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의자지자(醫者智者) (4)
단목정이 당령에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걸까. 또 당령은 왜 그렇게 어찌할 줄 몰라 했을까.
증명단으로서는 모르는 것투성이였지만, 이어지는 얘기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당 소저의 분석은 정확해. 그렇게 지효성에 전염성이 강한 독은 드물지. 하지만, 증 낭자의 가족들은 무사했다고 했지? 내가 줬던 백초환을 복용시켜서. 그렇다면 완전한 망령칩독은 아닐 거야. 그래도 문제는 크다.”
진자현 일당을 짊어지고 태원까지 같던 아저씨들. 하마터면 이유도 모르고 독살될 뻔했고, 아니, 태원부의 감옥이 전부 독에 침습 받았을 가능성까지 있다.
“완전한 망령칩독이 아니어도 큰 문제라면?”
해원기가 말을 받자 단목정이 무겁게 목을 울렸다.
“으음. 진자현 들이 죽은 후에는 더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건 독의 만연이 접촉에 의해 차례로 건너간다는 뜻. 그걸 내가 만든 백초환이 막았으니 완전하지 않다는 거야.”
“형님 말씀은 소단의 아저씨들이 해를 입었다면 또 번졌을 것이라는. 독기가 인체를 새로운 모판으로 삼았다는 겁니까?”
백초환이 그냥 해독으로 쓰이기만 한 게 아니다. 불완전한 망령칩독이 자칫 큰 사건이 될 뻔했잖은가.
해원기의 목소리가 침중해지고, 증명단이 홀연히 머리에 떠오른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앗, 그럼 오라버니는 어떻게!”
진자현이 처음 중독된 지역은 대첨산 아래의 화전민 마을, 바로 해원기가 무고하게 희생된 촌민들을 발견하고 화장해준 곳이다.
스물넷이나 되는 중독자를 접한 해원기.
잠깐 무거워졌던 단목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괜찮다. 지금까지 멀쩡하잖으냐. 중독될 리가 없지.”
“하아…잉? 왜죠?”
당연한 말이다. 해원기가 중독되었다면 벌써 목숨을 잃었을 터.
증명단이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려다가 도로 말끝이 올라가 버렸다. 상황이야 그렇지만, 해원기는 왜 멀쩡할까? 되묻는 표정이 조금 바보스럽다.
입을 다문 해원기를 힐끗 본 단목정.
“원래 그런 거라, 음, 이건 의생이 할 소리는 아니로군. 하여간 원기는 웬만한 독이 들지 않아서, 오독진살이라도 어려울걸.”
당대 제일 신의로서 참으로 엉터리 같은 설명이다.
강호에 전설로 백독불입(百毒不入)이니 만독불침(萬毒不侵)이라고 독이 전혀 듣지 않는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 있지만.
해원기가 익힌 신왕공, 그리고 제탁지검을 설명할 수야 없으니. 세상에 모든 탁기(濁氣)를 베는 검이 있다는 걸 누가 믿겠나.
복잡한 이유는 들을 생각 없는 증명단이라 그것만으로 충분히 이해했고, 동시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오독진살이 뭔데요? 삼대금독보다 더 한 거예요?”
조금 전 당령을 주눅 들게 했던 그 단어. 단목정이 허물어지던 얼굴을 다잡는다.
“당 소저가 먼저 설명을 했구먼. 사실 당세에 오독진살을 들어본 이는 거의 없을 거다. 그만큼 오래된 얘기여서, 지금은 다 잊힌, 그저 독문(毒門)에서나 이어지는 이름이니까.”
그런데 신의가 안다. 사십 대이면서.
단목정이 눈을 깜빡거리는 증명단에게서 해원기 쪽으로 시선을 바꾸며 말을 이었다.
“네가 한 말처럼 인앙독인 망령칩독은 인체를 모판으로 삼지. 그래서 독기가 전혀 줄지 않으면서 널리 퍼진다. 무섭지. 그러나 네 얘기에 따르면 화전민, 진자현, 그리고 증 낭자의 아저씨, 이런 식으로 독이 발작한 시간에 차이가 나고, 그건 독기가 점차 엷어졌다는 방증이기도 해.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다. 더구나 내 백초환은 아직. 흠.”
씁쓸함이 입가를 지나가자 해원기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겸양이십니다. 형님의 백초환은 진짜 신품(神品), 그걸 아낌없이 베풀어주시잖습니까.”
칭찬이 위로가 되지 않는 때도 있다.
“아직 멀었다. 선친을 따라가려면. 어렸을 때 놀지 말고 열심히 배워놓았으면……, 그래서 복원고를 따로 만들 수밖에 없었으니. 이 얘기는 그만하고.”
짤막짤막하게 말을 끊는 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함. 바로 화제를 되돌렸다.
