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낙극생비(樂極生悲) (3)
해원기가 두 손을 뒤집어 좌우로 펼쳤다.
검림소연을 준비하는 오른손을 위해 왼손만으로 우두머리들을 상대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섯 손가락에 담긴 오행검기. 게다가 탄금지(彈琴指)의 오현제발(五絃齊發)이라는 절초까지 덧붙였는데도 전부를 제압하지 못했다.
왜도술을 쓰는 귀장과 복면인. 그림자에 숨었다가 튀어나와 똑같은 도법을 쓰는 기예는 처음 보고, 그걸로 버텨내는 것이 보통이 아니다.
그렇다고 손속에 사정을 둘 수는 없다. 더구나 왼손이라.
검을 수련하는 자들이 주로 한 손을 쓰고 다른 손을 보조로 삼는 것과 달리 해원기는 처음부터 양손을 똑같이 익혔다.
그러나 우수검(右手劍)과 좌수검(左手劍)은 본디 같지 않다.
해원기의 검왕수도 마찬가지. 오른손의 오행제림이 정(正)하다면, 왼손의 오귀전륜은 기(奇)해서. 일단 발동하면 인정사정이 없다.
귀장과 복면인이 충격에 진저리를 치는 그 잠깐 새,
펼쳤던 왼손이 손바닥을 위쪽으로 한 채 살짝 떨리는 듯.
부웅.
곤충의 날갯짓 같은 가벼운 소음은 들릴락 말락, 왼팔이 마치 흩어지는 안개처럼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퍼펑.
“크악!”
폭음 속에 날아간 귀장이 계단에 부딪혀 비명을 내질렀다. 반면에 두 무릎을 꿇고 공처럼 웅크린 자세의 복면인. 주루 바닥에 밀려난 자국이 찢긴 바지와 함께 남았지만, 그 자세 그대로 빠르게 구르기 시작한다. 진짜 공처럼.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괴상한 형상. 그러나 해원기는 되레 엉뚱한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공처럼 구르는 복면인이 금방이라도 해원기 쪽을 향할 것 같은데도.
비췻빛이 어린 동시안이 이 층 난간 부근을 보자마자 사라졌던 왼손이 크게 휘어져 공간을 때렸다.
팡.
“헉.”
아무것도 없던 공중에서 돌연 뚝 떨어지는 복면인. 갈기갈기 찢긴 천 조각 속에서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때까지 바닥을 구르던 공은 어디로 갔는지.
그제야 해원기가 왼손을 거두면서 오른팔을 크게 떨쳤다.
쉬익.
상쾌한 바람 한 줄기라도 일 줄 알았더니.
소리만 내고 가만히 가슴 앞에 모인 두 손. 얼핏 읍(揖)하는 것 같은 동작을 풀며 걸음을 옮긴다.
왼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던 섬전추풍(閃電追風).
해원기의 눈을 속이고 도주하려던 복면인을 때린 탈백경혼(奪魄驚魂).
전부 절세오검(絶世五劍)의 수법이요, 검림소연의 기운을 사방대주루 밖으로 확장한 오른손과 함께 검을 거두는 수검(收劍)의 예까지 치렀다.
누가 알아보겠나.
그런데 해원기가 막 발을 떼자마자,
“수법이 아니라, 서, 설마 마도절세오검(魔道絶世五劍)?”
간신히 외치는 봉대저의 힘겨운 목소리에 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궁색한 서생 모습은 그대로지만, 눈꼬리가 찢어질 듯 커진 두 눈과 벌어진 채 가볍게 떨리는 입술. 봉대저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해원기 역시 조금 의외였으나, 입가가 약간 누그러진다.
봉대저의 말끝이 올라갔었지.
“그거 질문이죠? 흠, 일단 저자부터 확인하고요.”
따라오라는 듯 한쪽 어깨를 으쓱하고는 성큼성큼 복면인을 향하니.
봉대저가 겨우 입술을 깨물며 뛰었다. 뜻밖에 실태를 보인 게 속상하다.
해원기가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두 다리가 부러진 주귀, 양팔과 어깨가 꺾인 색귀와 재귀, 계단에 부딪혀 등까지 나간 귀장. 전부 검림소연의 여파로 혼절했으나.
그래도 전신이 난자되고 오공에서 피를 흘리는 복면인보다는 나았다.
얼굴을 가렸던 복면과 겉에 걸친 옷이 본래 하나로 이어진 천이었던 듯, 탈백경혼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 후에는 몸에 딱 붙은 경장 차림이 드러났고. 대머리에 수염 한 올 없는 맹숭맹숭한 얼굴도 심한 고통을 고스란히 내보인다.
곳곳에 오래된 상처를 지닌 오십 대의 얼굴. 눈썹까지 민 괴이한 외모인데 지금 피까지 흘려 흉한 몰골이 된 건 해원기의 탈백경혼 때문이다.
오행제림은 오악검법을 즐겨 쓰지만, 오귀전륜은 아무래도 절세오검이 더 어울리기에.
