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요출괴몰(妖出怪沒) (3)
해원기가 장거리 쾌체로 돌아다닌 곳은 주로 하북의 남쪽과 산동, 산서를 연결하는 노선. 하남에는 드물게 들어왔었고, 하남의 남쪽까지 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낭적천애(浪迹天涯)라고 강호인이 자유롭게 떠돈다는 얘기는 일종의 환상. 타지에 접어들면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대별산에 약왕당이 있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대별산이 어디 그냥 조그만 산 하나던가.
하남의 남부에서 호북과 휘주에까지 걸친 큰 산맥이다.
들른 곳마다 나름 꼼꼼하게 지형과 방향을 물어본 해원기도 역시 서투른 초행길이었고, 그나마 장갈을 떠난 후에는 작은 마을도 거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병풍처럼 늘어선 산이 평정산일지, 장팔령(張八嶺)이나 심지어 동백산(桐柏山) 끄트머리일지는 모르는 일.
강호초출의 증명단이나 사천에서 온 당령으로선 제대로 방향도 알기 어려울 터. 앞서서 일행을 이끄는 책임이 더 무거운데.
갑자기 변한 날씨. 폭우가 쏟아질 것 같아서 서둘러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산자락 근처에 무너진 폐묘(廢廟) 하나가 보였다.
산이 높으면 산신 따위를 모시는 사당이 있게 마련. 그러나 주위에 마을이 없는 이상 이런 사당이 멀쩡하게 남기는 어렵다.
암벽에 기대어 지은 사당은 겨우 삭은 기둥과 구멍 난 지붕만 남은 상태.
세 사람이 폐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솨아아.
억지로 참았던 것처럼 비가 동이로 붓기 시작했다.
“와, 아슬아슬했네. 어떻게 이렇게 쏟아지나?”
머리까지 올렸던 피풍을 풀며 증명단이 눈을 크게 뜰 정도로 돌발적인 폭우.
당령도 옷자락에 묻은 물기를 털었다.
“산지로 접어 들어설까요. 천기가 급변하네요. 마침 이 폐묘가 있어서 다행…….”
하던 말을 흐리며 안쪽을 쳐다본다.
커다란 바위가 통째로 벽면을 이룬 곳, 본래라면 신감(神龕)이 놓였을 장소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은 무너진 사당에서 뭘 보는지.
화륵.
잠깐 사이에 지로를 파고 불을 피운 해원기 덕에.
폐묘 안에 비로소 빛이 생겼다.
“완전 쓰레기 더미잖아. 언제 지은 사당이기에, 어, 당 소저는 뭘 봐요?”
바닥은 온통 깨진 돌과 흙더미, 썩은 나무와 검불들이 엉켜서 증명단 말대로 쓰레기투성이였고, 창도 벽도 없어서 빗물이 고스란히 안으로 들이친다.
그나마 구멍 난 지붕을 암벽을 덮은 덩굴과 가지들이 얽어매서 비를 막는 게 되레 신기할 따름.
마치 남의 집 추녀 밑에 간신히 머리만 집어놓은 꼴인데.
증명단이 당령을 따라 벽면으로 향하면서 머리를 갸웃거리자, 조그만 불씨를 일으킨 해원기도 몸을 돌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버려졌을까. 기둥과 지붕의 형태만 남은 이 폐묘는 대체 무엇을 모신 사당이었을까.
신감에 조각상을 올렸거나 그럴듯한 그림을 붙였거나. 대부분 사당이 그런 형식이지만, 이곳은 아예 벽면인 바위에다 직접 새겨놓았던 듯.
세 사람을 굽어보듯 눈을 부라린 기묘한 형상. 불빛에 그림자까지 일렁거려 절로 선뜻해지는 느낌이 든다.
증명단이 어깨를 움찔했다.
“에고, 이제 오시(午時)쯤인데 한밤중 같아서. 한밤중에 봤으면 누구나 놀라겠네. 그런데 저게 대체 뭐지?”
자기가 놀란 걸 당령이 알까 봐 괜히 둘러대는 소리.
확실히 대낮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폭우로 주위가 다 컴컴해졌으나, 딱히 그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해원기가 살짝 인상을 썼다.
벽면의 바위에 새겨진 형상. 마름모꼴의 머리에 화등잔 같은 두 눈, 양쪽으로 벌어진 귀 주위로는 많은 요철이 늘어섰고, 위로 뒤집힌 입술 사이로는 쇠꼬챙이 같은 이빨이 박혔다. 구렁이처럼 기다란 몸뚱이에 우락부락한 두 팔, 가장 괴상한 건 그 아래 달린 다리여서. 몸뚱이에 그대로 이어진 뭉툭한 아랫도리가 전부 다리. 즉 외다리인데 게다가 넓적한 발이 거꾸로 달렸다.
참으로 기괴한 모습. 본래 칠했던 색은 다 떨어져 나갔지만, 전신에 무수하게 털이 난 묘사였던 듯.
