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10화 (111/410)

제28장 주색재기(酒色財技) (2)

개봉에서 내려올 때와 달리 대별산맥에서 바로 북쪽인 방성(方城)을 향하면 곧장 등봉까지 이르는 길이 나온다.

딱히 약속을 정하진 않았어도 다시 만날 걸 의심하지 않았기에 작별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그저 당령을 배웅했던 해원기 자신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배웅 받는 처지가 되어서 기분이 묘했을 뿐.

어차피 당령은 서쪽, 자신은 북쪽이니 길이 겹치지도 않고. 지금은 오직 한시라도 빨리 악송령을 찾아야 한다.

해원기의 신형이 마치 한 줄기 거센 바람처럼 깊은 산속을 누볐다.

부풍(浮風), 질풍(疾風), 표풍(飄風).

같이 움직이는 일행도 없으니 세 가지 비결을 전부 사용해서 마주치는 숲과 절벽을 거침없이 통과했다.

단목정이 귀한 약품과 건량을 충분히 챙겨주는 바람에 허리의 요대자가 꽤 무거워졌지만, 오랜만에 편하게 쉰 덕분인지 몸이 가볍다.

사시(巳時)에 출발했으나 점심을 거르고 저녁 전에는 방성에 들어갈 계획. 거대한 산맥을 이런 식으로 관통하는 이가 또 있을까.

누가 뒤를 쫓는다 해도 이 산속에선 속수무책일 것이다.

그렇지만 막 하나의 산등성이를 넘은 해원기가 이 신속한 경공을 풀고 멈추어야만 했다.

좁은 산길 중간에 걸린 작은 야점(野店) 하나.

심산유곡과 밀림절벽만 거듭되던 풍경 속에 불현듯 출현했다.

야점이란 오가는 과객들을 위해 길가에 가설하는 임시 가게. 근처에 마을이나 쉴 장소가 마땅치 않은 길목에 만들어진다.

가설이니만큼 천막과 조립식 탁자 따위로 얽은 노천 식당이 되고, 가격도 상당히 비싼 편.

이 야점도 사방에 장대를 꽂고 그 위에 큰 천막을 씌웠으며, 다섯 개 정도의 작은 탁자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오시(午時)를 막 넘어간 시각, 등짐을 풀고 서성이는 장사꾼들이 여덟, 큰 칼과 쇠지팡이를 지닌 이가 둘, 그리고 아궁이에서 뭔가를 만드는 주인과 점소이 청년. 전형적인 야점의 풍경인데.

해원기가 산등성이에 모습을 보이자마자 병기를 지닌 둘의 시선이 곧장 꽂혔다.

딱 그런 위치, 누구든 야점에서 눈을 들면 산등성이가 훤하게 보여서 해원기로선 방향을 바꿀 틈을 놓쳤다.

쾌체 생활을 하면서 이런 야점을 몇 차례 겪은 적이 있기에 나름 이해하면서 천천히 걸어 내려갈 수밖에.

야점을 찾는 이들은 주로 먼 거리를 다니는 행상이니 당연히 강도나 산적을 피하는 길을 택한다. 어쩔 수 없이 주위에 마을 하나 없는 들판이나 산속을 가야 할 때, 적어도 경계가 용이한 야점을 찾기 마련.

지금 보이는 이들도 산을 넘으려고 인원을 모으고, 호위하는 무인까지 고용한 듯하다.

과연 해원기가 다가가자 두 사람이 각기 큰 칼과 쇠지팡이를 들고 앞으로 나선다.

해원기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이 매섭고, 서성대던 장사꾼들은 급히 안쪽으로 피하는 모습.

턱.

길이가 일 장 남짓한 쇠지팡이, 아무런 장식도 되지 않고 거무튀튀한 빛이 꽤 무거워 보이는 철장(鐵杖)으로 가볍게 바닥을 치면서 산발한 사내가 말을 걸었다.

“잠깐. 어디서 오는 길이고 뭐 하는 사람인가?”

산발한 머리, 우람한 체구, 걸걸한 음성이 누구든 겁을 집어먹을 용모. 그 뒤에 상대적으로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닌 자도 대도(大刀)를 늘어뜨린 채 장사꾼들 앞을 가리고 쳐다본다.

두 사람의 반응이 상당히 능숙해 보이고, 아궁이 가의 주인과 점소이 청년도 나름 식도와 장작 하나를 쥐니.

야점이라면 흔히 보이는 풍경이다.

해원기가 얼른 두 손을 모아 쥐었다.

“황백산에서 출발했습니다. 약왕당 부탁으로 방성까지 가는 쾌체입니다.”

“쾌체?”

“약왕당?”

철장과 대도를 지닌 무인 둘이 각기 반문할 정도로 의외인 듯. 둘이 서로 마주 보며 어깨의 힘을 빼자, 장사꾼들 사이에서도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낯모를 인물의 출현에 긴장되었던 야점의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한다.

