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07화 (108/410)

제27장 피단지미(皮蛋之謎) (3)

단목정이 해원기에서 손짓하며 증명단을 돌아보았다.

“증 낭자도 쉬어야지. 당 소저와 같은 방을 쓰라고. 아, 증 낭자는 눈치가 있으니까 지금까지 한 얘기를 쉬 입에 담지는 않겠지.”

“아, 네.”

남자인 해원기에게는 다른 방을 내줄 모양이다.

세 사람이 나눈 대화가 상당히 깊은 의미를 지녔다는 것쯤은 아는 증명단. 당연히 단목정의 마지막 말이 경고임을 깨달았고. 그런 경고가 아니라도 그녀 스스로 생각해볼 문제가 적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그저 사부가 가르쳐준 것밖에 몰랐던 철부지 소녀. 백여 년간 명맥이 끊겼던 항산파의 장문제자라는 호칭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사실 엄청난 얘기를 한꺼번에 듣느라 피곤하기도 하고.

그래서 평소답지 않게 다소곳하게 배웅하는데.

회랑으로 나와서야 해원기가 단목정에게 입을 열었다.

“미리 약속한 환자가 있습니까?”

단목정이 씩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묻는 해원기의 침착한 얼굴, 이 아우도 진짜 ‘바부탱이’는 아니다.

작은 방울 소리는 꽤 멀리서 전해졌고, 달리 약왕당의 주인을 급하게 찾는 기척도 없었다.

이미 단목정의 ‘환자’라는 말이 핑계란 걸 알고 확인 차 물었던 것.

“그럴 리 없지. 반룡령 위탁을 받은 요사스러운 계집을 만났다며? 게다가 폭우로 깨어난 산소에 당가의 여식까지. 겹친 게 많으면 뭐든 하나 걸리는 법이거든.”

해원기가 머리를 끄덕였다.

봉대저라는 여인. 반룡령의 소령주인 백문기의 부탁을 받았다고, 그녀 외에 다른 추적자가 있을 수도 있다고 했었다. 오다가 단목정과 뜻밖에 해후하게 된 원인인 산소라는 괴물도 세 번째 출현한 것이고.

뭔가 사연이 있어서 자세한 내막을 밝히진 않았으나 사천당가와 관련된 일도 있다.

단목정이 약왕당으로 돌아오는 걸 서두른 이유인가 보다.

“열여섯 명의 채약사(採藥使)가 약왕당 주위에 침입자를 막는 진세를 지키지. 그러나 이 방울은 침입이 아니라 정식으로 방문했다는 뜻이야. 채약사들을 피해서. 누구인지 궁금하군.”

아까 마중 나온 이들 대부분이 상당한 무공을 지녔고, 그들이 약왕당을 지키려고 진세를 친 것도 해원기는 알고 있었지만. 그밖에 상황을 알리는 기관도 설치된 듯.

“제가 같이 있어도 되겠습니까?”

괜한 번거로움을 불러들인 게 아닐까 싶어 해원기의 얼굴이 흐려지자,

단목정이 눈을 찡긋했다.

“그럼. 여차하면 네가 두들겨 줘야 하잖느냐. 아픈 이들 보살피는 의생이 무슨 힘이 있다고. 어험.”

두들겨 주다니. 약한 척하는 소리에 해원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호위로 삼겠다면 마다하지 않겠지만, 단목정을 누가 함부로 대할 수 있겠나.

일반 가옥이라면 중앙의 큰 건물에 대청이 있어 손님을 맞이하거나 회합을 치르지만.

약왕당은 오히려 서쪽 구석의 작은 건물이 그런 역할.

사방에 약재가 널렸고, 높은 침상은 환자를 살필 때 외에는 탁자처럼 쓰인다.

회랑과 연결된 작은 문을 열자 식사를 차려주었던 젊은이 중 한 명이 단목정에게 짧은 귓속말을 전하고 바로 물러났다.

방안에 켜진 건 작은 등 하나, 흐린 불빛 속에 서 있는 사람도 하나뿐이다.

