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02화 (103/410)

제26장 의자지자(醫者智者) (2)

단목정이 찡그렸던 미간을 펴고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좀 더 알아봐야겠지. 뭐 세 마리 이후로 더는 그 나쁜 기운이 느껴지지 않고. 나도 좀 쉬면서 기운을 차려야 해. 그것보다 어떻게 세 사람이 일행이 되었나 궁금하구먼.”

당령이 아차, 하는 기분으로 입을 닫았다.

산소에 대한 의문이 남았지만, 하룻밤을 꼬박 시달린 사람 앞에서 이게 무슨 실례인가.

해원기가 먼저 당령을 가리켰다.

“개봉 외곽에서 당 소저를 만났습니다. 마침 약왕당에 가는 길이라 동행하게 되었죠. 자세한 얘기는…….”

사천당가 집안 문제. 외부인이 나서서 떠들 내용은 아니다.

당령이 얼른 표정을 고치고 간단하게 그간의 사정을 말하고선,

“그런 일로 불초한 막내를 찾는 김에 당주님을 뵙고 가르침을 받고 싶었습니다. 물론 이런 사정을 집에는 속히 알리도록 했고요.”

차분하게 단목정을 바라본다.

이미 해원기와 증명단에게 밝혔던 사실. 빠지거나 보탠 부분도 없고, 집안 사정이라고 딱히 꾸며대지도 않았다.

단목정이 단정한 삼각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당가와 황보세가라, 역시 십여 년 만인가. 그간 서로 바쁜 처지라 안부를 여쭐 틈도 없었구먼. 그래, 가주께선 강녕하시고?”

‘독경약전’이니 ‘화합독술’이니 하는 단어가 나왔는데도 그것보다는 인사치레가 먼저라는 듯.

당령이 눈을 깜빡이다가 머리를 살짝 숙였다.

“네. 건강하십니다. 말씀대로 바쁜 나날을 보내시지요.”

예의 바른 대답. 단목정이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귀 가문의 일에 내가 뭐라 할 자격은 없고, 또 그런 얘기를 하기에 좋은 자리도 아니어서. 괜찮다면 나와 함께 약왕당으로 가지 않겠나?”

“삼가 당주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명문 세가 출신. 의젓한 말투에 단목정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고, 시선이 해원기 옆을 향했다.

“자, 그럼 증 낭자 차례네. 원기와는 어찌 알게 되었을꼬?”

당령의 사연은 들었으니 증명단이 궁금할 터. 쳐다보는 단목정의 시선이 은근히 흥미를 보이자, 증명단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우리 객잔에 들었거든요. 그런데 마침 객잔에 강도가 들어서, 그러다가 아랫마을 사람들이 전부 해를 당했고, 그걸 쫓으려다가…….”

할 말이 많은 데다 급한 성질이 더해지니 말이 제대로 될 리 없다.

해원기가 한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인연이 있었습니다. 조금 이상한 일에 휘말려 들었고, 무고한 이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소단에겐 가까운 이들, 저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독살을 당했지요.”

“독살?”

단목정의 반문에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이 끊겨 입이 튀어나오려던 증명단도 얼른 정색했다.

약왕당을 찾아가는 목적은 바로 그 사인을 알기 위함.

그러나 단목정은 지로를 뒤적이며 딴청을 피운다.

“습기가 많아서 불이 시원치 않네. 그것도 골치 아픈 얘기 같구나. 그런데 원기는 소단이라 부르고, 증 낭자는 오라버니?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지? 인연이란 게 설마.”

일부러 말을 멈추고 지그시 바라보는 눈길.

증명단이 어리둥절했다가 비로소 무슨 뜻인지 깨닫고 펄쩍 뛰었다.

“에에? 뭐예요? 이런 ‘고구마 대장’에게 무슨. 그냥 검법을 가르쳐줬단 말이에요! 사부라고 부를 순 없으니까! 나 참.”