더벅머리에 덤덤한 표정. 해원기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 포권을 풀고 허벅지를 주물렀다. 고된 산길에 지친 듯이.

철장을 지닌 이는 성이 장(張), 대도를 지닌 이는 성이 왕(王). 둘 다 표국에 소속되지는 않았으나 수시로 이런 호위를 맡는 보표(保鏢)라 ‘표사’라고 부르고.

여덟 명은 두세 사람씩 다른 장사를 하는 이들인데, 마침 방향이 같아서 이렇게 일행이 되고 장 표사와 왕 표사를 방성에서 고용했단다.

왕 표사는 거의 말이 없는 편, 우람한 체구의 장 표사가 되레 수다를 떨기 좋아해서 아예 해원기 옆에 붙어 앉아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황백산이면 한참 먼데, 언제 출발했나? 급한 일인가 보지?”

“산 아래 채가촌에 왔다가 마침 위탁이 들어온 김에 밤중에 떠났지요. 뭐, 간단한 서신과 약초 주머니 정도, 쾌체 일이 그렇죠. 뭐.”

야점을 그냥 지나치기엔 어정쩡한 상황. 들어와 앉은 이상, 먹고 마실 것을 팔아줘야 한다.

야점에 다양한 음식이 있을 리 없고, 삶은 돼지고기에 술 한 병이 기본이다.

해원기가 술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아무 때나 마시지는 않는다. 돼지고기나 몇 점 집는 동안, 이 장 표사는 벌써 두 그릇이나 술을 마셔버리고.

“호오, 쾌체라면 그저 고을이나 돌아 댕기는 거잖아. 황백산에서 방성이라면 쾌체가 아니라 표국이 할 일이라고. 다릿심이 좋은 모양이네.”

어깨라도 칠 것처럼 친숙한 척.

해원기가 피식 웃었다. 장거리 쾌체란 걸 들어본 이도 그리 많지 않을 터.

“타고난 거로 먹고사느라. 그런데 이쪽엔 산채도 없다고 들었는데요.”

사실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단목정이 산채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고, 설사 산채가 있다손 쳐도 해원기에게 무슨 장애가 될까. 물론 약왕당이 있는 주변에 산채를 엮을 멍청한 산적도 없겠으나.

장 표사가 미묘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산채가 없어도 산적이 나올 순 있잖아. 또 산짐승도 위험하고. 그래야 우리도 먹고살 것 아니냐. 흐흐.”

속이 뻔히 보이는 소리에 그저 입맛을 다셨다. 낯선 길을 헤매는 행상에게 이런 위험이라도 인지시켜야 보표 일을 하겠지. 나름 인정미를 갖춘 대답이라 쾌체 일로 먹고사는 같은 처지엔 알려준다는 건가.

그렇게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장사꾼 한 명이 다가왔다.

“장거리를 뛰는 쾌체라고요?”

괜한 소리를 지껄였던 장 표사가 얼른 고개를 돌려서, 해원기가 낯선 장사꾼과 인사를 나누었다.

“예. 무슨 일로…….”

“하아, 미리 알았으면 이렇게 산을 타는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아, 난 작은 서화상(書畫商)을 하는데 이번에 양호(兩湖) 쪽으로 몇 점 보낼 게 있었거든. 시일이 촉박해서 이 대별산을 종단하느라. 아휴. 혹시 모르니 연락할 곳을 알려주겠소?”

진즉 알았다면 쾌체를 이용했을 것이라는 아쉬움. 서화상의 말에 해원기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디 사시는지, 그곳엔 쾌체가 없습니까?”

“그게…….”

새 고객을 얻을 인연이다. 궁금한 건 알려주고 필요한 수속도 자세히 일러줄 필요가 있다.

대화에 흥미가 생겼는지 장사꾼들이 하나둘 옆으로 모여들었고,

장 표사와 왕 표사는 고용주를 위해서 슬쩍 물러나 외곽을 지킨다. 맡은 일에는 충실한 모양이다.

해원기의 탁자에 모인 장사꾼은 넷. 쾌체를 다들 잘 모르는지 꼼꼼하게 묻느라 대화가 갈수록 길어지고,

보통 탁자가 사각형이니까 해원기의 탁자에는 셋이 더 앉을 수 있어서, 네 번째 장사꾼은 아예 나머지 일행까지 불러 자신들이 앉았던 탁자까지 붙이게 했다.

여덟이 앉았던 탁자 두 개가 해원기 탁자 좌우에 몰리면서, 주인과 점소이까지 나와 손을 나누어 술이며 음식을 옮긴다.

고된 산길에서 쓸모 있는 쾌체를 만나 다들 호기심이 생겼나.

“어이, 여기 술 좀 더 가져와. 이 젊은이 얘기가 아주 흥미진진하구먼.”

호기 있게 주문을 추가하자, 야점은 오래간만에 장사가 될 듯해서 기운이 나는 듯.

“예이!”