단목정이 침상 위에 놓인 붉은 배첩(拜帖)을 들어 힐끗 보곤 두 손을 모았다.

“정수회(井水會)의 고인이 찾아주셨군요. 단목정입니다.”

약향이 가득한 곳에서 혼자 있던 이 역시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고,

“신의로 이름 높으신 단목 당주께서 친히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수회의 이회주(二會主)로 있는 정일건(丁一建)이 심야에 찾아뵈온 죄를 청합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 오십 대 초반이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당당한 체구에 젊은이 못잖게 우렁찬 음성. 머리에 두른 천이나 걸친 단삼은 모두 평범해서 그냥 시정에서 흔히 보는 행색이다.

단지 평범한 외모 속에 두 눈만이 기이하게 날카로운 빛을 품어서. 그것만으로도 이 시각에 약왕당을 찾은 이유가 간단치 않을 것 같다.

정수회. 해원기는 처음 듣는 조직. 그러나 한 조직의 이회주라면 우두머리에 속한다.

단목정이 예를 마치고 자리를 권했다.

“죄라니, 별말씀을. 약방에 밤낮이 따로 있을 리 없지요. 그래도 이렇게 늦은 시각, 뭔가 급한 용무가 있나 봅니다.”

권하는 대로 마주 앉은 정일건의 시선이 잠깐 해원기를 스쳤지만, 워낙 허름한 외모. 약왕당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여기는지.

바로 단목정과 대화를 시작했다.

“네.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 총회(總會)에서 쉬지 않고 달려왔기에, 무례를 무릅쓰고 배첩을 내밀었던 겁니다.”

“귀회의 총회는 안경(安慶)에 있는 거로. 허, 상당한 거리인데 무슨 일로?”

“그게. 괴질(怪疾)이 도는 기미가 있습니다.”

“괴질?”

단목정이 살짝 놀란 빛을 띠며 되물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 해원기를 노리거나 다른 이유일 줄 알았더니 제대로 약왕당에 볼일이 있는 손님이다.

정일건의 간단한 설명에 따르면 대략 한 달 전쯤부터 안경에서 이상한 병을 앓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단다.

오한과 구토, 고열에 설사를 동반하는 증상은 환절기에 흔히 나타나는 감기몸살이라서. 한두 명이 아픈 걸 특별히 신경 쓸 일은 아니었는데.

괜찮아지는 듯하던 환자들이 도로 누워버리고, 그 증상도 갈수록 이상해졌다.

오한이 심해진 자는 손발이 퉁퉁 불다가 동상(凍傷)같이 변하고, 고열이 심해진 자는 새까맣게 타들어 가더니 화상(火傷)으로 문드러지기까지.

그 수가 수십 명이 넘어가면서 비로소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고, 고명하다는 의원들을 무수히 초빙했는데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서.

마침내 약왕당을 찾게 되었다는 것.

설명이 끝나자 단목정이 심각한 얼굴로 수염을 쓸었다.

“과연 이상한 병, 괴질이라고 부를 만하군요. 정 회주가 이렇게 찾아오신 뜻을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흠.”

거북한 의미를 담아 말을 중단하자 정일건이 급히 말을 받는다.

“단목 당주께 어려운 부탁일까요?”

“아, 제가 마침 중요한 약을 만드느라 단로(丹爐)를 떠날 수 없는 처지라. 그래도 가만있을 수는 없죠. 저희 약사(藥師) 몇 명과 급한 약재부터 먼저 보내고, 제가 바로 뒤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정 회주는 잠시 쉬다가 저희 쪽 채비가 다 되면 같이 움직이시는 게.”

안타까운 의미를 담아 권하니, 정일건도 표정이 몇 차례 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단목정이 침상을 가볍게 두드리자 바로 열리는 방문. 아까의 젊은이가 조용히 대기하는 모습에 정일건이 살짝 놀랐지만, 더는 입을 열지 않고 바로 젊은이 뒤를 따라 나갔다.

정일건을 내보내면서 잠깐 일어났던 단목정.

다시 자리에 앉아 심각한 표정 그대로 수염만 쓸어댄다.

