?”
“이쪽 용어야. 눈에 띄는 거점을 골라 소식을 전할 자들을 심어두는 것. 수하들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선 현지의 백성들도 이용하니까 내가 어디서 누구에게 목격되었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우리는 굳이 노산현(魯山縣) 쪽으로 우회하는 거고.”
평정산도 대별산맥에 이어진 줄기. 주위에 몇 개나 되는 고을을 거느린다. 보풍과 겹현은 정북방이고, 노산현 쪽은 서쪽으로 조금 돌아가는 방향.
평정산을 끼고 돈다는 봉대저의 말은 바로 이런 뜻이었다.
“그럼 여주(汝州)를 거치겠군요.”
“응. 평정산에서 등봉까지는 두 시진쯤 걸리는 거리. 어느 쪽 길을 통해도 비슷하지만, 여주 쪽은 조금 더 걸리지. 하나 일단 여주로 빠지기만 하면 훨씬 수월해.”
적의 이목을 피하며 빠르게 등봉에 가는 노선.
봉대저의 의도를 이해한 해원기가 앞에 펼쳐진 산기슭을 보았다.
“반룡령의 위탁을 받은 자들은 또 누굽니까?”
봉대저와 환락사귀 만이 아닐 터. 어떤 희한한 자들이 있을지.
“어, 그거 질문이야?”
그러나 대뜸 날아오는 반문에 해원기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약속을 맺은 후론 대화에 방심해선 안 된다.
“됐습니다. 이 산기슭을 넘으면 노산현. 서두르죠.”
성큼 앞으로 나서서 먼저 몸을 날렸고.
그런 해원기의 등을 보며 봉대저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이쪽 지리도 꽤 아는 듯한데. 일부러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봤나.’
봉대저에게 쉴 시간을 주려고.
어리숙한 해원기의 얼굴이 갈수록 다르게 보인다.
“후우, 후우.”
봉대저가 마침내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았다.
노산현 경내를 반 시진 만에 가로질렀고, 곧장 여주로 들어서서 또 반 시진. 쉬지도 않고 계속 빠르게 경공을 썼으니 강행군도 이런 강행군이 없다.
시각은 이제야 축시(丑時).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할 속도다.
해원기가 일부러 몸을 돌려 높다란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이 석계령(石界嶺)을 넘으면 바로 등봉이로군요. 덕분에 빠르게 왔습니다.”
여전히 조금도 지치지 않은 모습.
봉대저가 머리끈을 다시 묶으며 그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오는 내내 매복도 함정도 없었으니 봉대저 덕분이랄 수 있지만. 쉬지도 않고 무식하게 달리기만 한 건 해원기잖나.
멀쩡한 모습에 더 약이 올라도 겉으로 드러내고 싶진 않아서.
“그래. 후우, 빨리 온 건 좋은데. 이제부터가 문제지.”
호흡을 가다듬으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문제?”
문제라는 소리에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시각과 장소야. 보통이라면 야밤을 틈타 도주하지만, 관병을 동원한 금의위라면 야밤도 위험하지. 또 등봉이라고 해도 큰 관도가 셋이나 교차하고 작은 고을이 십여 개나 되는 지역. 어디에 숨었을지 찾기 어려워.”
사리에 맞는 얘기. 해원기의 미간이 주름을 잡는다.
당장 악송령을 찾아 등봉 전체를 뒤지고 싶지만, 상황을 알지 못하고선 무리.
그러면서 의아한 시선이 봉대저의 전신을 향했다.
“그런데 언제 바꿨습니까?”
봉대저의 외모가 또 바뀌었다. 지친 모습을 보기 민망해 석계령을 올려다본 게 잠깐이었거늘.
머리엔 복두(幞頭)를 느슨하게 쓰고, 몸에 걸친 건 짧은 갈의. 무릎까지 칭칭 감은 감발, 등에 봇짐을 단단히 동여맨 누런 얼굴의 중년 남자가 되었으니.
하여간 이 역용술은 직접 보면서도 믿기 어려울 정도.
노파였다가 궁한 서생이었다가, 너럭바위에선 풍성한 치마를 휘날리더니 이동할 때에는 날렵한 경장이었다. 등에 짊어진 봇짐을 당장이라도 뒤집어보고 싶은데.
“질문이야?”
영락없이 돌아오는 반문에 도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당연히 봉대저는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띠고,
“석계령을 넘으면 잠시 헤어지자. 해 소제는 슬슬 숭산 쪽으로 움직이고, 나는 이곳저곳을 좀 더듬어볼게.”
동창이든 금의위든. 반룡령의 백문량도 코가 꿰었다고 했으니까 악송령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에는 봉대저가 나서야 한다.
끝까지 도와주려는 게 그저 약속 때문만은 아닐 터. 해원기의 표정이 복잡해지지만.
“등봉에는 사묘(寺廟)와 도관(道觀)이 많아. 이 시각에 깨어나 있는 이는 중이나 도사지. 내가 일러주는 길을 따라가라고. 중간에 소식이 있으면 내가 절이나 도관을 찾을 테니까.”
꼼꼼하게 연락할 방법까지 일러주니.
“그러다 괜히 오해라도 받으면…….”
거꾸로 반룡령을 배신했다고 여겨질까 걱정이 된다.
그러나 누런 얼굴의 중년 행상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해 소제. 괜찮으이. 우리 사이에 뭘 그리.”
어깨까지 두드리는 봉대저의 음성은 이미 완연한 중년 남자였다.
그런데 무슨 사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