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낙극생비(樂極生悲) (1)
방성.
꽤 큰 고을답게 저녁이 되자마자 곳곳에 큰 등이 켜지고, 차려입은 백성들이 많이도 돌아다닌다.
해원기가 얼마 전에 겪었던 폭우도 전부 대별산맥을 넘진 못해서 이 방성은 계속 화창한 날씨. 슬슬 온도가 올라가니 사람들도 집에 있기보다는 밖으로 나와 즐기려는 것이다.
음식을 파는 작은 가게부터 호화로운 주루며 차관까지 한몫 잡을 때이니 불을 환히 밝혀 손님을 붙잡을 수밖에.
번화한 중심가를 걷던 해원기가 앞에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사방대주루(四方大酒樓). 저곳으로 가죠.”
상당히 큰 삼 층짜리 누각. 층층이 추녀에 수십 개의 등을 달았고, 입구에도 사람 키만 한 등탑을 두 개나 세워서 금박으로 메운 편액의 글자가 멀리서도 보인다.
해원기는 짙은 회색 천을 왼쪽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비스듬히 걸친 모습. 바로 옆에서 걷던 이가 피식 웃었다.
“비싼 곳을 찾으면 괜찮을까? 뭐, 가보자고.”
찌그러진 모자, 낡은 장삼에 등에는 작은 보따리까지 져서 영락없이 궁색한 서생으로 보이는데.
방성에 들어오기 직전, 순식간에 외모를 바꾼 봉대저다.
노파였다가 서생으로. 얼굴이나 몸매뿐 아니라 목소리와 움직임까지 바꾸는 놀라운 능력. 단순한 변장이 아니다.
정교한 면구(面具)를 착용하고 약물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으로 분하는 역용술(易容術)이란 게 있지만, 그것도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자연스럽게 남의 눈을 속일 수 있거늘.
봉대저는 그저 몸을 한 바퀴 돌리는 사이에 딴판으로 달라졌다.
해원기에게도 회색 천 하나를 던져주며 가슴의 판과와 허리의 요대자를 가리라고 했고.
용모파기(容貌疤記)의 기본은 특징을 잡아내는 것이라나.
‘내가 워낙 평범하게 생겨서 회색 천으로 가리기만 해도 된다고 했지.’
해원기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걸음을 옮겼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거쳤던 주귀와 색귀의 암습. 향락사귀에는 아직 재귀(財鬼)와 기귀(技鬼)가 남았으며, 이제껏 전력을 기울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큰 고을인 방성에서 해원기가 어디로 올 줄 알고 함정을 설치하겠나.
해원기가 그런 의문을 표하자 봉대저는 그저 웃기만 했고, 이후로 해원기 뒤를 졸졸 따르기만 한다.
어쩐지 비웃는 느낌이라 해원기도 더 묻지 않고 나름대로 생각해서 고른 곳이 가장 화려해 보이는 사방대주루.
저 정도면 행세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출입하는 고급 음식점일 터. 해원기가 들르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며 함정을 파기에 용이한 곳도 아니리라.
봉대저가 또 비웃듯 피식거리는 게 거슬렸지만,
해원기가 성큼성큼 사방대주루로 들어갔다.
“아, 이쪽이 편하실 겁니다. 주문은 뭐로?”
입구 바로 옆 탁자. 들어서자마자 다가온 점소이가 해원기와 봉대저를 위아래로 훑어보곤 대뜸 권한 곳이다.
돈 있어 보이지 않는 차림새이니 뜨내기손님을 대충 대하는 게 분명하지만,
해원기는 오히려 주루 안팎을 두루 볼 수 있는 곳이라 불만이 없었다.
“간단한 요리 두 개와 괜찮은 차가 있으면 내오게.”
“괜찮은 차라면, 가격이 좀 되는뎁쇼?”
떨떠름한 반응. 사람을 우습게 보는 티를 역력히 내는 점소이에게 해원기가 은자를 넉넉히 내주었다.
“이거면 되겠지.”
점소이가 멋쩍게 물러가든 말든. 먼저 사방대주루의 내부를 훑어보았다.
일 층에 탁자가 여덟 개. 계산대와 계단이 차지한 면적을 빼도 상당한 규모다. 계단도 일부러 휘어지게 만들었고, 이 층에는 사방으로 난간을 세운 회랑에 붙은 탁자들이 또 열두 개. 또 좁은 계단이 뒤로 이어져 삼 층에도 올라갈 수 있는 듯. 삼 층 다락은 덧문으로 닫혀서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이것만으로도 한 번에 백여 명을 접대할 수 있는 크기다.
