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피단지미(皮蛋之謎) (1)
단목정이 힐끗 해원기를 보곤 수염을 쓸었다.
미간을 좁힌 채 살짝 감은 눈,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데. 그 표정 위로 불현듯 예전의 기억이 아련히 겹쳐져서.
증명단의 더듬거리는 질문에도 잠시 말문을 닫아야 했다.
얼굴 생김새와 풍기는 기질은 전혀 다르지만, 저렇게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기던 사람. 그에게는 아무리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감히 나서서 떠들기 어렵게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묵 대숙.’
속으로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홀로 세상을 구하고, 그리고는 스스로 그 공적과 명예를 전부 지워버린 채 사라지길 원했던 사람.
그의 제자인 해원기는 자기 뜻대로 살도록 놔두려고 했었다.
그러나 스스로 강호에 발을 들이게 된 원인. 그건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었으니.
‘결국, 제자리를 찾은 천기(天機)는 원기를 놔주지 않는 건가. 또다시 난세를 구할 영웅, 아니지. 영웅보다는…….’
천기의 흐름을 짚고, 세상의 변화를 따르면서 어떻게든 공도(公道)와 순리(順理)를 찾으려 했던 세월. 약왕당을 재건해 의술로써 사람을 구한다는 가문의 책무가 중요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이 평화롭기를 기원하는 사문의 유지 또한 잊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광활하고 사욕과 비리는 그치지 않아, 겨우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는 무림이 제대로 힘을 쓰기 어려운 상황.
게다가 백여 년에 걸쳐 세상에 뿌려진 악의 잔재는 도처에 존재하고 있었기에.
이십 년의 세월이 눈 깜빡할 새에 흘러가 버렸다.
어느새 사십 대의 중년인이 되어 약왕당의 당주요, 강호 제일의 신의라 불리지만. 하나도 제대로 한 게 없구나.
단목정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실 때.
“그래서 형님을 찾아온 거란다. 신의라는 이름은 당대 제일의 기인인 형님의 한 부분만 지칭할 뿐이지.”
어느새 눈을 뜬 해원기가 증명단에게 대신해주는 대답.
단목정이 현실로 돌아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허허, 우형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구나. 당대 제일 기인? 증 낭자 앞에서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하겠다.”
어쩐지 자조 섞인 말투.
그러나 증명단은 해원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느라 바쁘다.
“맞아, 맞아요. 정말 대단하신 분, 제일 기인이 딱 맞는. 그러니까 신의에 머리도 어마어마하게 좋으시고, 그렇지, 폭우 속에서 산소를 짓이긴 것도. 그 방법 좀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신의라니 의술은 당연히 고명할 것이요, 그간의 대화를 통해 지혜가 비상한 것도 알았으나.
아무래도 처음에 본 강렬한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나 보다.
졸라대는 통에 얼굴에 금칠한 단목정이 할 수 없다는 듯 손을 내렸다.
“알았다, 알았어. 그건 술법진의 일종으로 박령귀부진(縛靈歸府陣)이란 거다. 전에 말했듯이 아주 잡스러운 술법이 기초라. 흠, 항산의 장문제자가 배울 게 아니지.”
장문제자라는 호칭에 또 찔끔했지만, 왕성한 호기심이 그냥 단념되지 않는다.
“오라버니도 금방 제압하지 못한, 내단이란 불덩이도 토했잖아요. 잡스러운 술법진이 그렇게 금방 빈대떡을 만드니까.”
손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불을 토하는 시늉까지 해서. 단목정이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뭐,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조금 긴 얘긴데 괜찮을까?”
호기심이 왕성한 소녀. 뭐든 배우려는 자세가 기특해서 가르칠 마음이 생겼나.
굳이 양해를 구한다.
과거에 부근에서 괴물을 기른 자들이 있었다. 그것도 참으로 괴이한 방법을 써서.
사람의 혼백을 먹이로 삼아 기른 괴물. 무수한 사람들이 이유 없이 목숨을 잃었고, 갖가지 사술(邪術)이 동원되었단다.
남의 정신을 바꾸는 술법, 그 술법이 불완전해서 피시술자가 자칫 백치가 되는 수가 많았는데. 그렇게 백치가 된 사람들을 모아놓았다가 죽여서 물고기 밥을 만들고, 그 물고기를 갈아서 혼백을 정제한 후에 괴물의 먹이로 삼았단다.
참으로 끔찍한 방법. 당연히 그렇게 길러진 괴물은 어마어마한 악수(惡獸)가 되어 세상에 큰 해를 끼쳤으나.
다행히 하늘이 천하를 위해 내려준 검객이 있어 이 괴물을 처단했고, 무수한 혼백이 오용되지 않도록 해방해주었다.