“큰 문제라고 한 이유는 어떻든 망령칩독으로 의심되는 독이 등장했다는 사실. 삼재금독이 인세(人世)에서 자취를 감춘 지는 거의 이백 년 정도일 게다. 그걸 되살리려는 마지막 시도가 백여 년 전, 그때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니까. 그런데 그 기록에 의하면 삼재금독은 삼재의 순서로 만들어져야 한단다.”
“!”
해원기의 눈썹이 퍼뜩 일어서고, 오독진살이 궁금하던 증명단도 눈이 둥그레진다.
망령칩독은 삼재금독 중의 인앙독. 완전하든 불완전하든 참으로 무서운 독이거늘.
삼재의 순서, 천지인으로 독이 만들어진다면, 이 망령칩독 이전에 이미 천재독과 지변독이 있다는 말. 듣는 이의 가슴이 진동할 내용이다.
해원기의 눈이 빛을 머금는다.
“기록이 있었군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간단히 넘길 얘기가 아니다. 단목정이 큰 문제라고 했던 배경.
천재독의 이름은 자오황폐(子午荒廢), 중독 즉시 사망하고, 사망한 후에는 아무런 독기도 남지 않지만, 내부가 완전히 녹아버린다.
지변독의 이름은 불구부전(不具不全). 전혀 중독된 걸 알 수 없고 차츰 백치와 불구로 만들어가며 최후에는 광기가 폭발해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인앙독의 이름은 망령칩독. 중독을 모른 채 편안한 죽음을 맞지만, 죽을 때까지 인체 내에서 독기가 다시 증가한다.
그래서 천재독의 별명은 불시독(不時毒), 일월이 뒤집히고 주야가 거꾸로 된다는 의미이고. 지변독의 별명은 불리독(不理毒), 이치에 맞지 않는 걸 따지지도 않게 된다는 뜻이며. 인앙독의 별명은 불화독(不和毒), 사람들을 어울리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삼재금독은 자오황폐에서 시작해 불구부전이 나오고, 불구부전이 완성된 후에야 망령칩독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급성에서 만성을, 만성에서 지효성으로 이어지는 맥락이 무엇인지. 불시, 불리, 불화를 어떻게 음양으로 다시 어울리게 하는지 도저히 궁구할 방법이 없다.
생각건대, 금독은 절독과는 전혀 다른 계통, 독문(毒門)의 상리를 벗어난 것이리라.
“…당년에 선사께서도 참여를 부탁받으셨기에 대강의 사정을 남겨놓으신 거지. 그분이 궁구할 방법이 없다고 했을 정도면. 여하튼 불완전하더라도 망령칩독으로 여겨지는 독이 출현했다는 사실이 골 아프다.”
어느새 단목정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살. 천문노인이 남겼다는 기록을 들은 해원기의 미간도 깊이 파였다.
“멸마지계(滅魔之計)의 일환이었군요.”
“그렇지. 그 당시엔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이 문제라는 말이다. 과거에도 성공하지 못한 걸 대체 누가 어떻게 구현했을까. 물론…….”
“잠깐, 잠깐. 저는 전혀 못 알아듣겠어요. 삼재금독이 시독이 아니라 불시독이고, 또 멸마지계는 뭐지요?”
증명단이 결국 참지 못했다. 그래도 당대 제일 신의 앞이라 성질은 부리지 못해, 잔뜩 부푼 양쪽 볼이 붉어지고, 의자에서 엉덩이만 바짝 든 엉거주춤.
듣고 있으면 좋은 공부가 될 거라더니.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무슨 공부가 되나.
얼굴 가득 드러난 불만에 해원기가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어째서 단목정은 증명단을 그냥 있게 했을까. 이런 얘기라면 당령과 함께 먼저 쉬도록 하는 게 나았을 텐데.
나이에 어울리는 발랄함으로 봐줘서 다행이지, 실은 막돼먹은 기질이잖아. 단목정이 모를 리 없건만.
아무 때나 마구 끼어드는 무지한 철부지를 지금도 또 느긋하게 받아준다.
“아하, 그러지 않아도 설명이 필요할 때라고 봤다. 거의 결론에 가까워졌거든. 우리 증 낭자의 생각도 들어봐야 하니까. 자, 뭐부터 알려줄까?”
그야말로 서당 훈장님.
해원기가 자기도 모르게 갸웃거렸다.
이 형님은 무슨 속셈인가.
“왜 시독이 아니라 불시독이죠?”
“그건 관점에 따라서 붙인 이름이지. 때에 뜻을 두고 독을 만들면 시독, 그 결과가 때를 거스르니까 불시독. 독을 다루는 이가 아니면 불시독이 더 이해하기 쉽잖아.”
“삼재금독을 되살리려는 마지막 시도가 백여 년 전이라면서, 당주님의 사부님이 남긴 기록이라니…….”
“선사는 무지하게 오래 사셨거든.”
“에? 그럼 나이가 대체, 아니, 그것보다 그런 위험한 독을 왜 되살리려 했대요? 멸마지계라는 게 무슨 상관이기에?”
