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주색재기(酒色財技) (4)
해원기가 몸을 세웠다.
발끝에 닿은 건 여린 풀잎 하나. 비록 생기를 머금어 쭉쭉 자라는 때긴 해도 기껏해야 풀잎이거늘. 마치 평지처럼 밟고 서서 주변을 살피는 놀라운 경공.
풍뢰동의 기연도 있었지만, 해원기 스스로 공을 많이 들인 부분이 바로 경공이고. 이 경공에서만은 사부와 탁 소숙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빠르게 몸을 날렸던 해원기가 갑자기 멈춰 선 이유,
그건 노파의 기척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암습한 여자들을 선풍결로 물리치고 곧장 노파를 찾았다. 한 호흡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고, 병약한 노파가 아무리 서둘렀다고 해도 멀리 가진 못했을 텐데.
여자들의 암습을 넌지시 알려준 거로 봐서 보통 노파는 아니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줄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시안으로 비췻빛이 선명한 해원기의 두 눈이 슬슬 저물어가는 구릉 지대를 훑었다.
자신이 익힌 경공의 조예, 그걸 능가할 정도로 쾌속하게 빠져나갔단 말인가.
‘아니, 그렇게 빨랐다면 파공성을 동반해야 하고, 주위에도 일정하게 흔적을 남기지. 그렇다면.’
공기를 찢는 소음도, 풀숲이 누운 흔적도 없다.
신왕공이 더욱 강해지면서 보병청강의 힘을 사방으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보병청강은 본래 모든 물의 정화, 해원기를 중심으로 물결 같은 기운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고.
문득 해원기가 풀잎을 차고 오 장 밖으로 움직였다.
자잘한 돌무더기가 풀숲과 엉킨 곳.
내려서자마자 그 돌무더기 뒤를 향해 말을 건넨다.
“그렇게 웅크리고만 있으면 다리에 쥐가 날 거요. 우리, 만난 적이 있죠?”
아무런 기척도 없건만, 누구에게 하는 말일지.
하나 해원기의 말이 끝나자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던 돌무더기 뒤에서 늘씬한 그림자가 천천히 일어났다.
“호호,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해 소제는.”
젊은 여인의 교소, 그리고 해 소제라는 호칭.
나타난 여인이 누군지 깨달은 해원기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병청강의 힘을 써서야 비로소 기척을 찾을 수 있음은 상대방이 둔형류의 신법을 익혔다는 뜻.
노파와 같은 차림새에 얼굴만 바뀐 여인은 바로 봉 대저였다.
해원기조차 기척을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둔형류의 신법을 보인 자는 지금까지 두 명.
하나는 구주신도 팽조린이고, 또 하나는 장갈의 객잔으로 찾아왔던 봉 대저다.
보병청강의 힘으로 찾아낸 기척, 그리고 동시안으로 확인한 모습.
도대체 어떻게 병약한 노파로 둔갑했을까.
요사스럽다고 여길 만큼 대단한 여인. 과연 봉 대저다.
해원기가 백발과 허름한 옷차림을 다시 훑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발과 옷이야 그렇다 쳐도 얼굴과 체형은 어떻게 바꾸었나.
“뭘 그리 쳐다봐? 부끄럽게. 그나저나 어떻게 이 누님을 찾아냈대?”
살짝 눈을 흘기는 교태는 여전히 어울리지 않지만.
봉 대저도 나름 상당히 놀란 상황.
공들여 바꾼 외모와 몸을 숨기는 수단. 당대에 자신을 찾아낼 사람은 손꼽을 정도건만.
새삼스럽게 이번 위탁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원기가 또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봉 대저와의 대화는 자칫 휘말리기 십상.
“야점의 장사꾼, 이곳의 여자들. 전부 나를 노린 겁니까?”
잘 생각해서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봉 대저가 머리에 쓴 수건과 가발을 한꺼번에 벗어 던지며 가볍게 답했다.
“응.”
“꽤 지독한 수단이더군요. 어떤 자들인지 압니까?”
“응.”
가발 속에 바짝 동여맨 자신의 머리칼을 정리하며 다시 간단한 대답.
이 장난스러운 대응에 해원기가 살짝 인상을 쓰자.
봉 대저가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할 수 없지. 내가 떠드는 바람에 시작된 일이니까. 해 소제, 혹시 향락사귀(享樂四鬼)라고 들어봤어?”