당장 출발할 수 없는 처지가 가슴에 걸렸나.

그러나 해원기가 곁에 다가오자 쳐다보는 미묘한 눈빛.

“어떻게 보았니?”

눈빛처럼 묘한 질문이지만, 해원기는 예상했었다.

폭우를 따라 출현한 산소라는 괴물을 세 마리나 처리하고, 해원기와 만나 약왕당에 돌아와 방금까지 많은 대화를 나눈 단목정이다. 단로를 떠날 수 없는 처지란 건 핑계일 뿐.

“정수회가 뭔지 모릅니다만, 안경에서 쉬지 않고 달려온 것치고는 상당히 멀쩡하군요. 그리고 외공(外功)을 익힌 듯 보이는 외모와 달리 손속이 빠르고 날카로운 병기를 사용하는 자입니다.”

단목정이 정일건에게 거짓 핑계를 대고 자신에게 불쑥 질문을 던진 데에 다 이유가 있을 터.

묻는 대로 답하자 단목정이 빙긋 웃는다.

“역시. 정일건의 외호는 섬수혈추(閃手血錐), 두 자루 송곳을 병기로 사용하고 독한 솜씨로 꽤 알려진 자다. 정수회는 본래 등짐을 지고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는 휘주 행상들이 시작한 모임인데, 현재는 그 연락망과 무력으로 강호의 큰 세력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지. 물은 재원(財源)이라 천정(天井)에 떨어지는 빗물조차 아껴야 한다는 뜻이라나.”

정수회라는 명칭의 뜻이 무엇이든, 이들이 바로 단목정이 언급했던 신진세력의 하나. 섬수혈추라는 살벌한 외호도 상인들의 모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휘상(徽商)은 처음에 차(茶)로 시작했으나, 본조(本朝)에 들어 급속히 발전해 염상과 맞먹을 정도로 커졌다. 중원 천하의 모든 물류를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 휘상의 무력조직인 정수회의 이회주가 오밤중에 부리나케 달려왔다……, 물론 정일건 혼자 안경에서 왔다는 건 거짓이지만. 그 괴질이 급조한 날조 같지는 않구나.”

단목정이 미소를 지우고 수염에서 손을 뗐다.

안경에서 이 황백산까지는 빠른 말을 달려도 반나절이 넘게 걸리는 거리. 평범한 차림이라도 멀쩡하게 오밤중에 찾아온 정일건에게선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염상. 단목정의 말에 해원기가 미간을 조금 좁혔다.

“용문세가를 이용한 동창의 간세도.”

“휘주의 차상이라고 했었지. 휘상이 발전한 배경이 동창일 가능성은 짙어. 흐흥, 재미있군. 정일건이 말한 괴질이 사실이라도 이 방문은 우형의 예상을 뛰어넘는구나.”

예상을 뛰어넘으면 재미있을까.

해원기의 뒤를 캐는 것도, 산소라는 괴물과 관련된 것도, 사천당가의 모호한 사정과 이어진 것도 아니다.

“독이라면 이미 연락이 들어왔을 거야. 정수회가 초청한 의원 중에는 약왕당과 관계된 이도 있었을 테니까. 한번 직접 알아보는 것도…….”

“형님, 설마 형님을 목표로?”

해원기가 문득 든 생각에 단목정의 말을 잘랐다.

딱딱하게 굳은 인상. 강호에서는 정사흑백을 막론하고 의술을 지닌 자에겐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게 관행이었으나, 그 관행도 깨진 지 오래다.

정체 모를 암류니, 신진세력이니. 그들 중에 단목정을 노리는 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어떤 자가 어떤 짓을 꾸밀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하하, 그러니까 재미있잖으냐. 이 우형을 노리고 꾸민 일이 괴질이라. 신의라는 이름에 걸맞은 의술을 지녔나 시험해 볼 작정일까? 아니면 몸에 좋은 영약이라도 뺏을 심산일까? 하하하.”

이걸 재미있어하는 단목정도 범상치는 않다.

