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주색재기(酒色財技) (3)
암습을 당한 건 처음이다.
하지만, 해원기는 심상치 않음을 미리 감지했었다.
야점치고는 주인과 점소이가 지나치게 멀끔한 차림이었고, 여덟 명의 장사꾼은 서로 다른 장사를 한다는 특징이 전혀 없었으며, 보표 둘의 병기는 이런 산속에서 휘두르기엔 지나치게 크고 길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쾌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
행상과 보표만큼 쾌체를 가까이서 접하는 자들도 드문데.
미심쩍은 부분을 알아채자 자연스럽게 신왕공이 운용되었다.
고지식한 말투나 행동 탓에 ‘바부탱이’니 ‘고구마 대장’이니 하는 별명이 붙었으나, 해원기가 어찌 어리석겠나.
일단 신왕공의 상상지(上上智)가 깨어나면 잠심침령이 더욱 깊게 주위를 살펴 대응할 채비를 갖추니, 이는 해원기의 의식보다 앞선다.
야점에 의심을 품는 순간 발동한 신왕공이 암습에 따른 반격의 힘을 고른다는 뜻.
장사꾼들이 우르르 모여들고, 주인과 점소이부터 습격이 시작되었다. 시야와 공간은 급격히 좁아졌고 상대의 힘은 전신에 밀집되었으며, 아울러 약간의 시차를 두고 뒤에서 날아드는 살기.
암습이 아니라 의식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면, 아마 검왕수의 기초인 오행검지(五行劍指) 몇 개로 제압했겠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가장 빠른 건 섬뢰천주(閃雷天柱)였나.’
해원기가 입술을 깨물었다.
야점을 박살 내고, 열 명의 암습자를 내동댕이치고, 장 표사와 왕 표사의 병기를 퉁겨낸 섬광.
그건 바로 뇌정결의 하나. 말 그대로 벼락이 전신에 내려 하늘을 이는 기둥으로 화하는 가공할 비결이지만.
상상지가 이를 택했다는 건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뜻이다.
목표를 방심케 하는 불의의 암습.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피하기 어렵기에, 해원기가 지닌 특별한 능력이 아니었다면 죽지는 않더라도 큰 부상을 피하지 못했을 터.
그러나 역시 처리가 서툴러서.
독을 물고 자결한 열 구의 시체에선 배후를 알아낼 도리가 없다.
해원기를 노리고 설치한 함정이었나. 이곳으로 오는 걸 어찌 알았을까. 목적은 또 무엇일지.
아무 단서도 얻지 못한 해원기가 몸을 돌렸다.
단 하나 알게 된 건,
‘이자들은 전문적인 살수(殺手).’
과객을 노리는 강도나 산적 따위가 아니다.
사부에게 살수에 대해 들은 건 거의 없었다.
흥륭상단의 옛 주인을 구했던 인연, 그 얘기 속에 나오는 냉심무혼(冷心無魂) 백양희(白良喜)라는 인물. 그가 한때 무혼사(無魂社)라는 살수 조직을 거느리고 동쪽의 패자로 일컬어졌다던가. 사부와 탁 소숙에 의해 괴멸되었지만, 난세 속에서 또 등장했었다고.
단편적인 내용뿐이라서, 살수가 어떤 건지 감이 오질 않았다.
청부를 받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의 목숨을 취하는 자들. 그저 죽이는 것만 익혀서 남이든 자신이든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건가.
불쾌한 기분에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다 속도가 느려졌고,
대별산을 벗어난 건 거의 저물녘이 되어서였다.
워낙 거대한 산맥이라 산을 벗어났어도, 완만한 구릉이 평지 곳곳으로 뻗고. 바위와 작은 숲이 구불구불 휘어져.
길이 조금 넓어졌는데도 곧게 펴진 게 하나도 없었다.
위쪽에서 내려다보는데도 시야가 자주 막히는 지형.
“이러다간 방성에 가서 저녁을 먹으려는 계획이 틀어지겠네. 흠.”
해원기가 멀리까지 시선을 보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암습에 계속 신경을 쓰기보단 조속히 등봉으로 가는 게 더 중요한 일.
방성까지의 방향을 정해 눈앞의 언덕 하나를 바로 넘으려 했다.
옆으로 난 길을 돌아가는 것보다는 가로지르는 게 빠르니까.