봉 대저의 자책하는 말투에 해원기가 눈썹을 꿈틀했지만, 아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갓 무림에 출도한 처지. 모르는 게 아는 것보다 훨씬 많다.
그럴 줄 알았는지 봉 대저가 바로 말을 잇는다.
“워낙 은밀한 작자들이라 모를 거야. 돈만 받으면 뭐든지 하는, 음, 살인이 주업종이니 살수랄까. 주색재기(酒色財技), 인간의 속된 욕망에 편승한 귀신 딱지들을 가리키는 말이지. 이 고약한 것들에게도 위탁이 들어갔나 봐.”
위탁.
봉 대저가 말하는 건 반룡령이리라.
“에, 전에 내가 슬쩍 말해줬지? 나 말고도 여러 군데가 뒤를 쫓을 거라고 말이야. 이 향락사귀도 그중 하나고, 이 누님이 저희보다 앞서는 게 질투가 났는지…….”
말을 흐리며 슬쩍 눈치를 본다.
봉 대저가 ‘떠드는 바람’에라고 말한 이유를 해원기도 짐작할 수 있었다.
봉 대저 말고 추적이나 탐색에 뛰어난 자들을 여럿 구했던 모양. 서로 정보를 교환하다가 봉 대저에 앞서 손을 쓴 거다.
해원기가 찌푸린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래서 죽이려고?”
야점이나 여자들이나 전부 함정에 빠뜨려 살수를 펼치려 했었다. 말이 딱딱해질 수밖에 없는데.
봉 대저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내가 받은 위탁은 분명히 해 소제의 내력을 알아내는 거였다고. 다른 자들이라고 달랐을까? 다만, 이 누님처럼 신사적으로, 아니, 난 여자니까 숙녀적이라고 해야 하나. 서로 화기를 상하지 않으면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그저 할 줄 아는 게 사람 죽이는 것뿐인 못난이들이라.”
함정에 빠져 죽을 뻔한 해원기의 심사가 좋을 리 없다.
그래서 서둘러 자신은 다르다고 주장하더니, 돌연 눈을 찡긋거리며 화사한 미소를 보낸다.
“그런 식으로라도 알아낼 수는 있거든. 무식한 방법이지만.”
누구든 위험에 빠지면 실력을 감출 여력이 없다.
두 차례의 암습을 통해 해원기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재어본다는 건가. 그러나 겨우 그런 이유로 야점에선 열 명이나 독을 물고 자결했었다.
해원기는 찌푸린 얼굴 그대로.
“인명을 도구로 쓴다? 그 무식한 방법으로 뭘 알아냈소?”
무뚝뚝한 말투에도 봉 대저는 미소를 잃지 않고.
“그 귀신 딱지들엔 관심 없고. 이 누님은 해 소제가 걱정돼서 부리나케 달려왔다구우우. 야점은 놓쳤지만, 저 색귀(色鬼) 년들 함정은 딱 맞춰서 알려줬잖아. 그런데도 따져 묻기만 하다니. 너무 한 거 아냐아아?”
도리어 어디 아픈 고양이처럼 희한한 콧소리를 덧붙이는 통에.
해원기가 움찔, 그만 시선이 돌아가 버렸다.
여기서 이런 애교라니. 참으로 난감한 여자다.
봉 대저에겐 해원기의 반응 하나하나가 흥미로운 듯.
“거봐. 해 소제는 여자에겐 약하지. 이 누님이 아니었으면 색귀의 함정인 걸 알아챘어도 피하지 못했을걸. 못생긴 년들이 젖퉁이랑 볼기짝을 다 내놓으니까 꼼짝 못하고선.”
“마, 말 좀 가려서 하면, 어흠. 그것보다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하시오.”
여자 입에서 희한한 단어가 연달아 나오니 해원기가 질색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봉 대저가 키득거리며 해원기의 옆얼굴을 감상하다가,
“아, 뭘 알아냈냐고? 흠, 야점에서 살아남은 애들이 무슨 벼락이 어떻고 하던데. 여기서는 때아닌 돌개바람이 거셌지. 게다가 초상비로 몸을 띄운 채 이 누님을 찾아내는 능력. 뭐, 이 정도만 해도 소령주가 오만상을 쓰고 위탁한 이유를 알겠더라.”
낡은 옷을 털며 가볍게 답하는 소리에 해원기가 다시 봉 대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점에서 도망친 보표 둘이 이미 보고를 마쳤고, 봉 대저는 곧장 다음의 함정을 찾아왔던 듯.