오밤중에 듣기엔 오싹할 정도로 망측한 얘기. 사람을 바보로 만든 다음에 죽여서 물고기 밥으로 주고 그 물고기를 갈아 혼백을 정제해서 괴물에게 먹였다니. 황당해서 믿기 어려울 법한데도 증명단의 눈은 흥미로 반짝거린다.
“사람의 정신을 바꾸는 술법이요?”
“도가에서 황량몽(黃梁夢)이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니 하는 얘기도 있잖으냐. 꿈처럼 몽롱하게 만든다는 거지. 세심술(洗心術)이라 하더구나.”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그 사람들을 물고기 밥으로 만들다뇨.”
“혈적어(血滴魚)라는 괴상한 물고기다. 게다가 불가의 지장진언(地藏眞言)을 엉뚱하게 써서.”
“나 참. 사람의 혼백을 먹이로 삼다니. 벌써 그것부터 삿되기 그지없는데 도가와 불가는 왜 그런데 끼었대요?”
인상을 쓰고 고개를 갸웃갸웃.
“도가와 불가가 잘못이 아니라, 바른 가르침도 삿되게 쓰는 사람이 잘못이지.”
하나하나 답해주던 단목정이 해원기를 보며 씩 웃었다.
해원기가 왜 복룡검식을 이 소녀에게 전수했는지 알겠다는 의미. 가르칠 만하다.
증명단은 여전히 이 괴상한 얘기에 집중해서.
“완전히 물귀신이네, 물귀신. 그 괴물 이름이 뭐예요?”
“무지기. 회화수신(淮禍水神)이라고도 불린다.”
이 이름에 증명단이 눈을 크게 뜨고,
“그거. 전설에 나오는 괴수잖아요. 회하에 홍수를 일으킨다는. 와, 그럼…….”
비로소 아는 명칭이 나와서 목소리가 커지려다가, 커진 눈이 데구루루 굴렀다.
민간에도 많이 퍼진 무지기 전설, 아득한 태고에 세상을 물로 뒤덮었던 괴물은 상상 속에서도 거대하고 흉악하기 그지없는데.
그 무지기를 처단한 검객?
우스개라고 비웃었던 꿈같은 얘기가 이것과 또 연관되어서,
어색한 표정으로 슬쩍 단목정의 눈치를 본다.
“그 검객이 백년제일검사, 인가요? 진짜 그런 사람이 있었나요?”
단목정이 일부러 과장되게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과연 증 낭자는 영민하구먼. 그렇지, 바로 그분이지. 증 낭자의 사부님이 지어내셨을 리 있나. 더구나 그 증거가 눈앞에 딱 있는 바에야.”
“예?”
눈앞에 있다고? 헷갈리는 증명단의 시선이 단목정의 손을 따라 옆으로 이동했다.
“원기가 바로 그분의 제자인걸.”
“엑?”
목구멍이 걸린 듯한 괴상한 소리가 나오지만, 증명단 자신은 전혀 몰랐다.
놀라 자빠질 노릇. 이 ‘바부탱이’, ‘고구마 대장’이 지금까지 가공의 인물이라 여겼던 백년제일검사의 제자라니.
단목정이 모른 척 말을 이어가지만, 증명단의 눈은 묘한 표정을 짓는 해원기의 얼굴만 본다.
“그 무지기를 길렀던 후유증이랄까. 육안에서 곽산에 걸친 지역 여기저기에 의심스러운 기운이 뭉치곤 했다. 그래도 그간 채약하는 동안에 딱히 눈에 뜨이는 게 없었는데, 흠, 이번 폭우가 그것들을 깨운 계기가 되었을 수 있지. 무지기는 본래 수괴(水怪)였으니까.”
증명단이 산소에 관해 묻는 바람에 시작된 대화.
이제 그 상세한 배경을 다 밝혔고, 해원기가 묘한 표정 그대로 장탄식을 했다.
“하아, 형님은 계속 신경을 쓰셨군요.”
이름을 감추고 세상에서 잊히길 원했던 사부. 그 의지를 누구보다 환히 아는 단목정이 왜 증명단에게 해원기의 신분을 드러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야 약왕당이 이 대별산 뱃속에 자리를 잡은 게 단지 풍부한 약초 때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묻고 싶은 게 지나치게 많으면 얼른 질문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증명단의 입술이 계속 달싹거리는 이유.
그러나 단목정은 아예 해원기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대화를 이어갔다.
“당연한 일. 뭐, 황산(黃山) 쪽은 너무 외져서 말이지.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구주정문이 본래의 터를 되찾는 게 다 똑같은 일이었다. 문파란 게 그저 건물 짓고 편액 건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대부분 예상보다 수월한 편이어서. 흠.”
해원기의 장탄식에 개의치 않고 다시 진지해져서, 해원기도 표정을 고쳤다.
구주정문의 재건. 단목정의 말마따나 건물 올리고 편액을 내거는 게 아니다. 하물며 반도들에 의해 무수한 절학을 도둑맞은 처지임에야.