사당이란 게 대개 신이나 훌륭한 인물을 모시려고 짓거늘. 이런 기괴한 모습은 뭘 형용한 것인지.
처음부터 홀린 듯 쳐다본 당령에게 물었다.
“당 소저는 이게 뭔지 아십니까?”
그제야 당령이 멋쩍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제가 그만. 워낙 기이한 물건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이런 산자락에 이걸 모시는 사당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예전에 본 설명이 맞는다면 이건 산소(山魈)를 그린 거예요.”
“산소? 그게 뭐죠?”
증명단이 얼른 다시 묻는다. 자신을 놀라게 한 형상을 열심히 들여다본 당령, 어지간히 독특한 취미고 그쪽으로 아는 것도 많은 모양.
당령이 벽면에 새겨진 형상을 가리키더니.
“산에 산다는 요괴랄까요. 양쪽 광대에 많은 돌기가 돋은 큰 얼굴, 위로 뒤집힌 입술, 몸은 길고 흑색이며 그 힘이 무궁해서 호랑이나 곰, 표범도 맨손으로 찢어 죽인다고. 특히 다리가 하나면서 발이 거꾸로 뒤를 향한 모양이 전해지는 기록과 똑같아요.”
설명과 함께 공중에 손가락으로 ‘산소’라는 글씨를 써 보였다.
희한한 글자. 증명단이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입을 삐죽거렸다.
“산속에서 제일 무서운 호랑이와 곰을 맨손으로 찢어 죽인다? 그런 요괴가 과연 있을까요? 아니, 그런 요괴한테 왜 사당까지 지어준대?”
설명을 듣고 나니 놀랐던 게 무색해졌다.
그냥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요괴라잖아. 어려서부터 험준한 산속에서 커온 증명단으로선 야생의 맹수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안다. 그런 맹수를 찢어 죽인다니. 허황한 전설 따위 우습지도 않고, 그런 그림을 새겨놓은 이 사당이 더 이상하다.
이 폐묘가 있는 이유는 당령도 알 리 없어서. 어깨를 으쓱하며 지로로 다가오자.
해원기가 오히려 머리를 흔들었다.
“비가 들이치고 금방 그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차라리 저 산소가 새겨진 쪽이 낫군요.”
폐묘가 워낙 허술해 지로까지 빗방울이 튀는 판. 불을 쬐긴커녕 아랫도리가 흠뻑 젖기에 십상이라 더 안으로 피하는 게 낫다.
말을 마친 해원기가 바로 돌아서서 손발을 바쁘게 놀려 바닥의 쓰레기 더미를 사방으로 밀어냈다. 바짓가랑이가 금세 진흙투성이, 그래도 그런 식으로 물이 들어오는 걸 막아 놔야 다시 불을 피울 테니까.
솨아아아.
얼마나 세게 쏟아지는지 사방이 우막(雨幕)으로 갇혀 새카맣다.
해원기가 건네준 건량 한 조각을 우물거리던 증명단이 슬쩍 해원기를 보았다.
“오라버니, 비가 엄청난데 괜찮을까?”
걱정스러운 표정. 아직 어린 소녀요 이제까지 산서에서만 있었으니 언제 이런 큰비를 보았겠나. 벌써 반 시진 가까이 무섭게 내려서 꼼짝없이 폐묘에 갇힌 꼴이 되었다.
평평한 돌멩이를 골라 쪼그려 앉아서 멍하니 밖을 쳐다보는 게 지겹기도 하겠지.
해원기가 북룡포를 챙겨주면서 미소를 지었다.
“괜찮을 게다. 지금이 이쪽에선 갑작스러운 큰비가 올 때라, 청명을 지나 곡우에다 이제 강북과 강남이 나뉘는 지역이니까.”
“그렇게 멀리 왔나?”
산서에서 제남, 제남에서 개봉. 일행과 함께 지낸 여정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깨닫기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
증명단의 투정 부리는 듯한 말투에 해원기가 지로를 뒤적거렸다.
“대별산이란 이름이 그래서 생겼다는 얘기도 있더구나. 대별산 남쪽은 호남이니 장강(長江)이 흐르고, 북쪽은 하남에서 휘주로 향하니 회하(淮河)가 흘러서 이 큰 두 개의 강을 나누었다고. 그만큼 산의 남북이 기후가 달라서 뜻밖의 폭우도 흔하단다.”
딱히 불쏘시개로 쓸 나뭇조각도 없어서 기둥을 조금 뜯어 지로를 때는 판.
조그만 불이 처량하게 감실거린다.
“대별산이란 이름에는 다른 유래도 있지요.”
갑갑한 건 증명단 혼자가 아니었는지. 당령도 불쑥 입을 열었다.
