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09화 (110/410)

제28장 주색재기(酒色財技) (1)

대첨산 화전민 스물넷의 목숨. 하마터면 호중객잔 식구들도 중독될 뻔했고, 그 독이 태원에까지 퍼질 뻔했던 모든 사건의 원인.

증명단의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피단, 아니 금오혈석이 있다면. 정수회가 바로 흉수인가요?”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초짜, 아울러 타고난 성격이 화급하고 단순하니 결론이 비약할 수밖에 없다.

단목정이 집었던 피단을 도로 내려놓고,

“그렇게 간단하면 좋겠구나.”

돌아보며 답하는 표정이 조금 맥 빠져 보여서. 증명단의 벌컥 일어나던 기운도 따라서 흐트러졌고.

해원기 역시 어깨의 힘을 빼며 고소를 지었다.

“형님 얘기가 아직 끝난 게 아니란다. 소단, 네 마음을 모르시겠니.”

단목정을 만나고 나서 지금까지. 이 비상한 지혜를 지닌 형님이 갖가지 주제로 많은 얘기를 해준 이유를 이제는 짐작할 수 있다.

강호에서는 무공이 삼 푼이요 머리가 칠 푼이라던가.

해원기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해도 갓 무림에 발을 디딘 처지,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는 상태에선 그 뛰어난 능력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아우를 위해 머리 쓰는 법을 어떻게든 알려주려 애쓴 것이다.

물론 지혜로운 단목정이 자리를 함께한 증명단을 무시했을 리는 없다. 증명단에게는 참으로 귀한 기회를 준 셈인데.

선생이 배려해도 배우는 학생끼리는 차이가 나기 마련이요, 그런 복이 찾아왔는지조차 모르는 학생도 있기에.

해원기가 일부러 증명단의 북룡포를 다듬어주었다.

조금만 차분하면 얻을 게 참 많을 거라는 심정을 담아서.

증명단의 눈빛이 차츰 가라앉자, 단목정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안경의 정수회 총회에 금오혈석이 있다. 정수회가 겁표한 아홉 도적 중의 하나다. 이건 전부 일종의 억측에 불과하다. 다만, 억측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지금까지 두 사람이 겪었던 일이지. 내가 미리 말했듯이 이 대별산 주위의 큰 고을에는 약왕당과 연결된 곳이 꽤 되고, 그 덕에 다양한 소식과 소문이 전해진다.”

의원과 약방은 생각 외로 대단한 정보망이다.

“그래서 봄이 되자마자 휘상에서 산동과 하북을 자주 왕래한 사실을 들었다. 그리고 이번 괴질, 증 낭자가 한스럽게 여기는 사건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더구나. 하나는 독, 하나는 병이라도. 또 한 가지는 장풍보와 정수회다. 서로 위치나 성격이 전혀 다르긴 해도 그 내부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거든.”

억측이라고 했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해원기가 고소를 지우고 단어 하나를 보탰다.

“그리고 동창.”

고개를 끄덕이는 단목정.

“그렇지. 장풍보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그밖에는 전부 동창의 그림자가 느껴지지. 원기가 덕주에서 본 구주신도 팽조린 역시 이와 깊이 관계되었을 터.”

해원기가 미간을 모았다. 어젯밤에 나눈 대화,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암류와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 신진세력이 이 안에 포함된다.

“단서를 그저 눈으로만 찾으려던 게 잘못이었군요.”

겁표가 발생한 지점부터 찾으려 했던 덕주행. 다행히 오소민을 만났지만, 그때부터 많은 사건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문득 오소민을 떠올리면서 눈앞의 단목정을 다시금 보게 된다.

두 사람이 만났으면 훨씬 더 빠르게 결론을 내지 않았을까.

아쉬움인지 그리움인지. 오소민이 보고 싶었다.

단목정이 수염 속에서 미소를 머금었다.

영특한 아우다.

심계(心計)란 게 모사(謀士)만의 장기는 아니지만, 무인 중에는 이 심계를 가벼이 보다가 농락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면에 강호에는 무공뿐 아니라 심계에 뛰어난 자도 비일비재.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소위 명문정파란 쪽은 상당히 취약한 경향이 있다. 광명정대(光明正大)를 좌우명으로 삼기에 간단한 계략에도 속아 넘어가기 일쑤.

