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의자지자(醫者智者) (1)
뒤집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초조함.
폭우 속이라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지만, 전해지는 감정에 해원기가 원을 그리던 신령검을 풀었다.
화르르.
옥죄던 공간이 풀려서인가. 산소의 입에서 튀어나온 불덩이가 즉각 얼굴로 날아든다.
펼치던 수법을 중단하면서 거꾸로 닥친 위기, 그러나 해원기의 신형이 빙글 돌며 왼손이 힘차게 나아가니.
공간을 통째로 밀어내는 대우신장.
펑!
불덩이가 산산이 부서지고 산소가 홀연히 십 장 뒤로 움직였다.
해원기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 괴물이 아까와는 달리 해원기를 피해 물러서는 건 도주하려는 의도. 천손검법을 맛본 것만으로 겁을 집어먹었다. 아까처럼 달려들면서 외발을 쓰면 다시 차근차근 묶을 수 있지만, 작정하고 도주하면 뒤쫓기가 쉽지 않을 터.
불현듯 전해진 외침에 마음이 흔들렸나.
질풍결을 급하게 운용하려는데.
“유혼(幽魂), 망백(亡魄), 음령부유(陰靈浮游). 기(起)!”
또 그 목소리. 뒤집히다 못해 쉬어 가는데도 기이한 울림을 담아 거침없이 뭔가를 외쳐대고.
해원기가 미간을 좁히며 되레 옆으로 미끄러졌다.
마지막 호령과 함께 일어나는 기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음울한 기운이 수십 장을 뒤덮고 내리는 폭우까지 붉게 변한다.
불길한 느낌이라 더욱 날카로워진 해원기의 시선이 우막을 뚫고 날아드는 인영에 꽂혔다.
남쪽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산기슭. 발을 붙이기도 어려운 그 산기슭을 미친 듯이 달려와 펄쩍 뛰어오르더니 바닥을 내려찍듯 떨어지고.
무릎을 꿇으며 두 손바닥으로 지면을 맹렬히 내려친다.
파팍.
해괴한 짓을 하지만.
그러자마자 산소가 돌연 움찔하면서 커다란 머리통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뿐 아니라 거꾸로 달린 외발까지 꿈틀꿈틀, 마침내 뭐에 홀린 것처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니.
“휴우우우.”
나타난 인영이 긴 한숨을 내쉬며 아예 주저앉아버렸다.
폭우로 질척한 땅바닥,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사십 대 중반쯤, 작은 지붕처럼 머리에 얹은 순양관(純陽冠)을 따라 빗물이 줄줄 흘러내린 얼굴은 청수하지만, 단정하게 다듬은 삼각 수염과 넉넉한 황삼이 푹 젖어 안쓰럽다. 용모나 차림새가 속되지 않은데 등에는 커다란 포대를 짊어져서 영 어울리지 않고.
중년인이 겨우 일어서면서 고개를 돌렸다.
십 장 밖에서 맴도는 산소, 갑자기 날아든 중년인과 해원기의 거리도 십 장은 훨씬 넘었는데.
해원기가 어느새 자기 곁에 이른 걸 미리 아는 눈치, 놀라지도 않는다.
“아, 대단한 무공을 지니셨더구먼. 하마터면 일을 그르칠 뻔했는데 크게 덕을 보았소이다. 귀공의 검은 참으로…응?”
아니, 조금 늦게 놀랐다.
황급히 날아들 때, 분명히 엄청난 검기를 느꼈기에 고함을 질렀건만. 지금 곁에 선 더벅머리 청년에겐,
검이 없다.
허리에도, 손에도.
맨손으로 그 엄청난 검기를 펼쳤다고? 세상에 그럴 수 있는 이는.
중년인의 눈이 들이치는 빗물에 깜빡이지도 않고 해원기의 얼굴을 향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마치 장님의 손길처럼 더듬더니.
“워, 원기? 원기니?”
