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피단지미(皮蛋之謎) (2)
굳은 얼굴의 해원기와 놀란 표정의 증명단.
당세 강호의 형세를 논하다가 그게 돌연 아홉 도적과 연결되었다. 해원기와 증명단이 쥔 단서라곤 망령칩독으로 의심되는 독과 겁표 당한 마차를 찾다 맞닥뜨린 동창뿐.
이렇게 연결되는 건 참으로 의외.
“얽혔다는 건?”
해원기가 침중하게 되묻자 단목정이 천천히 두 손을 폈다.
“차근차근 따져보자꾸나. 우선 표행. 진짜 낙향하는 표행이었는지, 혹은 거짓으로 꾸민 공표였는지는 차치하고 일단 재물을 노린 겁탈은 아니었다. 목적은 단 하나, 똑같은 모양의 상자 아홉 개. 따로 순서도 정하지 않고, 불평불만도 없이 각각 들고 갔으니 내용물이 똑같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지. 무려 아홉이나 되는 도적이. 흥.”
가볍게 코웃음 치며 한 손을 움켜쥐었다.
표행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괴상한 겁표가 일어난 건 확실하다. 진자현에게서 입수한 상자가 해원기의 품에 있으니까.
“원기에게 이 얘기를 듣자마자 의심이 들었다. 표행의 규모가 워낙 커서 도적이 아홉 무리나 모였다? 그래놓고는 달랑 마차 하나, 그것도 작은 상자 하나씩 나눠 갖고 튀어? 말이 안 맞잖아. 더구나.”
주먹 쥔 손이 비웃듯 흔들린다.
“왕년의 흑도나 녹림의 거물들도 셋 이상 손을 잡는 걸 꺼렸다. 도적질이란 게 다 욕심에서 비롯되고, 일단 일을 마치면 아무리 소득이 많아도 분배에서 분란이 일게 마련이거든. 약속이고 의리고 다 팽개치고 서로 치고받고. 흐흥, 아홉은 지나치게 많지. 그리고 어떻게 서로 어울렸을까? 몇 놈은 진즉 친분이 있었고, 그 몇 놈이 좋은 일이 있다고 또 여기저기 권해서? 무슨 상부상조도 아니고.”
꿀꺽.
증명단이 소리 나게 침을 삼키며 머리를 끄덕거렸고. 해원기의 눈도 빛을 머금었다.
지금까지 그냥 지나쳤던 부분. 이렇게 이치를 따지면 처음부터 수상한 사건이었다.
“아홉. 일부러 맞춘 수로군요.”
단목정의 주먹이 쓱 펴진다.
“그렇게 봐야겠지. 아홉 개의 상자, 아홉 무리의 도적. 누구도 두세 개, 혹은 전부를 독점하지 못하고 딱 하나씩만 가져가도록. 진자현이 그중 둘을 거론했다지? 억센 동북 말투와 산동 동부 교주의 사투리. 그럼 혹시 동서남북 각지에서 끌어 모았다? 누가?”
“헉.”
숨이 막히는 듯한 소리. 증명단의 반응이 어떻든 해원기의 시선은 단목정에게 고정된 채.
“고의로.”
누군가 일부러 의도한 겁표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목정이 잠깐 숨을 돌리며 다른 손을 내밀었다.
“다시 처음으로 가자. 퇴직한 상보감의 장인태감이 절강으로 낙향하는 표행이라고 했다. 경사와 하북의 표국이 셋이나 호송하고 제남의 관군이 영접할 정도로 큰 규모. 여기서도 공표는 일단 미뤄두고, 상보감의 장인태감에 주목해보자. 상보감은 황궁의 진귀한 보물과 어용의 물품을 관리하는 기구라지만, 실제로는 옥새 외엔 자질구레한 애완물 따위나 대령하는 내시를 가리키지. 조각품이나 장신구, 서화와 관상용 장식품에 심지어 동물까지. 이런 것들은 황제가 바뀌면 그 취향에 따라 바뀌게 마련이고, 그걸 관리하는 상보감의 우두머리인 장인태감이 착복해도 딱히 티가 나지 않을 거야. 황제가 애용하던 벼루나 연적만 해도 아주 진귀한 것일 테니 얼마든지 치부할 수 있겠지. 자, 이 아홉 개의 상자는 뭐였을까?”
이치에 맞게 따져간다는 게 이런 것인가.
의심스러운 부분은 제외하고 알고 있는 것만으로 알지 못하는 부분을 미루어 짐작하는 지혜.
해원기는 차츰 추리(推理)의 기본을 이해하게 되었고, 다시 품에서 상자를 꺼내어 단목정의 손에 올려놓았다.
아까와 달리 차분하게 상자를 살피는 단목정. 조심스럽게 돌려서 해원기와 증명단에게도 잘 보이도록 한다.
