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의자지자(醫者智者) (3)
우연이 아니다.
오랜만에 아우를 만난 기쁨에 빈말을 하는 게 아니다.
단목정이 심각해진 해원기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꺼져가는 지로에 나뭇가지를 넣었다.
“당금의 강호는 상당히 불안하다. 이십 년의 세월로는 과거의 힘을 회복하기에 부족했던지. 정사흑백을 막론하고 이렇다 할 중심이 없어, 구주정문을 포함해서. 속되게 말하자면, 다들 이제야 겨우 자기 앞가림할 정도라. 이런 상황이 조정(朝廷)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겠지. 역대로 강호, 특히 무림은 권력의 눈엣가시와 같았으니까. 물론 지금의 조정은 이전보다 훨씬 교활해졌달까, 아니면 또 다른 힘이 작용해서일까. 황실(皇室)이 직접 나서지 않고 묘한 자들을 내세웠다.”
묘한 자들. 내시들로 이루어진 동창이다.
“세속의 권력과 강호무림이 서로 관여치 않기로 한 건 아주 예전부터 내려오는 관습이지만, 실제로 묵계(默契)로 맺어진 건 대강 남송(南宋)에서 원(元)으로 넘어가는 시기다. 실상 이 덕분에 원말(元末)에 무림의 힘을 업은 지금의 황실이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고. 그걸 뻔히 아는 주황실(朱皇室)이니만큼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을 수도 있어. 하지만.”
툭.
나뭇가지를 꺾으며 머리를 갸웃.
“자기 입맛에 맞게 무림을 재편(再編)하려는 건지, 아예 무림을 완전히 집어삼키려는지. 목적이 뚜렷하질 않아. 암암리에 무림 고수들을 매수하는 행위로 봐선 재편인 듯한데, 그것만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힘을 모으는 것 같거든. 그런데 여기서 의심스러운 부분은 그 목적이 어떻든 간에 무엇을 근거로 세웠느냐는 거다. 아무리 불안정하다고 해도 여전히 무림, 외부의 간섭이 강해지면 내부가 결속하는 법이어서, 흠, 자칫하다간 원나라 말기 꼴이 될 위험을 감수하고?”
해원기에게 묻는 말은 아니어서, 단목정이 스스로 고개를 흔들었다.
증명단과 당령이 깨어날 때가 되어가서인지, 단목정은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나중에 다시 시간을 내도되지만, 무림에 나선 해원기를 이렇게 만난 지금,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고 싶다.
그런데.
“정하불상침. 지킬 겁니다.”
해원기가 불쑥 꺼낸 말에 단목정의 입이 닫혔다.
“사부님이 그러셨죠.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망이나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분노, 이 모두가 헛된 욕망으로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사람이 곧 세상이요, 사람이 곧 하늘임을 잊은 채. 만약 지금 황실이 동창을 내세워 묵계를 깨려 한다면 그건 또 하나의 어리석은 짓, 원나라 말기처럼 난세가 된다면 무고한 사람들이 큰 피해를 보게 됩니다. 막아야 합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착 가라앉은 음성.
단목정이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을 눈앞에 떠올렸다.
검주의 귀환을 따라 단정곡(斷情谷)에 이르렀을 때, 추혼도(追魂刀) 손유상 대협의 손을 잡고 마중 나왔던 열두 살짜리 아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공손하게 인사하던 그 목소리다.
해원기의 본래 목소리. 그리고 지금 말하는 건 바로 한 자루 외로운 검에 깃든 의지.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망은 탐(貪)이요,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분노는 진(嗔)이며 이 둘은 각기 지부와 벽세의 본성이었다. 여기에 정하불상침의 묵계를 깨려는 행위를 어리석다(痴)고 했으니.
탐진치는 불가에서 말하는 삼독(三毒). 해원기는 자기 뜻을 분명하게 밝혔고.
단목정의 입가에서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우, 그래. 막아야지. 그러면…….”