뇌정결과 선풍결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해원기가 대응한 것만으로도 상당한 정보가 될 것이다.
어떻게 해원기의 행로를 알았을까. 해원기를 뒤쫓는 자들은 몇이나 될까.
아직 알아야 할 게 적지 않지만, 해원기는 우선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왜 알려주었습니까?”
확실히 봉 대저가 귀띔해 주지 않았다면, 여자들의 함정은 알아도 곤욕스러웠을 터.
덕을 본 건 틀림없기에 예의 고지식한 말투가 된다.
봉 대저가 긴 머리채를 올려 묶으면서 히죽 웃었다.
“해 소제는 참 알기 쉽구먼. 감정이 고스란히 표현되니까 이걸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일부러 말을 흐리는 티를 내고,
해원기도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안다.
“바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다른 목적이 있나요?”
타고난 고지식함을 바꿀 생각은 없다. 누구에게나 진심으로 대하는 것, 설사 상대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악인이라 해도.
그것이야말로 사부가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인 이유이기에.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가 다시 묻는 말에 봉 대저가 손을 탁 털었다.
“바보라곤 안 했어. 전에 내가 교환 조건을 내건 거, 기억해? 서로 궁금한 걸 물어보기로 했잖아. 그런데 해 소제가 엉뚱한 일을 당하면 곤란하지.”
“그런 약속을 하지는 않았…….”
“아, 내 대답은 여기까지야. 해 소제가 약왕당으로 간 것, 개봉에서 헤어진 친구들이 있으니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런 몇 가지를 떠벌린 잘못이 있어서 고분고분 말해준 거니까.”
말을 뚝 자르고선 제멋대로 떠든다.
언제 교환 조건으로 약속한 적이 있던가.
해원기가 결국은 참으려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숨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후우우,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제대로 약속을 맺죠. 서로 한 가지씩 궁금한 걸 묻기로. 저와 봉, 소저 간에.”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정체불명의 여자지만, 이미 도움을 한 차례 받았고, 묘하게 나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약속을 하는 게 낫겠다 싶은데.
“봉 소저라니? 나는 봉 대저라고. 그러니까 봉 대저와 해 소제 간의 약속이지. 뭐, 우리 사이에 격식 차릴 일은 아니니까 구두로 약속하면 되고, 그러니만큼 말은 똑바로 하는 게 중요해. 명정언순(名正言順)!”
‘대저’면 큰누나, ‘소제’면 막내 남동생.
큰누나와 막내라서 당장 ‘우리 사이’가 되나.
명분이 바르고 말이 사리에 맞아야 한다는 사자성어까지 강조하는 게 딱 큰누나다.
해원기가 말대꾸할 마음조차 들지 않아서 바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예, 예. 봉 대저.”
그냥 이름이라고 여기면 그만, 상대가 큰누나라고 듣든지 말든지.
빨리 다음 화제로 넘어갔으면 좋겠다.
“그래. 그럼 약속은 일단 맺은 거로 하고, 세세한 부분은 상의해서 조정하자꾸나. 아유,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네.”
‘일단’은 또 뭐냐.
선뜻 몸을 돌리는 봉 대저의 등에다가 또 한숨을 내쉴 판. 그러나 이어지는 봉 대저의 말에 해원기가 풀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서로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잖아. 그럴 땐 어떻게 할지 정해놔야지.”
맞는 말.
묻는다고 다 대답해 줄 수는 없잖은가. 거기까지 미처 생각지 못한 해원기는 역시 아직 미숙하다.
더구나.
“해 소제는 방성으로 가는 거지? 그럼 가면서 미리 준비해야 할 거야. 주색재기, 향락사귀가 이대로 물러날 리 없거든.”
세속적인 욕망에 기대어 목숨을 취한다는 살수들. 처음의 야점이 주귀요, 다음의 여자들이 색귀라면 아직 재와 기는 나오지 않았다.
어디에 어떤 함정을 파놓았을지. 긴장을 풀어서는 안된다.
해원기가 방성에 가는 것까지 추정하잖나.
종잡을 수 없는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교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를 봉 대저인데 기묘하게 툭툭 내뱉는 말마다 깊은 의미가 있다.
구불구불 방성으로 이어지는 길에 봉 대저와 해원기가 조금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어색한 사이건만,
불그스레 저무는 하늘 아래 의외로 어울려 보인다.