입술 사이로 튀는 건 빗물인지 침인지.
이 소리에 진짜 놀란 사람은 바로 해원기였다.
돌연히 등장해 기이한 기운을 펼친 중년인, 산소의 괴상한 짓거리도 의문인데.
대뜸 자신의 이름을 알다니.
해원기도 눈을 크게 뜨며 중년인의 처량한 얼굴을 다시 살폈고, 마침내.
“단목 형님!”
떨리는 외침과 함께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얼싸안았다.
십 년이 훨씬 지나 이렇게 만날 줄이야.
괴물이란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거다. 그런 괴물이 얼마나 흉포한지, 무슨 해괴한 술수를 부리는지, 또 그 괴물을 신선이나 영웅이 어떻게 퇴치하는지도 다 어려서 듣던 이야기들이다.
소년소녀가 가슴을 두근거리며 한껏 상상의 나래를 펴서, 머릿속으로야 온갖 장면을 그려내겠지만.
실제로는 누가 직접 보겠는가.
그걸 시커먼 폭우 속에서 직접 목격하게 된다면, 당연히 몸이 굳어질 수밖에.
언제든지 뽑을 수 있게 응운검의 손잡이를 쥔 증명단도, 기이한 가죽장갑을 재빨리 양손에 착용한 당령도 이 순간에는 평범한 아이들과 다를 게 없었다.
해원기외 산소의 공방전을 멍한 시선이 바쁘게 쫓을 뿐이었는데,
돌연한 고함과 함께 등장한 중년인.
비로소 정신을 차렸고, 혹시나 해원기를 방해할까 싶어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그렇지만 두 남자가 얼싸안는 장면에 또 얼떨떨해졌고.
자신들을 빠르게 훑고 돌아가는 중년인의 시선에 절로 발이 멈추었다.
“인사는 나중. 우선 급한 것부터 정리하고.”
재빠르게 등에 진 포대를 풀어 잡다한 것들을 늘어놓더니,
“원기는 혹시라도 저 원숭이가 날뛰게 되면 그걸 막아주렴.”
말도 행동도 서두르는 기색.
대뜸 해원기를 이름으로 부르는 소리에 증명단과 당령이 서로 마주 보았다.
이 중년인은 누구이기에.
바닥에 늘어놓은 건 작은 뼛조각, 짐승 이빨, 썩은 나무뿌리 같은 허접스러운 것들뿐.
질척한 바닥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대뜸 정좌하며 두 손을 붙였다 풀었다가 바쁘다.
그러면서 뭔가를 중얼거리는 듯한데 폭우가 아니라도 바로 곁에서조차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
그런데 십여 장 밖에서 빙글빙글 돌던 산소가 이상하게 몸을 꺾기 시작한다.
그게 이 중년인이 벌이는 묘한 행동 때문임을 깨달은 두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득, 우득.
제자리를 맴돌면서 어깨와 허리가 급격히 접히고, 뒤이어 커다란 머리통까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구겨 넣는 것처럼 몸뚱이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처음에 넓적한 꼬리인 줄 알았던 외발은 이미 바닥으로 이 척 넘게 파묻힌 상태.
“크웨에에.”
마침내 구슬픈 울음이 가냘프게 울리더니 사방으로 핏물을 뿜으며 짜부라 들었다.
소름 끼치는 광경.
해원기도 살짝 놀랄 때, 중년인은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더니 산소의 짜부라든 몸뚱이 주위를 빠르게 돌았다. 방금까지 늘어놓았던 허접스러운 것들을 정신없이 던져대면서.
상상도 못 했던 고괴한 행동에 다들 지켜보기만 하는데.
“후우. 세 번째에서야 겨우 되었군.”
한숨과 함께 황삼을 털며 다가오는 중년인의 말에 절로 묘한 표정이 되었다.
세 번째?
조그만 동굴.