뭔가 더 하려던 말이 있었으나,
호수처럼 깊은 해원기의 눈을 보면서 억지로 되삼켰다.
굳이 지금 꺼낼 필요는 없나. 아직 이 아우와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낸 적도 없거늘.
대신에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아이들이 깨어나겠구나. 그럼 그전에 오리 알이란 걸 좀 보자.”
화제를 바꾸어 해원기로 하여금 강호에 발을 들이게끔 만든 동기로 돌아갔다.
“아, 네.”
크고 무거운 얘기보다 당면한 문제는 역시 이상한 겁표 사건. 그 때문에 화전민 마을 무고한 스물넷의 목숨이 사라졌고, 그 단서를 구하고자 단목정을 찾았잖은가.
해원기가 건네는 작은 상자를 열고, 단목정이 그 안에든 검은 돌멩이를 가만히 살펴보더니.
차츰 미간에 새겨지는 주름, 표정도 무거워진다.
그때,
“아흠.”
증명단의 하품 소리. 단목정이 얼른 상자를 해원기에게 돌려주고 표정을 고쳤다.
“그거, 음, 어쩌면…… 아아, 잘들 쉬었느냐? 아주 곤히 자더구나.”
검은 돌멩이.
단목정이 뭔가를 떠올렸지만, 증명단과 당령이 깨어나자 바로 모른 척 인사를 보내며.
해원기에게 슬쩍 눈짓을 건넸다.
함구하라는 뜻. 해원기가 상자를 요대자에 넣고서 미소를 지었다.
과연 천하제일지의 후예. 단목정을 통해 그간 오리무중이었던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낼 희망이 생겼다.
동시에 마음속에 희미하던 의지가 형태를 갖추는 듯한 기분도 들었고.
“우리가 쉬는 동안에 비가 그쳤나 보다. 괜찮으면 다들 움직여볼까?”
단목정의 쾌활한 목소리가 동굴 안을 울린다.
“아까 잠들기 전에 물었던 거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안 잊어먹었어? 그런 게 뭐 궁금하다고. 그냥 잡술이야, 잡술.”
“그러지 말고 좀 가르쳐줘요. 그 산소인가 뭔가 하는 괴물을 아예 빈대떡으로 만들었으면서.”
“어허, 빈대떡이 뭐냐, 빈대떡이. 다 큰 아가씨 말투가 영.”
“아유, 또 말을 돌리시네. 제 말투야 원래 그런 거고. 무공이에요? 진법? 아니면 특별한 술법?”
“잡술이라니까. 워낙 천박해서 우리 증 낭자 앞에서 말하기 곤란해.”
“그럼 술법이겠네요. 그래도 오라버니가 애를 먹었던 괴물인데 당주님 손에 걸리니까 대번에.”
“거 참 끈질기네. 이미 얘기했잖아, 세 번째라고. 그러니까 상대할 방법이 자연히.”
“당주님은 신의로 유명한데. 진법이나 술법도 써요? 아, 그러고 보니 무공도 대단하시죠? 오라버니의 사부님하고 당주님 선친이…….”
“허어, 남의 내력을 함부로 알아보는 건 강호의 금기라고 안 배웠어?”
장난기 넘치고 쾌활한 단목정도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동굴을 떠나 약왕당으로 향하는 길.
사방을 온통 캄캄하게 만들었던 그 심한 폭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이 걷혀서,
신시(申時) 무렵의 날은 오히려 대낮보다 쾌청하다.
인적 없는 산길을 훤히 아는 단목정 덕에 네 사람이 모두 한껏 경공을 펼쳤고, 그 덕분에 밤이 되기 전에 약왕당에 이를 계획이다.
동굴 안에서 잠깐 잠들었던 게 아주 좋았던지, 모두 기력이 충만해져 거의 한 시진 넘게 달렸기에 이제야 한숨 돌리는 중.
증명단은 어지간히 단목정을 졸라댄다. ‘우리 증 낭자’란 호칭에 자신이 붙어서 평소의 기질이 나온 건데.