대주루라는 이름에 걸맞지만.
“호오, 돈은 넉넉한가 보네. 장갈에서는 면식이 통하는 거로 때운 것 같던데?”
봉대저의 놀리듯 건네는 말에 시선을 거두었다.
봉대저가 찾아왔던 장갈의 객잔은 같은 쾌체 일을 하는 이에게 소개받은 곳. 그때는 돈이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외상을 했고, 그걸 또 다 알아낸 모양이다.
어지간히 조사했구나.
“그것도 질문입니까?”
“아니. 지금 내놓은 은자의 출처가 약왕당이란 게 살짝 궁금하지만, 굳이 물어보고 싶진 않아. 나야 얻어먹으면 그만이니까.”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봉대저는 과연 해원기가 약왕당에서 출발한 것도 안다.
단목정에게 여비를 받은 것까지.
참으로 기민하고 영악한 여인. 방성을 지나 어디로 가는지도 알겠지. 한 가지씩 묻고 답하는 약속을 이런 소소한 문제에 쓰고 싶진 않은가.
해원기가 화제를 바꾸었다.
“고급 주루라서 그럴까요. 바깥과는 달리 손님이 그리 많지 않고, 오히려 이 층이 북적대는군요.”
봉대저가 위를 힐끗 보곤 머리를 흔들며,
“그렇네. 왜 그런지 알아? 물어보면 가르쳐줄게.”
거꾸로 질문을 유도한다. 이 기묘한 여자의 어울리지 않는 유치함에도 차츰 익숙해지는 중이라.
해원기가 아예 입을 닫았다.
마침 점소이가 주문한 요리와 차를 대령해서 억지로 대화할 필요도 없었다.
해원기와 봉대저가 앉은 입구의 탁자를 제외하곤 계단 옆의 손님이 넷.
이 층의 절반이 넘는 탁자에 사람들이 몰려 먹고 마시느라 떠들썩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산하다.
계단 옆의 네 명은 꽤 그럴듯한 차림새지만, 일찍부터 술추렴을 시작했는지. 한 명은 벌써 곯아떨어졌고 나머지 셋이 흔들거리며 각자 잔을 드는데. 그것도 입가로 줄줄 흘려 엉망이다.
죽자고 퍼먹은 주당들임이 틀림없다.
위에서는 웃고 떠드는 가운데 축하하는 말이 자주 들리는 거로 봐서는 부잣집 잔치라도 열린 듯. 온 집안이 다 몰려나와선지 여자들과 아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고급 주루의 한 층을 통째로 세내어 호탕하게 잔치를 치르는 예도 적지 않아서.
봉대저가 유치하게 질문을 유도했다고 여긴 해원기가 먼저 봉대저의 찻잔을 채웠다.
“묵은 것 같지만 좋은 홍차(紅茶)군요. 식사를 마치면 밤길을 갈 생각이라, 속을 든든히 채우시죠.”
객잔에서 잘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기묘한 약속을 맺은 사이, 동행하려면 해원기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야만 할 터.
그래서 음식을 권한 건데.
찻잔을 쥐던 봉대저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해 소제는, 참 순진하네.”
말 중간에 잠깐 쉰 건 ‘순진’이란 단어를 찾느라. 또 사람을 조롱하려나 싶어 해원기가 못 들은 척 젓가락을 잡았지만.
“넷이나 되는 살수 집단이 강호에 그다지 소문이 나지 않은 건 그만큼 은밀하게 일을 처리했다는 뜻이야. 워낙 가격이 비싸서 부유하고 힘을 가진 자들만이 이용하고, 그 결과가 언제나 만족스러웠다지. 그러면 당연히 돈과 권력의 그늘 속에 들어앉을 수 있잖아. 상대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는 게 옳지는 않아도, 모르는 상대라면 위험을 최대치로 잡는 게 낫지 않을까?”
혼잣말처럼 나직한 봉대저의 말에.
선뜻 음식을 집어 들지 못했다.
밤길을 걷는다고 알려주면서 식사를 권했기에, 그 보답으로 향락사귀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걸까.
아니, 이건 약속에 따른 거래라기보다는 지나치게 순진한 아우가 한심스러워서일지도.
야점의 장사꾼과 서방질한 여자들만 겪은 해원기다. 독특하고 방비하기 어려운 살수들이란 관념만 있을 뿐. 실제로 향락사귀란 살수조직이 어떤 규모인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파악하지 못했기에. 이렇게 호화로운 주루를 찾은 것으로만 충분하다고 여겼다.
