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낙극생비(樂極生悲) (4)
해원기가 손에 묻은 튀김 부스러기를 털었다.
“악 형의 일은 어떻게 된 겁니까?”
잠깐이지만 꽤 궁리해서 만든 질문에 봉대저가 눈을 묘하게 치뜨더니 웃기 시작했다.
“호호, 해 소제, 여간내기가 아니네. 호호호.”
웃음소리가 달밤 하늘까지 높다랗게 올라가는 게, 꽤 즐거운 듯.
생각할수록 더 우스운지 한참을 더 웃던 봉대저가 돌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든다.
“후우, 그래서 사람은 겉만 봐서 모른다니까. 이거야 원, 우습게 보다가 완전히 뒤집어쓴 꼴이잖아.”
투덜투덜.
웃었다가 한숨을 내쉬다가, 성격 참 괴상하다.
그녀의 종잡을 수 없는 분위기를 이미 아는 해원기가 가만히 있자,
봉대저가 그런 해원기를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바보라고 했던 건 취소야. 해 소제는 순진한 외모 속에 능구렁이가 들어앉은 셈이거든. 질문 하나? 흥, 이건 전부 다 묻는 것보다 더하다고. 아주 고약하구먼. 뭐, 그래도 약속은 약속. 군자일언(君子一言)이면.”
“사마난추(四馬難追)니까요.”
이미 뱉어낸 한마디는 네 마리 말로도 쫓아갈 수가 없다.
해원기가 냉큼 대구를 읊는 게 얄밉지만, 봉대저의 흘기는 시선이 더 독해지진 않았다.
“해 소제의 그 친구, 악송령이란 이름이더군. 반룡령 소령주가 꽤 신경을 써서 날린 화살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 건 그 친구가 휘두른 칼 때문이라. 그러나 강호에 소문난 도객(刀客) 중에 악송령이란 이름은 없어. 흠, 이런 점이 해 소제의 신분에 대한 궁금증을 더 증폭시키는 작용을 했겠지.”
백문량이 암습에 사용한 강설궁진. 그때에야 악송령의 칼을 처음 보았거늘.
이름도, 훌륭한 칼솜씨를 지닌 것도 다 알아냈다.
해원기의 미간이 슬쩍 좁아지고, 지금까지의 정보를 밝힌 봉대저의 말은 새로운 내용으로 넘어간다.
“해 소제 주위는 다 정체불명이거든. 용문세가의 천금 빼고는.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로 의심되는 미남자만 해도 그렇잖아. 개방 총단에 가서 확인할 수도 없고. 그런데 그 도객 친구는 의외로 금방 이름을 알 수 있었어. 후훗. 기녀 하나 때문에 난리가 났었거들랑.”
이환이라는 기녀. 기루 주인의 아들에게 능욕당하는 걸 구하느라 악송령이 남았고, 만일을 위해 개방이나 용문세가를 찾으라고 했었는데.
해원기와 증명단이 떠난 후에 일이 잘 풀리지 않았나.
“난리? 만화원이 어찌 되었기에.”
해원기가 무겁게 중얼거리는 말을 못 들은 척, 봉대저가 피식거렸다.
“개방을 믿었겠지만, 그건 강호의 관념이지. 오랜 역사를 지닌 큰 고을, 개봉부(開封府)에는 지부 대인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하나 있고, 만화원이란 기루는 그 사람의 사업 중 하나. 그 아들을 쥐어팼으니 가만히 있었겠어? 악송령이란 친구는 응방원 근처에도 갈 수가 없었을걸.”
과연 개방과 응방원에서 회합을 가진 것도 알아챈 모양이지만, 해원기는 다른 내용에 더 신경이 쓰였다.
개봉부의 지부 대인보다 무서운 사람.
만화원에서 응징한 젊은이는 어느 집안의 대공자라고 불렸었다.
“삼보별저.”