손을 거듭해 펼칠수록 심해진다.
해원기가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너는 누구냐? 네가 쓴 건 왜인(倭人)들의 소위 인술(忍術)이란 것이지?”
뒤에서 사주한 자가 반룡령의 백문기라는 건 이미 알고. 탄금지의 오현제발을 버틴 왜도술과 함께 마지막의 눈속임이 궁금했다.
복면했던 자의 붉게 충혈된 눈이 해원기를 노려보다가,
“오, 오마에가 난테……, 컥.”
간신히 중얼대는 소리. 알아듣지 못할 말을 맺지도 못하고 머리가 넘어간다.
“후우.”
해원기가 참았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역시 과했다.
대명호의 북극묘에서도 그랬다. 일단 진짜 능력을 펼치기 시작하면 그 본연의 힘을 제어하기 어려워진다.
삼산이 존재하지 않는 신왕공이지만, 바탕에는 보평청강이, 운용에는 풍뢰결이 항상 어우러지고. 검왕수를 시전하면 할수록 점점 강해진다.
지나치게 힘을 쓰지 않으려고 시작한 탄금지라, 주귀 등은 근골이 상해서 혼절하는 정도로 끝났지만. 왼손이 일단 오귀전륜을 전개하자 섬전추풍이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베어버리고, 그걸 피한 자에겐 탈백 뿐 아니라 절세오검에서 가장 독한 비천경혼음마검(飛天驚魂陰魔劍)까지 섞어버렸다.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은 상생상극(相生相剋)으로 호응하니. 검림소연에도 분명히 그 영향이 미쳤을 터.
살아남기 어렵다.
“왜어로군. 향락사귀에 왜인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해 소제는 왜인의 기예도 알아? 아, 이건 질문이 아니라고. 오히려 내가 알려줄 수 있지.”
착잡해지려는 심정을 봉대저의 목소리가 일깨워서.
해원기가 짧게 혀를 차곤 밖을 가리켰다.
“쯧, 우선 이곳을 떠나죠. 오래 있어서 좋을 곳이 아닙니다.”
봉대저가 주변을 훑어본 후에 다시 해원기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어차피 밤길을 걸을 예정이었으니까.”
방성의 곳곳에 여전히 향락사귀의 무리가 퍼져있을 공산이 크다. 우두머리를 전부 제압했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곳.
해원기가 아까 평가한 것처럼 살수는 살기를 숨기고 평범한 백성으로 접근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사방대주루를 포위한 바깥 상황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봉대저는 그냥 해원기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이미 그 능력의 일단을 목격했기에.
방성에서 북쪽을 향하면 다시 지대가 높아져 가파른 산세가 시작된다.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방성을 떠나 반 시진쯤 경공을 펼치다가 속도를 늦추었다.
이미 술시(戌時)도 넘어갈 때.
봉대저가 오른쪽에 우뚝 솟은 큰 바위를 가리켰다.
“저 위가 그럴듯해 보이네. 잠시 쉬면서 요기를 하자고. 밤새 갈 거잖아.”
오래 묵은 나무 몇 그루가 우산처럼 위를 가린 너럭바위라 두 사람이 머물기엔 딱 알맞은 곳.
가볍게 위로 오른 해원기가 어깨에 걸쳤던 회색 천을 펼쳐 앉을 곳을 마련했다.
당연하다는 듯 그 위에 앉는 봉대저.
“기껏 시켜놓은 차와 요리는 맛도 못 봤지. 해 소제, 돈 아까워서 어쩌나?”
놀려대는 말투가 평소로 돌아갔지만, 회색 천 끄트머리에 걸터앉던 해원기의 얼굴은 꽤 불편한 기색.
“그러게요. 근래에 아주 헤퍼졌습니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지 못한다.
돈이 떨어져서 흥륭을 찾아갔었고, 흥륭에서 받은 여비 중 남은 걸 개봉에서 악송령에게 다 줘버렸다. 그러다가 약왕당에서 다시 용돈을 받은 게 얼마 전이다.
무림에 발을 들일 결정을 하기 전에, 장거리 쾌체로 살던 육 년 동안은 이런 적이 없었건만.
또 심하게 손을 쓰고 나선 마음이 편치 않다.
비록 살수들이라도.
요대자에서 간단히 건량이라도 꺼내려 하는데.
“자, 이걸 먹자고. 조금 식었어도 기운을 쓰고 난 후에는 고깃점이 나아.”
봉대저가 기름종이에 싼 걸 풀어 건네준다.
그 안에 가득 담긴 얇고 길쭉한 튀김. 반점에서 두세 사람이 먹을 양 정도로 풍성하고, 안에는 나무젓가락과 향신료가 담긴 종이도 있다.
해원기가 하나를 입에 넣어 씹으면서 비로소 얼굴을 폈다.
“건작리척(乾炸裏脊)이로군요. 언제 준비했습니까?”
짊어졌던 보따리에서 물주머니까지 꺼내던 봉대저가 해원기의 얼굴을 보며 히죽 웃는다.