“흔한 상자지만 상당히 공을 들인 물건이다. 질긴 종이를 열 겹이나 덧붙인 지합(紙盒), 검은색도 먹이 아니라 옻이요, 뚜껑의 테두리에만 붉은 칠을 했는데 역시 단순한 물감이 아니라 주사(朱砂). 황궁에서 나왔다고 믿을 만한 고급품이니 상자 자체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단목정의 치밀한 분석 덕분에 단순하게만 여겼던 상자도 새롭게 보인다.
네모난 상자. 약간 길쭉한 형태에 새까맣고 뚜껑 테두리만 붉다. 무슨 의미일까.
열심히 초점을 맞추던 증명단이 뺨을 긁었다.
“관(棺)은, 아니겠죠. 헤헤.”
얼핏 떠오른 생각을 냉큼 종알대다가, 자신도 무안해서 웃음으로 얼버무리는데.
단목정이 묘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통에 어깨가 옴츠러들었다.
또 버릇없이 나댔나.
그러나 단목정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기고 다시 상자로 시선을 돌렸다.
탁자 위에 놓고 뚜껑을 열자 드러난 내용물. 보는 사람마다 피단(皮蛋)이라는 삭힌 오리 알을 떠올리게 하는 예의 돌멩이가 드러난다.
도무지 뭔지 알 수 없는 돌멩이.
“오광석도 오금석도 아니야. 오석 따위의 평범한 돌은 더욱 어울리지 않고.”
단목정이 두 손으로 돌멩이를 어루만지곤 가볍게 혀를 찼다.
“쯧, 참으로 기이한 물건이야. 표면에 다듬은 흔적이 전혀 없다. 만박(萬博)의 천지…… 흠, 그 어르신이라도 뭔지 알아보기 어려울걸. 그러나.”
누굴 거론하는지 알 수 없다. ‘만박’이라고 불렸다면 모르는 게 없는 박학다식한 인물일 터.
궁금해 하는 증명단을 향해 단목정이 미소를 지었다.
“어느 정도 추정할 근거는 있단다. 마침 증 낭자가 가르쳐준 것도 있고 말이야.”
증명단이 맹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가르치다니. 뭘?
하지만 단목정은 바로 말을 잇지 않고 뒤로 물러나 앉더니 술그릇을 찾는다.
“흐음, 얼핏 머리에 떠오르긴 했는데, 너무 황당해서 선뜻 입에 올리질 못하겠다. 증 낭자가 들으면 웃으려나.”
꿀꺽꿀꺽. 혼잣말하면서 시원하게 들이키고. 소매로 수염을 꼼꼼하게 닦을 때까지.
해원기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단목정이 거론하다 만 인물. 백여 년 전에 만박의 유수(儒帥)로 불렸던 천지일사(天地逸士) 제대광(齊大光)이다. 두 분 사모님 중 한 분이 그 의손녀(義孫女)이기에 말을 아꼈던 듯. 어떤 사물이든, 무슨 무공이든 전부 알아보았다는 인물이고, 과거 신유문의 문주였었다.
신유문이라니 도중에 만났던 노문기라는 자도 기억나지만,
지금은 이 돌멩이에 집중해야 할 때다.
지혜가 비상한 이 형님이 이렇게 뜸을 들일 정도로 황당한 내용이 무엇이기에.
단목정이 비로소 입을 연다.
“뭐, 이십 년 전에는 온갖 황당한 일이 천하를 진동했으니 이것도 그 여진(餘震)이라고 여기면 될까. 자, 황궁에서 나온 물건, 아홉 개가 똑같은 돌멩이, 그 가치가 다른 재물은 눈에도 두지 않을 정도, 장풍무명 진자현이 도적 중의 한 명. 이것만 가지고는 판단하기 부족하지만, 난 이게 금오혈석(金烏血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을 냈지만.
“금오혈석? 그게 뭔데요?”
대뜸 증명단의 반문이 붙을 수밖에.
오금석에서 글자 순서만 바뀌었으나, 생전 처음 듣는 명칭이다.
해원기도 마찬가지. 어디선가 들은 듯한데 바로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단목정이 손가락으로 술을 찍어 탁자 위에다 글자 하나를 쓴다.
깃 우(羽) 밑에 받들 공(廾).
잘 쓰지 않는 글자라 증명단이 요리조리 쳐다보지만, 해원기의 눈썹이 확 위로 일어서고.
“예(羿). 십일병출(十日並出)?”
퍼뜩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렸을 때, 사부의 집안 어른이 마련해준 곳에서 짧게 글공부를 한 적 있었다.
태고의 신화. 금오화석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믿기 어려워 벌어진 입이 닫히지 않는다.
반면에 증명단은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두리번거려서.