더 할 말이 없어서 해원기는 웃어젖히는 단목정을 쳐다볼 뿐이었다.

무공을 닦은 이라도 지치면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는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게 무인에게는 더 피곤할 수도 있고.

약왕당의 잠자리가 오랜만에 편해서인지 다들 날이 훤하게 밝은 후에야 일어났다.

해원기를 안내하는 이는 어제와 달리 채약사에 속하는 중년인.

“편히 쉬셨습니까, 해 대협. 당주께서는 일부러 깨우지 말고 대협이 일어나시면 조반을 준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깍듯한 언행. 황하문의 막혼 외에 자신을 대협이라 부르는 이가 처음이라 조금 어색하지만.

해원기가 어젯밤의 식탁으로 향하던 발을 멈추었다.

“형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단목정이 일부러 채약사를 보냈을 리 없다.

“네. 간밤에 왔던 정 회주라는 자. 당주께 다시 청을 넣어 산 아래 채가촌(蔡家村)으로 왕진을 가셨습니다.”

“왕진이라면.”

“괴질이 중증인 자를 벌써 이쪽으로 옮기는 중이었다고 하더군요. 당주께서 약왕당을 떠나기 어렵다고 하시니까 저들이 어떻게든 채가촌까지 데려오겠다고. 할 수 없이 밤새워 기다리시다가 새벽녘에 내려가셨습니다. 한 시진쯤 됩니다.”

단목정이 미리 일러놓았던 듯. 중년인이 자세하게 설명하자 해원기가 멈칫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정수회의 괴질은 거짓이 아닌 모양. 정일건이 안경에서 혼자 달려온 건 아니지만, 진즉 중환자들을 마차로 이송했으니 상당히 다급했다는 뜻이다.

‘재미있겠다’라고 웃어대던 단목정이 이렇게 변한 상황을 오히려 직접 부딪칠 기회로 여겼겠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아, 그리고 당 소저가 먼저 떠난다고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주께서 부재중이라고 하니 해 대협께만이라도 인사를 하겠다고.”

또 생각지 못한 일.

해원기의 걸음이 빨라졌다. 자는 동안 변화가 생겼다.

식탁에 홀로 앉아있던 당령이 해원기가 들어서자 벌떡 일어났고,

“아, 해 소협.”

곧장 예를 취하려는 걸 해원기가 말렸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떠나겠다니.”

권하는 대로 다시 의자에 앉은 당령이 아무렇지 않은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는 아니에요. 어제 단목 당주님께 좋은 얘기도 들었고, 황보 대가에게 부탁한 연락도 확인해야 하니까. 제가 약왕당에 머물러서야 제때 연락을 받기 어렵잖아요. 서쪽의 큰 고을로 나가 있어야죠. 일찍 당주님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려 했는데, 새벽에 왕진을 가셨다고 해서.”

어젯밤에 먼저 물러날 때 보였던 어쩔 줄 모르던 모습과는 판이한 표정.

조리 있게 이유를 댄다.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에 차려진 아침 식사, 당령 앞에는 젓가락까지 치워졌으니 먼저 식사를 마치고 기다렸던 듯.

“웬만하면 형님을 만나고 떠나시는 게. 이 대별산이 워낙 커서 황백산을 벗어나기도 쉽지 않으니 길 안내를 부탁하시죠.”

염려를 담아 만류해 보지만.

“호호, 당가의 자손들은 산길에 익숙하답니다. 저는 이미 아침 대접도 받았고, 증 낭자에게 작별을 고하지 못해서 아쉬운데. 그건 해 소협이 대신해주세요.”

명랑하게 웃음까지 섞으며 다시 몸을 일으키니.

해원기도 어쩔 수 없이 마주 서야 했다.

“그럼 다시 만나요, 해 소협.”

“일이 잘 풀리길 빕니다. 당 소저.”

포권을 마치자 몸을 돌리는 당령.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씩씩하게 떠난다.

그 뒷모습을 보며 해원기가 ‘오독진살’이라는 단어를 저절로 떠올렸다.

그게 당가의 추문이라는 소리와 연관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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