본산을 찾으러 가면서 하다못해 엄한 산적이 주인 노릇 하는 걸 예상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반도들이 복죄(伏罪)한 경우도 있었습니까?”
“글쎄. 자기 치부를 드러내고 싶은 이는 없고, 다른 문파 사정을 함부로 묻는 것도 실례라서. 하여간 특별히 시끄러운 소문이 돈 적은 없었다. 물론 폐문절손(廢門絶孫)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후대가 등장했거나, 몰락했던 집안이 홀연히 나타난 인재로 중흥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확실히 과거에 비해선 생기가 부족하다. 무림(武林)이잖으냐, 무를 숭상하고 익힌 이들이 숲처럼 많아야 하거늘. 영 재미가 없어졌다.”
“재미?”
갑자기 엉뚱한 단어가 나와서 증명단이 불쑥 종알거렸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지만, 이 지혜로운 신의가 영 어울리지 않은 말씀을 하시는 바람에 실수로 말이 튀어나온 셈.
증명단의 실언에 단목정이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허허, 그렇다. 별로 어울려 보이지 않겠으나, 강호 무림이란 본래 경세해속(驚世駭俗), 즉 세속을 놀라게 하는 삶의 구현. 협의의 고사가 없고서야 어찌 영웅호걸이 생기겠느냐. 그런데 나쁜 놈도, 착한 이도, 이상한 녀석도 별로 없는 맹숭맹숭한 무림이 되었단다. 기묘하지.”
증명단이 조금 멍했다가 눈썹을 바짝 올렸다.
비로소 단목정의 말투에 반어가 섞였음을 깨달았다. 갓 하산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증명단이지만, 그녀 또한 출도하면서 얼마나 큰 포부를 지녔던가.
문파의 재건. 쇠퇴하고 몰락한 집안이 중흥하기 위해선 얼마나 고되고 험한 사연을 겪어야 할까. 스스로 백여 년 만에 북악의 검을 계승하고 나온 증명단이기에 ‘기묘하다’는 말에 담긴 의미를 눈치챌 수 있었다.
해원기 역시 그 의미를 알기에.
“배경이 모호한 신진(新進)입니까?”
바로 핵심을 짚자, 단목정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 굳이 시선을 옮길 필요가 없다. 해원기를 볼 때는 증명단을, 증명단을 상대할 때는 해원기를 깨우치는 게 목적이었다.
젊은 아우, 어린 소녀. 무공은 천양지차지만 무림을 잘 모르는 건 어차피 매한가지.
완곡하게 당세의 실정을 알리고, 과거에서부터 어떻게 이어지는지 일러주느라 꽤 공을 들였다.
제대로 대화가 된다.
“맞다. 근 이십 년 동안 정돈된 무림에 전통의 문파들 외에 두각을 드러내는 새로운 세력들이 있지. 예를 들자면 하북의 팽가장.”
짐작한 터라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들은 얘기다. 십 년 전쯤에 세워진 신흥가문, 가전의 도법이 무림일절로 칭해지고, 가주는 구주신도라는 찬란한 별호를 지닌 팽조린으로 당세에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라나. 칼 쓰는 솜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무림의 도객(刀客)들엔 마치 깎아지른 절벽을 마주한 것 같은 절망감을 준다고 했다.
“어마어마한 소문으로 십 년 만에 무림의 명가가 되었다. 심지어 하북의 패주(霸主)라고 하는 이들까지 있는데. 그 소문 중에 믿을 만한 게 없거든. 광맥 운영권을 지녀서 아주 부유한 집안이라지만, 그 광맥 운영권은 어디서 얻었을까? 도산초벽이라고 절망감을 느낀 무림의 도객은 누구누구고? 도법 이름이 그냥 팽가도법(彭家刀法)인 건 이해해도 제대로 목격한 자조차 없어. 맹숭맹숭하다 못해 아주 미끈미끈하잖아.”
미끈미끈은 전혀 실마리를 잡을 수 없다는 표현일 터.
말하면서 손에 그런 느낌이 드는지 단목정이 손바닥을 가볍게 털며 혀를 찼다.
“쯧, 일례일 뿐. 중원 전체에 얼마나 더 있는지도 자세히 모른다. 원기가 말한 산동의 조양신문은 나도 처음 들었으니. 가장 골치 아픈 건 혹여 이 신진세력들이 동창의 후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
하북팽가 만이 아니다. 당장 단목정을 만나기 전에 반룡령의 위탁을 받은 봉대저를 만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어서 단목정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꺼내는 말에 해원기와 증명단의 안색이 확 변했다.
“신진세력은 겉으로 드러난 명(明), 그리고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암류. 태감의 낙향을 겁표한 아홉 도적은 아마도 이 명암과 얽힌 게 아닐까.”
지혜로운 이는 화제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