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요출괴몰(妖出怪沒) (2)
묵연히 앉았던 해원기가 천천히 일어나 탁자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텅 빈 접시, 남은 죽이 말라붙은 공기와 젓가락. 점소이라도 된 양 네 사람이 아침 식사를 마친 자리의 뒤처리.
깔끔하게 한 덩어리로 만들어 들고 주방 쪽을 향했다.
‘그녀의 정체가 뭘까?’
머릿속에 계속 떠오르는 생각.
봉대저라는 여인은 홀연히 등장해 한껏 요사를 떨다가 또 홀연히 사라졌다. 일 각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해원기에게 남긴 인상은 꽤 깊었다.
‘부탁을 받아 왔다고.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
생면부지. 첫 대면에 대뜸 수옥지니 미혼분이니 휘두르곤 또 멀쩡하게 오만 수다를 다 떤 여인이다. 반룡령과의 관계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수다 속에는 은근히 해원기를 깨우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호중객잔에서부터 시작되어 마침내 이 장갈까지 이어진 여정. 중간에 비로소 정식으로 무림에 발을 들일 결심을 했으나.
무림은 아직 해원기를 모른다.
설사 ‘풍화절세, 응양구천’의 ‘검왕’이란 소문이 과거에 잠깐 퍼지긴 했더라도. 그 소문이 막 퍼질 때도 검왕의 이름이 해원기라는 걸 아는 이는 극소수였었다. 당세에 이 어렴풋한 소문을 해원기와 연결할 사람은 거의 없을 터.
그런 해원기를 주목하는 시선이 나타났다.
반룡령의 소령주 백문량. 두 번의 실패를 통해 관점을 바꿔 움직인다는 건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제남으로 향하는 관도에선 비천무영 황정리를 상정하고 데려온 인색이귀가 패했고, 곡부를 벗어난 들판에선 탈명궁사와 강설궁진을 동원했는데도 머리를 싸안고 도주해야 했다. 거푸 실패한 원인이 바로 전혀 알려지지 않은 더벅머리 청년 한 명.
도대체 누구인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파악하는 게 우선. 제남에서부터 장갈까지의 행적을 놓치지 않은 것도 보통이 아니지만, 상대에 대한 전략을 크게 수정하는 건 비범한 지혜다.
달그락.
주방으로 통하는 선반 위에 그릇들을 내려놓았다.
굳이 주인이나 점소이를 찾지 않았던 건 이미 그들이 객잔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수소문하러 나간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고, 봉대저의 주문에 주방으로 달려간 점소이도 그대로 객잔을 뛰쳐나갔다.
봉대저가 나타나기 전, 점소이가 떠든 얘기에 의하자면 미리 억류되었거나 은밀한 언질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객잔을 포위하거나 봉대저가 다른 방수를 데려오지 않는 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거겠지.’
싸움이 목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해원기의 내력과 정체를 밝히는 게 우선.
대강 허술한 정보 몇 가지를 쥐여 주고서 해원기의 앞으로 행선지를 확인할 수도 있었겠지만, 봉대저가 먼저 나섰을 것이다.
상대가 어느 정도인지 먼저 재어보는 행위.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는 중에 기초적인 정보를 취했을 수도 있다. 그럴 만큼 강호 무림 전반을 아는 듯했으니까.
‘검법을 수공으로 변환하는 경지. 그걸 눈치채려면 상응하는 안목을 갖추어야 하지. 게다가 즉시 주르르 읊어댄 이름들.’
화산, 종남, 청성, 아미. 전부 뛰어난 검학을 계승한 문파들이고. 개봉을 거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만으로 소림과 무당을 들먹였다. 산서 남쪽의 소문은 금시초문이지만, 증명단에 대한 평가 역시 소홀하지 않다.
들어서 모를 이름들은 아니나, 당금 강호에서 어떤 지위인지.
해원기가 아는 건 거의 이십 년 전 상황들. 어떻게 보면 무림의 사정에 무지하다고 볼 수도 있다.
무림 전반에 걸쳐 자세히 알고, 지닌 능력이 상당한 여인. 봉대저는 그렇게 혼자 나타나서 혼자 떠들고 제멋대로 떠날 재주가 충분했다.
해원기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식은 차를 잔에 따랐다.
그다지 마실 마음도 없었지만.
평소의 차분한 자세 그대로 객잔 입구를 바라본다.
‘마지막에 의도적으로 보인 신법까지.’
봉대저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나서, 왜 그녀의 등장을 감지하지 못했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수옥지와 마찬가지로 높은 경지에 이른 경공신법, 그리고 그 안에 둔형류의 비결이 섞여 있었기에.
덕주의 성벽에서 팽가장의 구주신도 팽조린이 썼던 비결.