그래도 단목정의 ‘금기’라는 말에는 살짝 주눅이 든 듯.
계면쩍은 듯 주춤하는 증명단을 당령이 가만히 끌어당겼다.
“가르쳐주실 만했으면 가르쳐주셨겠죠. 우리가 폐를 끼치러 가는데 자꾸.”
귀찮게 해서야 쓰나.
슬그머니 주의를 시키는 명문세가의 아가씨를 보며 단목정이 씩 웃곤, 몸을 돌려 서쪽의 높은 산봉을 가리켰다.
“자, 저 금란봉(金蘭峰)을 넘어 조금만 더 가면 황백산(黃柏山). 늦은 저녁이라도 집에서 먹는 게 좋지. 서두르자고.”
증명단이 어이없는 표정을 보이고, 당령도 예의 바른말을 하던 입을 닫았다.
한 시진 넘게 시전한 경공, 막 한숨 돌리고 쉬려던 차에 다시 움직이잔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앞장서는 단목정과 해원기를 보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지금의 휴식도 단지 여자들을 위해서일 뿐.
한껏 경공을 펼쳤다고 여긴 건 그녀들의 착각이었다. 항산의 장문제자와 당가의 오매불망이 못난 꼴을 보일 수는 없다.
해원기가 슬쩍 단목정을 보았다.
길을 재촉하는 게 저녁 식사 때문이 아니란 것쯤은 알지만, 그렇다고 여자들을 골탕 먹이려는 것도 아니다.
남이 모르는 산길, 티를 내진 않았으나 단목정은 상당히 서두르고 있다. 해원기와 둘이었다면 전력을 다했을 터.
그러면서도 증명단이 졸라대는 질문에 웃으며 대하고, 자칫 화제가 해원기의 내력으로 넘어가는 걸 미리 방지한다.
이유가 있다.
이 지혜로운 형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단목정의 입꼬리에 은근히 맺힌 짓궂음을 깨닫고 남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어린 여자 둘이 기를 쓰고 따라오는 게 재미있을까.
황백산은 대별산의 복지(腹地)에 해당하고, 약왕당은 바로 그 황백산이 시작되는 나지막한 기슭에 있었다.
금란봉을 넘자 숲이 무성하고 계곡이 깊어지며 곳곳에 작은 폭포가 이어져 그야말로 별유천지. 크고 작은 평방(平房)이 네 채나 지어진 앞에는 꽤 넓은 약포(藥圃), 그리고 시내를 따라 길까지 닦여서 깊은 산속이란 걸 믿기 어려울 정도다.
숨을 몰아쉬는 증명단과 당령이 도착했을 때 맞이한 사람만 스무 명이 넘고,
늦은 저녁 식탁을 차려주는 젊은이도 셋이나 된다.
버무린 채소, 삶은 감자와 볶은 고기가 다인 단출한 식단이지만, 지친 입에는 그야말로 꿀맛.
단목정이 작은 술 단지 하나를 들었다.
“다들 오느라 고생했네. 약왕당에 온 걸 반기는 뜻으로 한 잔씩 하지.”
술잔도 그냥 넓적한 사발. 다들 사양하지 않고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사천당가의 자손, 백여 년 만에 다시 세상에 등장한 항산파의 장문제자, 그리고 내 아우. 환영하네.”
뭔가 그럴듯한 환영사라도 나오나 했더니 그렇게만 말하고 훌쩍 잔을 기울이는 단목정.
다들 따라서 잔을 비웠다.
시각은 이미 술시(戌時). 식사를 하는 이 작은 별채를 제외하고 다른 건물들은 다 불이 꺼져 주위가 조용해졌다.
“사람이 많군요.”
해원기가 건네는 말에 단목정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음, 과거의 일도 있고 해서. 절반 이상이 약포를 지키는 일을 하지. 항시 머물며 의약(醫藥)을 연구하는 사람은 대여섯, 나머지 의생(醫生)들은 다 주변의 큰 고을에 나가 있어. 하남, 호북, 휘주. 마침 이곳이 세 지역과 맞닿은 곳이라.”