하(夏), 우지서(雨之序)
맴맴, 매에 엠.
아련하게 전해지는 매미울음에 해원기가 고개를 들었다.
날이 꽤 더워지고 햇빛도 강해졌지만, 여름이라곤 생각지 않았었는데.
계절은 이렇게나 빨리 변했던가.
넓적한 바위에 걸터앉아있던 사부가 그런 해원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벌써 매미가 우는구나. 녹두탕을 가져왔느냐? 이리 와서 사부랑 같이 들자.”
“아, 네. 이사모(二師母)께서 미리 식혀두셨대요.”
해원기가 쾌활하게 대답하며 받쳐 든 쟁반을 바위 위에 내려놓았다.
소박한 나무 쟁반 위에는 넓은 그릇에 가득 담긴 녹두탕과 작은 사발 두 개. 해원기가 표주박 뜨개로 사발을 채워 사부에게 먼저 올리면서.
“마른 날이 거듭되니 그늘로 모시라고 하셨는데.”
사모의 당부도 끼워 넣었다.
이 풀밭은 환정곡의 앞마당이면서 동시에 해원기의 연무장이고, 저 바위는 언제나 사부가 앉는 자리. 해원기에게 무공을 가르치지 않을 때도 항상 나와 앉아계신다.
날이 가물어서 비가 내리지 않은 지 한참이 되었다.
워낙 계절 변화가 없는 환정곡이라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이사모는 꼼꼼하게 챙기는 편이어서 혹시나 사부가 지나치게 일광(日光)을 즐길까 염려했을 터.
사부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곤 해원기가 자기 사발을 채울 때까지 기다리다가,
“녹두탕은 체내의 열을 식히는 효능이 있단다.”
다 아는 것도 굳이 다시 일러주고서야 입에 댄다.
해원기가 사부의 그런 버릇에 웃으려는 입을 얼른 사발로 가렸다.
사부와 제자가 시원하게 녹두탕을 들이킨다.
사부는 과묵하고 냉담한 성격이었다고 들었지만,
해원기는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자상하고 다정해서 뭐든지 가르쳐주시고, 혹여 잊을까 싶으면 몇 번이고 거듭하면서도 염증을 내지 않으시는 분. 다만 그렇다고 말이 많은 편은 아니어서, 필요한 말을 꼭 필요한 때에 해주신다.
“자, 마시라는 녹두탕은 마쳤으니 다음은 그늘로 가야 하나. 원기야.”
사부가 부르자 해원기가 얼른 사부의 왼편에 섰다.
이사모가 녹두탕을 보내고 그늘로 모시라는 당부에 담긴 뜻. 사부가 모를 리 없다.
사부는 얼굴의 절반이 상했고, 오른팔과 왼쪽 다리가 불편하다.
손재주 좋은 사람들이 특별히 윤의(輪倚)를 제작해 드렸는데도, 웬만하면 걸어서 움직이는 걸 좋아하셔서.
그럴 때는 이렇게 해원기를 지팡이로 삼는다.
사부가 왼팔로 해원기의 어깨를 짚고 일어서며 웃는 낯을 가까이했다.
“보병청강의 수정지력(水精之力)이 아주 충실해졌구나. 검단(劍壇)으로 갈까?”
많이 약해진 사부지만.
어깨를 짚는 것만으로도 해원기의 내부를 환히 들여다보고.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해원기가 사부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대답했다.
“네. 우리 환정곡에서 가장 서늘하고 조용하잖아요. 제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곳이에요.”
걸음이 불편한 사부를 부축하려는 게 아니다. 이건 해원기의 버릇, 처음 사부에게 배울 때부터 그 허리춤에 매달리곤 했던 게 키가 훌쩍 컸는데도 바뀌지 않았다.
장신의 사부는 제자의 어깨를 든든히 짚고,
아직 소년인 제자는 사부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고.
풀밭을 가로질러 나무가 우거진 뒷동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뒷동산이라고 하지만, 환정곡 자체가 워낙 깊은 계곡이니 우거진 나무숲을 조금만 지나면 까마득한 절벽을 마주하게 된다.
그늘이 아니라 쨍쨍 내리쬐는 햇볕이 아예 들지도 못할 컴컴한 절벽 앞.
돌을 깎아 쌓아 올린 나지막한 대(臺) 위에 고색창연한 검 한 자루가 누워있는 곳.