해원기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주인에게 부탁했던 소식을 듣기는 어려울 듯. 그래도 일행에게 충분한 휴식을 주고 싶었다.
해원기가 혼자서 식은 차로 생각에 잠겼는데. 가장 먼저 객방에서 나온 이는 의외로 증명단이었다.
“어, 오라버니는 안 쉬었어요?”
눈을 비비다 쳐다보는 시선에 해원기가 빙긋 웃었다.
항산에서 갓 내려와 뭐든지 다 초행길일 텐데도 전혀 지친 기색 없이 활기가 넘치는 소녀. 낯선 이들과 만났다가 헤어지고, 예상 밖의 상황을 몇 번이나 마주쳤건만. 예쁘장한 생김새와는 달리 끈기와 의지가 있다.
“음. 나는 앉아서 쉬었다. 잠깐 눈을 붙였느냐?”
“뭐 눈만 감으면 잘 자니까. 부탁했던 소식은 왔어요? 에, 명문세가의 양반들은 곯아떨어졌나?”
해원기가 일부러 남은 걸 아는 눈치. 그렇다고 따따부따 따지진 않는다. 항상 남부터 생각하는 ‘고구마 대장’과는 얘기해봐야 입만 아프지.
그래서 사천당가의 말썽꾸러기에게만 집중하려는데.
“소단이 좀 깨워주어라. 아무래도 바로 출발해야 하겠다.”
“그럼 소식이…….”
“아, 우리가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바로 계단을 급히 내려오는 두 사람. 당령과 황보관의 얼굴에 민망함이 가득하다.
해원기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찻잔을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그런데도 당령과 황보관은 아주 푹 쉬었는지 증명단보다 더 기력이 충만해 보인다.
“아닙니다. 괜찮으시면 이대로 길을 나섰으면 합니다만.”
당령의 눈이 깜빡이고.
“뭔가 특별한 소식이라도 들어왔나요?”
“소가주의 소식은 아니고, 특별하기는 하군요. 왠지 머물수록 귀찮아질 듯합니다.”
묘한 대답.
당령이 금방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지 않아도 황보 대가가 먼저 떠날 참이었거든요. 가면서 얘기하죠.”
이 또한 갑작스러운 얘기.
증명단이 해원기와 당령을 번갈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귀찮아진다고, 아니, 황보 대협은 왜 떠나는……?”
“일단 나가자. 객잔에는 미리 얘기해 두었으니.”
해원기는 그다지 뜻밖의 얘기가 아닌 듯. 당령과 황보관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증명단의 소매를 끌었다.
좁은 골목 안의 낡은 객잔. 아침때를 지나서 다들 한가하게 쉬는지 주위가 다 조용했다.
간밤에 본 바로는 당령은 상당한 무공을 지녔다. 물론 지향하는 길이 다르니 황보관이 더 강할 수 있지만, 전궁유향의 신법이나 독연을 대하는 자세에서 드러내지 않은 실력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해원기는 함부로 남을 재어보지 않는다.
손을 섞어 겨루는 상대가 아니거늘 굳이 평가할 일이 아니고. 오히려 함께하는 일행에게는 무례한 일이다.
봉대저가 갑자기 등장하지 않았다면, 객방으로 쉬러 들어간 이들의 동정을 살피지 않았을 것이다.
암습이나 포위에 대한 염려 때문에 잠깐 잠심침령을 운용했었고. 그 때문에 당령과 황보관이 뭔가 대화를 나누고서 번갈아 운기조식에 들어갔던 걸 알게 되었다.
증명단보다 늦게 나온 건 그런 이유.
아무래도 당령은 해원기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것 같다.
“허창으로 가지 않나요?”
“네. 장갈은 허창의 관문, 이곳에서 막힌 이상 허창에서도 소식을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일단 여주를 지나쳐 바로 육안(六安)으로 빠질 계획입니다.”
“그럼 황보 대가와 한동안은 같이 움직일 수 있겠군요.”
“바로 섬서로 넘어가실 생각입니까?”
“그렇지요. 저희에겐 섬서가 익숙해서. 당규의 일도 그렇고, 제가 약왕당에 가는 걸 집에 빨리 알려야 하거든요. 다들 걱정하실까 봐.”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운기조식했던 게 이런 계획을 세워서였다.
증명단이 펄럭이는 북룡포를 바짝 조이며 머리를 돌렸다.
“황보 대협은 당 소저를 지키려고 나왔는데 그러면.”
여자를 지키러 온 남자가 혼자 빠져서야 쓰나. 약간은 그런 의미가 담겼고.