“눈치가 빠르구나. 과거에 어마어마한 마왕(魔王)이 있어서 전 무림이 이를 제거하기 위해 별별 방법을 다 찾아보았단다. 뭐, 이제는 아득한 전설이지만.”
“마왕이요? 전 무림이?”
묻는 대로 간결하게 답해주지만, 단목정의 이 간결한 대답이 어쩐지 너무 가볍게 느껴져서.
증명단이 코를 찡긋거렸다.
마왕이라니. 어린아이 속임수 같은 얘기. 그러나 전 무림이 나섰다는 거짓말까지 할 리 없다.
되묻는 증명단에게 단목정이 머리를 끄덕였다.
“맞다. 정사흑백을 가리지 않고 전 무림이. 물론 결과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만, 그 과정 중에 많은 일이 있었지.”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전 무림’.
그게 중점이란 의미인데, 증명단이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뭔가를 기억하려는 몸짓. 그러더니 의심이 가득한 시선이 다시 단목정을 향했다.
“설마 본파가 몰락했던 그 옛날이야기, 그리고 백년제일검사가 등장하는 꿈같은 이야기는 아니죠?”
“음?”
뜻밖의 단어에 해원기가 놀랐다. ‘백년제일검사’라니.
그런데 단목정은 이 대답을 기다렸던 듯,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 그거다. 우리 증 낭자도 알고 있었구나. 우리 증 낭자의 사부님을 한번 뵙고 싶은걸.”
“에에? 그거 사부님이 그냥 지어낸 얘기인 줄…….”
입을 딱 벌린 증명단의 얼굴이 더 우스운지 단목정이 한참을 웃었다.
‘우리 증 낭자’를 두 번이나 거듭한 건 아주 흡족해서일 터.
해원기의 시선이 멍해진 증명단과 웃어대는 단목정을 차례로 향하고, 그 눈매가 약간 이지러졌다.
이 총명한 형님이 허투루 이런 대화를 이끌었을 리 없다.
웃음을 그친 단목정이 정색하고 해원기와 증명단을 보았다.
“자, 옛날이야기는 이쯤하고. 이제 증 낭자도 이해했으니까 바로 결론으로 가보자. 그러고 나면 증 낭자의 또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까지 끌려 나오겠지.”
또 한 가지 질문? 확실히 단목정의 화술은 보통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일단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예전에 전 무림이 모이고서야 시도했던 일. 지금 불완전한 망령칩독이 어떻게 출현했는지는 몰라도, 그걸 만들어낼 역량은 오직 한 군데뿐이다.”
정사흑백의 기인이사가 총망라되었던 과거. 그와 같은 역량이다.
해원기가 찡그린 미간을 풀지 않고 말을 받았다.
“황궁, 이군요.”
천하를 아우르는 권력. 단목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세의 권력이 모인 곳이겠지. 황제도 대신도 아닌.”
“동창!”
증명단이 손이라도 들 것처럼 열띠게 대답하고, 단목정은 반대로 목소리를 낮춘다.
“그래야 말이 된다. 화전민들이 무고하게 당했다, 아니지, 이유가 있었을 게다. 그저 독을 시험하려고 했다기엔 장소가 너무 공교로워. 독이 퍼지길 기다리는 시간, 나중에 중독사한 포쾌들, 태원에 도착할 때까지 원기 때문에 지체된 사정. 이건 진자현을 노린 것이라고 여겨진다. 연관되는 일은 단 하나, 동창 태감의 낙향을 겁탈한 사건이지.”
해원기가 호중객잔에 투숙하는 바람에 계산이 다 틀어졌다. 또 증명단이 마침 그때 집으로 돌아올 줄 어찌 알았으랴.
왕대평이 사는 화전민 마을. 진자현이나 그 일행이 비밀을 유지하려고 왕대평을 납치해 갈 걸 알고 있었다. 감시하던 포쾌 셋이 증명단에게 쫓겨 화전민 마을로 도주했다가 죽은 일까지 고려하면 무공을 못하는 객잔 식구들은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터.
목적은 진자현이 객잔을 떠나 태원까지 가는 것. 그쯤에서 죽어도 아무 상관없다. 아니, 태원에서 진자현을 통해 독이 더 퍼져도 좋았을까.
단목정의 말에는 그런 추리가 다 담겨 있었고, 증명단은 절로 어깨가 옴츠러들었다.
더 끔찍한 결과를 맞았을 수도 있었구나.
해원기가 찌푸린 눈을 아예 감고 잠깐 생각에 잠기는데,
증명단은 겨우 머리를 들어 단목정을 새삼스럽게 살펴보게 되었다.
“다, 당주님은 어떻게 그걸 다.”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건 이런 사람을 처음 만났기 때문.
강호에 신의라고 알려졌다면서, 이건 모르는 게 없고 들은 것만으로도 환히 꿰뚫어 보잖나.
그녀로선 이 의자(醫者)가 동시에 대단한 지자(智者)란 걸 알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