폐묘에서 일 각 정도 더 남쪽으로 가면 되는 짧은 거리, 폭우가 아니더라도 생소한 지형에선 쉬 찾을 수 없는 위치였다.
마른 나뭇가지로 깔린 바닥에 지로를 피웠던 구멍. 중년인이 미리 말한 대로 몇 번이나 사용한 흔적이었고, 빗물이 넘치지 않도록 약간 경사져서 비로소 한숨을 돌리게 되었지만.
그것보다 인사를 나누면서 두 여자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에에? 그럼 약왕당의 당대 당주?”
“아, 몰라 뵈었습니다. 단목 당주셨군요.”
당세 강호에서 신의(神醫)로 일컬어지는 제세성수 단목정. 이 중년인이 바로 일행이 찾아가던 그 사람일 줄이야.
당혹스러워도 일단 예의부터 차리는 당령과 달리,
증명단은 이 공교로운 만남이 신기하기만 해서.
“그런데 우리 오라버니랑 아는 사이예요? 어떻게 우리를 찾았대요?”
불을 피우려는 단목정에게 달라붙듯 묻는다.
“소단, 너무 그러면…….”
“이거 활기찬 아가씨로구먼. 백 년 만에 다시 무림에 나타난 북악지검의 계승자라, 아주 많이 기대되는데. 하하하하.”
말리는 해원기보다 먼저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단목정. 전신이 폭 젖어 물이 줄줄 흐르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불을 피우고, 자리를 정해주고, 포대에서 마른 건량을 나눠주는 행동도 중년인답지 않게 경쾌해서,
본래 상당히 쾌활한 성격인 듯.
“자, 일단 앉아서 몸을 말리자고. 먹고 떠들다 보면 옷도 마르고 몸도 따뜻해지지. 원기, 내 아우와 밀린 얘기도 참 많거든.”
원기, 내 아우.
증명단과 당령의 시선이 동시에 해원기를 향했다.
단목정과 형제 사이라니. 들어야 할 얘기 중에 가장 궁금한 부분이다.
“응? 형제? 아, 그거. 내가 어렸을 때, 선친과 원기의 사부님이 아주 친한 사이였거든. 내가 원기의 사부님을 대숙(大叔)이라고 불렀으니까 원기와 나는 그 사촌, 그래, 사촌 형제인 거지. 하하하.”
으잉? 이걸로 대답 끝?
증명단과 당령이 어이없는 얼굴을 마주하든 말든.
단목정은 웃음을 거두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소식이야 간혹 황하문을 통해 들었다만, 얼굴을 본 건 열두세 살 때였으니까.”
백 년 만에 재건한 항산파의 장문제자도, 멀리 사천에서 온 당가의 오매불망도. 지금은 전부 뒤로 젖혀놓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할 때 딱 한 번 보았던 꼬맹이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이렇게 장성한 청년이 되었으니.
해원기가 머리를 조금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님을 뵐 면목도 없어서.”
말도 제대로 맺지 못하는 건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섞여 온갖 감정이 밀려들기 때문이었고,
“흠, 그렇게 말하면 나도 마찬가지지. 매년 약만 보내주었지 한 번도 찾아가질 못했잖으냐. 그게…어흠, 그런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니?”
단목정도 금세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나이든 어른답게 얼른 말머리를 돌린다.
해원기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되살리고 싶지 않은 기억. 그건 단목정도 마찬가지요, 이렇게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낼 수도 없다.
해야 할 얘기가 적지 않으나 순서에 따라 차근히 풀어가는 게 우선.
누구보다 믿음직한 형님이 옆에 있다.
“형님을 찾아가던 길이었습니다. 서두르다가 돌연 폭우를 만났고, 비를 그으려고 폐묘에 들었던 참에. 아까 그건 대체 뭐였습니까?”
막 일어난 일부터 언급하자 단목정도 의도를 알아챘다.