당령이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증 낭자가 오해했어요. 황보 대가는 우리 둘째 언니, 당이저(唐二姐)의 정혼자. 혹시 제가 엉뚱한 짓 할까 감시로 보낸걸요. 이제 돌려보내 드려야죠.”
“허험, 감시라니. 다 오매를 걱정해서. 어흠. 하여간 해 소협과 증 낭자에게 폐를 끼치게 되었소이다.”
계면쩍은 헛기침을 연발하던 황보관이 연신 부탁하는 눈빛을 보내서.
증명단이 킥, 하고 웃었다.
장갈을 뒤로 하고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 길. 육안을 목적지로 설정했기에 여남도 외곽으로 거쳐 갈 뿐이다. 어차피 섬서로 향할 황보관에게는 잘된 일이었고, 큰길을 택하지 않아서 조금 험해도 경공으로 더 빠른 이동이 가능하다.
당규가 관계된 구란와자. 그냥 도박판을 운영하는 극단이 아니니 당령과 황보관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가문에 연락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이 합리적인 결정에도 해원기의 마음은 조금 찜찜했다.
소가주의 가출, 가문의 정수라는 독경의 일부분. 그 이전에 같은 피붙이가 실종되었거늘.
허창이 아니면 여주라도 가서 다시 탐문하려는 게 가족의 생리가 아닐까.
봉대저가 ‘당가의 추문’이라고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여남을 지나치려는 것도 봉대저가 떠든 얘기 때문, 해원기의 내력을 밝히려고 봉대저만 고용한 게 아니라고 했다.
사방에 알지 못할 눈이 지켜보고 있고, 어떤 식으로든 건드려볼 계획을 짜고 있을 터.
큰 고을에 들리는 것보다는 신속하게 이동하는 게 낫다.
믿지 못할 여인, 요사스러운 천생 우물(尤物)이 한 얘기지만, 또 무시할 수도 없잖은가.
장갈을 나설 때만 해도 맑던 날씨가 여주 근처를 지나면서 확 변했다.
꾸물꾸물 구름이 짙게 퍼지기 시작하더니 황보관과 작별할 때쯤에는 온통 시커멓게 변했고.
투둑, 툭.
멀리 병풍처럼 늘어선 우뚝한 산들이 보이자 기어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증명단이 북룡포를 끌러 머리 위로 올리면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에이, 바람도 없었는데 이게 뭐람? 오라버니.”
부르는 소리에 해원기가 걸음을 멈추었다.
당령 역시 손바닥을 펴 위로 올렸다.
“소나기일까요? 따로 우장(雨裝)을 준비하지 않았으니 우선 비를 그을 곳을 찾지요.”
당령은 여전히 남장이라 머리에도 건을 쓴 채.
북룡포를 두른 증명단과 건을 쓴 당령과 달리 해원기는 간편한 흑의 경장에 더벅머리 그대로라, 비가 쏟아지면 가장 난감해진다.
해원기가 하늘을 보고, 또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황보 대협과 우현(禹縣)에서 헤어질 걸 그랬습니다. 당 소저 말씀대로 피할 곳을 찾는 게 먼저군요.”
섬서로 직행할 황보관과 헤어진 게 삼 각 전. 우현으로 빠지는 길목에서 헤어질 때만 해도 날씨가 이리 급변할 줄은 몰랐다.
두 시진 넘게 경공을 펼치면서 지형도 많이 바뀌었다.
산동에서 들어와 개봉을 거쳐 장갈까지는 평지가 훨씬 많았으나, 서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지더니 시야를 가로막는 산맥이 나타났고.
가파른 언덕에 빽빽한 숲이 곳곳에 이어진다.
하북, 산동, 그리고 산서와는 또 다른 곳.
해원기도 낯선 지역이라 방향을 따져 멀리 보이는 우뚝한 산들을 가리켰다.
“저쪽이 평정산(平頂山)인 것 같습니다. 저 산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육안, 바로 대별산맥으로 이어지겠죠. 가면서 적당한 곳을 찾읍시다.”
별반 당황한 기색도 없어서.
증명단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이러다 왕창 쏟아질 텐데. 너무 대충대충 아닌가?”
당령도 하늘을 올려보며 불편한 표정. 해원기가 고소를 머금고 얼른 몸을 돌렸다.
강호를 떠돌다 보면 들판과 산속에서 험한 날씨를 만나기 일쑤. 장거리 쾌체 일을 하면서 비바람에 시달린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항산에서 내려온 소녀도, 사천당가의 아가씨도 이런 상황에 익숙할 리 없다.
언덕을 넘어 우묵한 곳이라도 찾아야 할 판.
서두르는 해원기를 재촉하듯 사방이 금세 컴컴해진다.
진짜 한바탕 쏟아질 모양이다.