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낙극생비(樂極生悲) (2)
‘제 무공만 믿고 설치는 것들은 안 돼. 이 녀석도 결국은 그런 부류…….’
역용한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지만, 외면하는 봉대저의 눈에는 그런 실망감이 스쳐 갔다.
벌써 몇 번째인가.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이 정도면 괜찮다고, 잘만 이끌면 쓸모가 있을 거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허망한 희망을 품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
그동안의 헛수고는 다 잊고, 이제 여기서 빠져나갈 궁리나 하려는데.
“생신연이라면서. 낯선 과객을 희생으로 삼으려는 걸 보니 이 작자들 몹시 나쁜 사람들이로군요.”
해원기가 건네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들었다.
찌푸린 표정에 답답한 말투. 진짜 바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지만.
호수처럼 깊은 두 눈에 은은히 맺히는 기이한 광채를 확인하자, 봉대저는 마치 정수리에 냉수를 퍼부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그, 그렇지.”
저절로 움직인 입이 일단 말을 받았고.
해원기는 일 층부터 삼 층까지 주욱 훑어보면서 가볍게 혀를 찬다.
“쯧. 확실히 보통이 아니네요. 방성 전체에 그물을 깔아둘 줄은 생각도 못 했고. 이게 지금 저의 한계란 걸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말을 멈추며 한 걸음.
탁자를 떠나는 해원기의 앞에는 벌써 꽤 많은 사람이 늘어섰다.
계단 근처 주귀의 탁자에는 나머지 셋이 벌떡 일어섰고, 그 앞에는 화려한 무희들이 아홉. 휘어진 계단에는 좋은 옷을 걸친 사내들이 열두 명이요, 일 층을 내려다보는 이 층 난간에는 남녀노소 수십 명이 언제라도 뛰어내릴 듯, 삼 층 다락의 닫힌 문도 착착 열린다.
눈에 들어오는 자들만 오십이 넘는 숫자.
게다가 주루 밖에서 들려오던 흥겨운 악기 소리가 다 그쳤으니, 주루를 아예 포위한 모양이다.
물경 백에 이르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옴치고 뛸 수도 없는 상황인데.
해원기가 굳이 주귀와 색귀로 보이는 술꾼과 아줌마를 차례로 보면서 말을 잇는다.
“야점이나 구릉의 함정에 비하면 보잘것없군요. 이건 그쪽의 한계일까요.”
또 한 걸음.
목소리가 크지도 않고, 말투는 여전히 봉대저에게 건네는 듯하다.
정신을 차리긴 했으나 봉대저가 연신 눈을 껌뻑거리며 해원기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실망했던 과거의 경험과 뭔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기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전혀 바뀌지 않은 것.
그건 바로 해원기의 표정과 음성.
이런 상황에서.
조금도 경황(驚惶)하지 않는다.
“잠깐.”
삼 층은 개방된 회랑이 아니라 방으로 꾸며져서, 벽창이 열리자 냉혹한 목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서서히 자세를 가다듬던 오십여 명의 동작이 멈추자 그 목소리가 냉소를 흘렸다.
“흐흐, 담력은 있구나. 그런데 그 주둥이로 떠든 한계는 무슨 뜻이냐?”
해원기의 엉뚱함에 의구심이 생겼나.
우두머리로 여겨지는 자의 질문에 해원기는 도리어 봉대저를 돌아보고,
“이제 대화라. 이거, 또 한 가지를 알았습니다.”
또 모호한 소리.
그러나 봉대저가 뭐냐고 되물을 틈은 없었다.
해원기가 불쑥 들어 올린 오른손. 삼 층의 한 곳을 향하더니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편다.
“그리고 나는 누가 위에서 떠드는 걸 좋아하지 않죠.”
손가락이 아무것도 없는 공중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잡아당기는 시늉.
뭘 하려는지.
우직, 콰당!
그러나 폭음과 함께 와르르 쏟아지는 파편에. 모두가 펄쩍 뛰었다.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 무희들은 바로 코앞에 뚝 떨어진 충격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기침을 해대고,
뒤이어 떨어져 내리는 나뭇조각에 다른 이들이 정신없이 위를 쳐다본다.
벽창이 열린 삼 층 가운데, 방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서 커다랗게 구멍이 뚫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잡아 뜯은 것처럼.
그리고 그 혼란 가운데 뿌연 먼지를 헤치고 일어서는 그림자.
“크윽, 뭐, 뭐냐?”
경악과 고통이 뒤섞인 말소리에 주루 안이 화들짝 놀라 움직였다.
“귀장(鬼長)!”
“귀장이라고?”