“쳇, 결국 그 폐묘였구나. 이쪽은 샅샅이 안다고 여겼거늘. 그 괴물은 산소라고 하는데, 실은 귀비(鬼狒)의 일종이 이상하게 변한 거야.”
“귀비요?”
당령이 놀란 소리로 불쑥 끼어들자 단목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천당가의 여식이니 알겠구나. 드물지만 여기도 비비(狒狒) 종류가 있단다. 사천에선 마화(馬化)나 가국(猳國)이라고 부르는 백원(白猿)과 금확(錦玃)에 귀비까지. 어젯밤부터 이게 무슨 짓인지. 에휴.”
젖은 소매를 번갈아 짜는 손길이 부산스럽고,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여실하다.
어젯밤부터.
궁금해 하는 젊은이들 앞에서 단목정이 한숨을 섞어 얘기를 이어갔다.
약왕당이 대별산에 있는 건 그 독특한 위치 때문. 남북에 걸친 지형이 서로 다른 기후와 수문을 만나 다양한 약초를 길러낸다.
단목정은 평소에도 채약(採藥)을 위해 이 광대한 대별산을 헤매는 습관을 지녔고, 무르익는 봄도 마침 적절한 시기. 그래서 곽산 줄기를 타고 평정산 쪽으로 향할 셈이었는데.
천기가 돌변해 남에서 북으로 거대한 비구름이 천리마처럼 치달리면서, 좋지 않은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에 그 기운을 찾았더니 튀어나온 건 희한한 괴물. 사람 사는 곳과는 멀리 떨어진 깊은 산속이지만, 이런 괴물을 어찌 그냥 놔두겠나. 그다지 강하진 않아도 괴이한 능력을 지녀서 처리하는 데 거의 반나절을 썼다.
더구나 그놈이 죽으면서 뿜어낸 독기가 작은 골짜기 하나를 망가뜨릴 정도여서 풀어내는 데에 여간 고생하지 않았고, 뒤이어 더 강한 놈이 또 하나 나타났으니.
그놈을 쫓아 수십 리를 달렸고, 마침내 세 번째까지 찾아낸 것이다.
산소를 왜 세 번째라고 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세 마리가 다 똑같은 형상이었지. 물론 첫 번째는 갓 태어난 새끼랄까, 두 번째는 중간 정도 큰놈, 그리고 마지막이 아까 그 괴물이야. 두 번째 놈이 죽기 전에 딱 한 번 화구(火球)를 토하는 통에 하마터면 낭패를 볼 뻔했다. 설마 내단을 형성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었거든.”
“그 불덩이가 내단이라고요? 내단이라면 무지하게 오래 살아 신통해진 영물들이나 생긴다고 하던데.”
신기한 이야기에 눈빛까지 초롱초롱해진 증명단이 급하게 되묻고,
“맞아. 본래 그래야 이치에 맞지. 그런데 이건 좀 달라서.”
“게다가 세 마리의 산소라면, 그거 한 가족 아닐까요? 새끼에 어미에 아비. 괴물 일가족이네.”
조금만 대화를 나눠보면 증명단의 급한 성격을 알 수 있다.
단목정이 피식 웃었다.
“글쎄. 첫 번째는 백원, 두 번째는 금확, 아까의 산소는 귀비였으니 한집안으로 볼 수는 있어도 일가족은 무리일걸.”
전신에 흰 털이 난 원숭이, 긴 털이 비단 실처럼 흔들리는 큰 원숭이, 머리와 몸집이 훨씬 장대한 원숭이. 다 원숭이를 가리키는 명사지만 같은 종류는 아니다.
더구나 원숭이가 죽으며 독기를 뿌리고 내단을 형성해 화구를 만들어 토하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
당령이 비로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주님 말씀은 그럼, 그게 산소가 아니라는?”
단목정이 수염을 다듬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증명단과 달리 당령은 단목정이 하는 얘기의 묘한 점을 알아챘고.
그게 이 괴사의 중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