“얼씨구, 누군지 알잖아. 그런데도 그 악이란 친구 혼자 감당하리라 여겼어?”
해원기가 기억을 되살려 꺼낸 단어에 봉대저가 되레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삼보별저가 대체 무엇이기에.
해원기가 간단히 지난 일을 설명하자 봉대저는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
“삼보별저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 참. 자네들은 전부 딴 세상 살다 왔나? 아니, 그럼 반룡령과는 어떻게 척을 지게 된 거래?”
질문과 대답을 서로 주고받기로 한 공정한 약속이지만, 대화 중에 반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 때도 있다.
아무리 봉대저라도 해원기 일행의 태반이 강호초출인 건 모를 터.
그런 자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저지른 일이라니. 봉대저가 거듭 되묻다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 됐어. 우선 내 얘기부터. 삼보별저, 그건 삼보태감(三保太監)의 고거(故居)라고. 삼보태감이 누군지는 알지?”
삼보(三保)는 삼보(三寶)와 같은 발음. 그래서 개봉의 부유한 호족이 돈을 들인 별장으로만 여겼던 해원기가 ‘삼보태감’이란 단어에 깜짝 놀랐다.
영락제를 제위에 오르도록 돕고 일곱 차례나 원양(遠洋)에 나아가 국위를 크게 떨친 정화(鄭和)를 일컫는 말이다. 원(元)의 색목인(色目人) 출신으로 환관이 되어 연왕(燕王)을 모시고 엄청난 업적을 남긴 대인물. 그의 옛집이 개봉에 있을 줄이야.
개봉부의 지부 대인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라는 건 거짓이 아니다.
“알긴 아는구먼. 고거라고 해도 별저, 정화가 직접 살았던 곳은 아니야. 환관이 후사(後嗣)를 두는 게 우습지만, 개봉에는 먼 조카뻘을 데리고 살 생각으로 별저를 지었다나. 지금의 주인도 진짜 정화와 관계가 있을지 의심스러운데, 그건 그거고. 하여간 이 별저의 위세가 아주 당당해서 말이지 고관대작들도 설설 기는 판에, 흠, 그 큰아들을 흠씬 패버린 자를 그냥 놔둘 리 없지.”
해원기의 놀랐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고관대작들이 설설 기는 위세. 만화원에서 대공자를 혼내준 건 바로 그런 대단한 집안 체면에 먹칠한 셈이라.
동시에 한 가지가 머릿속을 강하게 때린다.
“거기도 동창과 관련이 있군요.”
엄청난 업적을 남긴 대인물이라도 근본은 환관. 고개를 끄덕이는 봉대저를 보면서 해원기가 비로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반룡령은 아마도 동창의 하부 조직.
야습에 실패한 백문량의 무리가 개봉에서 회합한다고 했지만, 개봉에는 이미 개방과 용문세가가 모여든 판이라 감히 얼굴을 내밀 수 없었을 것이다.
거듭된 실패로 해원기의 내력을 먼저 캘 계획을 세우고서, 봉대저나 환락사귀 등에게 위탁을 했는데.
되레 개봉에서 먼저 관련된 자의 사건이 터진 셈.
이 소식은 동창을 통해서 반룡령으로, 다시 반룡령에게 위탁받은 봉대저 등에게 전달되었을 터였다.
봉대저가 고기 튀김을 집어 들었다.
“관아를 몰아댄 것뿐 아니라 동창에서 직접 손을 쓰기로 했나 봐. 마침 개봉에 있었던 소령주는 꼼짝없이 코가 꿰었고. 난 그러든 말든 해 소제 뒤를 따라갔는데…… 흠, 약왕당의 소식통이 빠르더구먼. 우직한 해 소제라면 혹시 이 소식에 친구를 구한답시고 설칠 수도. 뭐, 그렇게 된 거야. 자, 대답이 되었겠네.”
‘우직한’은 ‘바보’를 순화한 표현이겠지.