도착하자 해원기가 먼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후손 원기가 삼가 열조(烈祖)께서 남기신 고죽지보(孤竹之寶)를 참배합니다.”
환정곡에 온 후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아 예를 올린 곳.
이곳이 바로 검단이다.
석대 위에 검집 채로 놓인 고색창연한 검. 검명(劍名)은 고검(孤劍)이요, 검집은 불고초(不孤鞘)라 불리며. 과거에 사부와 함께 세상을 돌며 천지를 바로잡았던 병기.
얼마 전에 사부가 정식으로 해원기에게 넘겨주었으나, 딱히 계곡을 떠나지 않을 때는 이렇게 검단에 모셔둔다.
지친 몸과 마음을 쉬듯이.
해원기가 예를 마치고 일어서자, 사부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검단 옆에 자리를 잡았다.
물끄러미 고검을 쳐다보는 눈에 얼핏 스치는 아련한 감정.
해원기가 처음 환정곡에 왔을 때, 이 검단을 만든 사람은 사부였지만.
사부는 처음 몇 차례 해원기를 데려와 참배시킨 이후로는 거의 찾지 않았고. 오늘 참으로 오랜만에 고검을 만나서인지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해원기가 꿇어앉은 채 그런 사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사부에게 들은 고검의 이야기.
오랫동안 고죽의 선조들은 고검을 영혼의 귀숙(歸宿)으로 삼았기에 마(魔)를 주살하려는 염원이 마침내 끔찍한 귀왕(鬼王)의 검을 낳았다고.
주마(誅魔)의 원한은 흉살(凶殺) 그 자체. 비록 천마(天魔)를 베고 마종(魔宗)을 멸하기 위한 일념이었다고 해도 인세에 남겨두기엔 너무나 무서운 검이라서.
사부는 스스로 망가진 자신의 육체에 귀왕의 검을 전부 받아들였다.
진혼위령(鎭魂慰靈). 사부는 여생을 그렇게 보내기로 결정했고. 그건 해원기에게 어떤 원한도 남겨주지 않으려는 의지였다.
원(怨)과 한(恨).
옳지 않아 사람을 원망하고, 억울해서 하늘을 미워하는 심정.
사람이 하늘인데 누구를 원망하고 무엇을 미워하랴.
그래서.
사부는 굳이 해원기의 성을 고죽의 성으로 바꾸지 않았다. 묵(墨)이라는 고죽의 성으로.
사부의 시선이 검단에서 뒤의 절벽을 살피더니,
“저녁쯤에 비가 오겠구나.”
문득 건네는 말에 해원기가 기억에서 깨어났다.
사부는 신기하게도 날씨의 변화를 미리 알아내곤 했다. 앞으로 무공을 얼마나 더 익히든, 산속에서 몇 년을 더 살든 배우지 못할 것 같은 능력.
“한참 가물었으니 한번 쏟아질 때가 되었죠. 아, 저녁 먹고 소유(小柔)랑 망고암(望古岩)에 가기로 했었는데. 또 칭얼대겠네.”
망고암은 환정곡에서 유일하게 발해를 볼 수 있는 바위고, 해원기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이다.
거친 파도가 부딪쳐 귀가 먹먹할 정도라 조용하고 그윽한 검단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 장쾌함은 환정곡의 누구라도 첫손가락을 꼽는 곳.
이제 겨우 다섯 살배기인 사부의 딸 묵소유도 걸핏하면 데려가 달라고 해원기를 졸라댄다.
못 가게 되면 어지간히 심통을 부릴 텐데.
해원기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자 사부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풍뢰동의 기연을 얻은 원기도 소유에겐 꼼짝 못 하는구나. 하지만 소유가 칭얼댈 틈이 있겠니? 한여름에 오랜만에 내리는 비인데.”
해원기가 황연히 깨달았다.
“아, 뇌우(雷雨).”
가벼운 대화 속에도 가르침을 담는 사부다. 한여름, 오래 가물다가 내리는 비는 특별하다는 걸 이미 배웠었다.
뇌성벽력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면 묵소유는 놀라서 그저 어머니 품에만 붙어 있겠지.
“그래. 마침 수정지력도 충실해졌으니. 비(雨)란 무엇이냐?”
사부의 물음에 해원기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늘을 찾아 검단으로 왔지만,
사부는 여기서 오늘 공부를 시작할 셈인가 보다.