“어? 어째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져서 어쩔 줄 모르는 오십여 명, 그래도 와중에 네 개의 인영이 급하게 먼지 속으로 뛰어든다.
일 층의 주귀, 이 층에서 뛰어내린 둘, 삼 층에서 날아든 하나.
얼른 몸을 세웠지만, 충격이 가시지 않는지 비틀거리는 자. 왜소한 체구에 짧은 머리, 보기 드문 연갑(軟甲)을 걸쳤고, 허리에는 어중간한 길이의 칼을 두 자루나 매달았다. 생김새는 딱 원숭이요, 두 팔도 보통사람보다 훨씬 긴 듯.
주귀라는 술꾼, 색귀라는 아줌마, 부유한 상인 차림은 아마 재귀일 터. 그리고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홀쭉한 사내까지 넷이 모여들지만.
귀장이라 불린 원숭이의 시선은 해원기를 찾느라 바빴다.
“네 놈잇.”
겨우 한 마디를 힘주어 내뱉지만.
그 눈에 보이는 건 차례로 세어보는 손가락질.
“주귀, 색귀, 재귀. 그럼 기귀는 저 검은 복면일까, 아니면 귀장이라 불린 자일까. 뭐, 어쨌든 환락사귀의 우두머리는 귀장이겠지.”
해원기의 고리타분한 말투보다 그 손가락에 절로 움찔하는 건, 아무래도 방금 삼 층에서 끌려 내려온 충격 탓일 게다.
귀장이 선뜻 말을 잇지 못하는 틈에,
“아까 그 얘기는 무슨 의미야?”
해원기의 뒤에서 먼저 나온 말소리. 해원기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손을 거두었다.
“그거 질문입니까?”
“으휴, 그래. 질문이야.”
이 상황에 둘이 대화라니.
가라앉는 먼지 위로 해원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린 게 보인다.
“야점이나 구릉에선 배치도 좋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살기를 잘 숨겼다는 거죠. 고수라면 살기를 축적할 수 있지만, 그렇게 완전히 감추진 않거든요. 그런데 이 사방대주루에선 아예 살기를 있는 대로 다 드러내던데. 살기를 다 드러낸 살수란, 음, 웬만한 산적만도 못하네요. 그게 살수의 한계고.”
뭔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귀장의 원숭이 같은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환락사귀 넷이 다 모였고, 안팎에 모아놓은 수하만도 백이 넘거늘.
이렇게 주절주절 떠드는 놈의 배를 확 갈라놓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삼 층에서 끌려 내려왔는지 모를 일. 더구나 해원기의 왼손이 슬그머니 올라오는 통에 또 몸이 굳어졌다.
아까 오른손이 자신을 가리키자마자 바닥에 메다꽂혔잖나.
“자신의 수는 많고 상대가 어리숙하게 포위 안에 들어왔으니 완전히 이겼다고 생각했겠죠. 그러면 같잖은 여유를 부리며 잘난 체하길 좋아한다……, 나쁜 놈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라고 배웠습니다.”
해원기의 자세한 설명이 덧붙자 봉대저가 뒤에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환락사귀의 한계와 귀장이 그 한계를 물은 것에 대한 답변.
추측하기 어려운 능력을 보였지만, 그 답변처럼 해원기 자신도 너무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닐지.
그런데 ‘나쁜 놈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라. 누가 그런 걸 가르쳤을까.
해원기가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또 입을 연다.
“그래서 전부 때려잡을 겁니다.”
우우웅.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전해지는 진동.
사방대주루가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통째로 흔들리고, 귀장이라는 인물이 황급하게 고함을 질렀다.
“쳐라!”
그건 본능. 마음을 진정시키고, 태세를 갖추고, 수하들을 배치하고. 그럴 틈이 없었다. 환락사귀에서 가장 강한 넷이 곁에 있고, 백 명이 넘는 수하가 모였지만 불안과 공포가 확 밀려든다.
해원기의 슬그머니 올라간 왼손이 크게 원을 그렸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동작, 얼핏 굳은 팔을 푸는 행동으로 보일 정도.
그러나 그 동작 하나에 사방대주루 안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바람도 들어오지 않았건만.
엉덩방아를 찧은 무희들이 낙엽처럼 굴러가고, 주귀와 함께 있던 술꾼들도 탁자와 의자를 안고 뒤집혔다. 휘어진 계단과 이 층의 난간에서 몸을 날리려던 수십 명은 아예 난간에 붙어 중심을 잡느라 바쁜 판.