장갈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아직 악송령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었으나.
약왕당의 소식통도 짐작하는 봉대저라 해원기의 북상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친구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쓸 바보라 여겼던가.
할 얘기를 다 했다고 고기 튀김만 씹으며 시선을 돌린 봉대저.
해원기가 그 고운 옆얼굴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약왕당에서 들은 소식은 악 형이 금의위의 추포를 받아 등봉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금의위든 동창이든 길을 잘 모르는 걸 알고 서쪽으로 몬 거지.”
당연하다는 대답.
응방원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상황이라면 개봉 안에서 개방이든 흥륭이든 찾을 틈이 없었을 악송령이다. 그렇다고 관병이 깔린 관도를 이용할 수도 없고.
이환을 지키며 그저 쫓기다가 큰 고을을 다 지나치고 점점 거친 곳으로 몰리게 된다.
다행히 등봉 부근에 기댈 곳이 있지만, 그건 해원기만 아는 게 아니다.
“숭산(嵩山)에 이르기 전에 악 형을 잡으려고 하겠군요.”
“물론. 아무리 동창이라도 아직은 소림(少林)과 엮이고 싶지 않을걸.”
여전히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봉대저.
해원기가 찡그렸던 미간을 풀며 계속 말을 걸고,
“시간이 촉박할 듯합니다. 괜한 일로 발이 묶이는, 이번 환락사귀 같은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봉대저의 얼굴이 슬그머니 돌아온다.
등봉 바로 위가 숭산. 숭산에는 소림사가 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동창으로선 어떻게든 소림사 경내에 이르기 전에 일을 끝내고 싶겠지.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고기 튀김을 씹는 시간도 아깝기만 하다.
방성을 빠져나와 밤을 도와 길을 재촉하는 게 바로 그런 이유 때문.
뻔히 아는 사실을 왜 얘기하나. 다 뭉개 버린 환락사귀는 왜 다시 거론하고.
해원기가 봉대저의 얼굴을 보며 빙긋 웃었다.
“등봉까지 아무 지장 없이 갈 수 있겠습니까? 물론 질문할 권리를 드리죠.”
이건 확실히 봉대저에게 도움을 청하는 뜻인데.
약속했던 교환 조건을 먼저 들먹이는 소리에 봉대저가 눈을 깜빡거렸다.
바보인 줄 알았더니.
“호호호, 잠깐, 잠깐만.”
갑자기 터뜨린 웃음을 수습하느라 내젓는 손짓에 고기 튀김이 몇 개나 튕기는데도.
봉대저는 얼른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어리숙해 보이는 해원기가 영악한 척 거래를 제안한 게 우습기도 했지만, 그녀 또한 이 기회를 가벼이 여길 수 없었기에.
등봉까지 안전한 길을 알려주는 즉시 해원기는 떠날 것이다. 상상을 뛰어넘는 무공을 지녔고, 경공만 해도 초상비의 경지에 이르렀잖나.
환락사귀처럼 또 암습을 가하거나 귀찮게 하는 자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봉대저와 같은 위탁을 받은 자들이 더 있다는 가정하에 하는 얘기다. 게다가 요청을 질문으로 포장하는 것까지.
생김새와 달리 머리도 쓸 줄 아는 해원기에게 서투른 질문을 할 수야 없지.
봉대저가 양쪽 소매를 맵시 있게 털었다.
“해 소제의 사부님은 누구야?”
“대답할 수 없습니다.”
“왜?”
“스스로 이름을 묻으셨거든요.”
“흠. 특이하군. 우리 약속은 알지?”
“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인 경우, 관련된 질문을 연속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봉대저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히죽 웃는다.
너럭바위 위. 반가부좌처럼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 무릎에 팔꿈치를 세우고 해원기를 쳐다보는 그윽한 시선.
풍성한 치맛자락이 환한 달빛 아래 가볍게 흔들려서 아까 가난한 서생으로 분한 걸 다 잊을 정도로 매혹적인데.