소리를 빽 지르고,

“푸하하하하.”

그 반응을 기다렸던 듯 단목정이 폭소를 터뜨렸다.

약왕당의 당대 주인, 강호에서 첫손꼽는 신의, 중년의 의젓한 선배 고수라기엔 상당히 짓궂은 모습이라. 지켜보던 당령이 좀 묘한 표정이 되는데.

해원기는 씁쓸하게 고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단목정을 처음 만나고 헤어졌던 그 시절, 사부가 가만히 가르쳐주었던 옛 별명이 생각나서.

‘소숙모(少叔母)는 소호리(小狐狸), 단목 형님은 소원정(小猿精)이랬다지.’

소호리는 꾀가 많은 작은 여우요, 소원정은 장난을 잘 치는 꼬마 원숭이란 뜻.

단목정은 어렸을 때 대단한 장난꾸러기였단다.

“검법으로 꾀었지? 원기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아, 뭘 꾀어요? 아니라니깐.”

“그런데 고구마 대장은 뭐야. 별명? 바부탱이가 아니고?”

“엥? 그건 또 어떻게 아신대? 그렇게 부르기도 하더라고요. 오 장로는.”

“오 장로는 또 누굴꼬?”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라나. 아주 잘생긴 양반 있어요. 오라버니의 친구.”

“그거 유룡개로구나. 하긴 그렇게 잘생긴 친구 옆에선 원기가 잘 보이지도 않았을 테지.”

“글쎄 잘생기고 못생기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데도 자꾸 그러시네.”

“하핫, 농담이다, 농담. 기분이 좋아서.”

“기분이 왜 좋아요? 밤새 고생하셨다면서. 저를 놀리니까?”

“아니다. 원기를 다시 봐서. 음, 아무래도 우리 증 낭자 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하하하.”

‘우리 증 낭자’란다. 단목정이 놀려대고 웃어젖히는 통에 증명단도 약이 올랐지만, 그 덕에 처음 만난 어색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오랜만에 아우랑 재회한 게 다 증명단 덕이라.

제세성수 단목정이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소탈하고 쾌활한 어른이다.

증명단이 뿌루퉁하다가 언뜻 다른 생각이 떠올라 또 입을 열었다.

“아 참, 아까 그 산소를 어떻게 하신 거예요? 되게 신기했어요.”

킬킬 웃고, 농담을 건네고.

증명단과 주거니 받거니 하던 단목정이 해원기를 힐끗 보더니 천천히 두 팔을 들었다.

“아흐흠, 옷도 마르고 몸도 다시 따뜻해지니까.”

기지개에 하품까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벽에 기대더니.

“피곤이 몰려드는구나. 다들 조금 쉬자.”

미소를 보이곤 그대로 눈을 감아버린다.

조금 갑작스럽긴 해도 증명단이 응, 하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밤을 꼬박 새우며 괴물을 세 마리나 처리한 사람이다. 후배들을 위해 동굴에, 불에, 건량을 베풀어준 선배 고수.

그러고 보니 단목정의 말대로 몸이 좀 노곤하긴 해서.

북룡포를 둘둘 말아 당령과 함께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해 소협도.”

당령이 조금 멈칫거렸으나 해원기가 괜찮다는 듯 목례를 보내는 모습에 그저 증명단을 따라야 했다.

폭우에 시달렸다 녹은 몸이 졸리긴 마찬가지여서.

동굴 안은 조용해졌고, 해원기만이 꺼져가는 지로를 뒤적일 뿐.

모두가 잠깐이라도 편하게 눈을 붙이도록 호법을 설 셈인지.

이 각 정도 지났을까.

해원기가 그제야 시선을 단목정에게 던지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정말 자는 겁니까?”

부스럭.

단목정이 눈을 뜨고 다가앉으며 히죽 웃는다.