비 우(雨).
하늘(一) 아래 구름(冂)이 있고 물(水)이 아래로 내리는 것이다.
물은 어디서 생기는가.
산에서 폭포가 떨어지고, 들에서 개천이 흐르며, 강하(江河)가 되어 흘러, 아득한 해양(海洋)으로 넘실대다가.
기운으로 화해 하늘로 올라가서 모양을 갖추어 다시 땅으로 내린다.
고로 비는 물의 순환이다.
“비는 곧 물, 천지순환은 오직 수(水)여서. 오행에서 북방의 수를 만물의 시작으로 삼는 것도 그런 이유다. 사부 역시 검왕수의 처음을 일지광한으로 삼았지. 군림어검대법의 수원광한(水源廣寒)을 기초로.”
검왕수를 배울 때 가르쳐준 내용이지만, 해원기는 새삼스럽게 처음 배우는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둔한 제자를 위해 몇 번이나 일러주는 사부. 그러나 항상 같은 의미만 담지는 않는다.
많이 배우고 깊이 익혀야 비로소 종횡으로 이어지는 이치를 깨닫는 법.
박대정심(博大精深)을 목표로 세워주셨다.
“네가 풍뢰동의 기연을 얻은 계기는 청강주(靑江珠)의 비밀이 풀리면서지. 청강주는 천외육가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보병요(寶甁窯)의 정화가 담긴 구슬. 그래서 너는 면면부절한 보병청강의 힘, 즉 수정지력을 지니게 되었다. 아, 물론 동강도 일부분 혜택을 입어 신응(神鷹)으로 화했다만. 원기가 천지순환의 이치를 제대로 체득하면 수정지력은 능히 대지체(大地體)를 대신할 수 있을 게다. 고죽의 역사 속에서 신왕공의 삼산(三閂)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는 처음이니. 네 사조가 아셨다면 아마. 하하하.”
웃는 사부의 얼굴이 매우 환해져서 원기도 미소를 띠었다.
갈수록 피폐해지는 사부지만, 이렇게 무학의 도리를 강론할 때만은 생기가 되살아나고. 특히 해원기의 성장에 사조를 떠올리면 더 즐거워한다.
묵인환(墨仁桓)이란 존함을 쓰는 해원기의 사조. 세상에는 그저 천외인협(天外仁俠)이란 별호만 전해졌고, 무수한 사람의 존경을 받으셨다는데. 사조가 계셨다면 해원기에게 더 좋았을 거라는 얘기를 사부는 툭하면 꺼내곤 했다.
들은 얘기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자부심을 느끼지만.
사실 해원기는 신왕공에 대해서 영 아리송한 부분이 있었다.
배우기로는 신왕공은 총 오단(五段). 일단에서 이단으로 넘어가려면 땅의 빗장을 열어 대지의 힘을 얻고, 이단에서 삼단으로 넘어갈 때는 하늘의 빗장을 열어 신묘한 지혜를 얻으며, 삼단에서 사단으로 넘어가는 건 사람의 빗장을 벗겨 오롯한 덕(德)을, 그리고 지덕체(智德體)가 아우러진 삼전태(三全泰)에서 오단을 달성한다라.
그런데 해원기에겐 이 세 개의 빗장이 생기질 않았다.
구결로 대지체와 상상지를 이끌어낼 줄은 알아도, 당최 인중덕(人中德)이란 걸 모르니.
사부는 해원기가 그 인중덕부터 깨달았다고 했으나.
그럼 완전히 거꾸로 아닌가.
“이 사부가 예전에 보병요의 유적(遺蹟)에 들어간 적이 있다고 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원기, 네가 지금처럼 수정지력이 충실한 상태에서 들어갔다면 그 유적이 다르게 움직였을 거다. 아쉽게도 사악한 자들에게 엉뚱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만. 흠. 장래에 세상에 나가면 보병요의 다른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신기역(神奇域)이라 불린 곳이니까.”
해원기의 장래를 말하면 흐려진 눈까지 빛나는 사부.
“네. 알겠습니다.”
해원기가 힘차게 대답했지만, 사부를 똑바로 보진 못했다.
남을 돕는 무인이 되겠다는 치기 어린 말에 제자로 삼아주신 사부. 아니 사부라기보다는 친아버지처럼 키워주신 사부가 나날이 피폐해 가는데.