그렇게 언덕 하나를 훌쩍 넘어가는데.
“아악!”
멀리서 들리는 비명.
해원기가 바닥에 발을 딛기 전에 몸을 틀었다.
왼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언덕 뒤에서 부산스러운 기척이 전해져서, 그대로 구부러진 길을 따라 달렸다.
여자의 찢어지는 비명이었다.
산속보다는 길이 난 복잡한 지형이다. 혹여 백성들 눈에 뜨일까 싶어 구부러진 길을 따라 빠르게 달렸지만.
막상 비명이 난 곳에 이른 해원기가 주춤거렸다.
언덕 뒤로 돌자마자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기에.
“이년이 어딜 도망가? 잡아, 잡으라고!”
“끝까지 지랄이네, 죽일 년이.”
“다리를 부러뜨려. 다리를.”
“개 같은 년! 퉤엣!”
여자 넷이 거품을 물고 욕을 해대면서 길길이 날뛰는 중. 그 가운데에는 만신창이가 된 한 여자가 바닥을 구른다.
손으로 잡아 뜯고, 마구 두들기고, 손에 잡히는 대로 흙덩이며 돌을 던지고, 발로 걷어차다가 아예 깔고 앉기까지.
만신창이가 된 여자는 옷이 다 찢겨 가슴과 둔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는데, 피와 멍 때문에 속살 같지도 않다.
“사, 살려줘, 제발, 제발. 아아악.”
엉망으로 풀어 헤친 머리칼 속에서 애원과 비명이 번갈아 나오지만. 네 명의 여자는 미친 것처럼 몰려들어 때리고 팬다.
“에라, 이 화냥년. 죽어버려!”
“걸레 같은 년아.”
이게 무슨 일이람. 여자들이 여자 하나를 몰매 치는 상황.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으니 해원기가 잠시 얼이 빠졌다가 바로 정신을 차렸다.
“멈추시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크게 소리치자 그제야 낯선 남정네를 발견하고 질겁하는 여자들.
“아이쿠, 누, 누구?”
“에구머니나.”
놀란 얼굴에 어쩔 줄 모르는 여자 넷은 삼사십대의 중년, 차림새가 차이가 나지만 다들 엉망이 된 화장 사이로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이 보이고, 얼마나 기를 썼는지 옷이 다 틀어져 어깨와 허리의 맨살이 드러났다.
폭행이 멈추자 비명도 잦아들고, 몰매를 맞던 여인은 죽은 듯 쓰러진 채, 맥이 풀려서인지 가랑이가 쩍 벌어져서 참으로 민망하기 짝이 없는 자세다.
해원기가 얼른 몸을 옆으로 돌렸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이 해괴한 폭행의 자초지종을 물으려는데.
“아휴우우, 이 무슨 흉한 꼬락서니야아? 쯧쯧.”
잔뜩 쉰 음성이 먼저 끼어들었다.
뒤집어쓴 낡은 천 밑으로 부스스하게 나온 백발, 온통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은 볕에 타서 새까맣고, 등까지 굽은 노파가 풀숲을 헤치고 거의 기듯이 나타났다.
여기저기 기운 옷이 농가에서 평생을 보낸 시골 할멈이 분명하고, 손에 든 광주리를 내흔들며 목소리를 높인다.
“뭐여, 그 계집이 서방질했다고 조지는 거여? 아이고, 그래도 이건 심하자너. 아예 죽여뻔질 셈인감? 혼꾸녕만 내고 그만…… 에엥?”
투박한 사투리로 지껄이는 이 노파는 귀가 어두운가. 해원기를 비로소 발견한 듯 짓무른 눈을 억지로 홉뜨다가.
“설마 서방까지 온겨? 그럼 시앗끼리 쌈을 붙이느라? 흘흘흘, 못났다, 못났어.”
귀만 어두운 게 아니라 정신까지 오락가락하는 모양. 제멋대로 떠드는 통에 여자들과 해원기가 다 멀뚱멀뚱 쳐다보게 되었다.
노파는 이제 입이 마음대로 돌아가는지.