“대별산은 본래 커다란 바다였는데, 손오공(孫悟空)이 천궁(天宮)에서 소란을 피울 때 옥황상제의 영소보전(靈宵寶殿)을 지키는 커다란 자라 한 마리가 지상으로 떨어졌답니다. 그곳이 바로 대별산의 바다, 나중에 옥황상제의 명을 받은 태백금성(太白金星)이 이 자라를 되찾아 돌아가려 했더니. 자라는 그게 싫어서 즉시 커다란 산맥으로 바뀌었다나요. 그래서 본래 대별(大鼈)이었다가 나중에 대별(大別)로 고쳤대요.”
“호오, 그거 재미있네요.”
장강과 회하의 큰 강을 나누었다는 얘기보다 훨씬 흥미를 끌었는지.
증명단이 눈을 반짝거리고, 해원기도 처음 듣는 고사에 시선을 보내자.
당령이 고소를 베어 물었다.
“어려서부터 신화니 전설이니 기이한 걸 아주 좋아했거든요. 어른들은 다 질색하셨지만.”
괴상한 걸 좋아하는 여자애. 독과 암기로 이름난 사천당가라도 상당히 난감했을 것이다.
그런 취향이 성장에 영향을 끼치는 법이라서.
꼬르륵.
웬만하면 모른 척해도 될 텐데.
“헤헤, 내 배꼽은 때 되면 운다니까.”
증명단이 히죽거리며 배를 문지르는 모습에 당령도 웃음을 금치 못했다. 어디서나 눈에 뜨일 정도로 예쁘게 생겼으면서, 그 언행은 천덕꾸러기 사내아이 같고.
“이런. 건량이 남은 게 없구나. 날씨가 이러니 사냥도 할 수 없고. 흐음.”
그 소리에 서둘러 허리춤을 뒤지며 안타까워하는 해원기도 신기하다. 허술한 차림새에 평범한 외모면서 증명단을 알뜰히 챙기려는 건 역시 오라버니답다고 할까. 뭔가 뒤바뀐 듯한 이 의남매, 지내면서 더 믿음직하게 여겨지지만.
그럴수록 속내를 다 털어놓지 못한 당령으로선 마음 한쪽이 켕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해원기가 몸을 일으켰다.
“잠시 돌아봐야겠다.”
이렇게 쫄쫄 굶으며 망연하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비를 무릅쓰고 나가볼 셈.
“오라버니, 어떻게 하려고……!”
우르르릉.
증명단이 말리려다가 그만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자신의 배가 이렇게 천둥을 칠 리가. 아니, 그것보다 슬그머니 기댔던 암벽까지 흔들리잖나.
좌라라라.
“으엑.”
“어머!”
간신히 막아주던 지붕에서 한꺼번에 빗물이 쏟아져 당령까지 펄쩍 뛰었고.
막 나가려던 해원기가 움찔 몸을 돌렸다.
번쩍.
빗물을 피하느라 당령이 미처 보지 못했지만, 해원기의 눈에 불현듯 맺힌 비췻빛.
‘이건.’
동시안이 저절로 일어났고 잠심침령이 급하게 심상을 두드린다. 해원기가 스스로 깨닫기 전에 먼저 반응한 신왕공이 전하는 예감.
시선이 방금까지 기댔던 암벽을 그대로 투과할 듯, 산소의 형상을 날카롭게 노려본다.
불길하다.
메말랐던 산지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 산사태가 일어난다.
산자락은 밋밋하게 비탈져 산이 시작되는 부분, 이 폐묘가 기댄 암벽 위로 토사가 쏟아지면 피하기 곤란하다.
증명단과 당령은 당연히 산사태를 연상했고, 벌떡 일어나자 곧장 폐묘 밖으로 몸을 날릴 생각이었다.
“오라버니?”
“해 소협, 왜.”
뻣뻣하게 서서 오히려 암벽을 노려보는 해원기 때문에 멈칫거리게 되었고.
우르릉.
또 한 번의 울림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암벽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 크지 않은 울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멍하니 암벽에 기대지 않았다면 흘려들을 수도 있었고, 등으로 그 진동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다지 주의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우레와는 다르고, 지진의 전조도 아니다. 산사태가 가장 의심스럽지만,
찌직, 찌지직.
암벽에 가는 금이 거미줄처럼 퍼지며 새겨진 산소의 형상을 지우는 장면. 산자락에서 시작되는 산사태란 있을 수 없다.
이 무슨 괴변인가.
해원기의 동시안이 강해지더니.
“뒤로!”
다짜고짜 증명단과 당령의 어깨를 잡고 몸을 날렸다.
파아앗.
쏟아지는 폭우를 도리어 폐묘로 밀어내는 질풍결, 급한 김에 두 여자를 데리고 벗어나는 순간.
퍼억.
암벽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기둥과 지붕이 삽시간에 폭삭 주저앉는다.
그리고.
“카우우우우우!”
돌연 주변을 채우는 지독한 울음. 증명단과 당령이 얼떨떨한 중에도 본능적으로 귀를 막았고, 해원기가 뒤로 몸을 날리면서 급히 고개를 들었다.
폐묘가 있던 암벽 위로 뭔가가 무서운 속도로 다가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