“낮에 방성에서. 그 서방질 아줌마들 찾으러 가기 전이지. 입에 맞나 보군. 약왕당에서 이른 아침을 먹었다고 해도 방성까지는 식사를 걸렀을 거 아냐. 그리고 조금 전에 또…….”
사방대주루를 떠날 때 이미 확인했었다.
풍각쟁이 따위로 분장한 졸개들 수십 명이 전부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맥을 추지 못하는 것을.
우두머리를 포함해 근 백 명이 그 자리에서 제압당했으니, 환락사귀라는 이름도 이제는 완전히 망한 셈.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해원기 혼자서 이룬 일이다.
얇게 저민 등심을 기름에 튀겨낸 건작리척을 이렇게 내놓은 건 그런 이유. 힘써 일한 이에게 합당한 상을 준다는 건가.
해원기가 사양치 않고 고기튀김을 연달아 집었다.
“마침 배가 고팠습니다. 약왕당을 떠날 때는 방성에서 이른 저녁을 먹을 셈이었거든요. 예전에는 아무리 바빠도 여간해선 끼니를 거르지 않았었는데. 배가 비면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라서.”
“호, 그거 좋은 말이네. 맞아, 지나치게 궁하면 시야가 좁아지고 엄한 실수를 범하지. 해 소제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잘 하는구먼.”
“제 나이를 아는 것처럼 들립니다?”
“흥. 왜 이래. 이 누님의 안목을 우습게보나? 생김새와 차림새 때문에 얼핏 어려 보일 수는 있어도 이십 중반은 넘겼지. 아직 서른은 안 되었을 테니까, 많아봤자 스물일곱 여덟일걸. 내가 괜히 누나를 자처하는 줄 알아?”
해원기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자신의 나이를 단박에 추리해내는 경우는 처음이다. 그럼 이렇게 눈썰미가 대단한 봉대저는 서른은 되었다는 뜻일까.
구름도 거의 없는 하늘이라서 반달인데도 주위가 훤하다.
밤중이 되어 서늘해졌지만, 딱히 불을 피울 정도는 아니고.
고기튀김을 씹으면서도 봉대저는 틈틈이 말을 끼워 넣는다.
“환락사귀의 셋은 다 만났었지만, 기귀가 진짜 두목일 줄은 몰랐어. 더구나 왜인일 줄은. 귀장이라고 불린 원숭이는 아마 겉으로 드러난 기귀일 거고, 진짜 환락사귀의 우두머리, 귀장은 복면했던 왜인일 거야. 밀탐(密探)이나 호위, 혹은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자들을 인자(忍者)라고 한다지. 그 인자들은 무공 외에도 남을 현혹하는 다양한 기술을 지녔다는데, 일종의 술법 같은 거고. 복면인이 원숭이 그림자로 숨고 쌍둥이처럼 굴었던 것도 그중 한 가지겠지. 우리가 체신(替身)이라고 하는 가짜, 왜인들은 영무자(影武者)라고 부르더군.”
“왜어도 압니까?”
“조금은. 아까 해 소제에게는 ‘네놈이 어떻게?’라고 한 거고. 꽤 놀래서 본래 말이 튀어나온 거야.”
“흐음.”
약속과 상관없이 알려주겠다는 내용.
해원기가 봉대저의 설명을 들으면서 미간을 좁혔다.
오랜 세월 왜구가 설치긴 했어도 해안을 벗어나 내륙까지 침입한 적은 그다지 많지 않다. 더구나 왜인이 강호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예는 극히 적은데. 해원기는 지금까지 벌써 세 번이나 왜도(倭刀)를 접했다.
대명호 북극묘에서 동창 첩형의 수하 중 술자령이란 여자. 병기와 무공이 모두 왜도에서 변형된 것이었고.
구란와자에서 왕소군으로 분했던 자. 염라검법을 썼지만, 왜도술을 기초로 익힌 동영의 살수였으며.
이제 환락사귀의 우두머리가 인술을 쓰는 영무자란다.
이게 그저 우연일까.
“뭔 생각해?”
“아, 네. 아까 나한테 질문 하나 빚졌죠? 아니, 두 개던가.”
해원기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바꾸었다.
해원기와 귀장이 나눈 대화의 의미를 물었던 게 한 번. 그리고 해원기의 왼손이 펼친 마도절세오검을 물은 게 또 한 번.
봉대저가 집었던 튀김을 내려놓으며 코웃음을 쳤다.
“흥, 두 번째는 성립되지 않아. 뭐 좋아, 일단 물어봐.”
절세오검에 관해선 궁금하지 않다는 건가.
어떻든 한 가지 질문할 권리가 생긴 해원기도 식사를 멈추고 생각했다. 아직 그 정체를 모르는 봉대저. 강호에서 언제부터 어떤 일을 했을까. 또 반룡령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동창과의 관계도 물어볼 수 있을까.
그러나 질문에도 제한이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
모르거나, 대답할 수 없거나, 역으로 먼저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