그래서 강호초출의 해원기가 걱정되었고, 가르쳐주고 싶었다. 이 엄청난 아우에게 형으로서 해줄 수 있는 건 그뿐이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더 빨리 배운다.

‘하긴. 머리 좋다는 이들 전부 묵 대숙한테는 꼼짝 못 했었지. 사부님을 포함해서.’

절로 옛날 생각이 나지만, 선생으로서 책임을 잊진 않았다.

“잘못은 아니다. 실재하는 단서가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게 없지. 그렇지 않을 때, 믿을 만한 정보를 추려서 여러 각도로 살펴보는 거야. 아홉 도적의 겁표 사건, 여기서 잡힌 도적은 장풍무명 진자현 하나. 강호에는 그가 보주로 알려졌으니 장풍보는 확실히 가장 큰 단서가 된다. 이게 바로 실재하는 단서지. 그러면 그다음으로 믿을 만한 정보가 무얼까?”

해원기가 모았던 미간을 풀었다.

단목정과의 대화가 많아질수록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

“공표든 아니든 표행이 덕주를 지나갔다는 것. 흠, 표국이겠군요.”

“그다음은?”

“표행을 맞이한 군부. 진자명이 얻은 소식도 관군에게서 흘러나왔으니까.”

“그리고는?”

“아홉 도적 중에 산동 교주의 사투리를 쓰는 자와 동북 말씨를 쓰는 자.”

“거기 까지다. 그 외에는 전부 추정과 억측이라서 다시 확인이 필요하고. 아울러 일을 처리할 순서와 방법도 자연히 뒤따르게 된다.”

“네.”

해원기는 마침내 자신이 무지하게 헤매기만 했음을 깨달았다.

진자명을 잡았을 때부터 장풍보를 찾았어야 했고, 경사와 하북에서 모인 표국을 확인했어야 했으며, 산동 제남의 관부를 더듬어 볼 필요가 있었건만.

갖가지 일에 휘말린 건 핑계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어리석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해원기 자신. 강호에 나서길 주저하던 그 연약한 심정이리라.

새삼 결의를 다지는 단호한 입매를 대견하게 보던 단목정이 머리를 돌렸다.

아직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남았고,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학생도 한 명 더 있으니.

“증 낭자, 그런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드나? 진짜 금오혈석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오리 알 닮은 돌멩이에 불과한데, 그걸 뭐하러 도둑질했을꼬. 괴상한 독과 괴상한 병까지 일으키면서.”

“네? 아.”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귀를 기울이던 증명단이 번쩍 정신을 차리다가,

눈을 깜빡이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모든 사건의 발단. 아홉이나 되는 도적이 모여 낙향하는 태감의 이삿짐을 턴 건 바로 이 돌멩이 때문이다.

“천금의 가치가 있어서? 보통 도적은…….”

상식적인 대답이 입에서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돌멩이다. 그게 금오혈석일 수도 있다고 얘기한 사람은 단목정 뿐. 저렇게 지혜롭고 저렇게 아는 게 많은 사람조차 완전히 단정하지 못하는 돌멩이인데.

천금을 주고 구할 사람이 있을까.

재물이 아니라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보는 증명단에게 단목정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강호에선 재물 외에도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게 있지.”

천금 아니라 억만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물건.

해원기도 증명단과 마찬가지로 답을 알았다.

“신병이기, 신공비급.”

단 두 마디 말이지만, 말한 해원기나 듣는 단목정이나 미묘하게 인상이 흐려진다.

그런데.

“그렇네요. 그럼 혹시 저 금오혈석에 뭔가 숨겨져, 그 뭐라더라. 이야기꾼이 자주 들먹이는 장보도(藏寶圖)일까요?”

해원기에게 대답할 기회를 뺏긴 게 아쉬웠나. 증명단이 냉큼 보충해서 말하자.

해원기와 단목정이 오히려 뜻밖이라는 듯 시선을 마주했다.

두 사람과 달리 증명단은 처음에 떠올렸던 재물까지 포함해서 ‘장보도’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시골을 돌며 옛 설화를 파는 이야기꾼. 사람들에게 흥미를 끄는 건 아무래도 흥미진진한 내용일 것이고, 그래서 ‘보물 지도’란 말을 자주 들먹인다.

온갖 모험을 겪어 획득한 숨겨진 보물, 그건 진귀한 금은보석일 수도, 가공할 신병이기일 수도, 전설의 신공비급일 수도 있겠지.