해원기는 도리어 쓴 한약이라도 마신 표정.
봉대저는 처음부터 해원기가 대답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물었다. 봉대저의 목적은 해원기의 내력. 이름과 나이는 이미 알고, 사부와 무공을 밝히기만 해도 대강 정체가 드러나는 법이다.
다음에 이어질 두 개의 질문은.
“익힌 무공 중에 마도절세오검과 같은 수준의 무공은 뭐야?”
당연히 무공. 그리고 진짜 영악하게 묻는다. 이미 사방대주루에서 해원기의 왼손이 절세오검처럼 보이는 걸 깨달았기에 이 질문의 대답은 당연히 절세오검을 익혔다고 인정하는 셈.
해원기가 쓴 입맛을 다셨다.
“오악검법(五岳劍法)이겠죠.”
이건 피할 수 없는 질문이고. 같은 수준이라고 했으니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그러나 턱을 괴고 앉은 봉대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정사십검(正邪十劍)을? 어떻게, 으흠…….”
예상 밖의 대답에 얼핏 되물으려는 걸 억지로 참아야 했다.
해원기가 맨손으로 검법을 쓴다는 정보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직접 싸우는 모습을 본 후에는 그게 절세오검이라고 추정했다.
그럼 검법 외의 무공, 절세오검에 맞먹는 무공수법을 밝히는 게 해결의 열쇠.
권장법이나 대단한 기공, 혹은 특이한 절학일 줄 알았는데.
또 검법? 그것도 오악검법이라고?
당세에 소림과 화산을 제외하곤 문파 자체가 몰락해 유명무실해졌지만 그래도 정도를 대표하는 오악검이요, 과연 누가 한 가지라도 습득했을까 의문시되는 마도의 절세오검을.
모조리 익혔다니.
도저히 믿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거짓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여기서 막힐 수는 없지.
봉대저의 흔들리던 눈이 해원기의 양손을 향했다.
“그런 절학들을 용케 맨손으로 시전하네. 그럼 맨손으로 쓰는 무공은 뭐야? 검법 말고.”
기어이 해원기의 무공으로 단서를 잡으리라.
정도오악검법과 마도절세오검을 빼고 나면 정사십검의 절학을 맨손으로 쓰기 위한 기초가 드러날 터.
과연 해원기의 얼굴에 당장 곤란한 기색이 떠오른다.
“그걸 다 말해야 합니까?”
약세를 보이면 확실히 다잡아야 한다.
“거럼. 약속이잖아아아.”
희한한 말투까지 써가며 콧대를 높인 봉대저는 그러나 차츰 아래턱이 무거워졌고,
마침내 턱을 괴던 손이 미끄러지기까지 했다.
“에, 지공(指功)은 일원지(一元指)부터 시작해서 파옥지(破玉指), 잔영지(殘影指), 천운지(穿雲指), 탄금지(彈琴指) 정도. 수공(手功)은 양의수(兩儀手), 관음천수(觀音千手), 현현수(玄玄手)에 봉황수(鳳凰手)까지인가. 조공(爪功)으로는 용조현형(龍爪現形)으로 들어가서 호조(虎爪), 계조(鷄爪), 응조(鷹爪)로 나아갔고. 장공(掌功)이 아마 오행장(五行掌), 칠원괴장(七元魁掌), 반혼장(返魂掌)을 익힌 후에 권법으로 바뀌었던 듯. 대정권(大定拳)으로 기초를 잡고 구벽신권(九劈神拳)과 벽력권(霹靂拳)을 함께 수습하면서 지수조장권(指手爪掌拳)이 어떻게 정인법(正印法)으로 구현되는지…….”
“그만!”
봉대저가 버럭 소리를 질러 해원기의 입을 막았고,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신, 도대체 누구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사나운 모습은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던 기세를 풍긴다.
해원기를 ‘당신’이라고 부른 것도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