“그럴 리가. 우형(愚兄)은 아직 팔팔하단다. 뭐 좀 생각하느라.”

단정한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짓궂은 미소에 해원기도 맥 빠진 웃음을 흘렸다.

“형님이 우(愚)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다 바보겠네요.”

“적어도 원기는 바부탱이니까. 둘 다 자니?”

대놓고 바부탱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또 있다.

해원기가 증명단과 당령이 잠든 걸 확인하고서,

“네. 동굴에 들어오면서 형님이 전음으로 일러준 대로 가만히 있었습니다만, 왜 재웠지요?”

낮은 목소리와 차분한 시선이 다시 단목정을 향했다.

놀라운 대화.

증명단과 당령이 잠든 건 단목정의 의도였다니.

어려서 단 한 번 만났던 단목정이 갑자기 전음을 보낸 의도를 모르면서도 그냥 따랐던 건 그만큼 믿을 만한 형님이기 때문.

단목정이 순양관을 고쳐 쓰면서 혀를 찼다.

“쯧, 어쩔 수 없었다. 너랑 이렇게 만난 게 기쁘다고 안 할 소리까지 나올 것 같아서. 증 낭자는 몰라도 저 당가의 딸내미는 아직. 그렇지?”

해원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어도 해원기 일행이 어떤 사이인지 간파한 단목정.

해원기가 새삼스럽게 단목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신의로 알려진 이 형님의 스승은 백 년 전에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로 일컬어졌던 분이었지.

단목정이 해원기의 시선에 미소를 보내며,

“티 안 나게 하느라 너한테 미리 전음을 보낸 거야. 당가의 딸내미를 자연스럽게 재우는 건 나라도 신경을 좀 써야 하거든. 뭐, 한 시진 정도는 시간이 있겠다. 일단 네 얘기를 들어보자, 처음부터.”

허리를 곧게 펴는데. 그 눈이 마치 별처럼 반짝거린다.

도대체 어떻게 두 여자만 곤하게 잠들었을까.

그 방법은 해원기도 짐작하기 어렵지만, 단목정의 반짝이는 두 눈을 보며 목을 가다듬었다.

의술뿐 아니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술법과 무공까지 갖춘 형님.

더욱이 그 지혜는 가히 하늘에 닿을 정도라. 천문노인(天門老人)의 유일한 제자 아닌가.

해원기는 본디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간 겪은 일들이 간단하지 않아서.

꽤 긴 얘기가 되었지만.

단목정은 단 한 마디의 반문도 없이 묵묵히 들었고.

그게 거의 반 시진에 이르렀다. 단목정이 말한 한 시진의 절반. 해원기의 말이 끝나고서도 삼각 수염을 연신 쓸던 단목정이 이마에 주름을 몇 개나 잡았다.

“피상적이다.”

“음?”

한참 만에 꺼낸 단어가 이상해서 해원기가 눈을 껌뻑였다. 어떤 부분에 관한 얘기인지.

단목정이 그제야 정신이 난 것처럼 수염에서 손을 떼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미안하다. 생각을 정리하다가 불쑥 나왔구나. 어떻든 원기 네가 무림에 나오게 된 동기는 저 꼬마 아가씨, 증 낭자 때문이란 내 추리는 맞았군.”

북룡포를 뒤집어쓰고 잠든 증명단을 턱짓으로 가리켜서,

해원기도 고소를 지었다.

딱 맞는 말은 아니지만, 결국 그렇게 된 셈. 모든 일은 호중객잔을 찾아가면서 시작되었다.

“그때 왜 갑자기 예전에 들었던 호중객잔을 들러볼 생각이 들었는지. 참.”

“그게 다 소호리, 아니지, 이젠 소숙모라고 불러야 하나. 그 소숙모께서 오만가지 얘기를 다 해줘서 그런 거 아니냐. 하하하.”

추억의 한 자락을 다시 끌어와서일까. 단목정이 또 쾌활한 웃음을 더하다가.