단목정이 간결하게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천제(天帝)의 처인 희화(羲和)는 열 개의 태양을 낳았다. 동쪽에 부상(扶桑)이란 나무가 있어 열 개의 태양은 그 나무에 거하는데, 하나는 윗가지에, 나머지 아홉은 아래가지에 머물다가 날마다 순서에 따라 하나씩 하늘길로 나아간다.
그런데 요(堯) 임금 때 돌연 열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나와 곡식과 초목을 전부 불태워 사람들은 살 수가 없었고, 이에 천제는 예에게 붉은 활과 흰 줄이 달린 화살을 주어 천하를 구하게 하였다.
세상의 참혹함을 목격하고 격분한 예는 서슴없이 아홉 개의 태양을 쏴 떨어뜨렸고, 마침내 하늘에는 하나의 태양만 남게 되었다.
어렸을 적에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는 신화. 대첨산 깊은 곳에 살던 증명단도 억지로 귀동냥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아, 그거 후예(后羿) 이야기.”
단목정이 고개를 가로젓고,
“후예는 하(夏)나라 유궁국(有窮國) 주인이지. 그도 활을 잘 쏜 탓에 사람들이 예와 후예를 헷갈린 거란다. 그런데 이 신화의 기록에 일중유준오(日中有踆烏)란 구절이 있고. 준오는 세 발 달린 까마귀, 금오(金烏)라고도 한다.”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것보다 뒷얘기가 더 희한해서 증명단이 픽 웃었다.
“히, 해 속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있다니. 그걸 어떻게 알 수 있……, 에? 떨어진 해를 보고 알았단 말이에요?”
비로소 이 신화가 왜 나왔는지 알아챘다.
예든 후예든. 쏴 떨어뜨린 태양은 아홉 개. 도적들이 훔친 돌멩이가 아홉 개.
그럼 눈앞에 놓인 돌멩이가 바로.
“황당한 소리다만. 예사구일(羿射九日), 떨어진 태양이 마침내 검붉은 돌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그게 금오혈석이야.”
단목정이 말을 마치자.
세 사람의 시선이 저절로 탁자 위에 모여들었다.
상자 안에 든 돌멩이. 삭힌 오리 알처럼 생긴 이 돌멩이가 정말 신화에 나온 태양의 화신일까.
단목정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뭐, 확실하진 않다. 증 낭자가 저 상자가 관처럼 보인다고 할 때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니까. 둥근 하늘에 있어야 할 태양이 네모난 땅에 떨어져 죽은 얘기와 잘 어울리잖아.”
증명단이 목을 빼서 돌멩이를 다시 보곤 입맛을 다셨다.
“쩝. 당주님 말씀처럼 너무 황당해서. 이게 설사 금오혈석이라고 해도, 누가 알아보기나 하겠어요? 태양의 화신이라기엔 특별한 것도 없잖아요.”
갑자기 태고의 신화랑 이어지기엔 상상력을 발휘해도 무리.
암만 봐도 그냥 돌멩이, 아니, 딱 먹다 남긴 피단 같은데.
한참 단목정의 놀라운 지혜에 끌려 다니다가 마지막에 허망한 결론으로 끝나서 그만 맥이 빠졌다.
기껏 증명단이 멋대로 종알댄 ‘관’이라는 소리 때문이라니. 증명단 자신도 전혀 믿음이 가질 않는 판.
그러나 해원기의 굳은 표정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단목정이 그냥 희떠운 소리를 덧붙일 사람이 아니요, 그전에 해준 분석과 반드시 관련이 있을 테니까.
과연 단목정이 증명단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렇지?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돌멩이인데, 이걸 노리고 사방팔방에서 아홉이나 되는 도적을 모으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표행이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호하며, 망령칩독으로 의심되는 독이 뿌려졌다니 말이다. 곳곳에 동창과 관련된 냄새도 풍기면서. 죄다 비정상이야.”
또 반어체. ‘비정상’이란 단어를 강조한다.
가늘어진 눈이 증명단에게서 해원기로 옮아갔다.
“하지만 황당하고 믿기 어려운 신화나 전설이 얼마나 세상을 어지럽혔는지. 원기는 알 것이다. 그걸 일부러 노리는 놈들까지.”
해원기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신화와 전설. 그 안에 담긴 힘에 집착했던 자들. 탐욕이란 그런 것이고, 그걸 바로잡느라 사부는…….
증명단과 해원기가 각각 단목정의 말을 되새기는데.
딸랑.
어디선가 들리는 작은 방울 소리.
단목정이 정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 이렇게 늦은 시각에. 환자의 용태가 아주 심각한 모양이군.”
얘기에 팔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이미 야반삼경(夜半三更). 대별산맥 가운데 황백산까지 찾아올 정도의 환자라.
단목정은 마치 환자가 올 걸 알았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