점소이가 커다란 단지를 통째로 들고 오고, 주인은 돼지고기가 가득 담긴 큰 접시를 양손에 받쳐 들었다.

야점에서 때 아닌 잔치가 벌어질 찰나.

주인이 뭐에 걸린 듯 비틀, 양손의 접시가 확 뒤집혔다. 해원기에게 와르르 쏟아지는 돼지고기.

동시에 점소이가 술 단지를 그대로 해원기에게 내던졌고,

여덟 명의 장사꾼이 동시에 손을 떨쳤다.

머리로 떨어지는 돼지고기 무더기, 허리 아래를 노리는 술 단지, 정면과 좌우에서 몰려드는 예리한 기운.

생각지도 못한 기습이고, 꼼짝 못 하고 당할 위기.

해원기가 본능적으로 발에 힘을 주어 몸을 뒤로 날리려 했다. 한꺼번에 덮쳐드는 공격을 피할 곳이라곤 뒤쪽뿐.

그러나 움직이기도 전에 등으로 살기가 날아든다.

쉬이잉.

목덜미를 향한 예기는 대도요, 허리를 후려치는 기세는 철장일 터.

피할 틈도, 피할 공간도 없는데.

번쩍.

해원기의 전신에서 섬광이 폭발하더니,

콰쾅!

굉음과 함께 야점 전체가 박살이 나버렸다.

천막은 흔적도 없고 탁자와 의자도 전부 나뭇조각으로 흩날리는 가운데,

홀로 의자에 앉은 해원기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찼다.

“쯧, 이런 식일 줄은 몰랐군. 너희는 누구냐?”

해원기의 앞은 마치 광풍이 쓸고 간 듯, 대패로 밀어낸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십여 장 밖에 내동댕이쳐진 열 명은 기절했는지 여기저기 처박힌 채.

장사꾼들, 야점의 주인과 점소이. 심지어 아궁이와 솥까지 엉망진창으로 흩어졌는데.

외곽을 지키는 척했던 장 표사와 왕 표사만이 오 장 떨어진 곳에서 겨우 몸을 일으킨다. 대도는 절반이나 부러졌고, 철장은 엿가락처럼 휘어져 간신히 손에 쥔 둘의 얼굴은 백지장같이 창백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중심을 잡느라 대답할 여력도 없나.

해원기가 시선을 따라 돌아앉으면서 표사 둘을 다시 훑었다.

야점을 박살 낸 무시무시한 섬광이 두 눈에서 서서히 사그라지고, 그 시선에 노출된 장 표사와 왕 표사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장 표사가 친한 척하면서 별다른 병기를 지니지 않은 걸 확인했고, 왕 표사도 특별한 기세를 느끼지 못했다.

장사꾼으로 변장한 이들이 우르르 모여들 때도 가만히 있었으며, 야점 주인과 점소이가 암습을 발동할 때까지 전혀 반응이 없었거늘.

눈이 멀듯 한 무서운 빛.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그 섬광이 번쩍인 순간, 엄청난 압력에 날아가 버렸다.

말 없던 왕 표사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대체 뭐, 뭐가.”

자신이 휘두르는 대도는 능히 금석을 쪼갤 수 있건만 거꾸로 부러져나가면서 호구가 다 찢어졌다.

장 표사도 마찬가지. 타고난 힘으로 가볍게 다루는 철장은 아름드리 거목도 두 조각을 내거늘.

이 전신을 꿰뚫는 시선은 또 뭐란 말인가.

“음.”

장 표사의 짧은 신음에 왕 표사가 퍼뜩 정신을 차렸고, 두 사람이 동시에 망가진 병기를 힘껏 내던졌다. 신음이 신호인 양.

부러진 대도와 휜 철장이 해원기에게 맞든 말든, 병기를 내던진 동시에 둘이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려서,

빽빽한 나무로 덮인 가파른 경사, 몸이 성하기 어려울 텐데도 서슴없이 뛰어들었다.

이 광경에 병기를 피하던 해원기가 어이가 없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동료고 뭐고 없다는 건가. 이렇게 허술한 자들이……, 응?”

야점을 차리고, 분위기를 만들고. 주인과 점소이, 어울리는 장사꾼들에 호위 둘. 대화를 통해 접근해 한꺼번에 달려드는 암습은 참으로 주도했는데.

나가떨어진 열 명을 아랑곳하지 않고 가장 무공이 나아 보이는 둘이 냅다 꽁무니를 말아버렸다. 하찮은 좀도적이나 할 짓, 이런 치밀한 암습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달리 문초할 자를 고르려다가 갑자기 변한 주변 기색에 표정이 바뀌었고.

휘릭.

바람처럼 빠르게 나가떨어진 자들을 살피던 해원기의 얼굴이 바위처럼 굳어졌다.

그 잠깐 사이, 전부가 거품을 물고 숨이 끊어졌다.

‘음독(飮毒). 실패하면 바로 자결한다.’

도주한 둘을 어이없게 여겼던 조금 전과 달리, 이들은 지독한 자들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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