표정을 고쳤다.

“자. 저 아이들이 깨기 전에 간단히 정리부터 하자. 자세한 얘기는 역시 약왕당에 가서 따로 하고.”

“네.”

해원기도 자세를 바로 했다.

이 지혜가 과인한 형님을 여기서 만난 건 행운, 분명히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단목정의 진지한 말이 시작되면서 해원기의 얼굴은 차츰 굳어져 갔다.

“네가 겪은 일은 전부 동창과 관련되어 있지. 하나 동창의 전모는 아무도 모른다. 수족이 금의위라지만 그뿐일까? 주구로 하북팽가나 반룡령이란 이름이 나오지만 그게 다일까? 게다가 미묘하게 과거 벽세의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독.”

말을 잠시 끊으며 단목정이 두 손을 펴 보인다.

“물론 세부적인 사항은 더 많지만, 중요한 건 이런 일들의 배경, 혹은 의도, 혹은 목적이지. 사실 이십여 년 전에 겨우 무림이 안녕을 되찾았지만, 그렇다고 암류(暗流)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게 벽세의 잔재든, 지부(地府)가 뿌려놓은 씨앗이든 간에.”

벽세와 지부.

백여 년에 걸쳐 세상을 혼란하게 만들었던 사(邪)와 마(魔)의 이름이 다시 나오고,

“그러나 그걸 처리하는 건 남은 이들의 책임. 오마왕전(五魔王殿)과 영광종(靈光宗)을 탁 소숙이 세외(世外)에 묶어두는 동안에. 그게 되찾은 무림에서 살아가는 후인들이 검주(劍主)의 은혜에 보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만. 흐음.”

지부의 뿌리인 오마왕전, 벽세의 잔당이 모인 영광종. 당세에는 그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이조차 드물다.

해원기의 눈도 아련해졌다. 사부를 검주로 부르는 이는 과거의 대전에 참여했던 사람들, 소위 백협맹(百俠盟)에 소속되었던 고수들뿐이다.

그러나 세월은 과거를 빠르게 지우고, 인심은 야속하게 잘도 변한다.

단목정의 무거운 신음에는 그런 감정이 담겼다.

“하여간 암류라고 인지하기 시작한 게 대략 십 년 전이고, 그 배후가 동창과 관계가 있다는 단서도 찾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방만하고 일관된 흐름이 없어. 여전히 암류라고 표현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무림에 직접 드러나 힘을 행사한 적도 없었고, 소문만 무성하지. 나도 암암리에 알아보려고 애를 썼다만, 약왕당의 현재 역량으론 어렵더구나. 구주정문이라고 해도 이제야 비로소 구색을 갖추는 판이라.”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가 더벅머리를 긁었다.

이제야 겨우 무림에 발을 들이민 격인 자신. 그간 일부러 외면했던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몰라도 너무 모른다.

사부의 뜻을 따른다는 핑계로 이렇게 무지했던가.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참는데, 단목정이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아까 내가 피상적이라고 했었지. 황명(皇命)을 빙자한 권력이 부패하는 건 당연한 도리라서, 세금과 부역을 높이고 상계를 건드리는 건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일이다. 그게 강호의 암류가 되어 간혹 남긴 흔적들이 전혀 연계되지 않기 때문에 한 말이었어. 원기야.”

“아, 네.”

“네가 이때 무림에 나올 결심을 한 건 어쩐지 우연이 아닌 것 같구나.”

빙긋 웃는 얼굴.

해원기가 그 얼굴을 마주하면서 비로소 이 대화의 속뜻을 깨달았다.

백여 년에 걸쳤던 과거의 난세. 그 난세를 구한 사부. 그리고 그 이후의 세상.

단목정은 일부러 지나간 일부터 당세에 이르기까지를 개괄해 일러준 것이었다. 이제 막 무림출도한 아우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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