단목정이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장보도라는 건 생각 못 했는데, 이거 증 낭자에게 한 방 먹었구먼. 하하하하.”

뜬금없이 웃어젖히는 건 단목정의 버릇일까.

증명단이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리송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기껏 찾아낸 게 기대하던 정답이 아니었나.

그녀로선 단목정과 해원기가 저절로 과거의 지독했던 국면을 떠올렸다는 걸 알 수 없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는 걸 저어한다는 것도.

단목정이 가볍게 혀를 차며 웃음을 그쳤다.

“쯧, 아무래도 머리가 굳어진 것 같군. 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봐도, 라는 속담도 있으니까. 증 낭자는 잘 모르겠지만,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기물이란 게 그저 가공의 물건이 아님을 실감한 적이 있었거든. 아주 징글징글하게 말이야. 금오혈석을 그렇게 여길 뻔했다가 장보도라는 말에 눈이 밝아졌어.”

증명단에게 간결하게 설명하는 단목정의 눈이 그 말처럼 밝게 빛난다.

“나도 일단 십일병출이라는 예의 신화가 떠올라 금오혈석이라 추정했지만, 결국 추정에 불과하다. 아홉 개의 기묘한 돌멩이, 그게 진짜 금오혈석으로 태양의 힘을 담고 있을지, 아홉 개의 신병이기를 찾는 단서일지, 아홉 종의 신공비급과 관련이 있을지. 아니면 태양의 힘이든, 신병이기든, 신공비급이든 이 아홉 개 돌멩이 전부를 모아야 찾을 수 있을지도. 지금으로선 경솔히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다만.”

잠깐 말을 끊은 단목정이 해원기와 증명단을 번갈아 보았다.

“그 아홉 도적 역시 제대로 알고 저지른 일은 아닐 거다. 아니, 전부 다르게 알았을 수도 있어. 그래서 이 이상한 겁표 사건의 동기를 밝히는 게 중요하단다.”

과정만 좇다 보면 단서를 놓치고 오리무중에 빠지기 쉽다.

사건의 본질. 그건 바로 동기다.

해원기의 미간과 증명단의 이마에 주름이 몇 개나 겹친다.

또 한 가지를 배웠다.

다시 의젓하게 수염을 쓰다듬는 단목정.

“그래서 이번에 내가 직접 안경에 가볼 셈이다.”

“네?”

해원기보다 증명단이 더 놀라 머리를 쳐들자,

“괴질의 원인을 밝히는 게 우선이지만, 만약 진짜 금오혈석이 있다면, 정수회가 아홉 도적의 하나라면 그 동기도 알 수 있잖으냐. 마침 저들이 먼저 찾아온 김에.”

단목정이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계획을 설명했다.

확실히 좋은 기회. 그러나 지혜로운 단목정도 증명단의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음?”

다부지게 입술을 깨물고 똑바로 단목정을 쳐다보는 두 눈.

비록 억지로 억누르긴 했어도 그 눈 속에 새파란 불꽃이 일렁여서 절로 증명단의 심정이 이해되고.

해원기의 표정이 더 굳어졌지만, 굳이 입을 열어 말릴 수는 없었다.

방안이 고요해지는 게 싫었나.

딸랑.

때맞춰 울리는 방울 소리에 단목정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특이하군. 하남 쪽에서 급한 서신이라.”

듣기엔 똑같아도 방울 소리마다 의미가 다르고 그에 따라 전음으로 소식을 전하는 듯.

증명단의 자원에 어색해진 분위기를 피하기에 좋은 핑계지만,

서둘러 방문을 나섰던 단목정이 급하게 바로 돌아왔다.

묘한 표정.

손에 든 작은 종이를 다시 한 번 훑고는,

“중간에 함께 했었다는 친구, 악송령이라고 했지?”

묻는 말에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와서 해원기와 증명단이 깜짝 놀랐다.

그간의 여정을 간략히 얘기하긴 했어도 지금 왜 악송령의 이름이 나오는지.

“엉뚱한 곤경에 처한 모양이다. 관병과 시비가 붙었다가 마침 지역에 나와 있던 금의위의 추포(追捕)를 받는다고.”

“네?”

“에에?”

해원기와 증명단이 벌떡 일어났다.

관병과의 시비에 금의위의 추포라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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