과거의 일. 단목정이 선친을 잃고 약왕당이 무너졌던 때를 말함이리라. 아까 맞이한 스무 명이 전부 무공을 지녔고, 지금도 죄다 주변으로 흩어져 약왕당을 지키는 진세를 구축한 걸 해원기만이 감지했다.
“약포를 지킨다고요? 식사를 차려준 청년들은 별로 무공을 닦은 것 같지 않던데.”
또 버릇없이 툭 끼어드는 증명단이지만, 단목정은 차라리 이런 발랄함이 나은지.
“하하, 우리 증 낭자가 눈썰미가 있네. 그 아이들은 내 밑에서 따로 공부하는 게 있어서. 아니면 이런 식사를 누가 차리겠나?”
웃는 낯으로 다시 술잔을 든다.
그런데 식탁에서 눈에 띄게 조용해진 사람은 당령. 많이 지쳤는지 말없이 젓가락만 놀린다.
경공이나 내력이 결코 증명단에게 뒤질 당령이 아니건만.
신경이 쓰이는지 단목정이 수염을 닦으며 말을 걸었다.
“참, 당 소저는 종남파 청령선고의 조카뻘이 되지?”
생각났다는 듯 묻는 말에 당령이 움찔하더니 얌전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네. 고모와도 아는 사이신가요?”
잘 다듬은 삼각 수염이라도 사발로 술을 마시면 젖기 마련. 단목정이 꼼꼼하게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장문인에게 내 얘기는 못 들었나 보군. 아, 오면서 원기에게 간단히 듣기로는 독문(毒門)에서 말하는 양의(兩儀)와 삼재(三才)의 이론, 그리고 망령칩독을 거론했다면서?”
또 불쑥 던지는 질문, 그리고 또 움찔하는 당령.
“네. 무고하게 독살당한 양민들의 상황이, 그 지효성과 전염성의 특징을 지녀서…….”
음독과 양독의 화합독술, 그리고 삼재금독의 하나인 망령칩독. 해원기에게 했던 설명을 다시 하려는데.
“오독진살(五毒眞煞)이란 걸 들어봤나?”
단목정의 거침없는 질문. 당령이 마침내 어깨를 살짝 떨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단목정을 향한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건 심중의 동요 탓.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해원기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고, 증명단은 어리둥절해 눈만 껌뻑인다.
왜 갑자기 단목정이 몰아세우고, 또 오독진살이란 건 뭔지.
그러나 질문은 여기까지. 단목정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린다.
“후우, 알았네. 이건 당 문주(門主)와 나눌 얘기겠구먼. 하여간 당 소저는 나이에 비해 독에 대한 조예가 상당하군. 덕분에 원기 쪽에도 큰 도움이 되었어. 뒤쪽에 방이 준비되었으니 피곤하면 먼저 쉬게.”
아쉬운 한숨, 그리고 칭찬. 그렇지만 마지막의 쉬라는 말은 먼저 자리를 피하라는 뜻의 완곡한 표현에 불과하다.
“어, 왜?”
증명단이 놀라서 입을 놀리기 전에, 당령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손을 모아 쥐고 깊이 숙이는 머리.
“당주님이 살펴주신 마음, 당령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직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살짝 떨리는 음성이지만, 정중하게 예를 차리고 해원기와 증명단에게 목례를 보낸 후에야 방을 나선다.
그 뒷모습을 보던 단목정,
“쯧쯧, 아, 우리 증 낭자가 많이 궁금하겠구나. 그래도 우선 원기와 나누는 얘기를 잘 들어볼래? 이게 다 좋은 공부가 될 거야.”
혀를 차다가 표정을 바꾸며 도로 쾌활해졌다. 커다란 눈만 껌뻑거리는 증명단이 어지간히 귀여워 보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