소홀했었나.
이때.
갑자기 계단을 쿵쾅거리며 몇 사람이 내려오고, 입구 쪽으로 시끌벅적한 소음이 다가들었다.
“아아, 장 대인이 이제야 오시네.”
“뭐야, 이 대인이 부른 풍각쟁이와 이야기꾼도 같이 오잖아.”
“이제야 흥이 나겠네. 어서 나가자고.”
중장년의 사내 다섯. 전부 비싸고 화려한 옷을 걸쳤고 살집이 두둑이 올라 부잣집 자손답다.
원래 이런 잔치에는 가족만이 아니라 가까운 이웃들과 벗을 초청하기 마련. 부를 과시하려고 악사와 가희를 부르고, 재미있는 얘기를 파는 설화인(說話人) 따위들도 동원하기 일쑤다.
과연 입구에서 장 대인과 이 대인이라고 당당한 풍채의 인물들이 또 여럿을 거느리고 들어와 왁자지껄 인사를 나누더니.
삘리리, 당당당.
피리 소리, 북소리가 음을 맞추기 시작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 층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지는데.
해원기는 귓가에 전해지는 봉대저의 전음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제부터라고.]
뭐가?
화려한 의상에 머리에는 화관(華冠)까지 쓴 무희가 줄줄이 들어오면서 진한 향수 내음이 진동하고.
장 대인과 이 대인 일행을 안내하던 사내 중의 하나가 탁자에 다가와 예를 표했다.
“이거 실례하오. 오늘 가친의 칠십 대수(大壽)라. 함께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소.”
나이든 부친의 생신연이라면 생면부지의 과객이라도 대접하는 게 도리.
고압적이긴 해도 제대로 예의를 갖춘 말이라 해원기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르고 들른 처지에 어찌 무례를 범하겠습니까. 조용히 식사를 마치면 물러나지요. 삼가 영존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수비남산(壽比南山), 복여동해(福如東海).”
수명은 산과 같고, 복은 바다와 같아지라는 축수의 관용어.
포권을 마치자 벌써 몸을 돌린 사내보다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봉대저의 시선이 더 거북하다.
기껏 귀띔해줬거늘.
그런데.
“와하하하하, 수비남산? 이거 정말 웃기는구먼. 정말 저 어리숙한 녀석이 맞아? 딸꾹.”
갑자기 터진 폭소와 딸꾹질.
그리고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전부 동작을 멈춘 사람들. 줄줄이 들어오던 무희도, 이 대인과 장 대인 무리도, 심지어 이 층에서 떠들던 자들까지 돌연 움직이지 않고. 입까지 봉해서 주루 안이 불현듯 정적에 빠져들었다.
막 흥이 오르던 생신연이 그대로 정지한 것처럼.
오직 혼자서 웃어대는 이. 바로 계단 옆 탁자에서 곯아떨어졌던 인물이었다.
해원기의 시선이 날카롭게 향하는데.
이 층의 난간에 기댄 여인 하나가 한숨을 길게 내쉰다.
“후우우, 왜 이리 서둘러? 나중에 또 욕먹으려고. 주귀.”
머리엔 장식을 하나 가득 꽂고, 주름을 지우려고 두껍게 바른 분칠. 나이깨나 먹은 뚱뚱한 아줌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 층 구석에서 혀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쯧쯧, 도대체 너희는 우리 사업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방성 곳곳에 애들을 풀고, 이 사방대주루를 전세 내고, 비싼 옷에 비싼 음식……, 도대체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아? 아이고, 아까워라.”
해원기의 시선이 차례로 음성을 쫓았다.
여전히 굳어있는 사람들. 술꾼과 뚱뚱한 아줌마, 그리고 돈이 아깝다는 목소리.
처음에 주귀라고 불렀으니 그럼 나머지는 색귀와 재귀인가.
마지막으로 꼭꼭 닫힌 삼 층 다락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곧장 이곳으로 들어오기에 그 의도가 궁금했었지. 함께 들어온 궁색한 서생도 의심스러웠고.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내장까지 다 들어내야 직성이 풀리겠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혹한 목소리.
해원기가 인상을 찡그리며 천천히 봉대저를 돌아보았다.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고른 이 사방대주루가 실은 방성 전체를 지켜보려고 환락사귀가 전부 모인 곳이었을 줄이야.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온 셈이잖은가.
봉대저는 찻잔만 홀짝이며 딴청을 피운다. 네가 저지른 일이니 네가 처리하라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