이 거대한 소용돌이의 가운데에 선 해원기와 귀장 무리만 멀쩡한 듯. 아니, 해원기 뒤의 탁자에 앉은 봉대저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봉대저가 해원기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이게 무슨 무공인가? 이 주루가 진동한 게 먼저, 저 왼손이 일으킨 소용돌이는 그 직후. 더구나 아까처럼 기운을 발한 흔적이 없고, 내가 앉은 탁자만 멀쩡하다.’
거울을 닦은 것처럼 반짝이는 두 눈이 해원기의 작은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으려 한다.
고함을 지른 귀장과 나머지 넷이 득달같이 달려들고,
원을 그렸던 해원기의 왼손이 기다렸다는 듯 맞아간다.
바닥을 헤집으며 해원기의 하체를 노리는 건 주귀의 두 다리, 왼쪽에서 색귀의 소맷자락이 어지럽게 날리며 어깨를 휘감고, 오른쪽에선 재귀의 두 손이 허리를 할퀴려 든다.
정면에서 왜소한 체구를 바짝 웅크린 귀장이 양손으로 허리춤의 칼 손잡이를 쥔 채 달려들고, 그 뒤에 바짝 붙은 복면인은 마치 귀장의 그림자인 양.
빠르고 독하며 현란하고 궤이한 합공이다.
‘낭창퇴(狼蹌腿)는 뼈를 부수고, 무정수(無停袖)는 경맥, 산명조(算命爪)는 근육을 찢지. 귀장의 도법과 저 복면인은 나도 모르겠지만.’
향락사귀 중 셋이 어떤 수법을 쓰는지 이미 아는 봉대저가 기이하게 흔들리는 해원기의 왼손에 눈길을 빼앗겼다.
덮쳐드는 다섯 명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부드럽게 좌우를 오가는 손. 손가락 다섯 개가 춤추듯 움직인다.
누르는 엄지, 당기는 식지와 무명지에.
파파팡.
“크악.”
“억.”, “아앗.”
낭창퇴가 짓이겨진 주귀가 비명을 지르고, 무정수와 산명조가 미끄러져 두 팔이 꼬인 색귀와 재귀는 여파에 팽이처럼 돌아 쓰러졌다.
그리고 문대는 소지와 튕기는 중지.
카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귀장과 복면인이 주르르 밀려나며 진저리를 친다. 두 사람이 손에 든 건 길이와 모양이 똑같은 네 자루의 칼. 이 척이 조금 넘는 어중간한 길이지만, 새파란 날이 범상치 않다.
좌우로 벌어진 귀장과 복면인을 보며 해원기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왜도술(倭刀術). 그림자에 숨는다?”
한꺼번에 다섯을 제압하려 했는데 둘이 빠져나갔다. 복면인은 아무 병기도 지니지 않은 거로 보였으나, 귀장의 그림자에 숨어 있다가 돌연 귀장과 똑같은 칼을 똑같이 휘둘렀다. 그건 왜구들이 흔히 쓰는 간결하면서도 흉포한 도법.
그림자에 숨는 것도 괴이한 기예다. 처음부터 모습을 감춘 게 아니라 복면을 한 채 멀쩡하게 나타났다가 싸우는 순간에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다니. 왜소한 원숭이의 그림자에 홀쭉이가 숨는 것도 예상외.
혼잣말은 잠깐.
해원기의 오른손이 아래에서 천천히 위로 솟는다.
웅.
또 한 번의 울림. 그러나 그 울림은 고통스러운 신음과 비명의 합창 속에 묻혔고.
“큭.”
“으윽.”
“케엑.”
사방대주루 안의 오십여 명이 동시에 고꾸라지는 장관이 벌어졌다.
검왕오형의 세 번째 검림소연에.
봉대저는 자신이 어느새 벌떡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벌어진 입술이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는 것도.
‘마, 마치 탄금(彈琴), 금을 튕기듯 놀리는 손가락으로만 다섯을. 그리고 저 오른손은 뭐지? 마지막에 주루 전체에 치솟은 기운, 언제 그런 기운을 발했단 말인가. 미리 심어두었다? 서, 설마 기권(氣圈)을 이루는 경지에 다다른.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까?’
순후한 기공(氣功)을 극도로 단련하면 마침내 원하는 대로 권역(圈域)을 설치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 권역 안에서는 자신의 무공을 더욱 뜻대로 구현할 수 있고. 이른바 스스로 가피(加被)를 입는 경지.
절정고수만이 가능하다.
그녀가 어려서부터 배운 모든 것, 온갖 고통 속에서도 기어이 외웠던 그 광대한 지식.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머릿속이 온통 헝클어진다.
더벅머리 청년이 보여준 능력 때문이다.
절정고수라도 불가능하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