그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
해원기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부가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서 다시 물었다.
“쓸데없는 소리가 길었구나. 다시 비 얘기를 하자꾸나. 우(雨)라는 글자에는 또 무슨 뜻이 있지?”
사부가 말머리를 찾았으니 해원기도 눈을 바로 들고.
“비 말고 벗(朋)이란 뜻, 헤어진다(散)는 뜻, 밀집(密集)과 은택(恩澤)도 있습니다.”
“맞다. 구름 속에서 물방울이 서로 엉기는 모습이 벗과 어울리는 것 같고. 아래로 떨어져 흩어지는 게 헤어짐이라서지. 화살이 비처럼 쏟아진다거나 가뭄의 단비 같다는 말은 밀집과 은택을 비유한 경우. 여기서 수기(水氣)가 우화(雨化)하면 체용(體用)의 변화란 걸 엿볼 수 있다. 네가 얻은 풍뢰지학(風雷之學)은 변화의 도리를 설파했기에 마침 체용의 순환과 잘 연결할 수 있단다.”
천지순환에서 풍뢰지학과 연결된 체용의 순환까지.
사부가 일부러 비를 끌어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가지 이치는 그 한 가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배움이 넓고 커질수록 이치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궁구해야만 한다.
진지하게 머리를 끄덕이는 해원기에게 사부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럼 오늘 내릴 뇌우는 어떨까?”
제자가 얼마나 깨달았는지 들어보려는 것.
해원기가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시험이라고 두렵지는 않다. 모르면 묻고, 사부는 언제든지 다시 가르쳐주니까. 그래도 바보로 보이긴 싫어서,
“여름은 열(熱), 수기(水氣)가 급격히 증가하지만, 물은 본래 차니까(寒) 금방 거대한 구름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침내 한순간에 많은 비가 내리고, 한열(寒熱)이 갑자기 부딪치는 건 곧 음양의 충돌, 즉 뇌전(雷電)이 발생해서…어?”
차근차근 따져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풍뢰지학과 바로 이어지잖나.
한여름,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무서운 번개와 귀가 먹을 듯한 우레.
바로 천지가 짧게나마 보여주는 음양의 진리다.
멍하니 눈만 껌뻑이는 해원기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듯이,
사부가 차분하게 정리를 해주었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일고,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고. 생명이 가장 왕성해지는 여름에야 천지음양은 그 진체(眞體)를 고스란히 드러낸단다. 답답한 더위를 식히는 바람, 따가운 햇볕을 가리는 구름,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비, 게을러진 만물을 깨우는 번개라. 그러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꽂히는데.
사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해원기가 정신이 퍼뜩 들어 펄쩍 뛰듯이 사부에게 다가갔다. 얼른 사부의 지팡이가 되려고 어깨를 들이밀자,
사부의 말이 다시 귓가에서 이어진다.
“좋기만 한 건 아니란다. 여름은 번성하니 흩어지기 쉽고, 염양(炎陽)은 순하지 않기에. 비가 본래 그렇잖니.”
해원기가 자신도 모르게 사부의 허리를 꼭 잡았다.
처음 사부에게 안겼을 때처럼.
땅 울림 같은 사부의 낮은 목소리가 저녁때 몰려온다는 뇌우보다 먼저 천둥처럼 자신을 일깨운다.
물은 서로 어울리지만, 비는 마침내 흩어져 떨어진다.
절령제칠(節令第七) 입하(立夏)
입(立)은 시작이요, 하(夏)는 크다(大)는 뜻이다.
입하는 여름의 첫 번째 절기로 더위가 정식으로 시작하는 표지이다. 봄과 작별하고 여름을 만나면 만물이 전부 장대(長大)해진다. 기온이 차츰 올라 바야흐로 염서(炎暑)가 다가오며 뇌우(雷雨)가 많아져 농작물이 왕성하게 생장할 때라.
‘푸른 나무 짙은 그늘 여름날은 길어지고(綠樹濃陰夏日長), 누각 난간 그림자는 연못 속에 잠겨드네(樓臺倒影入池塘)’라지만, 남쪽에는 심한 비로 홍수가 지고, 북쪽에는 가물어서 숨이 막히기도 하니.
번화(繁華)와 무성(茂盛)도 과해서는 아니 된다. 그런 까닭에 하(夏)는 또 가(假)로 읽혀서, 넉넉히 쉬는 것 또한 이제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