“내는 산에 나무하러 간 아들놈 찾을라꼬. 그놈 어리숙한 데다가 술을 좋아해서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술 한 잔 사주면 홀랑 넘어가거든. 아휴우우, 그러고 보니 이 양반이 내 아들놈을 조금 닮았네. 뭐, 인물이 그럴듯하면 꼭 인물값을 한다더니 여자들과 이리 얽혀서리. 쯔쯔쯧.”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해서,
해원기가 어색하게 머리를 저었고.
“아닙니다. 저는 막…….”
“할머니, 상관 말고 가요! 어디서 온 미친 할멈이야?”
여자들도 남자인 해원기보다는 정신 나간 노파가 만만한지 빽 소리를 지르니.
노파가 당장 광주리를 껴안고 전신을 떨었다.
“아효오오. 아녀, 아녀. 난 몰러. 자, 잘못 봤구먼.”
제정신이 들었나. 대번에 겁을 집어먹고는 납작 엎드리더니 도로 풀숲으로 기어든다.
병약해 보여도 한평생 고된 삶을 산 본능이랄까. 나타났을 때처럼 재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이 기가 찰 정도.
노파를 쫓아내자 여자들이 제대로 용기를 얻은 듯.
사나운 눈초리가 해원기를 향했다.
“어이, 젊은이도 그냥 가!”
“미친 할멈 말대로 화냥년을 다스리는 거니까.”
“동네에서도 다 아는 일이라고.”
“남 일에 끼어들지 마요.”
제각각 한 마디씩 을러대고, 그 소리에 죽은 듯 쓰러져 있던 여자가 바들거리는 손을 들었다.
“허억. 제, 제발 살려…….”
너무나 미약해서 잘 들리지도 않는 애원.
해원기가 얼굴을 돌린 채 짧게 탄식했다.
딱히 해를 입지 않았으나, 참으로 봉변을 당한 격이라. 성인군자라도 이런 경우엔 어떻게 처신할지 모를 것이다. 그렇다고 맞아 죽을 것 같은 여자를 모른 척할 수도 없고.
그런데.
“허, 그 낯부끄러운 자세로도 출수할 수 있소? 다른 사람들과 달리 병기를 지니지 않은 듯한데.”
탄식 다음에 나오는 이상한 말.
만신창이가 된 여자도, 몰매를 치던 네 여자도. 동시에 눈에 띄게 움찔.
그것도 한순간. 네 여자가 번개같이 만신창이 여자의 팔다리 하나씩을 잡더니 해원기에게 내던지고.
“이야아앗!”
비명 대신 날카로운 기합을 내는 만신창이 여자는 반라의 몸이 무기라도 되는 양 활짝 펼친 채 덮쳐들며, 나머지 네 여자는 짧은 꼬챙이를 쥐고 좌우를 찔러온다.
해원기는 여전히 몸을 돌린 채 미간을 찡그렸다.
부아앙.
전신을 뒤덮고 일어나는 돌개바람. 선풍결에 폭풍결까지 더한 회오리가 단번에 땅거죽을 말아 올리고.
펑!
주위의 나무와 풀숲까지 뒤집어 버렸다.
“악!”
“케엑!”
여자들이 토하는 비명은 맹렬한 바람 속에 지워지고, 방원 십 장의 공간이 온통 흙먼지와 부러진 나무에 휘말려 들었다.
그렇지만 해원기는 이미 그 광포한 돌개바람 안에 있지 않았다.
또 한 번의 괴상한 암습. 그렇게 알아차린 건 노파 덕분이었다.
여자들의 광태에 눈 둘 곳이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었는데.
미친 척하며 마구 지껄여댄 노파의 말속에 야점을 연상케 하는 표현이 있었다. 눈을 돌리지 않고 잠심침령으로만 다시 살피자 평범한 아낙들이 아니란 걸 대번에 알겠다.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접근하려는지 몰라도, 암습인 걸 알아차리고서야 가만두고 볼 리 있나.
그래도 여자에게 손을 쓰는 건 여전히 꺼림칙하다. 그것도 속살을 다 드러내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여자들.
바람으로 날려 보내면 또 단서를 놓치겠지만.
이번엔 다른 실마리가 있다.
해원기가 선풍결을 펼치자마자 곧장 풀숲 위로 몸을 날렸다. 발끝이 풀잎에 닿을 듯 말 듯, 소위 초상비(草上飛)의 절정 경공으로 찾는 이는.
바로 그 노파.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겼다.
왜 도와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